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이 섬기는 것은 무당? |
교회여, 하나님의 종을 두려워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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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끈질기게 떠도는 말 중에 평신도는 "하나님의 종"을 잘 섬겨야 하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치 이 말은 평신도가 하는 일 따로 있고 목회자가 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것처럼, 혹은 목회자가 하는 일은 더 거룩하고 하나님께 더 가깝고 평신도가 하는 일은 덜 거룩하고 하나님과는 더 먼 관계인 것처럼 여긴다는 의미 아닐까?
원래 평신도(laity)라는 말은 "무식한," "별로 중요치 않은," "속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속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성직자란 "거룩하고" "고상한" "구별"된 뭐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에 전적으로 수긍할 평신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뭐, 자신들이 그렇게 규정하고 싶다는데야, 누가 말릴 수 있으리요.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그게 도가 지나친 상태로 간다는데 있다. 요즘은 "하나님의 종님"인 목회자들을 너무나 떠받들다보니, 경외하거나 두려워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이쯤 이야기하면, 꼭 나오시는 분들이 계시다. 요즘 세상에 목회자들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되랴? 그런 교회들도 있냐?는 식의 반문을 해오시는 분들이 계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든다. 너무 좋은 교회만 출석하지 마시고 눈을 들어 문제 많은 이웃교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고맙겠다. 목회자를 떠받들고 두려워하는 것이 꼭 무당(巫堂) 대하듯이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무당을 찾아가 보신 분들이 있으면 내 이야기가 더 신뢰감이 느껴질 것이다. 무당들은 일종의 영매(靈媒, medium)다. 즉 신들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이들은 복채를 받아 생활하고 내방자(來訪者)의 생사화복을 점쳐주고 복을 받아들이고 화를 피할 수 있는 방책들을 제시해준다. 또 중요한 것은 무당들 앞에만 가면 오금이 저려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통해서 과거의 일을 족집게처럼 맞추며 미래의 일도 잘 알고 있다(물론 과거의 일은 백발백중이나 미래의 일에 대한 정확한 예언은 50% 이하가 보통이다). 이들은 주로 내방자에게 반말짓거리를 주로 하며 호통도 치고 공포감을 유도하길 좋아한다. 이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과 신비주의는 소위 새벽제단이나 가정제단, 혹은 기도원, 부흥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가 민망스럽다.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소위 정통적 교회의 정통적 목회자의 설교와 행동에서 묻어져 나온다. 신도들은 필자와 상담하는 중에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하면 복 받는다"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말에 두렵고 떨리고 심지어는 괴롭기까지 한다. 남의 이목이나 저주받지 않을까봐 ...를 한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런 저주의 망발은 강단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화를 통하여 혹은 심방을 통하여서도 진행된다고 한다. 목회자가 집도하는 예배가 더 성스럽고 무엇을 하든지 목회자에게 자문을 구해야하고 사업을 시작하면 반드시 목회자를 모셔야 하고 축복기도를 받아야 한다. 그냥 주안에서의 심방이나 위로나 격려나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권면이나 기도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교회 목회자는 무당이 되어 버린다. 물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무당과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간의 공통점은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저주와 축복을 독점하는 자들로 입을 열면 축복이요 입을 열면 저주의 말이 나올 뿐이다. 이제 신도들은 마음대로 생각도 마음대로 이사도 마음대로 말도 할 수 없다. 어렵게 받은 은혜와 어렵게 받은 축복이 날아가거나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을 잘 섬기는 일만이 복받는 일이고 저주를 회피하는 일이다. 물질로 잘 섬길 뿐만 아니라, 모든 예식과 행사에 열심히 참석을 해야 한다. 선지자라는 자들이 나의 백성을 속이고 있다. 입에 먹을 것을 물려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한다(미 3:5). 자신에게 물어보라. 무당에게 고상한 윤리를 요구한 적이 있는가? 무당에게 복채로 낸 돈이 정당하고 바르게 쓰여지도록 요청할 수 있는가? 무당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가? 무당에게 거짓을 말하지 말고 정의를 구하고 진리를 말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목회자들은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발언권이 곧 진리요 교인수가 곧 정의다. 그들의 결정과 이념이 곧 윤리며 삶의 지표다. 헌금은 하나님께 낸 것이기 때문에 따지지도 말고 묻지도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만이 알아서 하신다고 말한다. 성도들에게 부여된 것은 오직 맡은 바 충성이지, 따지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럼 하나님은 진정 사람을 들어서 쓰지 않으신단 말인가! 목회자에게 고상한 윤리와 상식과 재정사용의 공정성과 투명성, 민주성을,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정의를 구하고 진리를 말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그들은 온갖 변명과 자기 합리화와 거룩한 복음전파의 이름으로 정당한 요구와 요청을 물리친다. 수적성장지향주의자들은 거대한 교회건물과 수많은 교인들과 흘러 넘치는 헌금이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삼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던들 이러한 거대한 업적을 상상하기라고 했을소냐?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소냐?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주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소리를 친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한다(미 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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