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여러가지 이야기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입장

구원의 계획 2015. 11. 27. 18:06

[유해석 칼럼]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입장

 

 

지난 4월 2일 이른 새벽에 케냐의 동부 가리사대학교(Garissa University College) 캠퍼스에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알샤바브(al-shabab) 대원들이 무장으로 난입하여 폭발물을 터트리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현재까지 148명이 사망하였다.

미국 CNN 방송에 의하면 이들은 기독교 학생들이 모인 방을 급습하여 살해하였으며,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알샤바브 조직원들이 각 방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인지 무슬림인지’를 물었고, 기독교인이면 살해했다”는 목격자의 말을 전했다. 이 목격자는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현장에서 총을 맞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2월 15일 수니파 원리주의 단체인 IS(이슬람국가)는 21명의 콥트 기독교인들을 리비아의 지중해변에서 살해하는 동영상을 공개하였다. ‘십자가의 국가에 보내는, 피로 새긴 메시지’라는 제목의 동영상에는, 주황색 죄수복을 입은 남성들이 손을 뒤로 묶인 채 해변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는 모습이 담겼다. 이후 바닷물이 피로 물드는 장면과 함께, 이들이 참수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오늘날 기독교인에 대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잔학한 행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이웃의 이슬람 국가들과 이슬람 정권 아래에서 불안과 신음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꾸란에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시리아의 교회가 변하여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FIM국제선교회 제공

 

1. 꾸란이란 무엇인가?

꾸란은 이슬람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경전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을 이슬람의 신(神)인 알라(Alla)가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계시라고 믿는다.

 

꾸란은 총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모든 장은 ‘자비롭고 자애하신 알라의 이름으로’(Bismilla-hirrahmani-rahim)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9장만은 이 내용으로 시작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9장에는 알라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최후의 경고가 담겨 있고, 그들에게는 알라의 자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꾸란에는 그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아랍어가 사용되었다. 이슬람에서는 반드시 아랍어로만 기록된 것을 꾸란이라고 한다. 아랍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꾸란은, 아무리 완벽하게 번역됐다고 해도 아랍어가 아니기 때문에 ‘꾸란’이 아닌 ‘꾸란 해설서’라고 한다. 따라서 무슬림은 “꾸란은 지난 1400년 동안 변형되지 않고, 계시 상태로 완벽한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꾸란에 나타난 기독교인에 대한 변화

꾸란에서 나타나는 ‘메카 계시’와 ‘메디나 계시’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메카에서는 무함마드가 포교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을 이슬람으로 초청하였다. 예를 들어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꾸란 2:256), 즉 종교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 등이다. 그는 수도사처럼 행동했고, 기도와 금식, 예배의 삶을 살았다. 메카에서는 우상숭배자들과 논쟁하면서 싸웠다. 그런데 메디나로 오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나클라 전투에서부터 칼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종교에 강요가 없다던 “평화의 계시”는, 그 후 점차 “칼의 계시”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칼을 들고 개종하도록 설득하였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군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직접 지휘하면서, 유대인·기독교인들과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메카에서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과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꾸란 29:46)했다. 그러나 메디나에 오면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바뀐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메신저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항복하여 지즈야(비무슬림 성인 남자들에게 부과된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지하드를 하라 그들이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끼리라”(꾸란 9:29),

 

여기에서 ‘성서의 백성’이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말한다. 메디나에 와서 더 이상 기독교인을 옹호하는 정책을 쓰지 않게 되었다. 계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소동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종교가 알라에게로 귀의할 때까지 그들과 싸움을 계속하라”(꾸란 8:39)

 

꾸란에 같은 내용에 대하여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을 때는, 그 계시는 언제 받았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받은 계시에 의하여 먼저 받은 계시가 취소된다”는 교리가 있다. 이는 이슬람의 ‘나시크(Naskh) 교리’이다. 상황이 변함에 따라서 새로운 계시가 이전의 계시를 변경하고 폐지한다(꾸란 17:86). 이것은 “성경의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진리”라는 기독교적 관점과 완전히 대립된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진리인 이유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원으로 바뀐 비잔틴 교회. ⓒFIM국제선교회 제공

 

3.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꾸란의 견해

꾸란에 “성서의 백성”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의미하는데, 이 명칭은 54번 정도 나타난다. 또한 ‘복음서의 백성’이란 특별한 명칭이 단 한 번 나온다(꾸란 5:47).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안 나싸라(an-Na,sara)이다. 이는 꾸란에 14번 사용되었으며, 7세기의 기독교인을 말한다.

 

꾸란에 나타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이중적이다. 먼저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무슬림들은 유대인과 다신교인을 만날 때보다, 기독교인을 만날 때 더 우호적인 대접을 받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인 중에 오만하지 않은 성직자와 수도사가 많기 때문이다(꾸란 5:82). 반면에 꾸란 5장 51절에 따르면, 무슬림들은 기독교인을 친구나 보호자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따르라고 권유할 것이기 때문이다(꾸란 2:120).

 

더 나아가 꾸란은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공격한다. 삼위일체를 말해서는 안 된다(꾸란 4:171)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을 셋 중에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불경하며(꾸란 5:73), 그것은 다신교의 오류에 빠지는 일이다(꾸란 5:77). 꾸란은 ‘예수가 메시아이며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인 것’을 인정하면서도(꾸란 3:45-49), 성육신을 부인하고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꾸란 3:59, 5:116-117). 또 예수의 승천을 받아들이지만(꾸란 5:117, 4:157-159),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고 선언한다(꾸란 4:157-159).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꾸란은 기독교와 대비하여 자신을 정의하고 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기독교인들을 신앙의 공동체에서 배제하였다. 시리아에 있는 비잔틴 기독교의 전초기지에 군대를 보내겠다는 그의 군사적 결단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 불행한 대결의 시작이었다. 무함마드는 그것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계시로 결정지었다.

 

첫째,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인이 안 된 것을 알라에게 감사한다. 꾸란 첫 장(al-fatihah, 개경장)은 전 세계 무슬림들이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할 때마다 아랍어로 배워서 암송하는 장이다. 모든 무슬림들이 기도할 때 꾸란의 첫 장을 기독교의 주기도문처럼 암송한다. 마지막 구절은 “그 길은 당신께서 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지 않는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입니다”(꾸란 1:7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노여움을 받은 자’는 유대인을 말하며, ‘방황하는 자’들은 기독교인이라고 꾸란에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무슬림들은 예배 때마다 ‘기독교인이 걷지 않는 올바른 길’을 걷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둘째, 꾸란에서는 기독교인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있다(꾸란 9:29).

 

셋째, 꾸란은 무슬림들이 최고의 피조물이며, 기독교인들을 대부분 사악한 자들이라고 말한다(꾸란 3:110).  

 

넷째, 꾸란에서는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과 함께 지옥에 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에는 7개의 지옥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대인은 5번째, 기독교인은 6번째인 하비야(Haviya)에 간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슬람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에 대하여 기독교적 시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이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슬람에 대하여 면밀하게 연구한 끝에, 요한복음 8장 44절을 인용하면서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무함마드는 거짓 영에 사로잡혔고, 사탄은 꾸란을 통해서 영혼을 죽이고 기독교 신앙을 혼란시켰다. 나아가 인간을 죽이기 위하여 칼을 잡았다. 이슬람은 설교와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칼과 살육에 의해 발전했다.

 

결국 이슬람은 사해와 같다. 이는 자신의 품에 모든 종교를 받아들여 사해를 형성하며 자신의 형태와 틀을 만들지만, 사해에서 나오는 더운 수증기는 주변의 많은 생물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이슬람은 많은 땅을 무고한 피로 물들여 가고 있으며, 이슬람이 성장하는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의 무자비한 횡포에 신음을 토하고 있다.”

 

유해석 선교사
FIM국제선교회 대표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