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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룩한 촌사람

구원의 계획 2015. 4. 9. 11:33

어수룩한 촌사람

서울 종로에서 가장 큰 원앙포목점의 곽첨지는 악덕 상인이다.

촌사람이 오면 물건값을 속이고 바가지를 왕창 씌운다.

조강지처를 쫓아낸 후 첩을 둘이나 두고 화류계 출신 첫째 첩에겐 기생집을 차려줬고,

둘째 첩에겐 돈놀이를 시켰다.

어느 날 어수룩한 촌사람이 머슴을 데리고 포목점에 들어왔다.

곽첨지는 육감적으로 봉 하나가 걸려들었다고 쾌재를 부르며친절하게 손님을 맞았다.

촌사람은 맏딸 시집보낼 혼숫감이라며 옷감과 이불감을 산더미처럼 골랐다.

곽첨지는 흘끔 촌사람을 보며 목록을 쓰고 주판알을 튕겨 나갔다.

“전부 430냥입니다요. 이문은 하나도 안 남겼습니다요.”

“끝다리는 떼버립시다.

내후년에 둘째 치울 때는 에누리 한푼 안 하리다.”

“이렇게 팔면 밑지는 장산데….”

곽첨지는 짐짓 인상을 쓰면서 400냥에 합의를 봤다.

포목점 시동들이 보따리를 꾸리는데 촌사람 왈

“돈을 제법 가지고 나왔는데 패물 장만하느라 다 써버렸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하고는 데리고 온 머슴에게

“만석아, 얼른 집에 가서 집사람에게 400냥만 받아 오너라.” 명했다.

그러자 총각 머슴은 “나으리, 그래도 한두자 적어 주시지오.”

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촌사람은 혀를 찼다.

“네놈이 집사람에게 신용을 단단히 잃은 모양이구나.”

그 모양새에 눈치 빠른 곽첨지는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요.”라며

지필묵을 꺼내왔다. 촌사람이 소매를 걷자 오른손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끓는 물에 손을 데서….” 그가 붕대 감은 손으로 붓을

잡으려 애쓰자 곽첨지가 “제가 받아 적을 테니 말씀만 하시라”며

얼른 붓을 받아들었다. 촌사람은 헛기침 후 문구를 불렀다.

“임자, 이 사람 편에 400냥만 얼른 보내시오.”

곽첨지가 쓴 편지를 받아든 머슴이 휑하니 포목점을 나갔다. 곽첨지는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며 촌사람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두사람은 포목점

뒤 순라 골목 주막에 가서 막걸리를 곁들여 푸짐하게 점심을 먹었다.

한데 화장실에 간 촌사람은 오지 않았고, 지겹게 기다리던 곽첨지가

화장실을 뒤져봐도 촌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포목점으로 돌아가 봐도

촌사람은 없고 돈 가지러 간 머슴도 오지 않았고 혼수 보따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도 곽첨지는 안심했다.

“촌놈 여편네가 당장 400냥을 무슨 수로 구하겠어. 내일 오겠지.”

그날 저녁, 첫째 첩에게 간 곽첨지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아니 영감, 점심 나절에 갑자기 400냥은 뭣에 쓰려고….”

깜짝 놀란 곽첨지는 대답도 안하고 돌아나와 돈놀이하는 둘째 첩에게

달려갔다.

“영감 필적으로 그 사람 편에 400냥을 보내라고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