기독 자료/메아리

목사의 치는 설교

구원의 계획 2010. 9. 30. 21:40

목사의 치는 설교?

        

    牧會자는 세례요한은 안 돼요. 세례요한의 相對는 잠깐 모였다가 구경하다가 지나가는 사람 상대이다. 그런고로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고 하였다. 초임목사들이 세례요한의 열정으로 강단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유사한 설교로 외치는데 백해 무익하고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를 쌓고 곧 쫓겨난다. 쫓겨나지 않으면 책망받은 성도가 떠난다.

 

       떠나는 그 성도를 통해 얼마나 전도 될런지 아는가? 책망받을 만하여도 사랑으로 양육하면 자리를 채우고 시간이 지나면 본질로 회귀하고 그를 통해 많은 전도가 되고 교회는 부흥한다. 쫓겨나도 외쳐야 한다는 그는 요단강변 세례 요한이지 목회자는 아니다. 그런 용맹군은 교회를 떠나 요단강변에 가서 외치라.

 

     牧會자는 상처 입은 자를 치료하고(영적치료까지) 위로하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자여야 한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자를 치료 하여준 사마리아 인과 주막집 주인이여야 한다. 이들은  참 목회자의 모형이다.  책망 설교는 금물이다. 책망 설교 듣고 고치는 자는 없다. 아직 그것도 모르는 목사는 애송이 목사이거나 석두 목사이다. 고치는 자 없는줄 알면서 책망 설교하는 목사는 석두목사아닌가?  책망 받은 사람은 반대로 목회자를 향해 책망하는 마음을 갖고 목회자와 거리가 생기고 너 부터 고치라고 주문 한다. 그러는 책망이 목회가 되겠는가? 

 

     성도가 고쳐지기를  원하면 자신이 죽어 송장 냄새를 풍기고 거기서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여 성령이 함께하시는  감동적인 설교와 그런 삶을 살면서 보여 주면 성도들은 닮는다. 자신의 부족은 모르고 성도들의 부족만 보고 책망하는 목사는 인류대학을 나와서도 저능한 목사이다. 목사는 고치는 직업이 아니고 천국 문앞까지 인도하여 가는 직업이다.

 

      목회자는 치는 설교를 하면 망한다. 갈등한다. 분열된다. 쫓겨난다.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인들은  은혜받지 못하고 교회가 망한다.

 

      치는 설교는 잠깐 왔다가는 부흥사는 조금 효력이 있을 수도? 그러나 담임의 사주 받고 하면 역효과가 난다. 서울동노회 X 교회 담임이 한 장로가 너무너무  미워 부흥사를 청해놓고 주문을 하였다. 유명하다는  L. 부흥사가 지혜없이  담임의 증오의 감정을 전수받아 직설적으로 그  장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저속한 상 말로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그  결과가 담임에게 어떻게 미쳤는가를  생각하여보라.  담임의 주문은 은혜롭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부흥사나 담임이나 언어의 영향 법칙을 모르는 석두이다.

 

     책망은 잠시왔다 가는 부흥사는 입으로 시작하여 입으로 끝나니 가능하나  목회하는 교회에서 평생 한번도 치는 설교는 하지 않는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같이 살면서 삶을 통한 감동을 보여 회개케 하여야하는 직업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책망 설교를하고 그의 삶이 강단의 설교와 다를 때에 그는 위선자로 전락한다.목회자는 사랑과 섬김만을 하여야. 그 속에 책망의 효과 보다  더한 위력있는 회개가 일어난다.!!!!!!

 

     아마추어 후배 목사님들!   지혜로운 자는 남의 경험을 내 경험으로 수용하나 미련하고 둔한 石頭목회자는 반드시 시행차고를  하고서 깨닫는다. 필자도 초기에  세례요한이 된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복음이요, 사명이라고 생가하고 직설적 책망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소개하면 그  교회 최고 어르이 시고  주동되시는 분의 회갑연에 축하 예배를 인도하러 갔는데 그  어른의 장남이 이혼을 하고 객지에서 후실을 얻어 살고 본부인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데  집사이다. 회갑연에 큰 아들도 오고 후실 부인과 그  몸에 난 손자 손녀도 왔다. 그  분위기에서는 은혜로운 회갑연에 축하 말씀만 전하고 끝나야 했는데 동민이 가득찬 마당에서 첩질은  죄악이다. 회개하여야  한다고 세례 요한인것 처럼 회갑연과 상관없는 말로 외치고  위세 당당히 돌아왔다. 그 어른의 회갑연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 겠는가!.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겠는가?   

 

   지금 생각하여도 철닥사니 없는 언행에 부끄럼을 느끼며 고인이 되었지만 그때 그분들에게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된다. 말은 바른 말이지만 그때 그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미성숙한 자기 모순은 모르고 지금도 세례요한인 줄로 착각하고 필자와 같이 철닥사니 없이 외치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본다. 

 

    경북 어느교회 학벌좋고 설교 잘하고 훌륭한 장래성이 있는 목사로 인정받던 초임 목사가 영광스럽게 부임하여 임시목사 3년 청빙 받았는데 장로님의 예배 태도를 책망하고 고집 부리다가  남은 임기 1년반 사례받고  쫓겨났다. 1년반 사례주어 보냈으니 그 나마 고마운 교회이다. 그는 지금도 자기 부족은 모르고 어느 곳에서 그 교회 장로들을  욕하고 있거나 깨달았으면 후회하고 있을것이다. 필자는 똑똑한 젊은 목사들이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서  이런 글을 쓰고있다.

 

    또 한 예를들면 필자는 지금 주로 경북 영천 삼창에 20여명이 모이는 은목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거기에 거주하는 은퇴목사님 들이 돌아가며 설교한다. 필자는 고학을 하며 너무 굶고 고생하여 많은 병을 얻었다. 결핵성 능막을 심하게  앓아 치료를 제대로못하여 능막이 붙어 자유롭지못하고 폐 결핵으로 전이되어 심하게 앓았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잠들기 전에는 옆구리가 아프고  기관지 고장으로 기침을 심하게 한다. 기침 제어약을 먹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수가 없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의자에 앉으면 비스듬이 앉고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

 

    90도 각도로 앉으면 옆구리가 결려 견디기가 어렵고 찬송을 부르면 기침이 나기 때문에 속으로만 부른다.  그런 건강으로 목회한 목사를 30년이나 잘 도와준 당회원들과 교우들에게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전 은목교회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좁은 공간에서 필자를 향해 직설적 책망을 하는 것이다. 예배시간에 찬송을 안 부르는 것이 예배인가? 목사들이 평생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예배 자세를 똑바로 해야되지 않은가? 하는 등등. 찬송을 안 부르고 비스듬이 앉는 사람은 필자밖에 없으니까. 

 

   설교를 속으로 웃으면서 들었다. 설교 후 나는 웃으면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회개합니다. 하고 내가 그렇게 한 태도에 대한 건강상에 설명을 하였다. 그 목사님이 당연히 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됨을 알면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못한 좁은  안목의 실수를  한 것이다. 필자는 그 설교들 듣고 조금도 감정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은퇴후에 그런것에 감정이 상하거나 섭섭할 정도라면  어떻게 30년의 장기 목회를 하였겠는가! 

 

      그  설교를 듣고난 후 필자의 생각을 말한다면. 여기가 어디 인데!  평생 목회한  늙은 목사들이 모인 장소에서 책망하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설교인가! 상황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늙은 은퇴자들 만이 있는데서 저렇게 설교 한다면 과거 목회하던 교회 교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을까?  교회 공동체란 천태만상의 상황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안목이 너무 좁구먼, 추리력이 너무 약하구먼, 사고의 그릇이 너무  작구먼. 상대의 약점을 보는데만 너무 예민하군.  필자의 해명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가!

 

   후배목사 여러분!  이런 기탄 없는 이런 글을  읽으시면서 넓은 안목과 넓은 마음을 가지시기를  희망  합니다.철딱사니 없는 아마추어 목사님 들!  장로들과 교인들의 부족함만 보고  치지말고  덜 조각된 자신의 규각과 미성숙한 자신의 독선과 오만 권위주의 과오부터 고쳐 나가라. 

 

     필자는 교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하여 설교  잘 하는 부목을 주일 강단에 세웠다. 그가 설교하다가 조는 교인보고 졸음 마귀 쫓아 내라고 고함을 쳤다. 다음 주일 필자가 설교하고 그는 사회를 보았는데  뒤에 앉아서 껏덕 자덕하면서 쿨쿨거리며 자는것이 아닌가. 그후 그에게 강단에서 목사님을 졸게하는 졸음마귀는 어떤 마귀입니까하고 물은 적이있다. 아마추어들은 그런 모순을 많이 범하고있다. 부흥사는 그렇게 책망하고 조는 것도 안보아고 가버리면 되지만 담임목사는 같이 있으면서 자기 삶을 보이는 직업이다. 

 

        세례요한은  외쳤다. (마3:7)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가능하다.

세례요한은 목회자가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하는 로방 전도자다.사도바울. 고전9:19. 내가 모든  이 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함이라. !!!!!.   교회안에서는 사랑과 용서와 위로만이 목회가 된다.,

 

      장기간 성도들과 같이 갈 교회에서 치는 설교는 평생하지 말고 복음만 바로 전파하라. 복음만 바로 전파하면 그속에 성령님의 책망이 역사한다.목회자는 세례요한은  안돼. 목회자의 궁국적 목적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댓글 : * 배진현님의 글을 읽고 평생 책망 말라는 구체적 구분을 명시하지 못한데 대하여 보완합니다.
복음 전파를 하는 데는 죄의 지적과 책망이 없이는 복음의 본질을 밝히고 구원을  전할수 없습니다.반드시 복음 전파에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은유적이든 책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책망 금지의 필자의 논지의 본질은, 의견충돌로  쌓인 감정, 개인적 갈등으로 사인 증오의 감정, 욕구 불충족의 감정, 항상 목회자 반대편에서 면전 복배하고 나가서 헐뜯는 자를 향한 감정등을 자기 중심적 불만의 감정을 내포한 책망을 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적이든 감정적이든 책망은 일대  일 맞상대로 책망하는 것은  안됩니다. 당사자는 복음적이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자기 감정을 내포한 "책망과 일대일의 직설적 책망설교는 백해 무익한고로  하지 말라고 한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만 바로 전파하면 그 속에 성령의 책망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 글쓴이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무궁교회 장 달 윤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