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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구원의 계획 2011. 6. 16. 19:27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어떻게 구별하는가(마7:21-23)

                                                                        - 글  박 신목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신자를 벌거벗기는 말씀

 

예수님은 하나님 당신이시다. 그래서 그 말씀도 살아 운동력이 있어 인간의 실체를 벌거벗겨 드러나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요한복음 8장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의 사건을 들 수 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므로 돌로 쳐 죽이려고 모여선 군중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다 물러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죄에서 자유로운 자 아무도 없으며 현장에 모인 군중이 바로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의 참 모습이었다.

 

오늘의 본문은 거기서 한 칸 더 나가 이미 예수를 믿은 신자의 실체를 벌거벗기는 말씀의 대표적인 예다. 우리 모두 입술로는 주여주여 열심히 찾지만 과연 실제 삶에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가를 따질 때에 자신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 속의 진짜 모습이 주님께 들킨 듯 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지만 사람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지 죽이는 말씀은 아니다. 본문이 신자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만 그 뜻을 이해해서 그렇다. 그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기에 여러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우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고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도 천국가지 못한다면 지금도 그런 능력을 가진 은사자에게 평신도가 기도도 받지 말아야 하고 대신에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대해야 하는가? 심판을 받을 자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또 그런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일으키면 주님에게 누(累)가 될 텐데 하나님은 미리 막으셔야 하지 않는가? 

 

더 당혹스러운 것은 예수님이 다른 복음서의 비슷한 경우에는 정반대로 관용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위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9:38-40)(눅9:49,50)

 

물론 이 경우는 제자들의 편협함과 배타성을 꾸짖는 데 초점을 두었고 또 그런 자들이 공개적으로 예수를 반대하거나 비방한 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따지자면 마태복음의 경우 객관적 상황은 똑 같되 오히려 주여주여 하면서 공개적으로 주님을 향한 열심과 정성을 내 보였다. 마가복음의 경우는 겉으로 호들갑을 떨지 않았고 마태복음의 경우는 방정맞게 굴면서 겉과 속이 달라서인가? 아니면 예수님은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선 저 말을 하시는 분인가?
       
사마리아의 마술사

 

이 문제는 단순히 위선과 가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속으로 주님을 좋아하지 않고 의심하고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겉으로만 주여주여 그리 쉽게 할 수 없다. 사람이 주여주여 부를 때는 누구라도 주의 도우심과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고 소원해서 간구한 것이다. 만약 정말 주님을 속으로 불신하고 미워했다면 아무리 심판을 선고 받았다고 해서 따지듯 항변할 수 없다. 세 번씩이나 반발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또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것은 병자를 고쳤다는 뜻인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준 것은 선한 일이다. 주님께서도 이 땅에서 성실히 수행하신 사역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자기가 한 일은 좋고 남이 한 일이라서 안 된다고 하셨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힌트가 성경에 나온다. 사도행전 8:9-24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시몬이 많은 능력을 베풀어 사람들로 하나님의 큰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빌립 사도가 그 지역에 와서 복음을 전하자 그도 믿고 세례를 받고 사도들을 따라 다니며 열심히 섬겼다. 하루는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목격했다. 안수 받은 자들이 방언을 하거나 신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에게도 그런 능력을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가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행8:20,21)고 답했다. 이 도(道) 즉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분깃은 영원히 상속 받을 기업인데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과 동일하게 심판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고 했을 때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를 대부분의 신자가 모르고 있다. 단순히 거룩하고 의롭고 착하며 검소하고 절제하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쳐 주는 선한 일을 했는데도 예수님은 왜 심판을 선고했는가?

 

하나님 뜻대로 행함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세속적이고 쾌락과 재미를 추구하고 욕심을 많이 내며 더럽고 추하고 죄악스런 것들인가? 그럼 또 신자가 좋은 차, 큰 집, 좋은 옷을 찾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어떤 행위의 내용과 결과가 선한가, 옳은가, 바른가, 맞는가와 상관이 없다. 엄격하게 따지면 심지어 그 동기가 옳은가 그른가도 관계없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하다. 하나님 당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아이부터 가축까지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다. 9.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고 죄 없는 수천 명이 죽는 모습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은 있다. 

 

시몬이 베드로에게 심판을 선고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았고 사도들을 열심히 섬겼고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남에게 그 능력을 나눠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기에 돈 주고 사서라도 세상에서 더 능력 있는 자라는 칭함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바친 돈의 몇 배를 벌 자신이 있어 그랬을 것이다. 그가 예수를 믿은 가장 중요한 이유와 관심사는 주님의 능력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문자 그대로 하나님 당신만의 뜻이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이 아닌 자의 뜻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뜻의 정 반대는 내 뜻대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 뜻대로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내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부패한 존재라 이 둘이 일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할 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흔히 생각하듯 내 뜻이 내가 가진 계획과 소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길 소원하는 인간들

 

큰 권능을 베풀고 주여주여 했지만 천국에 가지 못한 자들이 종교적 실력과 열심에선 대단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여 진심과 전심을 다해 주를 찾고 섬겼다. 더럽고 추하고 죄악스런 행위를 별달리 한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그 능력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들은 주여주여 부를 때에 사실은 주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간구한 것이다.

 

신자가 큰 차, 좋은 집, 비싼 옷을 찾을 수 있다. 꼭 생활비를 줄여가며 이웃을 돕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좋은 일로 형통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복 주시기 원하시며 인간을 향한 당신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다.

 

솔직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면 예수 믿고 난 후 나쁜 습관을 고치고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한다. 가능한 이웃을 도우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 안에서 평강과 위로와 은총을 맛보려 갈급해 한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형식적, 가식적, 위선적, 종교적으로 찾지 않는다. 교회에 와서 주여주여 해놓고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행위도 하지 않는다. 간혹 유혹과 시험에 들어도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회개하며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

 

사실은 신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 모두 그렇다. 아담이 범죄하여 피조세계가 부패한 이후 모든 인생에 엉겅퀴와 가시 덤불이 만발해 있어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소산을 먹을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평생을 걸쳐 환난과 불안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 중 대다수의 사람도 자기들의 행복과 평강을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천지신명에게 진심과 전심을 다해 빌고 또 빈다. 본문 식으로 하면 모든 인간이 주여주여 하며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다.   

 

똑 같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길 소원하는데도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했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볼 줄 알게 되었고 하나님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그분 안에서 어떤 위치에 속하게 되었는지를 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부터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분의 약속을 붙들 줄 알게 된다.

 

십자가를 통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에 관한 인식이 생겼다는 뜻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되 그 분의 품성을 먼저 헤아려 그 분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위로와 평강을 찾는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택하셔서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있다는 불변의 진리 위에 모든 생각과 의사결정과 판단과 실행의 기초를 둔다. 마음 속에서부터 먼저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한 후에라야 현실에서 함께 걸어간다. 하나님의 품성과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의 안경으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볼 줄 알게 된다. 주님과의 교제가 먼저이며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행위, 여건, 상황은 그 교제를 통해 신자 속에 생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바탕으로 해서 그 후에 판단한다.

 

불신자는 이 순서를 정반대로 행하는 자다. 똑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갈망하지만 먼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풍성함을 보고서야 기뻐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평가한다. 기쁜 일이 생겨야만 하나님을 기뻐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과의 교제도 힘들어진다. 입술로는 주여주여 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신자는 하나님으로 현상을 해석하고 불신자는 현상으로 하나님을 평가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당신을 기뻐하고 소망하며 삶의 목적으로 갖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을 소망하고 갈급해 하는가의 차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혹시라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서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결과도 같아지는데 꼭 그렇게 구분해서 따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세상 일이 평탄할 때는 별 차이를 모른다. 힘든 일이 닥치면 엄청난 차이가 벌어진다.

 

환난과 핍박이 닥치고 사방이 막혀갈 때, 세상에서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끝까지 부른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가 손해 보고 망하고 만물의 찌끼나 배설물 같은 취급을 받고 심지어 죽음이 닥칠 때도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자라야 심판을 면한다.

 

에스더는 페르샤의 왕비로 평생을 호강하며 살 수 있었는데도 자기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백하면서 담대하게 왕에게 나아갔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한 풀무 불에 타 죽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들을 능히 건져 내실 분이기에 그분의 능력과 자신들을 향한 사랑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그 속에 더 선하고 더 거룩하며 더 큰 뜻이 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날 것을 확신하여 자기들 생명마저 완전히 걸었다. 

 

신자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소유한 자다.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인 자가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며 끝까지 다 이루셨기에 신자 또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끝까지 주님 편에 서 있는 자다.  평생을 통해 죽을 때까지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어떤 사건과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님 당신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과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슬픔이요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된 자다.   

   

입술로 주여주여 하는 자는 자기가 처해 있는 여건과 환경을 풍성하게 바꾸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그 반대다. 그분의 영광과 목적과 계획이 이뤄지길 먼저 바라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을 동원한다.

 

똑 같이 귀신을 쫓고 병자를 치료했지만 예수님의 뜻은 달랐다. 그 일을 통해 그들의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길 원했다. 그래서 병을 고쳐줄 때마다 성전에 가서 결례를 하도록 했다. 율법의 준수를 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그분의 백성답게 살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고쳐 준 것을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 메시야 되심을 밝히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이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을 단순히 인간 스승으로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성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인간이 가로챈다고 오해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시몬 같은 자가 돈 봉투 들고 찾아 와 능력을 나눠달라고 졸라댈까 그러신 것이다.  

 

같은 사역을 하고도 심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큰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기를 좋아했다. 주님에게 돌아갈 영광을 인간이 가로 챈 것이다. 심지어 오늘 날의 잘못된 은사자들이 그러하듯이 돈 봉투까지 챙겼을 것이다.

 

신자가 정작 염려하여야 할 것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독실한 신자였다. 노예를 해방 시키는 선한 일을 했다. 그러나 동족간에 수많은 사상자를 낸 남북 전쟁도 일으켰다. 행위의 선악간으로 사람과 믿음을 판단할 수 없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를 염려한다.” 하나님이 신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영원 불변의 진리다. 그것은 더 이상 염려할 문제가 아니라 잊지 않기만 하면 된다. 잊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니다.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는 것과 같이 너무나 당연하며 지극히 일상적인 사실이다.  

 

신자 불신자 모두 주여주여 하는 이유는 세상에 힘든 일이 겹치기 때문이다.  환경과 여건이 자꾸 걱정 되고 그것을 바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지부터 염려된다. 인상을 써서 힘 주어가며 주여주여 기도하는 이유는 역으로 주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대체 예수를 믿은 지 얼마나 오래 되어야 주님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라는 기도를 그만 둘 수 있을까? 주님도 신자들의 기도에 이제 제발 그런 문구가 안 들어 갔으면 하고 바라시지 않겠는가? “그래 내가 너를 일순간도 떠난 적이 없는데 왜 자꾸 기도할 때마다 또 묻고 또 다짐하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신자마저 좋은 일이 일어나야 주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것은 주님 당신을 기뻐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능력을 기뻐했고 그 능력을 찾은 것에 불과하다.  

 

내게 주어진 상황과 여건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구태여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 있는 그 장소와 시간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신자가 꼭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는 나에게 가장 적합하여 유익하며 최선임을 믿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과 감사가 없이 어떻게 자기 환경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 동원할 수 있겠는가? 현재 여건에 대해 불만과 의심 투성이라면 어떻게 하든 그것을 바꾸려 하지 그 상태 그대로 하나님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신자더러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하신 것이다. 감사하는 일이 선하고 신자가 불만을 갖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생각해 보면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너희를 사랑하고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걱정이며 그런 하나님이 지금 너희에게 주신 그 환경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너희에게 제일 유익한 것이다. 그 부분에 확신이 있는 자라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과의 차이

 

이렇게 따져보니 신자가 된 것에 오히려 자신이 없어지는가? 혹시라도 구원이 더 멀어진 것 같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먼저 묵상해 보라. 그 분이 구원을 싸구려로 주셨다가 도로 뺐을 분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 구세주로 영접했을 때 어떤 생각과 결단을 했었는지 회상해 보라.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다시는 이전처럼 세상을 목표로 살지 않을 것이며, 어떤 일이 되었든 주님을 위해 하고, 교회 봉사와 이웃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결단했지 않는가? 지금 그 마음에 변화가 있는가 없는가? 그렇게 행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더라고 그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면 구원 받은 것이고 그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 이후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도덕적, 종교적 관점에서 성화를 이루려 하지 말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내 뜻대로 행하면 안 된다. 내가 세운 계획과 소망을 취소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꾸만 내가 세우는 계획의 질적 내용에 도덕적 종교적 냄새를 피우고 양적 수준을 검소하게 절제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평소 때에 우리 속에 계획과 소망을 심어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우리가 가진 계획과 소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 두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했다. 하나님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계획과 뜻도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로 가는 것이었다. 이미 제자들에게 수 차례나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예고하고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왜 자신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것과 다른 것처럼 말씀하셨는가? 십자가의 격심한 고통과 사람들에게서 당할 온갖 멸시가 너무나 힘들어 좀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이 일을 이룰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다. 

 

유다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라고 했다. 에스더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유다 민족을 구해내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과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시고야 만다. 그녀더러 안락하고 풍성한 환경에 주저 앉아 있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당신을 기뻐하라는 것이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같이 자신의 비장한 각오를 밝힌 것이기 전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당신만을 기뻐하는 것만이 하나님 뜻이다.  

 

내 뜻대로 행한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내가 편해지고 풍성해지려고 마음 먹고 그것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자리, 위치, 수준에 오르고자 목표를 정하는 것이 그 의미의 핵심이 아니다. 쉽게 말해 한 달에 백만 불의 수입을 벌겠다고 계획해도 된다. 그 돈을 버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돈을 쓰는 곳에도 주님의 빛이 비췬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이다. 그 때는 입술로 애절하게 주여주여 수만 번을 불러도 된다. 반면에 백 불을 벌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내가 평안해지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 뜻과 계획이 된다. 돈이 많고 적고, 계획한 내용의 도덕성, 종교성으로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의 근본은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으로 환경을 분석하고 그 환경을 동원해 하나님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묵상하다 보면 어떤 계획을 세우더라도 당연히 선하고 의롭고 거룩해진다. 또 그렇게 세워진 계획이라면 비록 내 생각과 뜻에서 나온 것 같아도 이미 하나님의 뜻이며 그 성취를 위해 얼마든지 주여주여 해도 된다.

 

대신에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은 환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평가하려 드는 것이 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다. 따라서 그런 평가가  바탕이 된 기도는 아무리 간절해도 주님이 들어주시지 않고 계속해서 환난이 그치지 않는다.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해 하나님이 신자를 향하신 기쁘신 뜻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기도를 응답해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팔을 비틀려 하지 말라. 대신에 하나님의 팔 안에 안기어라.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은총 속으로 먼저 들어가라. 그러면 그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얼마나 풍부한지 발견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감사가 나오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의 출발이자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