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자료/메아리

성경 어디에 직분을 돈주고 사라는 곳이 있는가

구원의 계획 2010. 11. 13. 20:24

성경 어디에 직분을 돈주고 사라는 곳이 있는가?

멈출 수 없는 개혁(로마서 1 : 16 ~ 17)  하원식 목사

  

10월 마지막 주일은 개신 교회에서 지키는 종교개혁 기념 주일이다. 종교개혁주일이란 지금으로부터 493년 전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타락과 부패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통과 관습으로 일관된 카톨릭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신앙개혁 운동을 일으킨 날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이 날을 기념하고 새로운 신앙 부흥과 회개와 각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에서는 성탄절과 부활절 다음으로 매우 뜻깊고 중요한 날이다. 1천여 년 동안 걸쳐 내려온 중세 암흑시대가 막을 내리고 부패한 천주교의 무지한 교권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된 신앙의 사람들이 복음의 광명을 되찾고 자유를 회복한 날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저 유명한 면죄부사건이다. 면죄부 사건이란 카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10세가 자기 당대의 사업으로서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할 계획을 세우고 당시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그 모금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면죄부이다.

 

 알베르트(1490-1545) 라는 사람은 당시 이 면죄부의 판매를 청부 맡아서 그 이익금을 교황과 반분하기로 하고 유명한 웅변가 테첼(Tetzel, Johann. 1450-1519)을 고용하여 그에게 신학박사의 학위를 주고 가는 곳마다 면죄부에 대하여 설교 아닌 웅변을 하게 하였고 이 유창한 웅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웅변에 속아서 너도나도 거금을 들여서 면죄부를 사게 하였다.

 

"독일 사람들아! 똑똑히 보아라 나는 교황의 사신이다. 즐거워라 나는 여기 당신들을 위하여 10,900매나 되는 많은 속죄 표를 가지고 왔다. 부모님이나, 자식들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친척이나 친구를 위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줄 수도 있다. 당신들이 이 속죄 표를 사고 그 돈이 궤짝 속에 들어가 딸랑하는 소리가 날 때 바로 그 순간 불쌍한 영혼은 연옥에서 해방이 되어 천당으로 훨훨 올라갑니다"

 

 알브레트와 테첼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할 때에 그의 일행이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왔을 때의 일이다. 이 기막힌 사기꾼들의 쇼를 목격한 루터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를 많은 돈을 들여서 사기만 하면 지옥에 간 사람도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거짓말 설교를 듣고 모두가 줄을 서서 면죄부를 샀다.

 

 이와 같은 악행을 목도한 루터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관행을 95가지나 적어서 벽에 붙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와 같은 루터는 인간의 의지나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외쳤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 고 외쳤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①오직 믿음(Sola Fide) ②오직 성경(Sola Scriptura) ③오직 은혜(Sola Gratia) ④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Deo Gloria)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하나는 문예부흥(Renaissance)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 개혁(Reformation)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문예부흥은 인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며 종교개혁은 신본주의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중세 교회가 인본주의로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신본주의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종교개혁 운동은 본질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달려갔던 교회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꿈꾸고 있다. 내과 의사들이 쓴 수필을 오래 전에 읽었다. 내과 의사들이 제일 괴로운 시간이 언제인가 하면 환자를 다 진찰하고 나서 그 환자의 병이 깊었어요. 이제 진실을 말한다. "의학적으로 당신은 6개월 밖에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며칠밖에 살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형선고 같은 진단을 내릴 때에 괴롭다는 것이다.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이기 때문에, 또 이 의사의 무능함을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괴롭다는 것이다. 더 괴로운 것은 이 분이 이 병을 가진 것은 대체로 보아서 3년 전에 있었던 어떤 큰 충격 때문에 생긴 것이다. 3년 전부터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기는 오늘 안 것이다. 이 환자가 진작 3년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좀 더 다른 의미로 3년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 3년을 얼마나 뜻 있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던가. 이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럭저럭 흐지부지 이렇게 잘 못 살았다는 말이다. 그 마지막 3년을 잘 못산 것에 대해서 그것이 너무나 괴롭더라 하는 이야기다.

 

 오늘의 교회가 시급한 것은 이래선 안 된다. 달라져야 한다.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겉보기엔 그럴 듯 해도 실상은 안일함과 물질지향과 세속주의에 급속히 빠져들어 교회로서의 구실을 못하는 무기력함에 빠져있다. 지금 우리는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이 개혁되어져야 하는가? 우리의 믿음이 개혁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혁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 개혁되어져야 한다. 이 3가지가 우리에게서 개혁되지 않은 한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개혁이란 말은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개혁은 새로운 갱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혁은 기존의 있던 것을 다시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 말씀. 은혜 날마다 새롭게 개혁되어져 가고 있는가?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 앞에 그 자신이 새롭게 변화되어서 개혁을 외쳤다. 첫째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만(17절) 본문은 합 2:4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복음과 의와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잘 설명하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고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입니까 아니면 그의 선한 행위에 의해서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가 아는 정답은 물론 [믿음에 의해서]라는 답이다 그런데 재차 물어오기를 “그렇다면 그 사람의 선한 행실은 구원받는 데에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뜻이냐”라고 추궁하기 시작하면 이내 답변이 궁색해지고 만다. 복음 = 복된 소식인데.. 그 복된 소식은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복음에 하나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의 = 의롭게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 즉 복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해준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의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롬 3:26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의"가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고 이 믿음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믿음을 떠난 교황과 카톨릭을 따르는 성직자들의 더러운 행위에 참을 수 없어서 외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 시대에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가슴 아파 하면서 루터의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자. 먼저 루터 시대에 교황은 성직을 매매하는 자이며 온갖 파렴치한 죄악을 저지른 자였다.

 

 오늘날도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곳이 있다. 목사 안수를 돈으로 주고 사는 곳이 있다.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 권사, 안수집사, 돈으로 직분을 사는 꼴이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땅에 새롭게 개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개혁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잊어버린 우리의 신앙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 직분을 돈주고 사라는 곳이 있는가? 그런 믿음 없는 자들이 교회 직분을 맡으니까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루터 때는 어떠했는가 ? 1520년 루터가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의 타락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황제가 일층 왕관을 쓰는데 교황은 삼층 왕관을 쓰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추기경들도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도적놈처럼 돈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교황청은 성직매매, 술 주정, 사기, 도적질, 강도질, 사치, 매춘행위, 협잡질. 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가득 차 있다.

 

 이 시대도 목사 입에서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떠들고 있다. 교회들 다니는 사람들이 더 악한 짓을 하고 있다. 중세시대 때에 저들이 못된 짓 한 것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왜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헛소리를 하고 불신자들보다 더 악한 짓을 하는가 ?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개혁하는 삶을 살수 밖에 없다.

 

 금번 감리교는 감독회장 선거에서 서로 사회법에다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옳다고 해 달라는 소송을 했다가 결국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안 되어서 지휘부가 없는 공백 상태로 돌아왔다. 옛날 교회에서 사건이 있어서 그 사건을 사회법으로 가지고 가면 그일을 한 사람들은 책벌했다. 한국교회는 다는 아니나 돈을 제일로 하여 돈을 위해 예배하고, 결국은 돈을 숭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처럼 도시교회들이 돈을 제일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숭배하고 황금의 송아지를 경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국에서는 예수가 복덕 방망이가 되었는가? 그렇게도 많은 생명을 살리고 세계를 변화시킨 분이 한국에서는 복덕 방망이로 둔갑하여, 지금 한국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백성들도 복 받기 위해 교회에 나아오고 그 백성들을 위해 목사들도 축복설교와 축복기도를 저들의 주업으로 삼으니 기독교가 한국을 구원하고 개조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만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절에 시주하여 결국 절들만을 부하게 하고 강성하게 한 백성이 이제 동일한 시행을 교회에 대해 계속한다.

 

 금번 젊은 아이들이 봉은사에 가서 “땅 밟기 기도가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소위 '영적 전쟁'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타났던 부분이다. 악을 소멸시키는 '영적 전쟁'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신앙적 열정은 귀중하다. 그러나 그 열정이 잘못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의 생명을 상실하는 위험한 무기가 된다. 이 지구상에 한국만큼 위험한 지역이 또 있는가? 그래도 교회는 언제까지 황금 송아지 앞에 술 취한 춤만을 출 것인가?

 

 우리 한국 교회는 이제 교회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여 생명을 구원하고 이 사회를 개조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2. 구원은 오직 성경만으로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복음은 곧 생명의 말씀이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말씀 그 자체이시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오직 말씀 ==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성경을 당시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높였고 그래서 로마 교황청의 결정은 곧 성경이었고 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카톨릭 주장을 개혁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 시대도 저 중세시대 카톨릭처럼 성경보다 더 위에 있는 것들이 우리 교회들 안에 우리 신앙 안에 알게 모르게 많이 있다는 것 알고 있는가?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성경을 깔아뭉개고 있다. 루터는 많은 성경 강해를 하였고 특히 루터의 "소 요리 문답"은 평신도 성경으로 불리 울 정도였다. 루터는 교황을 "모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적 그리스도다"라고 낙인찍었다. 오직 성경은 우리 기독교의 최상의 힘이고 능력의 원천이다. 어떤 교리도 성경 위에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논리도 성경을 앞설 수는 없다. 시대를 각성시킨 사람들은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최우선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들의 설교를 분석해 보았는데 복음 적인 설교가 30% 윤리적인 도덕적인 설교가 70% 였다 고 한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많은 교회들이 진정한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 낙스 = "성경만이 설교에 대한 주된 원인이 되어야 한다" 고전 1:21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세상 지식이나 윤리나 도덕으로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전2:1]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듣기 좋은 말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유창한 언어 구변으로 성도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하나님 말씀이 온전히 역사 할 때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 강단이 세상과 타협해 버린 설교가 되고 있다. 성도들 눈치만 살피면서 하는 설교가 되어 버렸다. 윤리, 도덕, 교훈, 철학, 기복 적인 신비적인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다른 것을 좇아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대로 전하지 못하고 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가슴을 쳐야 한다.

 

 오직 성경. 오직 말씀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서는 곳에서 서며,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한다}는 신학 원리 아래 [성경만]이 신학의 시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대형 교회 화라는 첩경은 교회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이다. 외상으로라도 잘 지어 놓으면 사람들은 큰 교회에 모이기 마련이니 은행돈을 빚내서라도 기어이 교회당을 수 십억에서 수백 억에 이르게 짓는다. 그러면 어디서인지 사람들은 가득 모여와서 자리를 메우고 또 큰 교회에 속했다는 긍지 때문에 큰 헌금과 건축헌금을 종종 한다.

 

 미국의 크리스탈 처치가 최근 남 캘리포니아 법원에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슐러 목사의 딸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세일라 슐러 콜밴 목사는 파산 보호 신청에도 불구하고 교회 사역은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정교회의 화려한 명성은 이제 희미한 옛 그림자가 되고 있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결국 아무리 유명한 대형 교회라도 쇠락할 때가 있다. 왕조사가 왕조의 흥망성쇠를 다룬 것이라면 교회사는 교회의 번성과 퇴조에 대한 기록이다. 이 땅에서 끝까지 영화를 누린 절대 교회는 없다는 사실을 교회사는 증언하고 있다. “부자 교회”로 유명했다. 주 신자 층인 오렌지카운티의 성공한 백인들은 교회 충성도가 높고 헌금도 많이 냈다. 슐러 목사는 노만 빈센트 필 박사 등의 계보를 잇는 긍정과 적극적 사고의 신봉자였다. 그의 “긍정의 신학”에 백인 중산층이 호응했다. 자신들의 부와 번영을 신학적으로 지지해 줬기 때문이다.

 

 수정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은 방송사의 버라이어티쇼에 필적한다. 특히 부활절과 성탄절의 공연은 라스베이거스의 공연 못지 않다. 실제로 수정교회의 성탄절 공연인 “크리스마스의 영광”은 예배당 안에서 “천사”로 분한 수많은 사람이 와이어를 타고 날아다녔다. 장엄한 오케스트라에 화려한 조명등은 관람객의 찬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엄청난 돈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수정교회의 파산 신청을 한국 교회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하리라 미국교회 잘된 것을 벤치마킹하고 성장신학 번영신학에 몰입해온 목회자들은 주변정리를 하면서 몸짓을 줄이는데 노심초사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십일조 잘하면 잘되고 솔로몬의 단 일회성의 태워드린 일천 번 제를 천일 동안 나눠 드린 양 오도하여 성전 짓기나 교회운영비 조달에 혈안이 돼있는 비 성경 적인 관행들을 청산하고 십자가신학 고난받고 섬기는 종의 자세로 돌아 가야하리라 눈감고 아웅하는 시대는 지나가게 돼있다. 3. 구원은 오직 은혜만으로 롬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시대를 깨우고 개혁하는 자들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은혜가 무엇인가 ? 죄로 인해 심판 받아야 할 자들에게 아무런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무엇인가? 독생자 예수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은혜를 깨닫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살수밖에 없다.

 

 나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무엇을 행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분의 과분한 자비로 말미암아 축복을 주시지 결코 우리의 수고나 어떤 행위 때문에 주시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진정한 하나님 은혜를 깨닫는 자의 고백이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그때부터 개혁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 는 속담처럼 이 시대 남에게 받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고 남이 나에게 원수진 일은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 이 시대의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은혜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자들이 보기 힘들다. 교회를 다니는 자들까지도 하나님 은혜를 깊이 느끼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식은 불효자이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자들은 불쌍한 인간들이다.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개혁을 일으켰다. 루터는 어떤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로마 카톨릭과 싸운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가? 그 은혜를 받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만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그 은혜로 인해서 내 자신이 개혁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은혜로 우리는 새롭게 변해야 한다. 은혜를 받으면서도 변화되지 아니할 때 그 신앙은 타락되어지기 마련이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일 때 그 물은 썩은 물이 되고 만다. 이 시대 왜 예수 믿는 자는 많고 은혜 받은 자는 많은데 세상은 왜 더 악해지고 타락되어져 가는가?

 

 은혜를 받은 자들이 개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한사람이 은혜 받고 개혁되어질 때 우리교회는 개혁되어질 것이고 이 민족 위에 놀라운 개혁의 바람은 멈추지 아니할 것이다. 은혜 받은 자는 주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개혁을 일으켰다. 이 시대 은혜 받기를 얼마나 사모하는가? 은혜 받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 한 것은 은혜를 받고 난 다음이다.

 

< 결 론 > 루터가 살고 있던 16세기에만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이 사회에도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종교는 기독교를 막론하고 어느 종교나 부패하였다. 우리 기독교는 어떤가? 중세 암흑시대보다도 더욱 부패하여 지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는 망한다. 역사상 어느 나라든지 종교가 마지막 보루인데 그 종교가 부패하면 여지없이 나라는 망했다. 중세 로마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교권의 남용과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를 용납하는 등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교회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당시의 형편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할 것 없이 개인의 자유와 의사는 무시된 채 모두 다 로마 교회의 교권주의 자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급기야 문예 부흥운동이 터지게 되고, 이어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둘 다 로마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지만 전자는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옛날이마 지금이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이어져야 된다.

 

 개혁자 칼빈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 개혁의 요체(要諦)를 「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복고(復古)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이나 단체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버리는 힘의 원천이 된다. “개혁”은 궤도를 이탈하고 비정상적인 길로 가는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정상적인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며 개혁 교회가 지향하는 노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이루어나가는 생명 적인 운동이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개혁이 안되면 부패하고 타락하기 마련이다. 나라에서 하는 개혁도 어떤 기존의 틀을 다 무너뜨리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도 개혁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교권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물질주의가 만연 된 것은 아주 오랜 이야기이다. 인간의 공로가 구원의 방편으로 통용되고 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에겐 새로운 종류의 면죄부가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집안에 어려움이 있으면 속죄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헌금을 많이 바치면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한다. 기득권이 있는 사람은 개혁을 싫어한다. 그러나 성경에 어긋나는 걸 고쳐야 한다. 교회 헌금이나 충성을 성령의 감동으로, 은혜로, 믿음으로 해야 한다. 전통과 관습도 중요하지만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나부터 내 안에서 신앙의 개혁의 바람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지금의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안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놀라운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원하신다면 내 안의 개혁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내 가정. 우리 교회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나부터 내 안에서 개혁의 바람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우리에게 이 크신 은혜를 왜 하나님이 주셨을까요? 깨달으시고 이 은혜가 나에게만 멈추어 지지말고 내 가정에. 내 이웃에 내 민족 전체에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지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