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레 유적지
웨슬리가 회심했던 올더스게이트 거리
올더스게이트 거리는 영국 상업의 중심지이다. 세인트 폴 성당 뒤편으로 런던박물관을 정면으로 향하여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출처- 웨슬리스토리)
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런던 박물관 옆에 위치한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 지금은 그가 거듭남을 체험한 집회장소가 남아 있지 않고, 회심당일(1738년 5월 24일)의 일기를 적은 커다란 불꽃 모양의 동판이 이 곳이 웨슬리의 회심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다. 2003년 3백주년 기념으로 동판을 만든 것이다. 기념비 내용은 회심일의 일기이다. 정확한 회심위치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의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영국 학자들은 런던박물관 자리를 주장하고 있고 미국 학자들은 30m 정도 거리를 더 올라가 길가에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대학교에서 1926년 8월에 기증한 명판을 설치했다.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 죤 웨슬리의 일기 -
촬스 웨슬리 회심 기념비
“하나님은 그의 일꾼을 묻으시지만 당신의 일은 계속하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k" 기념비 맨 꼭대기 책에 적혀 있다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이었던 찰스 웨슬리 목사를 기념하여 설교자로서 그는 탁월한 능력과 열정이 있었고 유능했으며, 많이 배웠으나 자만하지 않고 경건했으나 허식이 없었으며, 다른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의 아들이었지만, 자만하는 자와, 위선자와 경건치 못한 자에게는 우레의 아들이었다. 그는 감리교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형인 존 웨슬리 목사와 함께 순회설교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선한 군병으로서 고난과 박해와 수모를 견뎠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 크게 헌신하여 이 나라에 최초로 감리교 모임들을 만들었다. 그리스도인 시인으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영어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찬송가로 교훈과 위로를 전했다. 그는 1707년 12월 18일에 태어나 1788년 3월 29일에 죽었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고 경건하게 믿었으며, 영국교회의 진실한 친구였다
촬스 웨슬리 회심 기념비
촬스는 존 웨슬리보다 3일 앞서 회심하였는데 찰스 웨슬리의 회심장소는 Mr. Bray의 집(John Bray's House)이다
촬스웨슬리가 회심한 집
촬스 웨슬리의 회심 (회심기념비)
1738년 5월 21일, 아픔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의 런던에서 그는 발견했다. 그와 그의 형 존이 그토록 오래 오래 찾아왔었던 것을 그는 드디어 찾았던 것이다. '나는 찾았다 내 자신이 하나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소망 안에서 기쁨에 넘쳤다.' 수일 내로 그는 찬송가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출한 재능을 발견하였다. 이 회심의 경험 이후 쓴 그의 첫 찬송은 이렇다: -나의 경이로운 영혼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내가 어떻게 내 모두를 하늘에 열망할까요? 한 노예였던 내가 죽음과 죄로부터 구원을 받다니, 영원한 불구덩이에서 불타던 막대기가 꺼내어져 구원을 받다니, 아 어찌하면 그만한 승리의 개가를 다 표현하여 올릴 수 있으리요, 혹은 나의 이 위대한 구세주께 찬양을 어찌다 노래할 수 있으리요? 아무리 찬양을 많이 올린다 해도 그 높으신 구원의 은총에 까지 올라가기란 너무너무 부족하기만한 그 구원의 경이로움이란. 1749년에 42세의 나이로 찰스는 20세의 사라와 결혼하였다. 결혼후 처음 4년 동안 그들은 함께 여행하며, 찰스는 설교했다. 그의 형처럼 전국을 다니며 순회설교를 하였다. 영감이 폭발할 때, 그는 펜! 종이! 펜! 종이! 하며 소리치며 공부방으로 뛰쳐갔다
웨슬리형제 기념우표
1999년, 영국에서 지난 천 년을 기념하며 "The Christian's Tale "라는 주제로 기념우표를 만들었는데 그 중 웨슬리 형제를 기념하는 우표이다. 중앙에 "천사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 제목이 보이고 이 찬양이 수록된 찬송가 Hymns and Sacred Poems(1739) 표지, 그리고 웨슬리 예배당 스테인드 글라스, 존 웨슬리가 찰스에게 쓴 편지의 일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리교 센트럴 홀
1912년 존 웨슬리를 기념하기위해 세워졌다. 1898년 "감리교 20세기 기금" 이 모아져 세워졌다. 1946년1.10- 2.14 까지 제1차 UN 총회가 열린 장소로 유명하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계단에는 존 웨슬리의 동상이 서있는데 본래 이 동상은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웨슬리스토리)
웨스트민스트 사원
왕실의 교회로 유명한 이 사원안에 존과 촬스웨슬리의 기념비가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에 대한 영국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웨슬리 스토리)
아래 사진은 존 웨슬리가 아버지 사무엘웨슬리의 무덤위에서 설교하는 장면이다
웨슬리형제 기념비, 웨스트민스터 사원, 원안의 사진은 왼쪽은 촬스웨슬리 오른쪽이 존 웨슬리이다
웨스트민스터의 사원에는 웨슬리 형제를 위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말한 세가지 명언이 기록되어있다. 기념비의 내용은 (존 웨슬리, 1703.6.17 출생, 1771.3.2 사망, 촬스 웨슬리, 1707.12.18 출생, 1788.3.29 사망, 첫 번째 명언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두 번째 명언 "세계는 나의 교구다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k)" ) (사진 출처- 기독교세계, 감리교)
세인트 폴 대성당
성 바울 대성당 건물 정면에서 왼쪽에는 교회마당과
정원이 뒤로 연결이 되는데 바로 이곳에 동상이 서있다.
이 동상은 감리교 센트럴 홀에 있는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동상을 복제해서 만든 것으로 1988년에 세워졌다.
출처- "웨슬리 스토리" 조선석 피기영 글 사진
이 책은 영국 선교사로 사역하던 조선석 목사와
피기영 목사가 저술한 책이다
아주 귀한 사진들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블러그 여러곳에 사용 하였다
세인트 매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기독교타임즈, 웨슬리연구소)
세인트매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강단,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의 펠로우로 있는 동안 교수와 학생을 대상으로 몇 차례 이곳에서 명설교를 했다. 존 웨슬리는 66년이라는 공식사역기간동안 무려 4만회의 설교를 했고 하는데, 간단히 계산해 보아도 하루 평균 2회 이상의 설교를 한 셈이다. 그의 무수한 설교 가운데 가히 명설교로 꼽히는 몇 편의 설교가 바로 이곳, 세인트메리교회에서 교수와 학생들, 졸업생들 앞에서 선포됐다.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Salvation by Faith)이라는 설교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구원의 믿음에 대한 부족함을 절감하고 낙심했던 웨슬리가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1738년 3월 4일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설교를 그만 두어라. 너 자신이 믿음이 없으면서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마음의 소리에 가책을 느끼며 설교를 그만 두어야 할지 아닌지에 대해 뵐러에게 묻는다.
뵐러는 의기소침해 있는 웨슬리에게 대답한다.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라고. 이후 웨슬리의 관심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두 달이 지난 5월 24일 웨슬리는 올더스게잇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강한 확신과 회심을 경험한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난 웨슬리는 에베소서 2장 8절(‘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을 본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이후 그의 몇몇 설교는 대학에서 논란거리가 됐다.
웨슬리의 8월 24일자 일기를 펼쳐보면, ‘성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했다. 아마도 이것이 최후였을 것이다..... 나는 나의 소신을 유감없이 피력했다. 대학의 소사가 와서 부총장께서 나의 설교노트를 보기 원한다고 하기에 하나님의 현명하신 섭리를 찬미하면서 지체 없이 노트를 보냈다’라며, 자신의 설교에 대한 주위의 비판적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웨슬리는 대학교회에서 여러차례 설교할 기회를 얻었을 만큼 뛰어난 설교자였다. 하지만 이번 설교는 오직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고, 형식적이고 믿음 없는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참석했던 교수들은 이를 문제 삼아 웨슬리가 대학교회의 설교단에 서지 못하게 한다.
무엇이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을까? 궁금하다면 웨슬리의 대표적인 설교 53편을 묶어 펴낸 [표준설교집]을 열어보시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90프로 크리스찬’ ‘신앙에 의한 의인’... 존 웨슬리가 성서에서 찾아낸 하늘가는 길을 한번쯤 진지하게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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