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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나의 상반된 관심사는

구원의 계획 2011. 7. 22. 21:32

주님과 나의 상반된 관심사는( 사도행전 1:2-11)

                                                                                  - 하원식 목사


오늘은 교회력 상으로 다음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다. 그러니 오늘 주일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과 가장 가까운 주일로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지상에서 공생활을 다 마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며 당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신다. 구름에 싸여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제자들은 모두 하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그린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 향해 지극한 동정심과 인간들의 지상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오늘본문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시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는 언제나 큰 갭이 있었다. 그래서 어떨 때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동문서답(東問西答)을 벌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동상이몽인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 우리들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 결국 초점이 맞지 않으면 이런 실수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세상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1. 제자들의 관심사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도 꿈이 있었다. 그들은 조국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다윗 왕 때와 같은 통일 왕국을 이루어서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압제 밑에서 짓밟히고 시달리고 있을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절실한 꿈은 또 어디 있었겠는가?

 

이 때 팔레스틴 땅에 젊은 예언자, 나사렛 예수가 등장했다. 그는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그는 병자를 말씀으로 고쳐주시고 손을 잡아 주시고 고쳐주셨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수천 군중을 먹여 주셨다. 거친 바람과 파도를 말씀 한 마디로 잔잔케 하셨다. 그는 바다 위로 친히 걸으셨다.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셨다. 그는 이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지 아니하고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 조국의 해방 자였던, 위대한 모세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한층 더 민족 해방의 꿈에 부풀었다. 예수님이 만약 왕이 된다고 하면 그와 침식을 같이하며 여러 해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내무장관이 되고 외무부장관이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제자들의 어머니들까지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꿈을 가졌던 제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비참하게도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림을 받아 무참히 능욕,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이로써 제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님께 바랬던 꿈은 산산이 사라지게 되었다.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또 함께 다녔던 동료들, 제자들 중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본 사람이 있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제자들은 그 때부터 또 다시 모여들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 꿈을 다시 꿀 수가 있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부활하셨다. 저들의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던 꿈은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난관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채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었다.

 

고사성어에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자리에 잠을 자는데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이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지금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는 수 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착취와 고통을 받으면서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다급한 현실인가? 얼마나 답답한 현실인가? 힘만 있다면 당장 로마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 주고싶은 생각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처참한 환경이었다.

 

어느 날, 주님은 제자들에게 심각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절,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다. 이거야말로 뭔가 일이 벌어진다는 뜻 아닌가! 그것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을 보아 이스라엘의 심장부 예루살렘에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예수님께서 진짜 뭔가를 보여주시겠다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야 뭐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겠는가! 게다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하신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그게 뭔가요?

 

5절,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아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보니 이제사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관리들로 공식적으로 임명하시려나 보다, 야, 눈물나는 고생은 이제 끝났구나, 이제야 우리가 고생한 보람이 있겠구나 했다. 이들은 아직 성령이 뭔지, 성령 세례가 뭔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게 뭔지 모른다. 그러나 세례란 말로 보아 뭔가 임명할 때 물 뿌리는 것을 연상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는다.

 

6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감동도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관심은 여전히 세속적 왕권, 권력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동행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다. 변화된 것이 없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하여 물었다.

 

그들의 관심은 메시아 왕국의 건설이다. 메시아가 임하실 때 유대인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지상왕국이 되며 옛날에 있었던 신정 정치의 시대를 그렸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1)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기대가 깨졌다. (눅 24:21 ) 2)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에 기대가 되살아났으나 좀처럼 메시아 왕국의 건설에 관하여 발표하지 않자 궁금한 나머지 묻게 되었다. 제자들의 메시아 관은 잘못된 것이었다. 메시아의 왕국은 육 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아직 성령 받기 전에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날도 성령 받기 전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

 

2. 예수님의 관심사는 ?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과 예언이 성취된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요 낙심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확신과 소망을 주기 위해서 가르치시고 깨우치셨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우리 인생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리고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첫 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나라 표현이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 이것이 그의 첫 마디였다. 그리고 3년 동안 전한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마지막 마무리 말씀도 하나님 나라였다. 제자들과 만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 나온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소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현실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나라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나도 모르는 새 성령이 임할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속이 뜨겁게 활활 타오를 것이다. 미움과 시기 질투가 다 녹아지고, 탐욕과 교만이 다 타버리고 오직 뜨거운 사랑만이 넘쳐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잇슈가 되는 것은 일본 지진으로 인한 원전의 폭발로 인한 핵의 공포다. 북한의 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핵이라는 것, 바로 이게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이다. 어떤 자극을 주면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이 있다. 예를 들어서 나무를 태우면 열 에너지가 나온다. 우라늄을 자극시키면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 북한이 우랴눔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가지고 있다. 그깐 우라늄을 조금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 뭐 대단하다고 그러느냐? 이게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사실 북핵 문제에 대해서 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열 에너지의 무서움을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1g의 우라늄 235가 분열되면 TNT 폭탄 20톤에 해당되는 무서운 에너지가 나온다.

 

사실 우라늄 1g의 열량은 별 것 아니다. 그것 자체로는 그냥 초 한 자루의 열량밖에 안 된다고 한다. 커피나 한 잔 끓일 수 있을까 말까. 그러나 여러분, 그 1g의 우라늄에 열을 가해서 핵 처리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 인구가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기량 2660kw와 같은 에너지가 방출된다. TNT 폭탄 20톤을 터뜨린 것 같은 무서운 파괴력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은 이것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 우라늄을 아무리 핵 처리 해도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의 권능은 악한 심령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 여러분, 성령의 권능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려냈다. 성령이 임하시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영원히 영생한다! 우라늄이 핵 처리되면 피괴 하는 에너지가 나오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살려내는 사랑의 에너지가 나온다.

 

주님의 승천사건은 어렵고 힘든 인간사회에 새로운 힘을 주시는 사건이다. 예수 승천은 죽으심과 인류 구원 사업에 있어서 주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이 하늘만 우두거니 쳐다보는 (사도 1.11)' 텅빈 가슴, 허무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슬픔의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사도 1,11) 기쁨과 희망의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자.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외면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하늘도 외면하고 살아간다. 세상일에 도취되어 우리가 머물러야 할 하늘의 필요성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 땅에서 지내는 생활이 우리의 모든 것인 양 생각하며 우리가 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를 잊어버렸다. 땅만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세상 안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함을 향유케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를 공허감 속에 몰아넣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머물러야 할 하늘에 대한 눈길을 거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이 계신 하늘을기쁠 때 바라보면 기쁨이 지극해지고 슬플 때 바라보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 바라보면 용기를 얻게 되고 마음의 유혹이 생길 때 바라보면 그것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너희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사도 1,11)는 제자들에 대한 천사의 질책이 우리에겐 "너희는 왜 하늘을 쳐다보지 않느냐"는 질책으로 다가온다.

 

초대교회를 시작했던 제자들은 ‘하늘 쳐다보기’를 멈추고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모여 성령세례를 기다리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하기 시작했다. 제자들 앞에는 무시무시한 박해의 손길이 뻗혀 왔으나, 재림 신앙으로 무장한 그들은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소아시아로 유럽으로 인도로 나아갔고, 예수님을 위하여 장렬히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제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현실의 육신 적 나라다. 예수님의 관심은 참된 베풂과 섬김의 삶인데, 제자들의 관심은 언제나 자기 권력과 권세를 누리는, 끌어 모으는 삶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원한 것에 대한 사모인데, 제자들의 관심은 이 땅의 빵에 관한 것뿐이다. 예수님은 저 하늘을 보라 하는데, 제자들은 죽어라 땅만 쳐다본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예수를 제일 잘 믿는다고 하였다. 그 결과, 전에 우리가 본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늘 취사선택하였고, 주님의 말씀의 진의(眞意)를 알지 못하고, 늘 자기들 편한 대로 왜곡 되이 말씀을 받아들였다.

 

3. 우리들의 관심사는?

우리들도 제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손에 쥐기보다는 신문을 먼저 든다. 그만큼 우리의 관심은 세상에 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세상일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사안이란 말이다. 세상 일 치고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정치, 경제 자녀교육 현실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모르셨을까요? 병든 사람의 사정을 예수님이 모르겠는가?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모르겠는가? 압박 당하면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사정을 주님이 모를 리가 없다.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의 관심은 현실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현실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면 우리의 인생은 비참해진다.

 

승천하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셨다. 어서 그 사명을 위하여 힘써 노력하라는 말씀이다. 승천하시는 주님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넋 나간 사람처럼 하늘만을 쳐다보지 말고 어서 빨리 위대한 선교의 사명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약속하셨고 그들이 희망하던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 하는 그들의 활동을 통해 점점 가까이 오게 된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생활로써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머무르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활동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제자들인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생활의 발전을 모색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진부하게 지난날의 삶만을 답습하며 색다른 흥미거리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만일 예수님의 승천이 당신 혼자만의 승천으로만 끝났다면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할 또 하나의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요, 희망이다. 승천은 새로운 존재 양식의 가능성에 대한 보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미천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새 사람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수 있다는 것과 우리도 그렇게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자세도 단지 하늘만 바라보면서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두려움만이 가득 찬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우리도 살아 우리도 승천하여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구원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고 살 수 있겠는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는 눈, 하늘을 향해 가는 발걸음,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는 눈, 하늘을 향해 가는 발걸음,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우리를 아주 떠나시지 않으시고 언제나 당신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분이다. 다만 문제는 보이지 않으시게 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할 일을 잊고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파견하신 듯한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갈릴리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행 1,11)라고 하신다. 이는 곧 제자들에게 허황된 꿈(회복의 때를 묻든 그들)을 언제까지나 꾸고 있지 말라는 경종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우리와 함께 구체적으로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로 돌아가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은 당시 변두리로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촌이라서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곳이다. 그래서 나다나엘 이 요한복음 1 장에서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한 것처럼 갈릴리는 곧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냉혹한 현실이다. 삶의 현장이 바로 갈릴리다. 춥고, 배고프고, 속상하고, 어렵고, 힘든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사셨고, 그렇게 사시면서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르치시고 또 심어 주셨다. 우리는 평소에 시선을 위로하고 살아간다. 자기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보다 부유한 사람, 보다 많이 배운 사람을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또 그런 사람이 되고자 안간힘을 쓰고 살아간다. 그것은 자기보다 더 나은 처지, 곧 자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고 더 인간답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느끼고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존재의 기쁨이다.

 

주님의 승천사건은 어렵고 힘든 인간사회에 새로운 힘을 주시는 사건이다. 특히 교우들은 이 땅에 주님 말씀의 씨앗을 심어야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며,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사람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직접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이들이지요.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옛날 사도들은 주님의 승천 이후 비로소 공동체를 살기 시작했다. 주님의 공동체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재도약이다. 어렵고 힘든 여러 가지 일상 생활 안에서 온갖 난간을 극복하고 사랑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곧 지금이지요.

 

지금의 시대에는 너, 나 없이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다. 이럴 때 주님의 자녀답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심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물질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가장 철저히 썩었고 타락했던 유대 사회에 예수께서 오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시궁창에 던져진 현대인에게 희망을 주고자 한다.

 

어느 작은 마을에 4차선 넓은 길이 뚫렸다. 그 마을에 살고 있던 한 아저씨 집 앞으로 큰 길이 지나갔다. 그리고 집 앞에 속도 감시 카메라가 달렸다. 이 아저씨는 매일 집 앞에 앉아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진짜일까? 가짜일까?” 궁금하였다. 차가 쌩하고 지나가면 저 차는 찍혔을까? 벌금이 나올까? 하는 것이 궁금하였다. 매일 궁금함으로 지내던 이 아저씨가 참을 수가 없어서 직접 차를 몰고 카메라 앞을 쌩하고 지나갔다. 쌩하고 달려 보았지만 찍혔는지, 안 찍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났을 때에 과속 범칙금 청구서가 날아왔다. 벌금을 내면서 비로써 그 카메라가 진짜인 줄 알게 되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셨는데 진짜 재림 하실까 ? 아니면 말만하신 것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진짜 천국이 있을까? 지옥이 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 하셨는데 진짜 살아계실까? 아니면 사람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요, 희망이다. 승천은 새로운 존재 양식의 가능성에 대한 보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미천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새 사람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수 있다는 것과 우리도 그렇게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자세도 단지 하늘만 바라보면서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두려움만이 가득 찬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우리도 살아 우리도 승천하여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구원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고 살 수 있겠는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는 눈, 하늘을 향해 가는 발걸음,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결 론

오늘 본문에서는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하다. 누가 보아도 처음부터의 내용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장면은 마지막 장면처럼 보인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그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제자들 역시'이것으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성질 급한 관객은 먼저 일어나 나갔을 수도 있다. 이런 영화의 마지막 분위기에 등장한 인물이 누구인가? 천사다. 천사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 승천하신 그 모습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전한다.

 

 마지막인 줄 알았던 영화에서 이제 우리는 후속 편을 기대하게 된다. 전편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었다면 후속편의 주인공은 교회다. 이제 새롭게 교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정말로 신 바람나게 일했다. 예수께서 하셨던 모든 일을 이제 제자들이 하고있다. 복음을 선포하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비록 박해라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들은 이 일을 너무도 기쁘게 해냈다. 이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이 나게 할 정도로…

 

그런데 이 영화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하셨던 일, 제자들이 했던 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이제 우리가 해야 한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감동으로 열연했던 제자들의 뒤를 이어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그 열정과 사랑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면 좋으련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도 제자들이 겪었던 불신과 배반과 절망을 다 겪어내야 비로소 주인공으로서 지녀야 할 열정과 사랑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치 영화가 끝이 난 것처럼 모두들 동작을 멈춘듯하다. 예수님이 올라가셨던 하늘을 쳐다보는 제자들처럼 집단 최면에 걸린 것일까? 이제 영화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 역시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조언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도 제자들과 똑같이 천사를 기다려볼까? 아니면 깨우칠 말씀을 기다려볼까? 중요한 것은 천사가 아니라 천사가 전해준 말씀이다. 이것을 우려해서 사도행전에서는 천사라고 하지 않고 흰옷을 입은 사람이라고 했나보다. 자, 이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흰옷을 입은 사람의 말씀을 되뇌어보자.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네가 주인공이다. 이제 할 일을 하라"라고… 현실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아무리 암담하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해도 희망이 있다면 그리고 그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쁨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저 하늘만 바라본다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천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왜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안 된다. 사도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비겁하고 용기도 없고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완전히 바뀌었다. '보고 들은 것을 생명을 내걸고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담대한 신앙으로 바뀌었고 이들 때문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수가 된 것이다. 일을 하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능력을 주시도록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주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기 바란다. 우리 기독교가 가끔 어려움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너무 세상의 것만을 위하여 나갈 때 교회는 세속화가 되고 타락하게 된다. 반대로 너무 신비주의에 빠질 때에 교회는 게으르게 되고 세상과는 분리되어 염세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이지만 신비주의에 빠져버리는 종교는 아니다. 때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겠지 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가 있다.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주님게서 원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