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경이 아닌가? (요한 복음 9:1-12)
- 하원식 목사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불행하게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다. 마침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그를 만났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입니까?
여기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만나는 재앙은 다 죄의 결과인 줄로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병이 든다 든지 혹 불행한 일을 당할 때에 이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과응보, 행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상들이 있다.
칼빈 선생께서, 오늘 우리의 본문 2절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은 남의 고난을 보면서 세 가지의 실수를 저지른다고 한다.
첫 번째 실수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그 사람을 정죄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까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해버린다. 두 번째 실수는 남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해해 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 버린다. 세 번째 결정적인 실수는 모든 고난으로부터 자기를 예외 시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받아먹었어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어요. 그러면 선악과 먹기 전에는 눈이 어두웠다는 말인가?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자기를 보는 눈이 밝아졌다. 자기 수치를 보는 눈, 자기 죄를 보는 눈, 자기 비참한 모습을 보는 눈이 밝아졌고 동시에 하나님을 보는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선악과 따먹자마자 그 영혼이 죽었다. 하나님을 보는 눈도 죽어버렸다.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신령한 눈은 어두워지고 세상을 보는 눈, 죄를 보는 눈, 자기를 보는 눈이 밝아진 것이다. 그 때부터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인인 동시에 영적으로 죽었고 영적으로 소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소경된 사람들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소경의 고난을 긍정적으로 보셨다.
3절 말씀이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제자들은 "그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기에 .. " 그런 식으로 과거 지향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고 미래 지향적으로 보셨다.
얼마나 놀라운 시각인가?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자. 태어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가 눈을 떴다. 그러면 고침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것이다. 또 그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는가? 제자들처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 예수님처럼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일이다." 이와 같이 고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란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인생의 풍랑이 세차게 불고 있는가?
그것만 바라보면서 겁먹지 마시기 바란다. 그 배후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예수님처럼 내가 당하는 고난을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란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중에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엄청난 고난이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사명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 같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조용한 가운데 네 권의 성경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위대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뀌어졌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믿음의 눈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고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한 빌립보서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빌1:12의 말씀이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득이 되는 것이 많은가? 따라서 우리도 사도 바울 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병든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사업에는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이 있는가? 제자들처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말자.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고생을 당하고 있나?" 이렇게 과거 지향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이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 선하신 뜻이 있다. 예수님처럼 긍정적으로 미래 적으로 소망 적으로 생각하자.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다. 그 죄인은 영적으로는 눈이 어두워진 사람이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구원받는 일이 뭐예요? 날 때부터 영적인 소경된 사람들이 그 영혼이 구원받자마자 하나님을 향해서 눈이 열리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소경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사람이 모델 케이스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게 한 것이다.
2,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셨다.
제자들은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실제적이면서도 사명 적인 답변을 주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덧붙여 4~5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아직은 낮이다. 밤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의 일,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셨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신다.
오늘 본문 5절에서도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어둠에 갇혀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맹인의 눈을 밝혀 주셨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눈은 빛을 보나 영적인 눈이 감겨 있어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빛을 비추시려고 지금까지 일하신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소경은 사실 인류를 대표하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사람을 케이스로 등장시켜 인간의 영적 소경 된 상태를 설명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3. 주님은 순종할 때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7-12절).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신 주님께서 이제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의 식수의 근원으로써 성전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직경은 6m이고, 깊이는 9m 정도 되는 조그마한 저수지였다. 그 저수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그 소경은 이런 시시한 짓이 어디 있느냐고 그만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연히 자기의 눈을 침으로 이긴 진흙으로 발라놓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한다고 귀찮아하며 짜증을 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즉시 순종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밝아져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 주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하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기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 .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했다.
1) 진흙을 눈에 바르셨다. 2) 인간 창조에 흙으로 만드셨다.
태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눈에 바르심을 주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한줌의 흙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창3장-"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라," 우리의 신앙 속에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이 필요한 줄 믿는다. 흙 속에 무슨 치료 효과가 있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 진흙을 바르며, 우리의 마음속에 진흙을 바르며, 우리의 생할 속에 진흙을 발라 이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달아 알기를 바란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명심하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7절,
1) 실로암- 보내심을 받았다 란 뜻이다.
주님의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서 씻어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이다,
구원을 얻게된 것이다. 실로암의 물로 눈을 씻어 그 소경은 보게 된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2)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못이다- (교회를 상징한다)
7절 말씀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 당시 실로암 못에는 33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성한 사람도 내려가기 어려운 계단이다. 그런데 33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눈을 씻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어떻게 했는가? 7절 하반부에 보니까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했다.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갔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말씀하시니까 씻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실로암 인들 못 가며, 요단강인들 못 가겠습니까? 33개의 계단이 아니라, 3,300개의 계단이면 왜 못 내려가겠는가? 그런 심정으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니까 가기 힘들어도 갔다. 예수님이 "씻으라"고 말씀하시니까 씻기 힘들어도 씻었다. 그것이 순종이다.
우리는 죄 씻음을 받아야 된다.
그 죄 씻음 받을 때 눈이 열린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던 눈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이 열리는 것이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그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하는 동시에 순종하는 믿음을 명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순종은 가장 중요하다.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순종. 이 소경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을 순종했다. 씻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이 문둥이였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계집종 하나가 말했다. 이스라엘 땅에는 선지자가 있는데 우리 주인께서 이스라엘에 있었으면 당장 고침 받는데. 그 선지자는 문둥이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 이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에 엘리사 선지자를 찾으러 갔다. 나아만이 많은 신하들을 데리고 갔는데 엘리사는 밖에 나오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서 말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고 와라 나아만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람이 나와서 자기 몸을 만지면서 하나님 앞에 축복기도를 해 줄줄 알았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종을 시켜 가지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고 가 하니까 나아만 화가 났다.
세상에 우리나라는 강이 없어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요단강보다 좋은 강이 얼마든지 있어 이렇게 사람을 모독하다니 내가 집에 가서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이스라엘을 박살을 낼 거라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지혜로운 신하 하나가 장군님, 그 하나님의 선지자가 그보다 더 큰 어려운 일이라도 시키면 그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는데 시원하게 들어갔다 나오시지요. 그렇게 하시지요. 그 말 들으니까 그럴 듯하니까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니까 어떻게 됐는가? 살이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졌다.
요단강의 물도 약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믿음은 순종을 동반해야 된다. 독사에게 죽게 된 사람들에게 놋 뱀을 쳐다 보라 했어요. 야, 놋 뱀이 무슨 약이냐 그거 따지고 있으면 다 죽어요. 쳐다보라고 했기 때문에 쳐다본 사람은 다 나음을 받고 살았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받아들여야 된다.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 약속대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쳐주는 것이다.
이제 주님을 우리의 생명의 주님으로 영원한 영광의 주님으로 만왕의 왕으로 모셔야 된다. 그 주님 앞에 절대로 복종해야 된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한 사람은 그 생애 속에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순종하는 믿음을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구원의 주님으로 모신 동시에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신 것이다.
내 생애를 주님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눈을 떠는 것이 그 사람의 최대의 소망이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 그대로 달려갔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가장 최선이다. 가장 급선무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된다. 지금 당장 가서 씻으라고 한다.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눈이 열렸다 자기가 눈떠진 것을 자기가 모를 리가 없지요. 자기가 보는데 왜 모르겠어요.
1) 두 종류의 소경이 있다.
한사람은 자신이 소경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소경이요, 한사람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소경이다. (날 때부터 소경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육신 적인 소경과 영적인 소경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을 산 헬렌 켈러 여사에게 누군가가 물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처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여 깨닫는 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눈을 가지고도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참 모습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도 보지 못하는 인생-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바로 영적 소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매우 흥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게 된다. 요한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우리도 맹인(소경)인가?" 41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더 흥미롭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이 맹인인줄 아는 맹인은 맹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맹인이면서 맹인인줄 모르는 인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본다고 하면서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신 그분을 뵙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말씀을 막연히 듣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들으며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다 죄를 지어서 육체의 눈은 떴지만 영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육체의 눈은 가졌지만, 영원한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실수하고 또 죄를 짓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삶이 뒤죽 박죽되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영적 소경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절망가운데 있는 자들, 탄식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신다.
2) 우리도 소경 일수 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피 흘리신 주님이 보이십니까? 구원 받으라.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영혼이 보이십니까? 전도하자.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주님의 손길과 축복하심이 보이십니까? 헌신하자.
보지 못하면 소경이다. 세상 것은 보지만 영적인 소경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소경일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보지 못하면 구원받았으나 신앙의 소경인 것이다. (갈3;1),,,"어리석도다,,,십자가에 못 밖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우리는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움과 죄악에 살던 자들이었다.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빛 되신 예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빛을 보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 것이다.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빛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이 눈으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갖가지 고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신 그 눈으로 형제들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교회밖에 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영적 소경이 많다. 영적 눈이 열리지 않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보지 못한다. 영적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비전도 보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의 참모습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오로지 육의 눈으로 현실만을 보면서 산다. 당장의 욕심을 충족하기에 급급하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열려져야 한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고 거듭나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아직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찾아주시고 만나주시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어둠을 물리쳐주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환하게 비추어주시기를 바란다. 아울러 참 실로암 이신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 모두를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를 바란다. 그리함으로서 우리의 추함이 정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렵게 만드시는 잘못된 분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일을 보는 눈
주님은 그 소경에게 이런 말씀의 메시지로 찾아오셨다. 사람들은 소경을 통하여 아무 것도 보지 못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소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고통을 주께서 보시고 너의 고통 속에 하나님의 일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너의 절망 속에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소망 적인 사실이다. 주님은 인생을 보실 때 한번도 절망의 눈으로 보신 적이 없다. 절망의 대명사가 되는 거지 소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보고 계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고난을 보시면서 너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일이 있다고 메시지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즉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죄 많은 사람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시고 지켜보신다. 예수님은 그 불쌍한 거지, 소경을 지켜보시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가까이 다가가셨다. 이 말씀을 보면 이 시간 주님이 우리 가운데 같이 계셔서 우리 가운데 영적인 소경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소경이다. 세상에는 눈이 밝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소경이다.
그 소경 된 사람들, 그 영혼이 불쌍한 사람들, 영혼이 잃어진 그 사람들을 주님은 지켜보신다. 그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그 사람을 보신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시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가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소경이라는 자신이 가진 장애만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서 상처받고 부서진 그러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영혼을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을 죄 덩어리라고 비난하였지만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의 장애를 더 이상 장애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삶이 변화되었다. 오늘도 세상에서 삶의 용기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빛의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다. 인생의 장애 때문에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활의 새 인류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빛 가운데 거하고 사랑과 용서와 웃음과 화평으로 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가운데 이사야9:2에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요, 생명이요 구원이다. 구원의 빛을 모신 사람은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오직 빛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참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어둠의 일을 다 벗어버리고 생명의 빛 가운데서 신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눈이 가장 맑은 곤충은 파리
이 세상의 곤충 중에서 눈이 가장 맑은 곤충은 '파리'다. 파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두 팔로 얼굴의 대부분을 다 차지하고 있는 눈을 닦는다. 파리의 눈은 여러 개의 눈이 합쳐진 겹눈이다. 겹눈에 먼지라도 앉으면 눈앞의 먹잇감이나 자기를 죽이려는 적들의 모습이 여러 개로 겹쳐 보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낱눈들을 하나하나 티 없이 깨끗하고 반들반들하게 열심히 닦아야 한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눈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팔복 중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다. 파리가 눈을 닦는 것처럼 사람들도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 하나님이 보인다. 마음의 눈에 먼지나 오물이 묻으면 딴 것이 보여 위험해진다.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고 밝고 맑고 선하게 유지시키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해인의 '보게 하소서'라는 시를 소개하며 마치려고 한다.
당신은 나에게 두 눈을 선물로 주셨지만 눈을 받은 고마움을 잊고 살았습니다.
눈이 없는 사람처럼 답답하게 행동할 때가 많았습니다.
먼지 낀 창문처럼 흐려진 눈빛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먼 헛된 욕심에 혈안이 되어 눈이 아파 올 땐 어찌해야 합니까?
웬만한 것쯤은 다 용서하고 다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소서.
너무 가까이만 보고 멀리는 못 보는 근시안도 아닌
너무 멀리만 보고 가까이는 못 보는 원시안도 아닌
사물의 중심을 바로 못 보는 난시안도 아닌 밝고 맑은 시력을 주소서,
주여! 편견과 독선의 색안경을 끼기보다
기도의 투명한 안경을 끼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기 전에 나의 못남과 어리석음을 먼저 보게 하여 주소서.
결점 투성이의 나를 보고 절망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당신의 사랑을 바라보게 하소서
다시 한 번 당신께의 믿음으로 눈을 뜨게 하소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과 분별력을 주소서.
살아서 눈을 뜨고 사는 고마움으로 언제나 당신 안에 보게 하소서
오늘도 샅샅이 나를 살피시는 눈이 크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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