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바람직한 목회자상
1. 여는 말
2. 한국교회 및 목회자들의 문제점
3.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위한 조직신학적 모델 제시
3.1 말씀론의 측면에서
3.2 교회론의 측면에서
3.3 기독론의 측면에서
3.4 직무론의 측면에서
4. 맺는 말
1. 여는 말
요즘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한국교회의 책임적인
구성원으로서 우리들 자신도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개신교의 성장은 둔화되기 시작했고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다는 진단도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비(非)신자들의 비판적인 생각들이 점점 더
증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악의적인 안티(anti) 기독교세력의 영향도 있겠으나 그동안 개신교가 사회에 보여주었던 모습에 대한
일반인들의 냉정한 평가도 있다는 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까지도 매스컴을 통해 공개된 일부 목회자들의 지나친 호화스러운 생활과
목회자들의 납세문제 논란, 그리고 몇몇 대표적 대형교회에서 일어났던 당회장직의 세습 문제, 일부 목회자들의 스캔들,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유착
등은 개신교 지도자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를 매우 부정적으로 만들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가 여러 부분에서 사회의 어두운 부분과
연약한 부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맡겨진 직분을 감당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에 대한 사회의 질타에 대중들이 더 공감하는 상황이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교회는 안팎으로부터 위기에 직면해 왔다.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할 때도 있었고, 내부의 부패와 갈등으로부터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적도 있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위기는 오히려 교회를 깨우게 하고 복음에 더욱 헌신하게 해주는 기회가 되어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위기까지도 극복함으로 전화위복의 전기를 맞게 된 경우도 많았다. 로마제국에 맞섰던 초대교회가 그러했고 히틀러에 맞섰던 독일의 고백교회가 그러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받게 되는 위기보다 내부로부터 등장한 위기는 더욱 심각하여서 이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교회가 당면하게 될 피해는 치명적이 되고, 외부로부터 받게 되는 공격에 대한 저항도 불가능할 뿐 더러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정당한 명분도 부여해 주게 된다. 이때의 위기는 더 이상 단순한 교회의 위기가 아니라 타락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역사와 지난 세기 공산주의의 등장과 함께 몰락한 러시아의 정교회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상황을 종교개혁 직전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고 평가한다. 교회권력의 절대화, 성직자들의 귀족계급화, 면죄부(돈)를 통한 구원의 수단화 그리고 복음과 신학의 왜곡의 현상은 단지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개신교회와 개신교 목회자들 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문제점에 대해 이미 유사한 비판과 자기반성들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작년 평양대각성운동 100주년 기념성회에서 주제설교를 한 옥한흠 목사는 한국교회의 전체적 회개를 선포했고 이미 한국교회는 자정력을 상실한 교회라고 자아비판을 했다. 한국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교단들이 대부분 개혁교회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갱신을 이룰 수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개혁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 및 목회자의 문제점들을 소개한 후,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 모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적 모델은 먼저 말씀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론적 관점과 기독론적 관점, 그리고 직무론을 종교개혁적 신학 유산인 만인제사장직적 관점 등으로부터 바라보는 목회직에 대한 분석이다.
2. 한국교회 및 목회자들의 문제점
최근 한국교회의 위기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교계의 여러 기관으로부터 우리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2008년 1월과 4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개최했던 월례모임에서는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의 성격과 그 가운데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다.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는 2008년 1월 11일 강변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모임 설교에서 현재 한국교회는 자신을 바꿀 힘을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는 교회라고 분석했다.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세속주의에 빠져서 어떠한 집회나 행사로도 한국교회를 깨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워했다.
역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2008년 4월 11일 남서울교회에서 개최했던 “영적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비정상적으로 바쁜 스케줄로 인해 영성개발을 외면한 결과 도덕성 상실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돈, 성, 권력의 유혹에 많은 목회자들이 넘어가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현재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신뢰를 상실했다고 질타했다. 한편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는 현재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혐오를 당하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는 교회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의 기업화, 고난과 희생의 결여, 설교의 가벼움, 혼합주의, 땅에 떨어진 교회내의 윤리기준 등을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또 지난 3월 31일 한국교회언론회가 주최했던 “한국교회 나아갈 길을 말한다” 의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기독교학술원장 이종성 박사는 한국교회의 성장과정에서 변질된 목회자상을 문제 삼았다. 이 박사는 최근의 목회자들에게서 예언적 품격은 사라지고 웅변가로 변했으며, 감언이설로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고, 장로교회의 예배신학의 표준인 설교단과 성찬식이 경시되며 진지한 성직자상은 사라지고 교인을 웃게 하는 만담가 직전의 수준에 목회자들이 와 있다고 비판했다. 또 목회지를 회사로 생각하고 자신을 유능한 CEO로 착각하는 등 목회자의 자의식에 대한 변질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앞에서 제기된 한국교회 및 지도자들에 대한 문제점의 주요한 원인이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움직여지는 한국의 개신교와 목회자에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교회의 시작과 운영 그리고 무엇보다도 담임목사의 의식과 목회활동은 대부분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분석 가능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도 비교적 균형을 이룬 발전된 서구의 자본주의모델이 아닌 미성숙한 한국적 자본주의 모델이 그대로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역사적 뿌리가 오래지 않고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 해왔다. 한국의 개신교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도 한국의 자본주의가 성장했던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산업화시기였으며, 성장이 둔화된 이후 90년대에는 교회의 성장도 둔화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유산이 1000여년이 넘는 유럽의 기독교와 한국의 개신교는 매우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상대적으로 2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개신교와 유사점이 많지만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은 상황에서 단기간 성장과 함께 부에 대한 건강한 가치관을 함께 형성해 오지 못한 한국의 자본주의적 특성이 한국교회 안에도 그대로 자리 잡게 된 점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자본주의의 성장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미국의 교회와도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가 한국의 개신교를 자본주의에 물든 기독교로 진단하는 이유는 교회개척은 창업에 비유되고 선교는 시장개척, 대형교회는 재벌기업, 개척교회는 구멍가게, 담임목사는 기업의 대표이사, 장로들은 임원들, 성도들은 소비자 내지 투자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교회의 인적 재정적 규모에 따라 교계 안에서의 영향력과 사회적 영향력은 비례되어 대형교회의 목회자의 경우 여느 정치인들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누리는 삶의 질은 재벌그룹 총수들 못지않은 수준이며, 이미 사회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의 인적 자원은 이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해주는 기간세력이 된다. 재력이 풍부한 교인은 교회에서 대접받지만 경제력이 약한 교인은 무시되고,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은 일류신자인 반면 개척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은 삼류신자로 부른다고 해서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다 실패한 경우는 마치 영업을 시작하다 망하게 되어 폐업정리하는 업소로 보이기도 하며 공공연히 매매가 오가기도 한다.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주로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에 부합되는 성공, 물질적 축복, 삶의 향유, 긍정적인 사고 등이며 실제로 성경에서 우선적으로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및 십자가를 지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 등은 축소되어 일방적인 모습만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에 출석하거나 신앙을 권유하는 이유로도 교회에 나와서 축복받기 위한 목적이며 심지어는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이 소개되기도 한다. 목회자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목회의 성공이 교회의 규모와 영향력으로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목회자의 삶의 내용과 목적, 삶의 질, 헌신의 정도, 경건의 능력, 말씀과 삶의 일치 등 이런 내용들보다 교회의 신도수를 얼마나 증가시켰느냐가 목회자의 평가에 대한 가장 결정적 잣대로 동원된다. 신자들의 의식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 스스로도 동일한 가치관에 자신을 몰입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목회자들의 자의식 내지 자기 정체성은 구도자나 예언자라기보다 기업의 CEO와 같이 최고경영자로서 자리매김하고 목회활동은 경영행위에 비견되며, 교회성장은 사업 확장의 수준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이러한 가치관에 어느 정도 만족할지 모르나 이런 목표에 이르지 못한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성장과 성공의 강박관념에 쫓기고 자신의 목회적 삶에 대한 만족이나 감사보다 늘 부족하고 미달된 목표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목회자 스스로 자신의 영성개발과 경건훈련에 치중하거나 교인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성숙한 신앙에 이르게 하기 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킬 프로그램개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내실 있는 장기적인 목회활동보다 단기적이고 성과에 급급한 프로그램 위주의 목회활동에 치중하게 된다. 점점 더 목회는 깊이를 상실하고 신자들의 직접적인 관심과 순간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듣기 좋은 말씀과 감정에 호소하는 예배, 흥미위주의 교육에 집중하게 됨으로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의 깊이 있는 경건의 훈련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한국 개신교의 급속한 성장에 공헌한 점이 없지 않고, 목회자의 최선의 노력과 목회동기 유발적인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자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들에 대해서 심각한 자기반성과 문제제기가 고려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위기와 목회자의 위기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한철하 박사는 서구교회의 몰락이 물질적 혜택에 도취하여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 중심진리에서 떠나게 된 데에 근본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개신교 지도자들이 물질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더 이상 자기 갱신과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고 말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유지하되, 단점은 극복하고 개선하는 자기 개혁의 노력이 더욱 철저하게 요구된다. 자본주의에 물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말씀과 건강한 신학에 기반을 둔 목회자의 자아회복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경쟁보다는 동반적 관계, 소유보다는 나눔을, 지배보다는 섬김을, 성공보다는 돌봄과 배려의 목회가 필요하다. 이러한 요구조건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의 신학적 관점에서 그 개선의 모델을 찾아보기로 한다.
3.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위한 조직신학적 모델 제시
3.1 말씀론의 측면에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고 성례전을 올바로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 교회이다”라고 교회를 정의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도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게 전해지고 또한 그 말씀을 들으며,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례를 따라 성례가 시행되면, 거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했다. 루터와 칼빈 모두 교회를 참교회로 만드는 교회의 표지를 순수하게 선포되는 말씀과 올바로 집행되는 성례전 안에서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교회를 참교회로 만드는 것을 교회의 표지라고 하며, 종교개혁자들이 이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 순수한 복음의 선포로 말하는 이면에는,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가르치지 않고, 로마 카톨릭교회와 사제들이 자신들의 목적대로 왜곡하여서 가르쳤던 잘못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공개했을 때도 로마 카톨릭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가르치지 않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공로를 강조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공로는 단지 선행만이 아니라 돈을 지불해야 구입할 수 있었던 면죄부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사람의 물질로 가리워지고 카톨릭교회의 사제들은 그 물질로 교회와 자신의 부를 증식시켰다. 이런 타락한 교회에 맞서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수하게 가르치는 곳에 참교회가 있다고 증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목회자들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과연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오늘날 한국교회 개신교 목회자들이 즐겨 강조하는 메시지는 축복이다. 얼마 전까지 “예수 믿고 구원받자” 가 한국교회의 대표적 주제어였다면 이제는 “예수 믿고 축복받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요즘 한국교회는 성공하고 부자 되기 위해 복 받는 방법을 신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교회에 충성하고 교역자에게 순종하고 신앙생활에 헌신하면 물질과 건강과 성공의 축복을 받는다고 약속해 준다. 과연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이 부자 되고 건강하고 성공하는 것일까?
만일 그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면 주님은 돌로 떡을 만드셨을 것이다(마4,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믿음의 위인들을 축복하신 경우를 종종 보게 되지만, 적어도 신약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후 부자가 되거나 성공했다거나 건강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어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을 만난 후 베드로는 자신의 배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지 않았던가!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 후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지 않았던가! 오히려 부자 청년은 자신의 많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영생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물론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여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들은 언제나 최종적인 것 이전의 행위들이었지 그것 자체로서 예수님의 선포 내용이 된 적이 없었다. 병자들을 고치신 후, 예수님은 언제나 그 현장을 조용히 떠나셨고(마8,34), 굶주린 자들을 먹여주실 때에도 예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해 혼미해 진 백성들을 안타까워 하셨다(막6,52.요6,15). 오히려 제자들은 그 때마다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려다 주님으로부터 더 큰 핀잔과 질책을 받곤 했다(막10,38).
언제나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것을 가르치셨고(마6,33), 회개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을 명령하셨고(눅14,27) 영생에 이르는 길을 준엄하게 알려 주셨다. 그 길은 구체적 사랑의 실천의 길이요, 세상적 욕심을 버리는 길이요, 자기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사랑할 것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마19,24). 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주님은 영생에 이르는 좁은 길을 일관되게 가르쳐 주시건만(마7,13-14) 오늘날의 목회자는 세상을 사랑하는 넓은 길을 강조하여 가르쳐 주고 있는 현실이다. 회개와 심판과 희생과 나눔과 양보를 가르치는 말씀 대신 더 많은 축복을 누리는 일과 더 많은 소유를 얻는 일과 더 높은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욕심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으로 합리화를 시켜 주고 있다.이런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화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5-26). 루터의 말처럼,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십자가의 신학자가 되기보다는 영광의 신학자가 되려 하고 있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하나 십자가의 신학자들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자들이다. 과연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결코 당시의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귀에 즐거운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그들이 듣기에 좋도록 말씀을 가공하여 전하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이 들어야 할 말씀, 그들이 영생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할 필요한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물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선포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좀 더 가난하게 살자고 요구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는가?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것에 자족하자고 권면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는가? 형통함보다 오히려 고난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설교자가 얼마나 있는가? 사람들의 귀에 듣기 즐거운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포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세상을 향한 욕심에 진정으로 걸림돌이 되게 하는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얼마나 있는가?
목회자 아니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침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유혹과 시련을 이길 지혜와 믿음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당장의 눈앞에 세상의 욕심보다 더 영원하고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보여주고 증거해 주어야 한다. 한철하 박사는 21세기의 인류의 주요 문제도 역시 죄에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욕심에 있습니다. 우상숭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하셨습니다... 숨은 탐심, 불신, 분노, 미움 이런 것을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를 사모하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시간을 아끼지 않고 힘을 다하게 되는 천국인이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에도 세계를 살릴 길은 지옥인들이 천국인들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목회자의 사명, 아니 설교자의 사명이란 성경의 중심진리를 찾아서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되게 하는 일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맘몬의 설교자인지 아니면 십자가의 복음의 설교자들인지 설교자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말씀의 진정성에 무릎 꿇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 스스로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과 자신의 삶이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지를 언제나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교인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고, 그 축복의 약속이 실현된 모델로 자신을 소개하고 자기가 누리는 축복을 자랑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며 수고하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고백하고, 자신을 쳐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증거함으로 그리스도의 강함을 드러내는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칼 바르트도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설교가 계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존하기 때문이라 했다. 선포하는 메시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가 가려지고 세상을 향한 욕심이 하나님의 축복이란 이름으로 왜곡될 때, 그 설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아니며 단지 설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설교의 타락이다. 타락한 설교가 선포되는 현장인 그 목회지는 축복을 가공해서 판매하는 종교기업은 될지언정 더 이상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의 현장은 아닐 것이다. 강단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왜곡에 대항해서 우리는 깨어 경성하고 말씀을 말씀되게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속히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루터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고 외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면 이제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되게 할 사명이 주어졌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철하 박사는 21세기 인류를 살리는 일은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3.2 교회론의 측면에서
교회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신학적 진술 가운데 유독 필자의 관심을 끄는 표현은 “교회가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일찍이 키프리안이 처음으로 그의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언급한 것이 시작이 되어 그 이후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표현이 칼빈의「기독교 강요」4권 교회론의 표제어로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말이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 라는 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지지 못한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키프리안은 “교회의 뱃속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교회의 젖으로 우리는 영양을 받으며 교회의 영으로 우리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고 표현함으로 신자들과 교회의 관계를 매우 적절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키프리안의 어머니 교회론은 후에 종교개혁자 칼빈에게도 계승되어 그는 자신의 교회론을 어머니 교회론으로 구성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교회의 품속으로 모으셔서 유아와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는 동안 교회의 도움과 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기르실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장성하여 마침내 믿음의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어머니와 같은 보살핌을 통하여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10;9)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자들에게는 교회가 또한 그 어머니가 되도록 하셨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증거하듯이(갈4,26), 그것은 비단 율법 아래서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신 이후에도 그러한 것이다.” 이어서 칼빈은 “신자의 어머니인 가시적인 교회” 라는 항에서 말하길,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의도가 가시적인 교회를 논의하는 데 있으므로 어머니라는 간단한 호칭에서도 교회를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하며 또한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를 배워야 하겠다. 이 어머니가 우리를 그 뱃속에서 잉태하고 낳고 가슴의 젖으로 우리를 양육하며 또한 마지막으로 우리가 죽을 육체를 벗고 천사들과 같이 되기까지(마22,30) 그 보살핌과 인도 아래 우리를 지키지 않는 한, 우리가 생명 속으로 들어갈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평생토록 교회라는 학교의 학생들로 있어야 하고 거기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사37,32)와 요엘(욜2,32)이 증거 하듯이, 그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는 죄 사함이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교회의 하는 일이 신자들과 관련되어 마치 가정의 어머니의 역할이라면, 적어도 교회 안에서 행사되는 리더십의 성격은 그에 상응하여 어머니와 같은 리더십이어야 할 것이다. 교회를 제국으로 본다면 그 안에서 제왕적 리더십이 필요할 것이고, 교회를 기업으로 본다면 그에 따라 기업경영적 리더십이 필요할 테지만, 교회를 하나님의 가정으로 본다면 그 안에서는 가정에 어울리는 리더십이 요청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어머니의 리더십이 아닌 제왕적 리더십이나 경영자적 리더십은 교회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리더십의 유형에 해당되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도 아니고 기업도 아니고 신자들이 태어나고 자라나고 양육받고 보호받고 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신앙의 가정이다. 그 안에서 모든 신자들은 마치 어머니의 품에서와 같이 생명을 얻고 영양을 공급받고 위로를 받고 안식을 누린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행사하는 리더십의 모델도 어머니의 리더십이어야 한다. 지배하거나 명령하거나 통제하거나 이익을 계산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돌보고 희생하고 품어주는 리더십이 교회 안에서 행사되는 리더십의 참된 모습인 것이다. 어머니의 리더십은 여자 교역자들이 독점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 목회자가 할 수 없는 낯선 역할이 아니다. 어머니의 마음이란 사실 선한 목자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아니다. 양을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길 잃은 양에게 마음이 먼저 가는 선한 목자(눅15,3-7; 요10,11-18)의 모습이 곧 우리네의 어머니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성공한 목회자의 리더십은 대개 제왕적 리더십이고 신자들도 그런 리더십에 대해 카리스마가 있다고 기꺼이 순종한다. 목회자의 말 한마디로 온 교회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 리더십은 어쩐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한 인간이 지나치게 절대화 되는 위험한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최근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세상 속에서 교회 안에서도 기업의 CEO처럼 효율을 먼저 생각하고 성장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유능한 목회자의 모습도 필요하겠지만 왠지 그보다는 미련하고 세련되지 못해도 묵묵히 빈자리를 채워주고 언제나 다가갈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위로를 줄 수 있는 따듯한 마음을 지닌 어머니와 같은 목회자가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더 필요한 것 같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 품에서 안식을 누리기까지 안식할 수 없다는 상황이 신자들의 실존이라면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품을 연상시켜 주는, 모든 사람을 품어 주고 용납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넉넉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리더십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는 자기 자신의 십자가 뿐 아니라 신자들의 십자가도 함께 져 주는 사람이다. 바로 어머니가 식구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모든 짐을 지고 견뎌 내며 가정을 책임지듯이,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모습이 그런 모습에 해당되는 것이다. 말로는 섬기는 리더십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제왕적 리더십에 물든 한국교회의 지도자상이 키프리안과 칼빈의 가르침대로 어머니와 같은 교회 안에서 어머니의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목회자 상으로 바뀔 때, 마치 자식이 어머니에게 무한의 사랑과 감사와 신뢰를 보내듯이 신자들이 목회자를 향해 그러한 사랑과 감사와 신뢰를 보내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한국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이와 같은 어머니의 리더십이 행사된다면, 그 영향력은 단지 교회 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온 사회에 건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 안에서 로마 카톨릭교회 및 그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증대된 이유가 바로 그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소외되고 억울한 사람들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 줌으로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된 것은 아닌지 우리 개신교 지도자들이 곰곰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어머니의 리더십을 실천하게 된다면 이는 한국 사회 안에서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3.3 기독론의 측면에서
과연 목회자는 제사장인가? 이 질문은 비단 최근에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항상 제기되어 왔던 질문이다. 많은 개신교 목회자들이 여전히 자신은 제사장이라고 믿고 사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교인들도 목사는 제사장이라고 믿는다. 흔히 목회자들은 자신들과 일반 신자들을 구분하기 위해 제사장 직을 강조하고 심지어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선택을 입은 레위지파라고까지 역설하는 것을 접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듣게 되는 일반 신자들은 목회자와 자신들 사이에는 적어도 넘을 수 없는 신분상의 차이가 있다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제사장이란 말이 진정 목회자의 배타적인 특권을 정당화 시켜주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성직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로 원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셨으므로 따라서 목회자도 제사장임에 분명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해석도 그리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목회자의 제사장직은 또 다른 문제가 되므로 이를 쉽게 연결 지을 수 없다. 먼저 목회자의 제사장직을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로 사용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부터 살펴보자.
과연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셨는가? 흥미로운 사실은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 불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아니 신약의 공동체에는 제사장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개 사도나 제자, 감독, 장로, 교사, 집사 등의 직은 등장하나 유독 제사장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신약의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에 제사장직은 없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유독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칼빈의 답을 들어보자. “사도는 히브리서 7장에서부터 10장 거의 끝 부분까지를 할애하여 이 점에 대해서 길게 다루고 있다. 그의 논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곧, 제사장직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죽으심의 제사를 통해서 그가 우리 자신의 죄책을 제거하셨고 우리 죄를 대신 만족시키셨기 때문이다.(히9,22). ... 중략 ... 율법 아래에서는 하나님께서 짐승을 제물로 드릴 것을 명령하셨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다른 질서가 제시되었으니, 곧 동일한 한 분이 제사장도 되시고 또한 동시에 제물도 되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다른 것으로는 결코 보상할 것이 없었고, 또한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달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의 임무를 행사하시는데, 이는 영원한 화목의 법을 통해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도록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계1,6).“
여기에 서술된 칼빈의 의견을 정리하면,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신 (대)제사장이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서 기능한 방법은 구약의 제사장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제물을 드림으로 화목의 역할을 담당했으나 신약의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렸다는 점에서 구약의 제사장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했다는 말이다. 바로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서술하고 있다.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제물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완수하셨다. 이로써 이제 예수 외에는 다른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고 예수 이외에는 다른 중보자가 불필요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현대의 대표적 카톨릭 신학자 중 한 사람인 한스 큉도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묘사한 것은 제의적이면서 동시에 제의비판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신약성경의 직무를 구약성경의 사제직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이제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점에서 제사장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의 제사장직은 구약성경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더욱이 예수의 중보자적 사역의 완성을 통해 예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또 다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감당할 이유가 사라졌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신약성경 안에서 히브리서 이외의 곳에서는 전혀 제사장직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직무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뿌리를 박으려 한다면, 제사장직을 통해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특권을 말하는 구약의 제사장직이 아닌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길을 따르는 의미에서 제사장직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결국 제사장직보다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다는 사실에 더 큰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미사를 비판했을 때 제시한 신학적 근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사제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 십자가에서의 희생의 제의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희생제사라고 반복하는 한, 기능상 제사장이 요구되고 정당화 된다. 그러나 반복할 이유가 없는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라면 마찬가지 논리로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미사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오늘날 목회자 자신이 구약성경의 제사장직을 이어가는 지도자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분명한 비판의 말이 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새로이 제물로 드리겠다고 생각해 온 자들의 거짓이 얼마나 더 역겹겠는가! 교황주의자들은 날마다 이를 시도하고 있다. 미사(the Mass)를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칼빈의 이 말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우리 가운데 제사장은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제사장이시고 대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제사장 역할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칼빈은 같은 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들 자신은 더러우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제사장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또한 값없이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와 찬미의 제사를 드릴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진술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17,19).”
이와 같은 칼빈의 말은 얼핏 들으면 우리가 제사장이라 하는 것 같으나 사실 이 말은 모든 신자들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헌신한다는 점에서 제사장직을 말하는 만인제사장설이지, 또 다른 인물이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서 제사장직을 감당하게 된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목회자는 결코 제사장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제사장이라는 말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제사장인 척 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더구나 일반 신자와 구분되는 특권으로서 제사장직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서로 높은 자리를 논했던 제자들이 범했던 동일한 어리석음을 범하는 행동일 것이다(막10,35-37). 그러나 이들에게 주신 주님의 답변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막10,38.40)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목회자가 제사장이라 끝내 주장한다면, 그는 대접받는 특권적인 제사장직이 아니라 제물로 자신을 드리는 희생과 헌신의 삶으로부터 제사장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자신을 제사장이라 부르는 것은 성경적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적 신학에도 맞지 않는 주장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제사장으로 불리기를 원한다면 일반신자들과 구분되는 특권적 의미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선한 목자의 의미에서(요10,11), 즉 자기 포기와 자기 버림의 의미에서 제사장직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3.4 직무론적 측면에서: 만인제사장직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사역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종교개혁자들이 이어서 이 신학적 결과를 교회의 직무론으로 적용해 간 것이 곧 만인제사장직 이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특권적인 제사장 계급에 대한 거부이며 동시에 그와 반대로 모든 신자들을 제사장직의 위치로 격상시킴으로 교회 내에서 권위의 수평적 일반화를 이룩한 획기적인 주장인 것이다.
이로써 개신교 신학에서는 중세의 미사희생론의 거부와 함께 제사장상도 사라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직무를 맡은 자가 제사장직을 통해 그리스도를 대표하거나 재현한다는 생각도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신 바울의 신학적 전통에 따라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직무론이 집중되었고 이 일을 담당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본질상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능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루터의 만인제사장 이해에 나타난 제사장직과 목회직의 기능상 차이는 두 직무를 표현하는 단어 사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루터가 만인제사장직을 설명할 때는 언제나 라틴어로 sacerdos/sacerdotes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 목사(신부)를 나타낼 때는 minister/ministri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을 위해서 minister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1530년의 시편 강해에서 루터는 제사장과 목사의 구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목사는 아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요 목사일 뿐만 아니라 직임과 그에게 위임된 사역의 장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소명과 명령이 목사와 설교자를 만드는 것이다.”
루터가 제사장과 목사를 나타내는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 외에 우리가 주목할 또 하나의 용어적 특징이 있다. 루터는 성직(officium)을 언급할 때, 그 직무가 오늘날의 상황에서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목회직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교회의 질서라는 단어를 고려했다. 이에 관한 예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조 제 14항이 해당된다. 이 항은 교회의 질서를 이루기 위해 정식적인 청빙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교회 안에서 가르치거나 설교하거나 성례전을 집례할 수 없다는 점이 주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직 이해는 여러 면에서 있어서 제 삼의 성직이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루터의 만인제사장직 이해를 제 삼의 길이라 부르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첫째는 카톨릭의 성직계급주의적 이해와 열광주의자들의 성직파괴주의를 극복하는 제 삼의 대안으로서이고, 둘째는 레위 지파로 출생했다는 태생적 원인으로 제사장이 되는 구약성경적 제사장 이해와 서품성사(안수)를 통해 제사장으로 임명받는다는 로마 카톨릭의 성직계급주의를 극복하는 의미에서 제 삼의 길이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직 이해는 세례와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제사장이 되며, 그러나 이 제사장은 신분에 있어서가 아닌 기능에 있어서 목사직과 구분이 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본질적으로는 모든 신자들이 각자의 사명을 공유하되,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구분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인 만인제사장직 이해가 한국 개신교에 주는 의미는 사실상 거의 미미하다고 판단된다. 특정한 경우 로마 카톨릭교회와 신학을 비판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원용될 뿐이지 사실 상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이나 일반 신자들의 책임의식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만인제사장직은 목회자와 일반신자들에게 모두 쌍방적 자기이해 및 상호이해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하여 자신의 목회직을 정립해야 하고, 일반신자는 일반신자로서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하여 자기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목회자들은 거의 신자들에게 구약성경적 의미에서의 제사장직으로서의 목회자의 특별한 지위와 위치를 강조하고 일방적으로 순종을 강요하기도 하며 때로는 협박(?)도 하는 한편, 일반신자들은 많은 봉사를 하면서도 그 섬김의 사역이 제사장적 의미에서 건강하고 정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일반신자로서 자신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제사장이라고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결과는 목회자들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유산인 만인제사장직에 대해 바르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신자들도 이에 대해 제대로 배운 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직에 건강하게 기초한 개신교의 직무 이해는 교회 안에서 상호 협력과 견제 그리고 보완을 가능케 해줌으로 목회자에게도 도움이 되고 신자들에게도 교회 안에서와 세상 안에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는 근거가 된다.
만인제사장직은 교회의 권위가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지배가 아니라 질서로, 독점이 아니라 공유와 나눔으로, 건강하게 기능하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만인제사장직은 목회자를 살리고 일반신자를 세워주고 교회를 건강하게 해주는 모두에게 생명의 봉사의 원리가 된다는 사실을 한국교회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만인제사장직의 분명한 인식은 칼빈이 가르친 바처럼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알게 된 신자(목회자도 포함하여)가 교회와 세상 안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달은 결과이다.
4. 맺는 말
사실 목회자가 되는 일은 두렵고도 떨리는 일이며 너무 힘든 길이다.
신학대학교 교수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과연 그 길에서 만나게 될 어려움을 예상하고
준비하고 가고 있는가? ‘먹사’와 ‘삯꾼’으로 전락하지 않고 참된 목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좁은 길 중에서도 더 좁은 길이다. 주님의 특별한
은혜와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 하지 않고서는 결코 갈 수 없는 불가능해 보이는 길이다. 부자가 천국 가는 일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목회자 되는 길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그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하겠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현재의 우리의 자화상은 십자가에서 떠나가고 있는 교회, 복음에서 떠나가고 있는 목회자,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기보다 이 세상을 사모하는 신자들, 그리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사랑하는 교회, 목회자, 성도들처럼 보인다.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서, 건강한 신학적 기초 위에 교회를
다시 세우고 목회의 지표를 삼고 교인들을 가르치고 섬길 때, 한국교회는 우리 민족을 복음으로 구원하며 진리로 인도하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 안에서 점점 더 고립화되는 게토로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또 목회자가 자신의 교회 안에서만 인정받는 지도자가
아니라,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전 한국사회에서 건강한 지도력을 행사하고 존경과 신뢰를 얻게 되는 새로워진 한국교회를 꿈꾸어 본다.
목회자의 말이라면 한국사람 누구나가 신뢰하고, 목회자의 삶이라면 한국사람
누구나가 존경할 수 있는 존경과 신뢰를 받는 모습으로 목회자의 위치가 회복된다면 한국교회는 분명 한국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날을 꿈꾸어 본다. 비(非)그리스도인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목회자를 꼽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왔으면
좋겠다.
정홍열/ACTS 신학과(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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