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일천 번제가 기원제(祈願祭)라고요
1. 도입
작금의 한국 기독교회 현장에서는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드린 일 천 번제를 기복제(祈福祭)나 기원제(祈願祭)로 해석해 적용하는 일이 일반화 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적지 않은 교회들 가운데 목회자를 비롯한 전 교인들이 일 천 번제를 드리는 행위를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앞 다퉈 시행하고 있음을 봅니다. 마치 교회적 전통으로 자리매김 된 듯 말입니다. 심지어 교인들 중에는 일 천 번제를 몇 회에 걸쳐서 반복해 드리고 있는 교인들도 있는데 이런 교인들의 믿음은 가장 모범적인 신앙사례로 꼽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도 얼마 전까지 850여회에 걸쳐서 매주 빠짐없이 일 만원씩을 꼬박꼬박 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계속해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의 심정 속에는 한결 같이 확신에 찬 마음의 소원을 갖고 있는 것이 일반입니다. 곧 그토록 말씀에 근거해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있으니 일 천 회가 다 마치는 날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베풀어 주셨던 크나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자신에게도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기대감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복적인 종교행위는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의 동기와 배경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결과를 중시한 데서 비롯된 왜곡된 해석과 편의적 적용의 경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왕상3:2-15과 대하1:2-6의 본문을 통해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일천 번제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전개
일 천 번제의 동기와 배경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이 드린 일 천 번제의 동기를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기 위함’에 근거하고 있음을 기술합니다(왕상3:3). 동일한 번제사건을 역대서 기자는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함께 하시는 결과로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케 되며 그 나라를 심히 창대케 하신 결과’라고 기술합니다(대하1:1-6).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솔로몬이 드린 일 천 번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드린 목적적 제사로서 기복제나 기원제가 아닌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해 주셨으며, 이제 솔로몬을 다윗의 뒤를 이은 왕위의 계승자로 삼아 주셔서 더욱 견고하게 신정적 통치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섭리적으로 간섭해 주신 사실을 기리기 위해 드린 감사와 헌신과 결의의 성격을 띤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솔로몬의 경외심과 사랑하는 마음은 각별했습니다. 그가 드린 일 천 번제를 통해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때 소요된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러 날이 지났을 줄 압니다. 어쨌든 일 천 번제에 담긴 솔로몬의 심정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최고조로 표현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서 경외하는 자들만이 그 분의 계명에 전적으로 자원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름지기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감심(感心)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덧입은 자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14:15, 21, 요일5:3, 요이6절, 약2:17).
확실히 솔로몬의 탁월함은 그가 역사상 유래 없는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전무후무한 왕적 삶을 살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 일천 번제 사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가 여호와를 전심으로 경외하며 사랑하는 바, 다윗의 법도를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겁게 순종하였다는 데서 찾아집니다(전12:13). 그렇습니다. 예배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경외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입니다. 예배의 본질로서의 정체성을 ‘신령과 진정’이란 단어로 제한해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요4:24).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의 은혜를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무상으로 덧입은 데서 나와지는 감심의 마음이 동기유발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참 된 예배를 결코 드릴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아벨과 가인의 차별화된 예배를 통해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예증(例證)됩니다. 이런 사실은 예배를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나머지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적 축제정도로 생각하는 현대교인들에게는 일대 경종을 울리는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결코 인간의 종교심을 부추기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이용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자와 구원자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서 표출되는 전인적인 신앙행위로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기는 데서 나와지는 바, 자의적 숭배로 인한 우상 숭배적 신앙관에 불과할 뿐입니다(롬1:21-23).
일천 마리의 희생제물로서의 번제
흔히 솔로몬의 일 천 번제를 얘기 할 때, 일 천 번의 제사에 초점을 맞춰서 ‘횟수’에 강조점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 번의 제사(헌금)를 드렸느냐의 여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일 천 번의 제사(헌금)행위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향한 지성감천(至誠感天)주의적 열심있는 신앙심을 유발시킴으로 보상심리에 입각한 크나큰 기대감을 갖게 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기사를 싣고 있는 역대기서를 보면 일 천 번제가 천 번의 ‘횟수’가 아닌 천 마리의 ‘희생제물’을 드린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대하1:6입니다.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 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본문을 참고해 보면 왕상3:4에 언급된 ‘일천 번제’는 다름 아닌 ‘일천 마리의 희생제물’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심정으로 일천 마리의 짐승을 잡아 번제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일천 마리의 짐승을 일천 번에 걸쳐서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천 마리의 제물을 드린 것은 확인되나 일천 번의 제사 횟수는 불확실합니다. 사실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횟수와 제물의 양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본질로서 그 제사와 제물에 담긴 예배자의 계시 의존적 심정입니다. 제아무리 많은 제물을 자주 드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이 담겨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와 제물을 열납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 받지 않으십니다.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고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히11:4).
구속사의 본질을 깨닫는 데서 나와진 일천 번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마지막 일천 마리째의 희생제물을 번제로 드린 날 밤에 비몽사몽간에 여호와의 계시를 접하게 됩니다. 지금 솔로몬에게 주어진 계시는 꿈을 통해 일어난 계시입니다. 즉 솔로몬은 일종의 환상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눴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꿈은 단순한 일상적인 꿈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의식을 가지고 분명하게 간구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간구를 현실적으로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보여준 여호와를 향한 진실한 경외심은 그가 하나님께 어떤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아뢰기도 전에, 하나님 편에서 먼저 그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자 물으셨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런 식으로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극진한 경외심의 표현이었으며 증표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얻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솔로몬이 보여준 응답 역시 ‘주의 마음에 맞는 것’으로 나타났던 사실을 통하여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됩니다(왕상3:10).
‘주의 마음에 맞는 것’으로 나타난 솔로몬의 간구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땅에 수립해야 할 하나님 나라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가운데 모세언약을 통해 그 신정적 기반을 수립하셨고, 드디어 이제 다윗을 통하여 그 역사적 측면에서의 궁극적인 완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계속적인 유지와 발전이라고 하는 중차대한 신적 사명이 솔로몬에게 맡겨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입장에서 보건대 큰 영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또한 큰 책임과 의무가 요구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통치역량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가 결정적으로 좌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마음에 맞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솔로몬의 간구는 바로 이런 식으로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이란 사실과 밀접히 관련된 것입니다.
한편 이런 사실은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절)라고 요청하고 있는 데서 신정적 통치의 정체성이 잘 드러납니다. 지금 솔로몬은 자신에 의해 통치되는 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신정왕국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누구보다 분명히 인식하는 가운데 통치의 방편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솔로몬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남은 구속사를 운반하는 자들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기도가 총체적인 관점에서 어떤 성격을 띠고 나타나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시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마6:33).
3. 결론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일천 번제는 일 천 번의 횟수에 의한 제사가 아닙니다. 일천 마리의 희생 제물로 드린 제사입니다(대하1:6). 때문에 제사의 횟수와 기간은 얼마나 소요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은 그렇게 중요한 사항도 아닙니다. 사실 제물의 양 또한 많고 적음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심을 좌우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사1:11-14, 암5:21-24).
아울러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기복제나 기원제의 성격을 띤 목적적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으며 다윗의 법도를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자원해 지켜 행하는 데서 나와진 계시의존적인 신앙심의 발로였습니다. 곧 감사와 헌신의 성격을 지닌 제사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 사실 속에서 일천 번제의 성격과 본의가 밝히 드러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질문에 솔로몬이 단지 ‘지혜로운 마음’(왕상3:9)을 구했다는 사실과 이런 요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왕상3:10)는 사실을 통해서도 일천 번제의 제사성격이 단순히 일신상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복제나 기원제가 아닌 사실이 명확히 확인됩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의 성격은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신정적 나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적으로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는 데서 나와진 하나님 뜻에 부합된 제사행위 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그의 간구 또한 신정왕국으로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치수단인 ‘지혜’를 구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을 고려하건대, 작금의 일부 한국교회 현장에 만연돼 있는 기복제로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야말로 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 적용의 극한 전형(典型)이요 예시(例示)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율법에 명시된 제사제도에는 기복제나 기원제는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2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복의 본의 또한 순종을 담보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언약백성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인 사실을 고려하건대, 가나안 땅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신령한 천상적 복의 내용을 표상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모형과 실체라는 점진적 계시의 원리를 통해 이런 사실이 확증됩니다.
이제 말씀의 본의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밝히 해명하는 일에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마음을 집중해야 할 시기입니다. 소위 목회성공을 위해 기복주의를 부추김으로 성도를 백치화(白痴化)시키며 경건을 세속적 이익의 재료로 삼는 얀네와 얌브레 같은 패역한 행위는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총체적인 영적 암매와 무지몽매(蒙昧)로부터 온전히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본 글의 일부 내용은 장수민 목사의 열왕기서 강해와 호크마 열왕기서 주석을 참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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