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부터 뽑고
옛날 유럽 어느 나라에 미움이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남의 재물을 빼앗아 치부하는 그런 자였다. 하루는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말하면 내가 소원을 지체 없이 들어 주겠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같은 천사의 말에 사나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요구했다. "좋습니다. 천사님 ! 나의 소원은 오직 그 놈의 눈을 뽑는 일이니까 우선 내 눈부터 뽑아 주십시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몇 년 전 몹시 무덥던 날 전철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 안이라 응급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주위 사람들고 괜찮으냐고 걱정을 해 주는 것이 고작일 따름이었다.
아주머니가 약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마실 물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철은 역에 도착했다.
바로 그 순간 20세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꽁지에 불붙은 토끼처럼 튀어나가더니 전철이 출발하는 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캔 주스를 하나 들고 전철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주머니, 이것으로 약을 드세요."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역이 내려야 할 역인 듯 그 아가씨는 다시 잽싸게 내렸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승객 모두는 어안이벙벙해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아가씨가 내리고 나자 잠시 후 아주머니도 고통에서 벗어났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고 하지만 그런 기특한 아가씨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내 딸도 그 아가씨처럼 성장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빌었다. 그 광경은 언제까지고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눈치빠른 선교사
갓 학교를 졸업한 한 신참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 낯선 나라에 파송되어 겪은 실화이다.
그 나라 말을 모르던 그 선교사는 예배를 드리러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결국 여기 저기를 헤매다 교회에 도착해보니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서 맨 앞줄 말고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아서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따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찬송이 시작되었고 그 사람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선교사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찬송이 끝나자 일어나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도 따라 일어나 기도를 하고 그 사람이 앉자 따라 앉았다. 그리고나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며 성찬식을 하기에 그대로 따라했다.
설교가 시작되었지만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따라 열심히 목사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목사님이 뭔가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을 보니 그도 박수를 치길래 선교사는 따라했다. 잠시 후 목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시자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도 따라 일어섰다.
그러자 갑자기 여기 저기서 놀라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자기와 옆좌석에 있는 두 사람만 일어서 있는 것이었다. 당황한 선교사는 속히 자리에 앉았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문 앞에 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교인들과 악수를 하던 목사님이 그 선교사에게 영어로 말을 거는 것이었다.
" 당신, 이 나라 말을 모르시지요? "
" 아, 예에... "
" 아까 제가 한 말은 ' 아코스타 집안에 새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 아버지께서 좀 일어서주시겠습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눈물
눈물은 고귀하다. 눈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진하다. 눈물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래서 눈물은 신성하다. 하나님이 눈물을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심에 틀림없다. 가끔 애처롭게 비가 내릴 때면 '하나님도 외로워 우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은 우셨다. 값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다. 건강한 영혼만이 눈물을 흘린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희로애락이 분명한 사람이다. 요셉은 형제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창세기42:24) 사도 바울도 눈물로
성도들을 섬겼다.(사도행전20:19)
눈물의 가치는 누구를 위해 울며, 무엇을 위해 울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영성 생활의 출발은 회개의 눈물과 함께 시작된다.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한 사람의 영혼의 창은 새롭게 열린다. 눈물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결케 한다. 애통하
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애통한 후에 열린 눈으로 그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마른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눈물은 하늘의 다이아몬드이다. 비누는 몸을 닦는데 필요하고 눈물은 마음을 닦는데 필요하다.
눈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눈물의 배후에는 의미가 있다. 눈물 속에는 말못할 사연, 아픔 그리고 고뇌가 담겨 있다. 때로는 감격적인 기쁨 속에 흘리는 눈물도 있다.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와 같은 상을 받는 사
람의 눈물 속에는 지난날의 아픈 추억이 함께 담겨 있다.
"나는 어느새 이불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1981년 2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중인 김대중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
낸 옥중서신의 한 구절이다.
눈들어 높은곳을 바라보자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한번은 시골교회를 방문했다. 그 교회의 젊은 목사는 가정과 목회문제 때문에 큰 좌절감에 빠져있었다. 웨슬리가 이 젊은 목사와 함께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마침 외양간에 소가 있어 바라보니 소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외양간 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웨슬리는 젊은 목사에게 “저 소가 어째서 고개를 들고 있는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웨슬리는 젊은 목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벽이 있기 때문이죠.사람도 앞에 벽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눈이 제일 위에 있는 것은 빨리 위로 눈을 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앞에 벽이 있다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 있기 때문에 위를 바라다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고 말씀하신다.
희망의 눈
뉴욕의 젊은 검사들로 조직된 특별타격대는 그들의 오랜 범죄자 취급의 경험으로 볼 때 범죄예방의 최선의 힘은 긍정적인 생각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남을 미워하는 자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결과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자가 파괴적인 생각을 갖는다. 최악의 경우에도 가능성을 바라보는 사람은 가망이 있다. 소망이란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가능성을 생각하며 한 가지를 하는 것이 불가능을 생각하며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세상을 밝혀 주는 사람은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에델바이스는 고산지대의 작은 꽃이지만 이른 봄 아직 눈이 덮여있는 속에서 꽃봉오리가 맺힌다. 역경을 오히려 온상으로 삼는 교훈을 주는 꽃이다.
미국의 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뉴햄프셔 주 워싱턴 산 주변 마을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스트레스도 없고, 교통혼잡도 없고, 주로 은퇴한 사람들이므로 직장에서 직면하는 인간관계도 없다. 그들의 불만은 오직 춥고 긴 겨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건강이 환경만으로 좌우되지는 않는다.
타락과 부패 씻어낼 참회의 기도와 눈물
한 유대인이 향수의 원료가 되는 비싼 기름을 유리그릇에 보관해두었다.그런데 어느날 그곳에서 심한 악취가 풍겼다.공 교롭게도 그 향유에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죽어있는 것이었다.결국 비싼 향유는 썩은 한 마리의 파리로 인해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죽은 파리 한 마리가 향수의 원료를 악취의 진원지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0:1)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요즘 혹세무민하는 점술인들과 이에 현혹되는 일부 지식인들,물질에 눈이 어두워 양
심을 팔아버리는 사람들,잘못된 판단으로 사회를 그릇되게 이끌어가는 지도층 등을 바라보면서 ‘작은 어리석음 때문에 지혜의 가치가 손상된다’는 뜻이 담긴 이 성경 구절이 부쩍 피부에 와닿는다.
신앙인이며 대통령의 처조카라는 분이 역술인의 꾐에 빠져 보물사업에 뛰어든 것은 인간이 재물 앞에서 얼마나 나약하 고 우매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258명의 수장된 영혼을 달랜다면서 만두 258개를 바다에 던져 보물의 매장 지점을 알 아내려 했다니 기가 막힌다.
최근 대법원이 조상의 천도재를 지내면 시력이 돌아오고 교통사고를 막을 수 있다며 상담자 가족에게서 938만원을 받아 사기공갈 혐의로 기소된 역술인 김모씨에게 무죄를 확정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역술인이 점을 봐주거나 길흉화복을
경고하며 돈을 받은 것이 과연 상대방을 속이려 하거나 협박한 것이 아닐 수 있을까.
다른 이야기지만 정부는 남아도는 쌀 100만섬으로 소주를 만들었다.쌀 100만섬으로 만들 수 있는 소주가 무려 7억병이 넘는다고 한다.북한 동포가 굶주려 죽어가는 마당에 우리 민족에게 ‘피’와 ‘생명’‘으로 여겨졌던 쌀을 기껏 술로 만든다 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또 부패한 권력과 빈부격차의 악취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누가 누구를 안다고 압력을 행사하고 권세있는 자가 힘을 과시하는 현실은 힘없는 사람들의 어깨를 처지게 만든다.서울 강남의 치솟는 집값은 한푼두푼 월급모아 집을 장만하려 는 보통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든다.1년간의 성실한 저축이 집값을 따라잡지 못할 때 사람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
문득 “IMF 위기는 우리의 타락과 부패를 향한 하나님의 옐로 카드였다”던 어느 노목사의 말이 떠오른다.거북등처럼 갈 라진 들판의 틈새를 파헤쳐 나물과 땔감용 뿌리를 캐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 한국의 악취나는 현실을 오버랩해 보면 서 하나님이 언제 레드 카드를 꺼내실지 두렵다.
오페라 가수 핼버턴(Halverton)은 초등학생 아들이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한 아이가 “우리 아빠는 국 회의원을 잘 안다”고 자랑했다.다른 한 아이는 “우리 아빠는 시장님과 친하시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때 핼버턴의 아 들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과 아주 친하시단다”고 말해 가슴이 뭉클했다는 것이다.이제 ‘나는 하나 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사회의 악취를 제거하는 것은 회개의 눈물이 아닐까.참회의 눈물은 ‘영혼의 보석’이다.악취를 제거하는 방향제와 같 은 ‘참회의 기도’가 이 땅에 차고 넘쳐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한 나라가 되길 소망한다.
사랑의 눈길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로마서 12 : 9)
이십년 동안 매일 매일 안토니오는 그이 아내에게 사랑의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혼 공판정에서 그의 결혼의 즐거움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런 시들을 지은 것이 아
니고 그이 거센 아내를 달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판사는 이혼 을 허락했고 그 결혼이 외관상의 '사랑의 모습'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고 선 언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 간의 관계에서도 자주 그와 비슷한 깨짐이 생깁니다. 가식이 사라지면서 오래 숨겨져 있던 분노가 표면화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는 자신이 멋있는
가식을 앞세우고 행동하는데 지쳤다고 말하며 수년간의 소위 말하는 '행복한 결혼' 을 뒤로하고 떠납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된다."(18절)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우 아벨에 대한 가인의 "사랑"은 결국 분노로
터져버리는 끓어오르는 시기심에 덮혀 있었습니다(12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이
야기의 비극적인 종말을 알고 있습니다(창세기 4:8).
결혼생활에서나 또는 동료 믿는 자들과의 관계에서나 사랑이 진실하지 않으면 당 연히 분노와 분열이 표면화됩니다. 그저 "사랑의 눈길"을 한번 주기보다는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는 로마서 12:9의 말씀에 진지하게 도전해 봅시다.
[실화]두눈을 가린 스승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성했다.
학생들은 어떤 교사를 해임시키라고 주장했는데 그 교사는 학생 한 명을 심하게 때려 미움을 받은 것이다.
학교측에선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며 수업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했고 수십명의 학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교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흥분한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선생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주임교사인 김선생님은 교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네이놈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난동이냐!
어찌 교무실까지 함부로 들어와 행패냐! 어서 썩 나가거라!"
청천벽력 같은 김선생님의 말에 잠시 움찔한 학생들은 갑자기 김선생님에게 와락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그순간 김선생님은 얼른 두 손으로 자기의 눈을 가렸다. 학생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게 없는지 김선생님을 마구 구타했다. 어깨를 흔들어대는 학생들의 손짓에도 김선생님은 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그뒤 학교는 평온을 되찾았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불경한 죄 때문에 고민했다. 고민끝에 김선생님을 구타한 학생들은 교무실로 김선생님을 찾아가 사죄했다.
"선생님,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들이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됐다, 됐어. 스스로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이 세상엔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김선생님은 도리어 학생들을 칭찬하는 듯한 말로 아이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그때 왜 그렇게 한사코 눈을 가리고 계셨습니까?"
"아, 그때. 나는 수양이 좀 부족한 사람이야. 만약 때리는 너희들의 얼굴을
본다면 내가 그 너희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봐.
너희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린게지."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내 눈을 감겨주십시오(詩)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나는 당신을 볼 수 있읍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수 있읍니다
발이 없을지라도 나는 당신 곁에 갈 수 있읍니다.
또한 입이 없어도 나는 당신에게 애원할 수 있읍니다.
내 팔을 꺾어 주십시오,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더듬어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멈추어 주십시오, 나의 뇌가 맥박칠 것입니다.
만일 나의 뇌에 불이라도 사른다면 나는 나의 피로써 당신을 운반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이 울거나 울지 않거나 눈에는 항상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이 눈물은 눈을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보통 우리는 울 때에 눈에서 흘러나오는 물방울만을 눈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을 감싸고 있는 액체는 눈물샘에서 나옵니다. 이 물은 눈이 잘 움직이게 하는 윤활제로서 또는 각막에 붙어 있는 먼지나 머리카락 같은 것을 제거하는 세척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 눈물이 없다면 곧 눈이 멀게 될 것입니다.
눈물은 눈꺼풀 아래에 있는 작은 샘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눈물샘에서 너무 많은 눈물이 흐르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그 눈물이 빠져나갈 다른 통로를 코 속에도 두셨읍니다.
이것은 사람이 울 때에 종종 콧물이 흘리는 이유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우는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양파를 썰 때나 연기 같은 자극체 속에 있을 때에 눈물이 나옵니다. 또한 강한 빛을 보거나 바람이 눈물샘을 자극할 때에도 눈물은 나옵니다. 눈꺼풀의 계속적인 움직임은 눈물을 흐르게 합니다.
우리의 몸은 매우 놀랍게 만들어져 있어서 강한 감정을 갖게될 때 눈물을 흐르게 합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모두 슬픔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기뻐하거나 웃을 때에도 눈에는 눈물이 고이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너무 슬퍼도 눈물이 쏟아져 뺨에 흐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우는 것에 대하여 난처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눈물 앞에서 용기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눈물샘의 건전한 사용은 매우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에 대하여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크게 울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필요할때 눈물을 흘리고, 시편 56 편의 기자는 때때로 밤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여러 번 잠자리에서 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생활을 돌보고 계신 것을 너무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슬플 때 흘렸던 모든 눈물을 모아 병에 담는 모습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흘렸던 모든
고통의 눈물들이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그 눈물의 기록들을 하나님의 기억 속에 간진하고 계신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를 울도록 만든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너무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 명상 : 하나님 !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삶도 눈물로서 씨를 뿌리
서울 수도침례신학교학장 세계 복음화운동중앙협의회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장등 교계지도자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지덕목사(57 서울시남침례교회)는 대학시절에 [질병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목회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 한다.
마도로스가 되어 대양을 누비겠다는 소망으로 부산수산대학에 입학, 의욕적인 학창생 활을 하던 그에게 급속한 시력감퇴와 색맹증세가 나타난 것. 맹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중학교 때부터 신앙을 가져 19세때 집사직분까지 받았던 제가 왜 이런 고난의 벽에 부닥쳤는지 의문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젊은 혈기와 의욕으로 자행자지하려는 저를 질병의 굴레로 묶어 인간의 나약과 한계를 체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토록 희망차고 찬란했던 장래가 건강을 잃자 잿빛으로 변했다.
두손을 든 그가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서원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자 그 양쪽 눈은 거짓말처럼 치유되었다.
하나님께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신 것을 확신한 지목사에게 시편 126편5절 말씀이 불 꽃처럼 다가왔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령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서 눈물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전파를 수행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또 하나님께 간구하고 매달리는 신앙, 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믿음을 가질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며 승리의 길로 인
도하신다는 진리를 지목사의 처녀목회지는 전기도 버스도 들어오지 않던 경북 영일군 신광면의 만석이란 오지였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지목사는 [모세의 미디안광야 생활과 같은 이 연단의 시기가 오히려 축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단계]였다고 기억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 인들이 씨앗은 심지도 않은채 열매만을 기대한다든지 성급한 결과를 원하는 우를 범하 고 있습니다]
75년 41세의 나이에 침례교총회장에 선출돼 화제가 되기도 했던 지목사는 [신앙은 가지는 것보다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이 더욱 힘들다]며 [기독교인은 끊임없는 자기점검을 통해 참된 평안과 기쁨, 거듭남의 확신을 계속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종순사모(57)와의 사이에 3남을 둔 지목사는 [남은 삶도 강단에서 눈물을 뿌리는 목회자, 어디서나 은혜와 사랑을 심고 거두는 성실한 추수꾼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눈물 공감대
이산가족 찾기의 감동은 <심청전>의 라스트 신에서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다. 그 가족 찾기 방법이 지금 KBS에서 벌이고 있는 것과 신기할 정도로 흡사하다. 방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을 천만 칸의 넓은 대청에 일자로 앉힌 후에 거주, 성명, 연세, 직업, 자녀유무, 가세빈부, 유식무식을 적은 널펀한 종이 피켓을 양손에 들게 하고 황후가 된 심청이 앞을 지나가게 한다.
`도화동(桃花洞) 심학규(沈鶴圭), 연(年)이 63세, 직업은 밥먹고 잠자기뿐이요, 아들은 못 낳았고, 딸 하나 낳았더니 제수(祭需)로 팔아먹고, 글이라는 것은 언문조차 겨우 알고, 받침은 못 하며...' 하는 종이 피켓을 보기도 전에 심청이는 육감으로 아버지를 알아보고 끌어안고 옥루만면(玉淚滿面)을 한다. 꿈이거든 깨지 말라 하고 귀신이든 날 잡아가라고, 텔레비전 상봉에서 외치듯 똑같은 감동을 심청이 부녀(父女)는 외쳐댄다.
이에 감동하여 만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산천초목(山川草木)도 다 울었다고 했다. 우리 고전 소설 속에서 가장 많은 눈물의 기록을 세운 대목이다. 이에 비해 지난 주말은 한국의 역사가 생긴 이래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많은 눈물을 동시에 흘리게 한 고밀도(高密度) 낙루시간대(落淚時間帶)를 기록했다고 본다.
5백여 쌍의 이산가족이 만나는 동안 한 집에서 한 사람이 1그램꼴의 눈물만 흘렸다 해도 줄잡아 10톤, 수집 드럼통에 담아 트럭 두 대에 만재할 만한 낙루량(落淚量)이다. 그 눈물이 감천(感天)하여 주말 내내 그렇게 억세게 비가 내렸던 것같다.
아파트마다 불을 켠 채 밤샘하느라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다. 눈통이 부어 휴일(休日)의 약속을 취소했다는 부인도 있다. 다투어 냉전 중이던 모녀가 텔레비전 앞에서 끌어안고 울었다는 집도 있다. 울고 있는 아내에게 밥차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몰래 나와 외식했다는 남편도 있다. 한 나라 사람들은 온통 하나의 공감대(共感帶) 속에 이토록 녹여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나의 가족 밖의 남들 일에 대체로 무심하다는데 정서의 어느 한 심층에 이토록 남들 일에까지 광범위하게 교감(交感)할 수 있는 따스한 온기가 보존돼 있었는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5백여 쌍의 만남이라는 소득도 대단하지만, 민족이 하나로 교감하는 순수한 공감대를 조명해주었다는 데에도 뜻을 두고 싶은 것이다.
눈물로 뿌린 씨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작은 동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네 살 된 윌리암이라는 소년은 동리에서 평판이 대단히 났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지도를 할 수 없었던 거칠고 못된 소년이었다.
더구나 그는 많은 학생들에게 점차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당국에서도 큰 문제였다.
그때에 새로 부임해 온 교사가 한 사람 있었다.
이 새 교사는 윌리암 소년에 대한 말을 듣고 그를 한번 지도해 보겠다고 했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 말렸다. 공연히 봉변이나 당할 터이니 손을 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 교사는 윌리암 소년을 차근차근 관찰해 가면서 그의 형편과 성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희망이 없다고 낙인이 찍히고 틀림없이 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윌리암 소년을 친절과 이해와 끈기로 지도해 갔다. 교사는 못된 그 소년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참된 자존심과 포부를 넣어 주었다.
그 교사는 눈물로 씨를 뿌린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뿌려진 씨앗이 싹이 트고 땅에 뿌리를 내고 자라는 것이었다.
이 소년은 나쁜 버릇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밤잠을 안 자며 공부를 하였다. 그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할때에는 우등이라는 명예로 졸업을 했다.
윌리암은 계속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결국 미국 대법원의 부판사가 되었다. 그는 이어서 미국의 상원의원이 되었다.
윌리암은 뉴욕의 주지사가 되었고 드디어는 미국의 국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어려서 몹쓸 인간으로 점 찍혀 버림받았으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한 교사의 지도로 이처럼 위대하고 뜻 있는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교인들의 눈물”
“담임목사를 모함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명예훼손 죄가 적용돼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이 말은 D시의 D교회 담임 B모목사가 설교시간에 교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교인들을 향해 저주한 말이며, 이에 교인들은 울분을 터트리고 있다. 여기에다 B목사는 자신을 반대하는 교인들을 ‘정신병자’로 몰아 붙이고, ‘교회 출입금지령’까지 내렸다는 것이다. B목사의 이같은 협박과 저주는 주일 낮예배 설교시간에 공공연하게 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더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이같은 일들이 교회 내에서 계속 일어나자 교인들은 하나, 둘 떠나 1백30여명이 모이던 교회가 40여명으로 줄었고, 나머지 교인들도 목사측과 반대측으로 분열, 패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놓였다.
더욱이 담임목사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자격을 박탈당한 교인들은 교인들을 보호하고, 양육해야 할 교단지도자들이 B목사의 편을 들어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를 지켜본 교인들은 목회자들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D교회의 사건을 지켜본 주변교회 교인들도 목회자 한사람이 살기 위하여 교회와 교인은 죽어도 된다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며, 교회를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파행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입을 모아 비난하고 있다.
눈과 손이 없어도
미국 캔사스 주의 어떤 사람이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하여 바위를 폭파시키다가 잘못하여 두 손과 두 눈을 잃고 말았다.
그는 성경을 읽고 싶었으나 눈이 보이지 않았고 손이 없어서 점자로도 읽을 수 없었으므로 궁리 끝에 혀로 점자 읽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혀는 너무 약하여 오랫동안 성경을 읽으면 피가 흘렀고 고통이 심했다. 그래도 그는 기뻐하면서 계속하여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유명한 앗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이 때 프란시스는 겸손에 관해 참으로 아름다운 정의를 남겼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네."
어느 수련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사람, 한사람 대답을 합니다. 어떤 남학생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의 대답을
듣고 모두가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대답이 얼마나 진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야말로 죽일 놈이죠."
인간과 인간과의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실 앞에서 아무도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 심이니이다”-시 61:2,3.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이 하루는 눈이 아파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눈이 너무 지쳐 있군요. 당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업무가 바빠서 한 시도 쉴 수 없었던 그 여성은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만약 일하시는 곳에서 산을 볼 수 있다면, 눈이 피로할 때마다 그곳을 바라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눈의 피로가 풀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곧 피곤함에 지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안과 의사의 처방대로 산을 바라다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산이란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우리가 지쳐 그 분을 바라볼 때 그 분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함께 휴식을 주실 것입니다.
눈물의 시라기 죽
한 때,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길에 빠져 살았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한 삶을 그 안에서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행보를 함께 하리라 마음먹고 전도사님이 되신 어느 팔방미인 여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자신을 은파(恩波)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 은파 전도사님이 지금부터 약 50년 전쯤, 어느 성탄절에 교회 사모님과 장난기가 발동되어 재미있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때의 일입니다. 변장을 하여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부자집에선 모금을, 가난한 집에는 그 모금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은파 전도사님과 사모님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구두약을 바르고 눈섭도 그리고 분장을 하여 교인들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장을 하였습니다. 장난기가 남에게 지면 서운하리라하던 사모님은 베개를 아기 삼아 등에 엎기까지 하였답니다.
해가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저녁부터 가정방문을 시작하였습니다. 교인들의 가정을 한 가정씩 방문하면서 구박도 맞고 모금도 하면서 그럭저럭 재미가 있을 즈음, 그들의 발길이 교회에서 가장 부자인 신발가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틀림없이 거액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교회에서 재정부를 맡고 계시는 분이고 헌금도 많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신발가계의 문을 드르륵 열자, 금방 벽력같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에이, 재수 없게 웬 거지가 들어오고 야단이야. 어서 나가지 못해요!" 이 말에 주춤하던 전도사님과 사모님은 내심 깜짝 놀랐지만, 애써 참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주인 왈 : "아직 개시도 못했는데 당신들에게 줄 것 없소!" 그 시간이 조금 있으면 문을 닫을 시간인데 개시도 못했다니... 몇 번 더 구하다가 둘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래, 저렇게 마음을 쓰니 개시가 있을 수 있나"라고 서로는 분한 마음을 삭히면서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가마니를 만들어 파는 집사님 댁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허름한 집에 호롱불을 켜 놓고 열심히 새끼를 꼬던 집사님이 허름한 차림의 두 여인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그는 곧 일어서서 그들을 난로가로 인도하였습니다.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있던 아내를 큰 소리로 부릅니다. 손님이 오셨으니 저녁을 충분히 지으라고 말을 전합니다. 안 집사님도 반가이 맞으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윽고 저녁이 다 되었습니다. 나온 저녁은 쌀 한 톨 들지 않은 시라기 죽이 전부였습니다. 당신들이 먹으려 했던 죽에 그저 물만 더 붓고 끄려 낸 시라기 죽,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두 사람은 눈물이 나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핑계를 대고 먹다 남은 시라기 죽과 꼬깃꼬깃한 돈 몇 푼을 억지로 받아 가지고 그 집을 나와 둘은 모퉁이 담을 돌자 약속이나 했듯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와 바가지에 담겨 있는 시라기 국을 다 먹었습니다. 지금도 은파 전도사님은 그 때를 추억하고는 그 때 먹었던 시라기국과 같이 맛있는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아마 눈물이 적당히 간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 한 방울
패러데이는 근대 전기학의 대가이다. 그는 열렬한 신앙인으로 높은 인격을 가졌고 학생들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졌다.
어느 날 학생에게 '신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유리 시험관에 어머니가 그 아들을 위해 흘리신 눈물 한 방울을 들고 교단에 섰다. "지금부터 이 눈물을 분석하겠습니다." 분석 결과 수분과 소량의 염분이 나타났다. 그는 흑판에 '한 방울의 눈물은 수분과 소량의 염분으로 이루어졌다.'라고 쓰고서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이 분석표는 어머니의 눈물 한 방울을 남김없이 나타내고 있을까요?" 학생들은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선생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패러데이는 말했다.
"이 분석표는 과학적으로는 물론 어머니의 눈물 한 방울을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잘 되기를 비는 사랑, 그것은 전 세계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그런 사랑은 이 표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 속에 그것이 없다고는 하지 못합니다. 이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세계를 보고 이를 인식하는 힘을 신앙의 힘이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신앙의 영역입니다."
한 눈 팔지 말라
왕이 젊은 재상을 불렀다. 젊은 재상이 왕 앞에 서자 왕은 기름이 가득한 잔을 주면서
한 시간 안에 지시하는 거리를 돌아오라고 했다. 기름을 쏟거나 시간이 늦으면 엄벌에 처한
다고 하며 칼을 든 군인으로 하여금 뒤따르게 했다. 젊은 재상은 정신을 바짝 차려 땀을 흘
리며 기름을 쏟지 않고 제 시간 안에 도착했다. 왕은 만족하다는 듯이 웃으며
"모퉁이의 구두가게를 보았는가?"
"못보았습니다."
"그럼 쌀가게는 보았겠군?"
"못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기름을 쏟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다보니 아무것도
못보았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왕은 "맡은 일에 충성하다보면 시험에 들 겨를이 없는 법이요."라고 말했다.
토마스 에디슨이 나이 많았을 때 한 젊은이가 "선생님, 살아오시는 동안 시험에 든 적이
없습니까?"라고 말하자 "시험? 나는 평생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시험에 들 여지가 없었다네"라고 하였다.
미국 속담에 "마귀는 빈둥거리는 자들을 찾아서 시험한다"고 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충
성하지 않을 때 마귀는 시험의 독침을 꽂는다.
게으른 것이 눈
어렸을 적에 농사일을 도우면서 짜증내고 싫어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늘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것이 눈이란다”며 나를 타이르셨다. 한 번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보릿단을 탈곡해야 하는데 그것을 올려다보며 막막해 하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또 그 말씀 “눈이 게으른 것이여. 내일 비가 온다는데 하는 데까지 해봐야제…” 하시면서 보릿단을 헐어 탈곡기에 넣기 시작하셨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꼬박 날을 새워서야 그 높은 보릿단을 다 탈곡해낼 수 있었다. 하고 보니 정말 어머니 말씀대로 사람에게 제일 게으른 것이 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일도 실제로 부딪쳐보면 쉬운 일과 어려운 일, 그리고 불가능한 일의 차이는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차이뿐이라고 에디슨은 말하였다. 미얀마에 윈게트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부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정글을 꿰뚫고 지나간 뒤가 아니면 어떠한 정글도 돌파 불능이라는 보고를 하지 말라.” 이 말은 모순 같지만 부딪쳐보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뿐이다. 사실 상식과 현실이 항상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상식으로 보면 안될 일도 부딪쳐보면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가 있어도 웃으면서 맞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의 용기이고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눈
우리 인생들의 오관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보배로운 부분이 눈입니다. 눈의 예술이고 눈의 문명입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것보다 보는 것보다 텔레비죤을 통해서 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는 말도 있고 세상 만사가 다 보는 것으로 통하는 예가 허다 합니다.
그래서 맛 본다고 하면 만져 본다고 하고 맡아 본다고 한다 계산해 본다. 선본다. 시장본다. 옛날에는 과거 본다고 말을 했고 오늘날은 시험본다고 말합니다.
고대철학자의 교훈 가운데 `너의 눈이 밝아라`는 말이 있읍니다. 눈이 어두우면 어두운 인생이고 눈이 고장나면 고장난 인생입니다.
세계 미인대회 심사규정에 의하면 채점할 때 지성미에 50점 , 육체미에 50점을 준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눈에 해당되 는 점수가 10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소경이고 벙어리고 귀먹어리된 헨렌.켈러 여사를 기억합니다. 이 사람이 감동깊은 수필을 썼는데 `Three days to See`라고 하는 수필입니다. 그 내용은 `내가 만일 눈을
떠서 사흘 동안만 볼수가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볼까? 먼저는 친구의 얼굴의 보아야지. 그리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볼테다. 또 자연의 꽃송이를 보고 삼라만상을
마음껏 보리라.` 그런 내용의 수필입니다.
귀부인의 눈물과 마차부
월리엄 제인스라는 심리학자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러시아의 상류사회의 어떤 귀부인이 한 번은 어떤 극장에 오페라 구경을 갔다. 그런데 그오페라의 연극에 나오는 주인공이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보고 한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시간, 그 극장 밖에서는 그 귀부인의 마차부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눈물로 뿌린 씨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작은 동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네 살 된 윌리암이라는 소년은 동리에서 평판이 대단히 나빴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지도를 할 수 없었던 거칠고 못된 소년이었다. 더구나 그는 많은 학생들에게 점차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학교 당국에서도 큰 문제였다.
그때에 새로 부임해 온 교사가 한 사람있었다. 이 새 교사는 윌리암 소년에 대한 말을 듣고 그를 한 번 지도해 보겠다고 했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 말렸다. 공연히 봉변이나 당할터이니 손을 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 교사는 윌리암 소년을 차근차근 관찰해 가면서 그의 형편과 성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희망이 없다고 낙인이 찍히고 틀임없이 악한 사람이 될 곳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윌리암 소년을 친절과 이해와 끈기로 지도해 갔다. 교사는 못된 그 소년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참된 자존심과 포부를 넣어 주었다. 그 교사는 눈물로 씨를 뿌린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뿌려진 씨앗이 싹을 트고 땅에 뿌리를 내고 자라는 것이었다. 이 소년은 나쁜 버릇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밤잠을 안 자며 공부를 하였다. 그는 대학에 진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우등이라는 명예로 졸업을 했다. 윌리암은 계속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결국 미국 대법원의 부판사가 되었다. 윌리암은 뉴욕 주의 주지사가 되었고 드디어는 미국의 국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몹쓸 인간으로 점찍혀 버림받았으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한 교사의 지도로 이처럼 위대하고 뜻 있는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눈물을 되찾자
예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런 격언을 본 적이 있다.“바쁜 사람은 눈물 흘릴 시간이 없다” 아마도 그 격언은 눈물 흘리지 말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라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다.“인간이 눈물 흘릴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서야 되겠는가”
오늘날을 스피드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만큼 정신없이 바쁘지 않으면 경쟁에서 낙오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누가 먼저 제품을 개발하고 누가 먼저 시장을 장악하느냐가 기업의 생사를 결정한다. 누가 먼저 승진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느냐에 의해서 사람이 평가된다. 그런 때문인지 요즘 현대인들은 점점 정서가 메말라가고 인심이 각박해져가는 것같다. 그만큼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이웃을 보아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아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보아도, 이 땅에 복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보아도 우리의 눈물이 메말라버렸다.누가복음 10장 38절 이후에 보면 예수님이 마르다라는 여인의 집에 계실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다는 손님들의 음식을 준비하느라 무척이나 분주했던 반면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그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다. 마르다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예수님께 동생을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정신없이 바쁜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인정해주셨다.
만약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물 한잔을 가져다줄 것을 부탁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마르다가 물 한잔을 가져다 드렸을 것이지만 이런 불평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음식 준비하느라고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는 줄 아시면서 왜 귀찮게 하시나”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똑같은 요청을 했을 경우 마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 얼른 예수님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물 한잔을 떠왔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정말 주님과 깊은 관계속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였을 것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도록 만든다.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잘한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주님은 너무 바빠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돌아볼 시간이 없는 사람을 칭찬하시지 않는다. 비록 이 세상에서 경쟁력은 좀 떨어지더라도 삶의 의미를 찾고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동화돼 주님과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 고통받는 이웃과 죄악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너무 바빠서 주님과 함께 눈물 흘릴 시간조차 없지는 않은가. 내 이웃이 고통을 당하고 차별과 학대로 사람들이 죽어가도 눈물이 메말라버리지는 않은가.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져도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만큼 바쁘지는 말자.
사랑에 눈이 멀면
아프리카의 조그만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유학 온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고 어려웠지만 몇 년 지내면서 말도 익히고 사람들도 사귀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교회에서 장학금도 받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직원으로 있는 아름다운 한국 여성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산책을 같이 하고 쇼핑도 함께 했으며 고궁에도 함께 갔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구혼을 했습니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결국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피부색이 검은 사람과 결혼하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말리기도 했고, 현지로 돌아가면 말할 수 없는 고생이 있다고 충고도 했으며,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라고 만류했지만 결국 결혼하여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결혼한 이유는 다만 이 남자가 '가장 멋진 사나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물
다른 사람들은 새 옷을 좋아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새 옷을 입게 되면 이틀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리신다.
다른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는 즐겁게 노래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밥 한 그릇 받고도 눈물만 흘리신다.
"아버지! 왜 아버지는 별스럽게 구시나요?"
"너희 할아버지는 우리를 기르실 때에 옷 한 벌도 당신의 차례가 없어서 추운 겨울에도 때묻은 헌 겉옷에 백지 속을 넣은 백지 겉옷을 입으셨고, 그렇게 사시다가 그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나셨단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위해 피눈물 어린 축복을 하셨단다."
외로운자의 눈물
이슬비가 내리는 어느 봄날입니다. 한 늙은 노인이 어느 집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며 오들오들 떨고 서있었습니다. 마침 교회에 다녀오던 그집 가장이 방금 들은 설교말씀이 떠올라 그 노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따뜻하게 노인을 잘 대접하여 보낸 그는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다음날 또 이 노인을 만나게 된 그는 이번에도 노인을 극진히 대접해서 보냈습니다. 노인은 고마워서 어쩔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몇번 더 노인은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 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밖에서 뛰어 들어오며 너무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이것봐, 전에 왔던 할아버지가 주셨어." "그게 뭐니?" "맛난 과자야." 아빠는 즐거운 마음보다 언짢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그 할아버지가 주는 것은 받지 마라. 그 할아버지는 얻어먹는 할아버지야. 그게 얼마나 더러운 건지 아니?" 아들은 시무룩해 졌으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아빠는 골목길에서 과자를 아들에게 주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재빨리 뛰어가서 과자를 빼앗아 때묻은 노인의 손으로 돌려주며, "이래서는 안됩니다. 노인네. 자, 어서 받아가세요." 어리둥절하던 노인은 잠시후 더듬더듬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이 고마워서...아니, 아이가 너무 이뻐서..." 그래도 아빠가 막무가내로 말리자 노인은 슬픈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얼굴전체가 어두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아이의 아빠는 노인이 너무나도 쓸쓸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과자를 얼른 아이에게 주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할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기뻐하며 깡총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 아빠는 몇번이고 할아버지가 서있는 곳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광화문 지하도의 층계아래 매일같이 쭈구리고 앉아있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구걸하는 사람답지 않게 옷차림은 제법 깨끗하였습니다. 하나 구걸하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앞으로 벌리고 있는 손바닥 위에는 백 원짜리 동전이 한 개 외롭게 놓여있었습니다. 부산히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손바닥 위의 동전은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어느 여학생은 홀깃 할머니를 쳐다본 다음에 시선을 돌리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납니다. 한 넥타이 차림의 젊은이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동전 하나를 꺼내어 할머니 손에 얹어 놓습니다. 동전은 이제 한 개가 아닙니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수그립니다. 엄마의 손에 끌려 지나던 어린이가 물끄러미 할머니를 바라봅니다. 엄마는 급히 어린이 손을 잡아당깁니다.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똑같은 자리를 지킵니다. 언제 밥을 먹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끼니를 거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구걸을 하면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할까?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할머니 앞을 지나갑니다. 떠들석한 그 속에서 할머니는 홀로 앉아만 있습니다. 하루 얼마나 벌이가 될까? 그걸 또 할머니는 뭣에 쓸까? 혹은 어느 움막에선가 기다리고 있을 어린 손자를 위해 라면을 사갈까? 할머니의 얼굴에는 외로운 모습이 스칩니다. 그런 할머니가 어제도 오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병이라도 났을까? 부산하게 오가는 사람들은 할머니를 잊었습니다. 비정한 도시는 모든 감상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이나 고통, 외로움에도 무감각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워 질 수 있는 풍토가 이제는 아닙니다. 할머니가 앉았던 콘크리트바닥에 빗방울이 맺힙니다. 성경에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102:7), "참 과부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5-6)하였습니다.
미국 어느 도시에 한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대회의 목적은 남을 가장 잘 생각할 줄 아는 아이를 뽑는 일이었습니다. 심사위원이 뽑은 우승자는 일곱 살의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옆집에는 최근에 아내를 잃은 나이 많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이 우는 것을 보고 어린 소년은 노인이 사는 집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의 무릎에 앉아 있었습니다. 소년의 엄마가 나중에 아이에게 이웃집 노인께 무슨 위로의 말을 했느냐고 묻자 어린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할아버지가 우는 걸 도와 드렸어요."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예배에 잘 참석하고 전도에 열심이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에 열심인 것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것에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고아와 과부는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늘 고려하고 도와야 할 연약한 이웃의 대명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한 방식이 바로 고아와 과부 즉, 연약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필요를 채운다는 것은 꼭 물질적인 차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의 가장 큰 특징은 외로움입니다. 이런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별로 큰 힘이 되지는 않겠지만 함께 있어 드릴께요."라고 말하는 것이 그들의 필요를 가장 적절하게 채우는 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사역하실 때 얼마나 많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병을 고쳐주시거나 먹을 것을 제공하심으로써 보다 더 근본적인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고아나 과부와 같이 자연적으로 외롭게 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리와 창기 같이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소외당함으로 외롭게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콜로라도 주 덴버 시는 겨울이 되면 북극을 능가하는 시속 60km의 강풍이 불어대는 곳입니다. 그런 어느 겨울날 아침 한 24시간 편의점에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추위를 피해 들어온 어떤 노신사와 계산대 뒤에 있는 여자 직원이었습니다. 사실 얼음이 뒤덮이고 강풍이 부는 거리를 다니는 것이 이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 이른 아침에 노인이 사러 온 것은 싸구려 옥수수빵 하나와 바나나 하나였습니다. 노인은 오래된 동전 지갑을 꺼내어 동전 몇 개와 다 구겨진 지폐 한 장을 계산대 위로 떨어 뜨렸습니다. 계산이 끝나고 빵과 바나나가 비닐 봉지에 담기고 났을 때 이상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노인이 아무 말 없이 지친 손을 천천히 계산대 너머로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 직원이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벌려 노인의 손목에 걸어준 후에 크게 미소지으면서 계산대 너머로 몸을 숙여 노인의 두 손을 맞잡아서는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노인의 손을 자기 얼굴에 대고 따뜻하게 덥혀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슨씨, 건강 조심하셔야 해요. 난 내일도 당신이 여기에 꼭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란다구요." 노인은 바나나 한 개와 옥수수빵 하나를 사기 위해 그곳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따뜻해지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슴속까지.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시10:14)
아가다 자매의 눈물
아무리 작은 말이나 행동일지라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 우리는 "아가다" 자매를 그녀의 가게에서는 "미세스 정"이라고도 부른다.
남편이 경영하는 옷가게는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코너에 자리잡고 있어 평일에도 장사가 잘 되는 편이며, 주말에는 아가다 자매가 혼자서 계산대 일을 감당할 수 없어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안나"를 파트 타임으로 고용해야만 했다.
초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가게 안은 옷을 고르는 사람들로 붐비었고, 옷을 고른 고객들은 계산대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열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가게 정문 안쪽에 설치된 도난방지 검색기가 금속성의 경보음을 길게 울리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일시에 가게 문 쪽으로 쏠렸다. 경보음과 동시에 누군가 급하게 거리를 향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그 도망자의 뒤를 이어 경비원 "타미"가 도망자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도망자를 뒤쫓고 있었다.
도망자는 콜롬비아 대학 방향의 뉴욕 시내 "압 타운" 118가 코너에 있는 지하철 층계를 사력을 다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경비원 "타미"도 도망자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도망자는 층계를 거의 다 내려가던 중 발을 헛디디어 시멘트 바닥위로 나동그라지자 뒤따르던 경비원 "타미"의 억센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혔다.
도망자는 7학년(중학교 1학년) 정도 또래의 흑인아이였다. 경비원은 그 흑인아이가 혹시 흉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지, 그 아이의 몸수색을 한 다음 그 아이의 손에 쥐고 있던 청바지를 뺏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혁대를 후려 쥐고, 그를 가게로 데리고 갔다.
아가다 자매는 경비원 손에 끌려오는 흑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손아귀에 잡힌 한 마리의 참새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아이의 입술에서는 지하철 역 시멘트 바닥에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가다 자매는 그 아이를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의 상처 난 입술을 소독약으로 소독해주었다.
"얘야 ! 너 이름이 뭐냐 ? 집은 어디지?"
아가다 자매는 흑인아이에게 물었다. 흑인 아이는 대답대신 두려움에 젖은 커다란 두 눈동자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가다 자매는 경비원이 붙잡아 온 "샵 리프터"를 그때까지 많이 보아 왔지만, 이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아이는 처음이었다.
아가다 자매는 지금까지 경비원에 잡혔던 좀도둑 모두를 하나도 경찰에 인계하지 않고 용서하였던 것처럼 이 아이도 마음속으로 이미 용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다 자매는 그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얘야! 너 하나님을 믿니? 예수님께서 너를 용서하시는 것이니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에 몹시도 떨던 그를 놓아주었다. 그로부터 6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해를 거듭하며 아가다 자매의 가게는 만족할 만큼 번창해갔다.
어느 토요일 저녁 가게 문 닫는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 가게의 자동문이 열리며 말쑥하게 차려입은 잘 생긴 흑인 청년이 들어왔다. 그 청년은 옷이 진열돼있는 매장으로 가지 않고 아가다 자매가 앉아 있는 계산대로 다가왔다.
아가다 자매는 그 청년에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대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기억할 수 있느냐고, 아가다 자매에게 되물어왔다. 그녀는 그를 도저히 기억할 수 없었다. 아가다 자매가 자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자, 그 청년은 거제서야 자신을 소개하였다.
6년 전 청바지를 훔쳤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며, 자신의 병든 영혼을 고쳐주신 분이 바로 당신이라고..........
"얘야! 너 하나님을 믿니? 예수님께서 너를 용서하시는 것이니,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아가다 자매가 그에게 들려준 말을 아가다 자매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비로소 아가다 자매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눈이 큰 그 청년이 6년전 경비원 "타미"에 잡혀, 마치 가엾은 참새처럼 떨며 끌려왔던 흑인 아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였다.
"정말 반갑다. 지금은 뭘 하니?"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 나가니?"
"예일대학 법과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에요."
그러면서 그 청년은 손에 들고 온 예쁜 포장지에 싼 무엇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가다 자매는 펴 보아도 괜찮으냐고 그 청년에게 물었다. 그는 공손하게 "예스"라고 대답하였다.
그 선물은 눈물어린 예수님의 사진이었다. 다시 찾아오겠다며 돌아서는 그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아가다 자매는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녀는 아들이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누렸던 기쁨보다 결코 못지 않은 기쁨을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두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고였다.
그 이후 아가다 자매의 가게에는 그 청년의 마음이 담긴 "예수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지금도 그 청년은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감사의 카드를 아가다 자매에게 보내오고 있다.
눈물 섞인 빵 껍질을 씹을 때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물은 살아있는 인간 감정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물은 이율배반적입니다. 사람이 가장 슬픈 일을 당하거나 목격할 때 눈물을 흘리지만, 반면에 가장 기쁘고 감격적인 일을 성취하거나 목격할 때에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 사실은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즉 '가장 슬픈 일'은 '가장 기쁜 일'과 가장 깊은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눈물은 '없어야 할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장 슬픈 일을 당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슬픔을 정화시키는 눈물'이 될 것이며, 우리들이 그리움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상처받아 무거운 마음에 비상 탈출구를 열어주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연민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인격 성장을 촉진시키는 눈물'이 될 것이며, 우리들이 감격과 기쁨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받은 감격을 오래도록 지속시켜주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기쁨으로 영혼의 단을 수확하는 참으로 고귀한 눈물'이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마치 '길을 닦는 자'와 같습니다. 공장을 세우면 금방 제품이 생기지만 길을 닦으면 바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는 사실이 눈물 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을 닦는 사람이 많을수록 장래는 희망이 있습니다. 흔히 미국의 힘은 잘 닦인 고속도로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오래 전 선진들이 후손들을 위해 백년 이상을 사용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만들었으니 후손들이 그 혜택을 입는 것이 않겠습니까? 앞서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씨를 뿌리면 반드시 단을 거두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눈물이 메마른 인생이 되지 말고 또한 눈물을 부끄러워하는 영혼이 되지 마십시오! 당대의 가장 강자였던 성경의 '다윗'에게도 눈물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6장 6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이 밤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그 눈물이 홍수가 되어 침상을 띄울 정도까지 되었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왜 이토록 눈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그는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편 56편 8절에서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의로운 자의 눈물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눈물 병에 기록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다윗에게 눈물은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비웃거나 눈물에 냉소적인 메마른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눈물 섞인 빵 껍질을 씹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위선적인 껍질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눈높이 선택
결혼을 앞둔 어떤 남성이 「완벽한 배우자」를 찾기 위해 온 세상 을 여행했다.
그는 이런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고는 불행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세상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렇게 40년을 허비했으나 그런 여성과는 결혼하지 못했다.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의 나이 이제 70인데,그래 세상에 그런 여성이 없었나?』『사실 딱 한번 그런 여성을 만났었네.그런데 그녀는 「완벽한 남성」을 찾고 있었다 네.그래서 결혼이 이뤄지지 못했지』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
서양에서는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풍습이 있다.
이 때의 진주를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라고 부른다. 아마도 딸이 시집살이하다가 속상해할 때 조개가 살 속에 모래알이 박힌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잘 참고 견뎌내라는 뜻일 것이다.
진주는 조개 안에서 만들어진다. 어쩌다 조개의 몸 속에 들어온 모래알은 조갯살 속에 박혀 고통을 준다. 그때 조개는 ‘nacre(진주층)’이라는 생명의 즙을 짜내어 모래알 주변을 덮어 싸고 또 덮어 싼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흐르면 바로 진주가 되는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에도 이런저런 모래알이 들어올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시련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임할 때 ‘내가 지금 값진 진주를 품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자. 내가 당하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내가 품고 있는 진주도 더 크고 더 값지겠구나!’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오늘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내일이면 아름다운 진주로 바뀔 것이다.
마리아의 피눈물
중부 이탈리아 시비타치아의 한 성당에 안치된 석고 마리아상이 피눈물을 흘렸다 하여 신도들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한다. 현지 이탈리아 텔레비전이 가슴팍까지 흘러내린 그 피눈물을 찍어 전국에 방영함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이 피눈물의 기적이 알려지면 관광객이 몰려들고, 몰려오면 땅값이 치솟을 것을 노린 인근 주민의 장난일 것이라는 견해와, 감정결과 진짜 피라는 현지 신문 보도가 맞서는 가운데 바티칸에서는 조사단을 파견, 공식 견해는 미루고 있다.
유럽에는 이같은 미해결의 기적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얼굴이 어슴푸레하게 박혀있는 이탈리아 트리노 성당의 성포도 그것이다.
예수의 시신을 덮었던 폭 1m, 길이 4.3m의 아마포로서 지금까지 미량분석(미량분석), 탄소검사, 컴퓨터분해등 온갖 과학적 방법으로도 그 기적의 비밀을 가려내지 못하고 있다.
남부 프랑스 스페인 접경에 있는 루르드의 기적도 그렇다. 베르나데트라는 신앙심 깊은 소녀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더니 기적의 물을 솟게 한 것이 그 발단이다. 그후 그 물을 마시면 중병환자나 불구자가 낫는다 하여 지난 1세기동안 루르드의 기적을 찾는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바티칸에서도 그 성수의 효험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카렐도 믿음에 심취하면 육체의 생리기능과 밀접하게 맥락되어 치유효과를 유발한다고 그 가능성을 밝히기도 했다.
이같은 일련의 종교적 기적을 수집 분석한 영국의 콜린 윌슨은 이 기적들이 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스페인같은 반도지형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하고, 상대적으로 기후나 풍토가 악조건인 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기적을 믿고 기적에 의존하려는 신심이 강한 때문으로 해석했다. 그 때문인지 한반도에서도 마리아의 눈물유형의 기적이 적지않이 일어나고 있다.
신라 진흥왕 36년 경주 황룡사의 장육불상이 발뒤꿈치까지 눈물을 흘렸고 고구려 보장왕 5년에는 동명왕모상이 마치 마리아상처럼 사흘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렸다 했다. 고려 태조 9년에는 원주 산한사의 철불이 사흘동안 땀을 흘렸고. 경술년 일본의 강제병탄이 있던해 해인사 경내에 있는 사명당비가 눈물을 흘리고 울었고, 그후에도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바람에 민심을 두려워한 일본 경찰이 그 비석을 두들겨 깬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민심이나 원한이 사무쳤을때 기적에 의존하고 또 과학이 못다한 공백부분에 기적을 믿고싶은 인심이 이렇게 성상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것일게다.
눈물의 사도 이용도 목사
이용도 목사가 집회를 하러 간도로 갈 때였다.
이호빈 목사가 두만강 맞은편 도문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둘은 반갑게 만나서 용정행 열차에 다시 올라타고 이야기를 나누며 오다가, 창밖에 양 우리 같은 것들을 보고는 이용도 목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큰집은 중국인 지주가 사는 집이고, 작은 것들은 우리 형제가 사는 농막이오."
그 당시 만주에서는 우리 백성들이 중국인 대지주 밑에서 노동을 하며 지내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말을 듣고는 이용도 목사는 가슴이 메어져 용정에 도착될 때까지 내내 울면서 왔다.
그 날 저녁 첫 집회에서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하는 찬송을 시작으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농막지기로 고생하는 형제들을 생각하고 기차에서부터 우 는 눈물이 강단에까지 와서 찬송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용도 목사는 한평생 헐벗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을 향해 늘 아픈 마음을 안고 살았고, 그들 때문에 울고 그들 때문에 피를 쏟은 사람이었다.
어느 사형수의 눈물배인 성경쓰기
사형수가 국민일보 주최 제1회 성경옮겨쓰기 대회에 응모한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난 2일 지존파일당 등 18명과 함께 사형이 집행된 서울구치소 2616번 사형수 양진순(25). 그는 짧지만 파란 많았던 삶을 정리하듯 편지지 4백여장에 꼼꼼히 옮겨 쓴 성경내용과 편지 한통을 본사에 보내온 며칠 뒤 세상을 하직했다.
성경옮겨쓰기대회에 응모하기 위해 지난 9월중순부터 감방 찬바닥에 성경을 펼쳐놓은 양씨는 정성스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옮겨 써 내려갔다. 그가 매일 7-10장씩 쓴 편지지 사이사이에는 간간이 눈물을 흘린 자국이 배어있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양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사형집행이 그렇게 빨리 다가올 줄 몰랐다. 본사에 보낸 서신에서 『갇힌 자 됨을 참으로 감사한다』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써 이 무렵 비로소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한듯하다.
1개월만에 『집필』을 마친 양씨는 1백여장씩 복음서별로 원고를 묶어 교회사람들을 통해 응모했다. 그러나 12월 5일로 예정된 발표를 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
양씨는 89년 9월 친구들과 함께 가정집에 들어가 살인등 흉악범죄를 저지른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는 범죄와의 전쟁기간이어서 법정최고형을 피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그가 국민학교 때까지는 모범생이었으나 중학교 때 축구부에 들어간 뒤 친구들을 잘못 사귀어 빗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고교도 진학하지 못한 양씨는 나쁜 친구들 틈에 끼여 크고 작은 강.절도행각을 벌이다 살인에까지 이르게 됐다. 양씨는 그러나 수감된 뒤부터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회의와 함께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서울 어느 목사의 설교와 감화가 크게 작용했다. 목사는 정기적으로 양씨를 찾아가 말씀을 전하며 기도했고 양씨는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열심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변화는 91년 11월 19일 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회개와 삶에 대한 참깨달음이 일어나자 양씨는 교도소내에서 전도사로 불릴 정도로 복음전파에 열성을 올렸다.
불신자였던 가족들까지 모두 신앙안으로 불러들였다. 『사형될 때까지 진순이는 항상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며 『가족들이 면회갈 때마다 신앙을 가지라고 신신당부해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말했다.
비록 내 눈썹에 이끼가 끼더라도
죤 번연이 갇혀 있게 된 베드포드의 감옥은 괴로운 곳이었다.
불결하고 음침하고 습기가 있는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신앙의 날개를 굽히고 나가고
도 싶었다. 마음에 유혹도 많이 왔다. 그러나 번연은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결단을 했다.
“나는 작정을 하였다! 나의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도움이 되시니, 비록 내 눈썹에 이
끼가 끼더라도 나는 내 주님을 버리기보다는 이 감옥에 남아 있으리라!”
‘비록 내 눈썹에 이끼가 끼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죤 번연의 이 결단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죤 번연이 가난한 집에 태어
났지만 성경을 보면서 영어를 배우게 하셨고 “천로역정”이라는 위대한 신앙의 책을 내놓게 하셨던 것이다.
비록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주님만을 바라보리라는 결단이 요구된다.
죽음 앞둔 눈물의 결혼식
간암에 걸려 죽음울 앞둔 나이든 신랑과의 마지막 `작별 결혼식'... 지난달 21일 오후 이옥연(42.강남구 수서동)씨가 시한부 인생을 살던 남편 한용진(52.신미 운수 운전기사)와 동거 12년만에 정식 결혼식을 올린 동대문 구민회관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형부의 손을 잡고 입장하던 신부는 휑한 신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진통제를 맞고 슬픔을 억누르던 신랑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결혼식을 주선한 신랑의 회사 동료들도 "신한부 인생"의 친구 얼굴과 눈물로 범벅이 된 신부의 얼굴을 더이상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인채 흐느겼다.
"동정이 아닌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는데.." 이씨는 결혼식을 마친뒤 끝내 38시간만에 숨을 거둔 남편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첫 아내와 이혼한 뒤 무절제한 삶을 살던 한씨를 그녀가 만난 것은 83년 9월. 신미운수 근처에서 그녀가 운영하던 다방에서였다. 처음엔 모두들 이들의 만남을 비웃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악물었다. 한씨는 성실히 운전하기 시작했고 그녀도 식당과 파출부 일을 하며 살림을 도왔다.
"남들이 우습게 보던 사이니까 여건이 나아지면 하자"며 결혼식도 미루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한씨가 간암 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 6월말. 그녀는 "둘 사이에 자식도 없이 힘들게 살아왔는데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다니던 삼성의료원직원 식당에 휴가원을 내고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남편의 병세는 자꾸 나빠졌고 지난달 중순 담당의사로부터 "며칠 못살것 같다"는 최종진단을 받았다.
"남편이 평소 턱시도 입고 나비 넥타이 매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12년간 같은 회사에서 정을 쌓은 직장 동료들이 그녀의 넋두리를 듣곤 결혼식 준비를 맡겠다고 나섰다. 동료의 부인들은 음식을 준비했고, 신미운수 사장도 주례를 자청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도 한씨의 삶을 연장시킬 수는 없었다. 한씨는 결혼식이 끝난뒤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이튿날 그녀와 86세 노모를 남긴 채 숨을 거뒀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면 그이가 금방 들어올 것 같아요..." 남편이 편한 마음으로 저승에 가도록 앞으로 울지 않기로 했다던 그녀의 눈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들어 높은곳을 바라보자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한번은 시골교회를 방문했다.그 교회의 젊은 목사는 가정과 목회문제 때문에 큰 좌절감에 빠져있었다.웨슬리가 이 젊은 목사와 함께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마침 외양간에 소가 있어 바라보니 소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외양간 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웨슬리는 젊은 목사에게 “저 소가 어째서 고개를 들고 있는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웨슬리는 젊은 목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벽이 있기 때문이죠.사람도 앞에 벽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눈이 제일 위에 있는 것은 빨리 위로 눈을 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을 가져야 한다.믿는다는 것은 앞에 벽이 있다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 있기 때문에 위를 바라다볼 수 있는 것이다.성경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고 말씀하신다.
눈까지 바쳐 세우리다
박금출 씨의 「실화사전에 주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 자신의 음조가 바치려고 했던 아름다운 신앙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북 삼례 성결 교회 문형일 집사는 예배당을 짓다가 완공을 못 본 채 불신자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전을 채 완공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에게 욕을 받는 것을 마음 아파하던 어느 날 전주 예수 병원에서 사람의 눈을 사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문 집사님은 뛸 듯이 기뻐하며 자기 눈을 팔러 전주 예수 병원을 찾았습니다.
문 집사님의 사연을 들은 병원장은 교회건축을 위해 눈을 팔겠다는 말에 감동을 받아 집사님의 눈을 뽑지 않고, 오히려 병원에서 헌금을 해 주었고 교단에 알려서 미국 신문에까지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본 미국의 한 갑부가 헌금을 해서 문 집사님은 교회 건축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능성을 보는 눈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의사 에게서 이런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 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 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 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 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에 지 배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 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 들은 몇 번 노력하다 실패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조차도 기꺼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속지않는 눈
고대 그리스에 키소이테스와 파라시우스라는 두 화가가 있었다.사람들은 두 화가의 우열을 시험했다.
먼저 키소이테스가 포도 그림을 나무에 걸어 놓았다.
그러자 새가 날아와 그것을 쪼았다.
다음은 파라시우스가 엷은 커튼 그림을 창문에 걸고 키소이테스를 초청했다.
진짜 커튼으로 안 키소이테스가 걷으려고 손을 댔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속인 파라시우스가 새의 눈을 속인 키소이테스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눈물을 심으면 기쁨이 됩니다
“야구는 9회말 투 아웃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를 말리는 게임이 마지막 순간에 역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국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를 9회말 투 아웃에서 역전을 시켰습니다. 그것도 2번이나 말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역전을 허용한 투수가 바로 우리나라의 김병현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역전을 한 팀은 통쾌한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역전을 허용한 팀은 한 순간의 방심을 후회하면 한탄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운명 역전 드라마가 많이 나타납니다. 오늘 시편 126편에서도 우리는 운명 역전 드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죄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인 이스라엘이 사명을 망각하고 이방인들처럼 살아가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이라는 세월을 나라를 잃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그들은 고국의 소중함과 더불어 지난날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아온 부분을 되돌아보며 회개의 눈물을 흐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이러한 상황은 바로 조상과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알고 회개를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짓지도 않은 조상의 죄를 마치 자신들이 지은 죄처럼 알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본문의 시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상황을 역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을 아비가 자식을 대하듯이 징계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주전 537년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정직한 눈
성 구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4)
천사가 한 교회에 가서 어떤 성도를 만나되 천사의 모습은 보여주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세상에 왔습니다. 그 천사는 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천사가 찾아간 교회는 시기심으로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했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공동체는 심하게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예배실에 들어갔을 때는 예배가 막 끝난 후였는데 교인들이 실눈을 뜨고 있다가 천사를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천사다" 하며 소리치자 사람들은 천사에게 자신들을 드러내고자 열심히 말을 걸었습니다. 성도들은 천사를 대접하고, 식탁을 장식하고, 방송국에 연락해서 촬영기사를 불렀습니다. 천사는 그 자리가 혐오스러웠습니다. 천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천사를 오게 한 주인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맨 뒷자리에서 천사를 보고 미소만 짓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가 본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본래의 모습을 감춰 버리기 때문이지요. 진정으로 겸손하고 정직하다면 천사를 다시 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천사는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눈을 떴지만 천사를 기억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 천사가 내려온다면 당신은 그 천사를 알아보겠습니까?
눈물의 기도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이 기도로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재정부 부장이자 박사였던 한 장로님이 자꾸 목사님의 설교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너무 내용이 없다. 신학적으로 이상하다."
그런 식으로 계속 시비를 하니까 목사님이 견디다 못해서 그 교회를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다시 기도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목사님이 떠나자 그 교회에서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을 담임목사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오자마자 철학적, 신학적, 문학적, 역사적 하면서 흔히 말하는 '쩍쩍 설교'만을 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그 '쩍쩍 설교'를 듣고 예배가 끝난 후에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옛날 목사님은 무식했지만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멘' 소리가 나왔지만 새로 오신 목사님의 경우에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졸음만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그 목사님을 모셔온 재정 장로님이 또 시비를 했습니다.
"너무 쩍쩍 설교만 한다.
너무 은혜가 없다." 그런 식으로 계속 시비를 하니까 새로 오신 목사님도 견디다 못해서 그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이전 교회에서 당한 아픔을 새로운 개척의 원동력으로 삼고 교회를 새롭게 개척하였습니다. 교회를 새롭게 개척하게 되니까 이 목사님도 눈물의 기도를 많이 해야 했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동시에 균형 잡힌 설교를 은혜롭게 잘 준비해서 이 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소문을 내는 아름다운 교회로 부흥했다고 합니다.
기도는 은혜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는 능력의 줄입니다.
기도 없는 설교는 말은 될지언정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기도 없는 찬양은 노래는 될지언정 찬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교회 봉사는 나의 영혼을 메마르게 만들고, 기도 없는 충고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립니다. 제자의 삶은 눈물로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로 향하는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고단한 삶에서 승리하는 제자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기쁨의 미소도 있어야 하지만 눈물의 기도도 있어야 합니다.
어느 무뢰한의 눈물
궁궐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였어.
왕과 신하가 흥겨운 마음으로 잔치를 즐기고 있을 즈음,느닷없이그 안의 불이 모두 꺼져버렸지. 때는 깊은 밤이라 주위는 그대로 암흑이었고, 이때를 틈타 누군가가 왕이 가장 총애하는 애첩의 입을 맞춰 버렸어.
깜짝 놀란 애첩은 엉겁결에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뗐고, 곧이어 분한 목소리로 왕에게 고했어.
"폐하, 지금 어느 놈이 신첩에게 해괴망측한 짓을 하기에 그 놈의 갓끈을 잡아떼어 놓았나이다. 어서 그 놈을 잡아내 능지처참하소서."
그러자 이 말에 왕은 노발대발, 당장에라도 그 놈을 잡아죽일 듯이 노기등등했어. 그러나 다음 순간 왕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좀 이상한 것이었어.
"들으렷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갓끈을 떼지 않는 자가 있으면 용서치 않겠다!"
이러한 왕의 호령에 신하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모두 서둘러 갓끈을 떼어내는 것이었어.따라서, 이후 불을 다시 켜 주위는 밝아졌으나 모두가 다 갓끈을 떼어냈는지라 아까의 무례한 작자를 가려낼 방도가 없었지. 다시금 왕이 말했어.
"나의 애첩에게 입을 맞춘 무례한 놈은 살려둘 수 없다. 허나, 그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이번만은 없던 일로 하겠다. 그러니 그대들은 더 이상 그 일에 신경쓰지 말고 계속 잔치를 즐기라."
그리하여 풍악은 다시 울렸고, 왕과 신하는 또다시 흔쾌한 마음으로 그 밤이 새도록 흥겹게 놀았지.
그 후 몇 년이 지나 나라에 위급한 일이 닥쳤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웃의 강대국이 급기야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침범해온 것이야.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게 된 마당에 왕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웃나라의 대병을 막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어. 그때였지. 별안간 어떤 장수 하나가 날래디 날랜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비호처럼 나타나 적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던 것이야. 참으로 용맹하기 짝이 없는 장수와 군사들이었지. 그러자 적군은 마침내 패퇴하고야 말았어.
그때 왕의 감격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이럴 수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오? 장군은 도대체 누구요? 누구길래 나를 .......?"
그러자 그 장수는 왕 앞에 무릎을 꿇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
"폐하께서 저에게 베푼 은혜를 오늘에야 조금 갚았을 뿐입니다. 몇 년 전 궁에서 베푼 연회를 기억하시는지요? 제가 바로 그날 폐하의 애첩에게 불측한 짓을 저지른 무뢰한입니다. 하오나 폐하의 은혜를 입어 무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언제고 폐하께 목숨을 바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남 몰래 군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그 장수의 손을 잡는 임금의 손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어. 그때의 관용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줄 누가 알았겠어.
이렇듯 조그마한 관용 하나를 베풀면 그것이 태산보다 더한 보답으로 다가오는 것이야.
눈에 띄지 않는 꽃
어느 날 나이 지긋하고 지혜로운 스승이 젊고 열성적인 학생들을 모아놓고는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가로 가서 풀숲에 숨어 있는 작은 꽃을 찾아보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그러고는 여러 시간 동안 그 꽃에 대해 연구해 보라고 덧붙였다.
"확대경을 가지고 잎사귀에 나 있는 정교한 그물 무늬들을 살펴보고 또 꽃 색깔의 음영이라든지 조화에 대해 관찰해 보아라. 그리고 잎사귀를 천천히 돌리면서 그것이 좌우로 대칭되어 있는 모습을 살펴보아라.
그럴 때에 너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단다. 그것은 만일 너희들이 그 꽃들을 찾아내어 감상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그 누구의 관심과 찬사도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갔을 것이라는 사실이란다."
그 학습 학생들이 주어진 과제를 마치고 돌아오자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도 바로 그 눈에 띄지 않는 꽃들과 같은 것이란다. 사람들은 각기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지. 또 아주 정교하게 창조된 존재고, 하늘 아래에서 똑같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일무이한 존재란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이런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시간을 내어 각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단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해 주고 자신의 유일한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얻지 못한 채 잊혀진 상태로 사라져 가는 것이란다.
귀부인의 눈물과 마차부
월리엄 제인스라는 심리학자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러시아의 상류사회의 어떤 귀부인이 한 번은 어떤 극장에 오페라 구경을 갔다. 그런데 그오페라의 연극에 나오는 주인공이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보고 한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시간, 그 극장 밖에서는 그 귀부인의 마차부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수리의 눈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불일치한 것을 보는 데는 독수리의 눈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나태하고 비열한 행동 속에 있는 변덕이나 불일치를 발견하는 데는 독수리와 같이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독수리도 태양 빛을 반긴다. 당신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도록 하라.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일관된 경건한 생활을 보고 존경심을 가지며 끌리도록 하라.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찾아와서 상의하도록 하라.
두 가지가 그들의 눈에 특이해 보였다.
레바논의 한 선교사가 예수님 당시의 문화와 아주 비슷한 문화 속에 살면서 아직 한 번도 그 비유를 들어 본 적 없는 시골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읽어 준 뒤 반응을 물었다.
두 가지가 그들의 눈에 특이해 보였다.
첫째, 서둘러 유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곧 아버지한테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가장이 이런 모욕을 참거나 아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둘째, 잃은 지 오랜 아들을 맞으러 아버지가 달려갔다는 대목이다.
중동에서는 권위있는 남자는 품위 있게 천천히 걷지 결코 뛰는 법이 없다.
예수님의 비유 속의 아버지는 달려간다.
예수님의 청중도 분명 이 대목에 가슴이 찡했을 것이다
교황의 눈물
소리없이 흘러내려 입 가장자리로 스며들면 약간 시클하고 짭짤한 투명한 액체, 그것이 눈물이다. 리처드슨의 대하소설 <파멜라>에서 동명의 슬픈 여주인공이 자신의 흐르는 눈물 맛으로 그것이 시큼하면 사랑의 눈물이요, 짭짤하면 슬픔의 눈물로 분간한다는 독백 장면이 나온다. 정서의 변화에 따라 눈물의 화학 구조가 달라진다면 정말 눈물은 멋장이다.
깜박일 때마다 조금씩 분비되어 안구를 적시고 먼지를 씻어내라는 것이 조물주가 눈물에게 내려준 역할이다. 가느다란 누선(淚腺)은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하루 1~1.2그램의 눈물을 자아내기에도 벅찬데 왜 슬플 때는 그토록 걷잡을 수 없이 많은 분량의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우리 옛 어른들이 말하듯이 눈 아래 눈물보가 있는데 조물주가 이 눈물보를 막는 둑을 쌓을 때 마침 어머니가 죽어 울며불며 엉성하게 쌓았기에 잘 터져 흐른다는 편이 실감난다.
젊었을 때 극장에 가 앉아 있으면 곁에나 뒤에서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어 하는
부녀자를 곧잘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세상 살기 각박하여 구
두창이 구멍 나고 부러진 안경테를 실로 걸어 매고도 경련이 나도록 세상 살 맛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불 꺼진 항구의 고동 소리며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운운한 유행가 가락에도 신세를 투영시키면 눈물보 둑이 터질락말락 했던 것이다. 한데 요즘은 오랜 가뭄 끝에 눈물보가 말라 바닥이 거북 등처럼 갈라졌는지 눈물을 볼 수 없다. 드라마에서도 돼지 깔대청처럼 소리로만 운다. 동조를 요구하는 울음인 것 같은데 보는 사람은 오히려 웃는 그런 이상한 울음밖에 울지 못한다. 옛날 아이들은 꾸짖으면 잘못을 뉘우치고 우는 체라도 했다. 옛날 여인들은 울음으로 가장 강력하게 자신을 대변했었다. 한데 쌍꺼풀 수술을 할 때 눈물보를 밀어버린 걸까. 고향 나라인 폴란드를 떠나온 교황(敎皇)이 손등으로 눈물을 막고 울었다. 눈물 가뭄이라선지 그 교황의 눈물이 별나게 인상적이다. 압박받고 있는 고향 사람들
에의 연민의 눈물인지, 그보다 심오한 신앙적인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행여 순 수한 인간 본연에서 울 수 없게 된 각박한 현실, 그 현실을 슬퍼하는 신(神)의 울음을 대행해서 흘린 눈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눈높이 선택
결혼을 앞둔 어떤 남성이 "완벽한 배우자"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여행했다.그는 이런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고는 불행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세상 구석구석을 살폈다.이렇게 40년을 허비했으나 그런 여성과는 결혼하지 못했다.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자네의 나이 이제 70인데,그래 세상에 그런 여성이 없었나?""사실 딱 한번 그런 여성을 만났었네. 그런데 그녀는 "완벽한 남성"을 찾고 있었다네. 그래서 결혼이 이뤄지지 못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