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창세기 1장 26∼27절) 2017.9.21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라면 부잣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눅 16장)처럼 대접을 받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 상처투성이로 버려진 채 부자가 먹다 남긴 음식으로 연명하던 나사로였습니다.
그러한 나사로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오로지 개들뿐이었습니다. 성경엔 개들이 나사로 몸에 상처 난 곳, 헌데를 핥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존귀한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을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죽어서는 어디로 갔나요.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부자 또한 등장합니다. 뒤늦게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애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눅 16:24)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눅 16:25)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는 신조어 가운데 ‘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이 부하 직원 등에게 폭언과 폭행, 인신공격을 스스럼없이 일삼다가 발각되면서 등장한 용어입니다.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존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갑질’을 일삼는 이들에게서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기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도록 하신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 위에 있는 것이라면 그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지위의 높고 낮음과 재산의 많고 적음, 배움의 정도와 직업에 따라 차별하고 무시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입으로는 정의와 공평을 외치고 있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빈부격차가 극심합니다. 차별 문화가 깊이 배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생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을 겁니다. 성경은 그런 부자가 지옥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나 생전에 고난을 받았던 나사로가 위로를 받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부(副)의 복을 베푸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라고 허락하신 부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남들보다 더 많이 주시고 높이신 것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허락하신 목적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우리 성도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빌 2:3).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확장하는 데 앞장서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고광신 서울 고려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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