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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님 글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구원의 계획 2010. 9. 3. 09:12

옥한흠 목사님 글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여기 교회 하면 아무도 안 와요” 말 속에서도

 

▲ 옥한흠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한국교회가 세계를 위해 쓰임받고 있다는 것은 바로 한국교회가 세계를 위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우리의 비전이 성취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날이 오면 교회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서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다섯 살 때까지 살았던 거제도 산골 마을 삼거리라는 곳에는 초가집 교회가 한 채 있었다. 그 마을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내 증조부(옥주래 영수)께서 당신이 전도한 다른 몇 가정과 함께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시작한 교회였다.

 

증조부님은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은 후 바로 상투를 자르고 제사를 폐하여 마을에서 상당한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너나없이 가난했지만 고려 왕씨 후손들이 ‘玉’씨로 변성하고 이조 500년간 숨어 살았다는 전설을 믿고 있던 씨족 마을이라 나름대로 그 완고함이 대단한 곳이었는데 참 용기있는 어른이었던 것 같다. 초가집 교회에서 예배 드리던 일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은 가장 오래된 추억이다.

 

내 인생의 역전

초등학교 3학년에 접어들 무렵 내게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당시에 유행하던 사경회란 사경회는 다 쫓아다니던 어느 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뜨겁고 강력하게 어린 나의 가슴으로 부딪혀 온 것이다. 소위 구원의 감격을 맛본 사건이었다. 그 일은 마치 바닷가에 오래 서 있다 보면 때가 되어 밀물이 밀려오고 그 물에 온몸이 잠기는 것 같은 신비스러운 은혜였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한 7년, 중학교 3학년 무렵까지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행복 속에 젖어 지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을 온통 소유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신앙의 터를 한 켜 한 켜 닦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나만이 누린 특별한 은총이었다.

 

중생을 체험한 지 얼마 안 되어 내 평생 처음으로 신구약 성경을 가지게 되었는데 표지도 없고 창세기 2장까지는 반쯤 찢겨 나간 퍽 낡은 것이었다. 외삼촌을 졸라 선반 위에 얹혀 있던 그 책을 얻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부어 주시는 은혜를 가장 가까이서 오래 지켜보신 분은 어머니셨다. 내 증조부의 전도를 받은 몇 가정 중 하나였던 외갓집은 동네에서도 소문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어머니의 믿음은 퍽 단아했는데, 많이 못 배웠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하는 법 없이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셨던 것 같다. 나는 무조건 주님을 믿고 따르며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그대로 항상 순종하려 하는 소박한 마음의 어머님을 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우리 가족이 잠시 일본에 살던 때였다. 소학교 1학년 때, 주변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한 후 집에 돌아와 분해서 우는 나를 붙들고 예배를 드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렇게 나의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켜보시며 60여 년 동안 새벽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목사는 되기 싫어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매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생활하는 내게 교회의 어른들은 자주 목회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자라난 교회는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경건 생활을 강조하는 교단이었는데, 신앙이 좀 뜨거운 학생에게는 으레 “얘, 너는 신학교 가라. 주님의 일을 해야지 왜 세상 일을 하려고 하니?” 라며 권하는 일이 많았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런 말 듣는 것이 싫었다. 100여 명 정도 모이는 시골 교회에서 지내다 보면 목사가 어떻게 생활한다는 것이 뻔히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나는 교인들이 성미를 가져다주어야 끼니를 이을 수 있고 식량이 떨어져서 가족들이 굶어도 누구에게 말도 못하는 목회자의 가난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아 몸을 사리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먹이고 꼴을 베야 하는 가난한 농가의 아들이던 나는 굳이 목사가 되어 여러 식구 고생시키기 싫었을 뿐 아니라, 낮이면 별로 하는 일 없이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것으로 보이던 목사의 생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을 위해 그 시간에 밖에 나가 노동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목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니 그 답답한 틀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사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사람일 거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내가 얼마나 목사 되기를 꺼렸는지 짐작이 갈 일이다. 한편 그 당시 나는 제법 신학적인 지식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 그럴듯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믿음 좋은 젊은이들이 다 신학교에 가면 누가 세상을 변화시키나? 잘 믿는 사람이 공무원도 되고 장군도 되어야 사회 구석구석에 전도가 되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게 아닌가?’

 

요즘에 정리된 말로 한다면 ‘평신도 지도자’를 꿈꾸는 제법 선견자적인 발상이기도 했고, 남자라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을 잘 부양해야 한다는 생활인으로서의 내 기질에 꼭 맞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영락없이 신학교로 끌려갈 처지에 놓여 있었다. 노골적인 강요는 하지 않으셨으나 내심 내가 목사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시던 어머니는 나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주변의 은근한 기대를 뿌리치고 내가 지원한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진해 해군사관학교였다.

 

6·25 전쟁 후인 1950년대 중반은 가난한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모두들 궁핍하게 지내던 시절이라 농촌에서는 어느 집이건 예외 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뼈가 으스러지게 일을 해도 보리밥이나마 세 끼 먹기가 수월치 않았다. 자연히 돈 안 내고 대학을 다닐 수 있는 데다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사관학교는 경쟁률이 70대 1을 넘을 정도로 인기 있는 학교였다. 가난한 시골 교회 젊은이가 사관학교를 지원하며 품은 각오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꼭 해군 장교가 되어 선상에서 사병들과 예배도 드리고 복음도 전하며 살아야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보여주며 살 거야.’ 어찌 보면 상당한 신앙심의 표현 같았지만 사실은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한 탈출구를 마련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심정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성적이 좋기 때문에 당연히 합격하리라고 예상했던 것도 나의 착각이었다. 신체검사에서 ‘고혈압’이라는 판정을 받아 시험도 보기 전에 자격이 박탈되고 만 것이다. 그 막막한 심정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혈압 때문에 불편해 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이 뜻밖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관학교에 응시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어머니께서 대뜸 하시던 말씀이 낙망하여 돌아오는 내 귓전을 맴돌았다.

 

“응시하는 거야 니 맘이다마는 잘 안 될 끼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그럴수록 목사 되기 싫은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래서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물론 내 형편으로 보아 재수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서 재수생 뒷바라지란 어불성설이라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찾으려던 차에 하루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 4년 가까이 자랐던 삼거리라는 벽촌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 설교와 주일학교 지도를 해주면 방 하나를 주고 재수 생활 뒷바라지도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의에 내가 더없이 기뻐한 이유는 이 교회를 나의 증조부가 처음 세웠기 때문이다.

 

워낙 교인 수가 적고 재정 상태도 어렵다 보니 교역자를 청빙할 수 없는 지경이라 시골에서 성경 말씀 잘 아는 학생으로 소문나 있던 나를 부르게 된 것이었다. ‘이런 걸 두고 궁즉통(窮卽通)이라고 하는구나.’ 신이 나서 앞뒤 가릴 것도 없이 허락하고 신학도 안 한 주제에 목회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에는 미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오! 주여, 나 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건만 일년 후의 두 번째 도전에서도 실패하고 나자 스물 한 살의 나는 그제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을 내 삶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실패의 쓴맛 때문에 한동안 정신없이 고민하며 돌아다니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백기를 들고 시골 교회 마룻바닥에 엎드려 하루종일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때 내 모습은 다시스로 도망가다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던 요나의 꼴이었다.

 

며칠 후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목회의 길을 가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작은 질그릇이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항복하는 순간이었다. 즉시 내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려웠던 목회자의 길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렇게 싫었던 가난도 기쁜 마음으로 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살기로 결단한 이후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곁눈질하는 일 없이 외길을 달려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항상 송구함과 쑥스러움이 남아 있다. ‘왜 나는 자원해서 내 생을 주님께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진실로 고마워 일찍부터 세상 유혹 다 뿌리치고 목사 되기를 소원했다는 주변 동역자들의 간증을 들을 때면 나는 기가 죽어 버린다. 나 같은 것이 감히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무슨 소명하고는 거리가 먼 일종의 강제 차출로 끌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이것을 은혜라 부른다면 정말 별난 은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바울이 목멘 소리로 중얼거리던 독백을 사랑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폐결핵의 고통, 그 속에서 경험한 기적과 연단

5·16 군사정변이 나던 해 12월에 논산 훈련소로 향하는 내 마음은 참으로 참담하기만 했다.

사관학교 낙방 후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부산 모 신학교의 부속 기관 대학부를 2년간 다니다가 다시 집에 내려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차에 영장을 받았다. 그때 나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목회를 하려면 보리죽을 먹으며 고학을 해서라도 일반 대학을 거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기왕 마음먹은 이상 잘 준비된 목회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나는 논산훈련소로 가면서도 입시 준비를 하던 책가지와 성경책, 사전을 싸들고 갔다. 입소하면 입었던 옷가지와 함께 들고 갔던 것들이 전부 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번 오기를 부려 본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들고 간 책들이 통과된 것이다. 지금도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기적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훈련 중에 화장실에 가서도 공부하는 괴벽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군대 생활은 “저를 목사로 사용하시려면 먼저 대학에 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라는 억지 쓰는 기도로 이어졌고, 동시에 응답의 기적이 연속되는 놀라운 과정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빽이 좋아야 갈 수 있다고 해서 ‘빽관구’로 통하던 서울 6관구로 지원해서 올 수 있었다. 서울 구경이 평생 처음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이 나 같은 가난한 촌놈에게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곳에서 목사 아들인 직속 상관을 만난 것이나 그의 배려로 낮에만 근무하고 밤이면 밖에 나가 입시 준비를 할 수 있었던 일, 3개월 준비해서 국가고시에 붙은 것이나 당시 야간 대학으로는 가장 인기가 높아 수십대 일이라는 기형적인 경쟁에도 불구하고 12명의 합격자 중에 끼여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일 등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너무나 놀랍고 기이한 은혜다.

 

그렇게 소원하던 대학을, 그것도 빈손 들고 서울 와서 남보다 3, 4년 늦게 단기복무하는 졸병의 신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감격과 흥분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그런 들뜬 기분도 잠깐, 내 앞에는 호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1년간은 부대 일과 학업 사이에 끼인 채 너무 힘들어 파김치가 될 지경이었다. 몸이 점점 여위어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혈을 하게 되었다. 폐결핵이었다.

 

아내를 만나다

지금도 대학 시절 하면 두 가지만 유달리 기억에 떠오른다. 2년간의 처절한 투병 생활, 그리고 그 사망의 골짜기 끝자락에서 아내를 만난 일이다. 무엇보다, 비록 완치되었다는 판정은 받았지만 내가 결핵을 앓은 병력이 있는 줄 알면서도 나와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은 아내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결혼을 하자 아내의 내조 덕분에 가난하나마 생활이 안정되었다. 남은 대학 과정을 마치고 총회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서울에 단칸방이라도 마련해 살림을 일굴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던 나는 처가에 머물던 아내와 결혼 후 5년 가까이 헤어져 지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앨범에서는 남들과 같은 달콤한 신혼 생활의 추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목회자의 길, 하나님이 실수하신 건 아니실까

나는 신학교 시절에 남다른 정력을 쏟아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내가 신대원에 들어갈 무렵의 총신 강의실은 신학과 목회에 뜻을 둔 동료들의 눈빛으로 반짝반짝했고, 교수진 역시 박형용, 박윤선, 하비 콘, 김의환, 명신홍, 최의원 박사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분들의 강의는 이론이 아니라 육화된 학문이었고 인격과 삶이 배어 있는 신학이었다.

 

이런 이상적인 분위기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15년이 흘러간 어느 날, 김 박사님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그때의 내 숙제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데 때가 되면 신학 잡지에 싣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 숙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서 한번 보고싶다고 말했다. 내 손에 건네진 원고 뭉치는 노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스승에 대한 진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참 죄송한 것은 내가 그 원고를 받아 오기는 왔는데 이후 원고를 어디에다 두었는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글을 높이 평가하여 소중히 간직해 준 스승의 마음을 대접하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 금치 못하고 있다.

 

공부에 열을 올리던 한때는 총신 뒷산 언덕에 작은 토굴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혔다. 그곳에서 기도도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가 안될 때는 그곳으로 가 촛불을 켜 놓고 밤새도록 공부했는데,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히며 혼자 즐겼던 희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중에 산책 나온 동네 사람에게 간첩으로 오인받아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그 토굴을 포기했지만 되돌아보면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다. 지금은 수십 년 넘도록 훌쩍 커 버린 나무들이 산을 덮고 있어 그 토굴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 안수를 받은 지가 어언간 수십 년이 흘렀다. 하나님께서 나같이 자격 없는 것을 불러 주신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인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목회란 나 같은 것이 해서는 안 될 너무나 영광스러운 사역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빌리 그레이엄의 책을 읽으면서 그가 평생 마음에 담고 있던 질문 하나를 알게 되었다.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주님께 여쭙고 싶은 질문이라고 했다. “주님, 왜 저였습니까? 왜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농군 아들을 택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까?” 나 역시 이와 비슷한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아무튼 나 같은 것이 목사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불가사의의 수수께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이 실수하신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제자훈련에 눈뜨다

주일학교에서 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를 사임한 것은 신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부당하게 행동하는 장로와 부딪쳤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고 나를 퍽 아껴 주시던 목사님도 더는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쫓겨나더라도 저런 사람 버릇은 고쳐 주고 나가겠다’는 젊은 정의감으로 충돌했다가 갑자기 쫓겨나게 되니 막막한 심정을 떨칠 수 없었다. 유학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처자식이 딸린 처지라 무리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개척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여기저기 장소를 물색하며 다녔다. 며칠 간의 방황이었다.

 

그때 마침 총신에서 소선지서를 강의하던 성도교회 김희보 목사님이 내 소식을 듣고 불러주어서 그 주간부터 성도교회 주일학교를 섬기기 시작했다. 결국 한 주간도 쉬지 못한 채 사역을 다시 시작한 셈이다. 당시 성도교회는 600-700명 가량 모이는, 합동측에서는 중진급에 속한 교회로 한동안 지나친 열심 탓에 싸움이 잦고 상처의 골이 깊은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김희보 목사님이 부임해 9년여 동안 안정적으로 목회를 이끌어 오히려 분위기 좋은 교회로 변화되면서 유명세를 탄 곳이었다.

 

첫 사역지에서 100여 명 나오던 주일학교를 500여 명 나오는 주일학교로 부흥시킬 만큼 열심히 사역했음에도 힘없이 쫓겨난 신세가 되어 그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의 상처가 쉽게 가시지 않는 때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로 인해 성도교회로 가게 된 것은 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이었다. 성도교회 사역은 오늘날 사랑의교회 사역의 시발점이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제자훈련’에 눈뜨기 시작했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생각할수록 묘하고 놀랍기만 하다.

 

개척을 결심하며,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연구 여행을 시작하면서 귀국하면 개척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아내에게 편지 했는데, 그 의견에 자기는 동의할 수 없다는 답장이 왔다. 무척이나 당황하고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 동안 시골에서 고생하면서 남편이 귀국하면 안정된 교회를 맡아 제대로 생활할 수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을 텐데 돈 한푼 없이 개척을 하겠다니 불안해하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아내의 반대에 부딪히고 보니 내 마음에도 갈등이 오래 지속되었다. 기성 교회로 갈 것인가, 개척할 것인가라는 갈등이었다. 가족들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기성 교회로 가서 일해야 할 것 같았고, 기성 교회가 얼마나 제자훈련을 하기에 어려운 토양인가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고생을 하더라도 개척이 지름길이라는 것은 자명했지만 실제로 결정 내리기는 어려웠다.

 

그 무렵, 7년 동안 소식이 끊겨 있던 은평교회 배기주 목사님이 느닷없이 편지를 보내 왔다. 은평교회는 내가 주일학교를 2년 가까이 섬기다 밀려난 교회였다. 배 목사님은 내가 귀국하면 개척교회를 할 의향이 있는지 궁금해서 먼저 아내에게 타진했는데, 마음이 불안한 아내가 개척은 안 할 거라고 대답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배 목사님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개척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는 내게 개척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 준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배 목사님은 편지에서 은평교회 교인 중 몇 명이 한창 개발 중인 강남으로 이사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은평교회 출석이 어려우니 옥 목사가 강남에 개척을 한다면 안심하고 맡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1978년 3월 중순경이었다.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명령이 동시에 내려졌다고 판단한 나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6월에 귀국하고 7월 23일에 창립예배를 드렸으니 내가 얼마나 서둘렀는지 알 만한 일이다. 내가 그렇게 서두른 이유는 기성 교회로 가고 싶은 마음의 유혹을 가급적 피하려는 나름대로의 자기 관리였다.

 

여기에 교회 하면 아무도 안 와요

개척할 의사를 밝히는 내 편지를 받자마자 배 목사님은 바로 장소를 물색하러 다닌 것 같다. 먼저 강남으로 이사 온 교인들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몇 가정은 개척교회에 동참할 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그들이 내놓은 헌금에다 목사님 자신이 모아 둔 저금을 합해 들고 배 목사님 부부는 강남 일대를 둘러보다가 반도 유스호스텔 앞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의 2층 40평 정도를 계약하였다. 오늘의 사랑의교회를 위해 믿음의 씨앗 하나를 묻어 준 그분들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아직도 빚진 심정을 씻지 못하고 있다.

 

귀국해서 바로 교회 장소로 가 보니 강대상과 의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나는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 장의자 대신 강의실에서 쓰는 받침대 달린 1인용 의자 50개와 접의자 50개를 구입했다. 그 장소는 이미 어느 큰 교회의 지원을 받은 젊은 목사가 교회를 한다고 문을 열었다가 한 달도 안 되어 포기한 곳이었다.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는 그 목사에게 왜 떠나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에 교회를 하면 아무도 안 와요. 저 아래 있는 필리핀 대사관에 가서 선교나 하면 모를까”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살펴보니 아닌게아니라 교회를 하기에는 너무나 부적당한 입지였다. 교통도 매우 불편해서 버스가 20분에 한 대 꼴로 지나다녔고, 한창 신축 중인 아파트 단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곳 주민을 바라기는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주변 일대는 몇 채 안 되는 주택과 지저분한 여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돈이 부족하니까 좋은 자리는 잡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싼 곳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계약이 끝난 후라 어쩔 도리도 없었거니와, 당시의 나는 한 사람이라도 제자훈련 해서 투철한 소명자로 만들면 기적이 일어나겠거니 하는 단순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장소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교회 간판을 달려고 하니까 이름이 없었다. 배 목사님이 “옥 목사, 교회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었소?” 하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전에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떨결에 배 목사님 내외분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자는 생각으로 ‘강남은평교회’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더니 쾌히 동의해 주어 그 이름이 처음 3년간 사랑의교회 전신이 되었다.

 

교회를 세우다 - ‘왜 이 교회를?’

교회 개척을 위한 외형적인 준비가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동안, 나의 마음은 지금까지 붙들고 씨름해온 목회철학을 포괄하여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혼자 앉아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여러 교회들 가운데 또 하나의 교회를 더하지 말게 하옵소서. 종교적 허세만 가득하고 정작 생명을 잉태치 못하는 불임의 교회를 또 하나 세우지 말게 하소서. 사람을 위한 직함들만 줄줄이 만들고 정작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교회를 만들지 말게 하소서. 내가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명쾌한 자기 인식 없이 행사에 바쁜 사교 클럽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 왕국을 전략적으로 이 땅에 구축하는 야전 벙커가 되게 하시고 행정에 분주한 동사무소가 되지 않게 하소서.”

 

1978년 7월 23일 주일 오후 3시, 드디어 창립예배를 드렸다.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교회 안에 펼쳐 놓은 100여 개의 의자에는 축복하러 온 은평교회 성도들로 가득 찼고 강대상에는 오유순 집사가 꽃꽂이해 놓은 꽃이 환한 자태로 향기를 발했다. 배기주 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예배는 김희보 학장의 축사, 그리고 내수동교회 대학부 학생들의 찬양 등으로 이어진, 흔히 볼 수 있는 개척 예배의 조촐한 풍경이었다. 남다른 점이 있었다면 담임목사가 설교를 맡았다는 것이리라.

 

예배가 진행되면서 여기저기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부인들이 여럿 있었다. 앞으로 고생할 목사가 측은해 흘리는 눈물과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다는 감격이 어우러져서 흐르는 눈물이었으리라. 그 중에는 내 아내도 끼여 있었는데, 그는 아마 앞일을 생각하니 더욱 막막해서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놀라운 평안함과 기쁨이 자리잡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듯한흡족한 심정이랄까, 배불리 젖을 먹고 난 어린아이의 평안함이랄까, 그런 신비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날 내가 설교를 맡은 것은 의도적이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관례를 깨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개는 교단 내의 유명 인사를 초빙하여 설교 부탁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 시작하는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하는 첫 메시지는 그 교회의 목표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설교이므로 남에게 맡길 수 없다는 약간은 고집스러운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 관례를 깨기로 했다.

 

설교 제목은 “왜 이 교회를?”로 본문은 마태복음 9장 35-38절이었다. 나는 이 설교 속에서 사랑의교회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예수님이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며 사역하신 것처럼 개척되는 교회도 어느 지역에 묶여서 일하기보다는 주님이 가라는 곳이면 어디나 갈 수 있는 교회, 즉 경계선 없는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보여 준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기능은 바로 우리 교회가 꾸준히 추구해야 할 기능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을 목자 잃은 양으로 보시고 가슴 아파하시며 그들을 위해 일할 일꾼을 찾으신 것처럼 우리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받은 소명자로서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목회의 비전을 두어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며 우리는 한 목소리로 이런 기도문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 우리는 여기 모였습니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원은 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믿으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예수가좋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