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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열(十)이란 수의 의미는?

구원의 계획 2010. 8. 14. 13:37

성경의 열(十)이란 수의 의미는?

글/扈一麥

 

<완성하다, 충만하다>의 뜻을 지닌 十(십)

十 (열) 십/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다는 뜻.

 

 성경을 보다보면 겹쳐지고 많이 기록되고 특정한 숫자가 눈에 띄게 됩니다. 숫자를 세고 계산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 관한 기록 만큼이나 오래됐습니다. 숫자는 개수를 나타내는 문자입니다. 숫자 역사를 보면 수의 각 단위를 기호로 나타낸 초기 이집트 숫자에서, 기호로 수를 나타낸 그리스 숫자로 발전됐습니다. 숫자는 처음에는 벽이나 지면, 판자 등에 필요한 수만큼 줄을 긋는 것으로 표현됐을 것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수(數)에 따라 분류되고 질서가 잡힙니다.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존재 자체의 원리는 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문화에서든지 수에는 제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인류 최초 계산기라고 할 수 있는 손가락의 개수는 열 개입니다.

 

성경에는 왜 십(十)이란 수와 열이란 수를 기록한 곳이 많이 있을까요?  

성경에서 나태 내고 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분명한 하나님의 메세지가 있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시대는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셨지만 노아 한 사람을 부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노아 가족 전체를 부르신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사악한 세대 가운데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홍수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창6~10장).

 

아브라함이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가시는 하나님께 그 땅을 중보하며 기도할 때 왜 의인 10명이라는 숫자에서 멈춰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였기 때문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최소 단위의 공동체를 만들었을 것으로 아브라함은 생각하고 있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던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풀어 놓으라는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다른 사람들이 사역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한 책임있는 그룹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드로는 1000명, 100명, 50명, 10명 단위의 그룹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드로를 통해 그의 지도자들이 탈진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어떤 것이 관계를 위한 효과적인 것인지를 알게 하신 것이었습니다.(출 18:13~26). 위기의 시대에서 지파, 족속, 가족의 구조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간의 죄는 하나님 가족의 이러한 그룹(지파, 족속, 가족) 각각을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하는 왕국에서 책임을 갖는 단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기드온도 하나님 가족의 이와 같은 그룹인 지파와 족속과 가족을 거론하며 하나님께 변명하였습니다(수 7:16~18, 삿 6:14~15). 구약의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관계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소그룹이 10명 단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 중심에 최소 그룹이 열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를 수학적 수치보다는 상징적 의미에 중점을 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십계명일 것입니다. 십계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숫자 십은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로 우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한 후 노예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열 번째 재앙인 이집트 맏아들과 모든 짐승들 중 초태생의 죽음을 경험하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줍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십계명이었을까요? 그것은 가장 작은 단위의 법이자 완전한 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아브람은 조카롯을 구해올 때 그 전리품의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습니다.(창 14,20). 또 레위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수확한 것의 십분의 일은, 그것이 곡식이든 과일이든 가축이든, 주님께 바친다는 규정이 적혀 있습니다.(레위 27,30). 십이란 숫자에는 구원의 성취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이고도 완전한 요구가 내포돼 있습니다. 야곱도 외삼촌에게 열번을 속어서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이르켜서 피난길에 열명의 후궁에게 성을 맡기고 떠나갑니다. 다윗 왕의 의중은 아버지의 후궁들은 보호하고 해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끔직한 일을 백주 대낮에 벌였고, 후궁들의 열명의 공동체는 차라리 죽음으로 정조를 지켜야함에도 새로운 왕인 압살롬에게 동조를 하였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셨다고 기록합니다.

 

 십(열)이라는 숫자는 신약에도 등장하는데 열 달란트나 열 처녀의 비유 등입니다.(마태 25,1-13). 열므나 비유, 열명의 문둥병을 앓고 있는 열 사람은 예수님께서 치유하십니다.(눅 17,12-19). 여기도 작은 그룹인 열명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집단 구원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열명중에서 반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힘과의 관계에서도 십의 숫자가 등장합니다. 불길한 의미로 열 개의 뿔이 나옵니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을 표현합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계 12,3).
 
10명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최소의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여정 중에서 배워야 될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었다면 이 교훈은 주님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체에 있어서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히브리 민족을 생각해 보면 이들은 40여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접는 생활을 수 없이 반복 반복 했을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전번에 천막을 친 자리가 좋지 못해서 불편 했었던 사람이 "이번에야 말로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좋은 자리를 차지 하리라"하여 경쟁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지난번에 불편했던 사람이 "이번에야 말로" 하고 경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온갖 무질서와 혼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막치는 자리 하나까지 정해져 있었고 작은 공동체로 시작하여 큰 공동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질서를 지켰습니다.


목이 심히 말라 있는 상황에서 우물을 찾았을 때 서로 "먼저 마시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빨리 마시고 비켜나라"고 아우성이고 "아직 마시지도 못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삿대질 하고 그러다 보면 그 공동체는 약속의 땅에 이르기도 전에 붕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수백만(약200만으로 추산)이 이동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문제들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이 질서를 유지해 가며 약속의 땅을 항해 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민족이 가졌던 공동체 의식은 무엇 이었을까요? 히브리 민족의 공동체 의식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단위는 열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출4:29 이하를 보면 그 민족은 그들 스스로 결정에 의해서 애굽을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출발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부르시는 하나님, 약속하시는 하나님,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이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중심이 됩니다. '가라' 하면 가면되고' 머무르라' 하면 머물면 됩니다. 지금도 성경 말씀에서 '하라'하면 하고, '하지말라'하면 하지말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백성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그들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의 공동체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공동체입니다.(사43:1)  하나님 뜻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신앙의 정신은 히브리인들에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부름을 받은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작은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어갑니다.

 

유대교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는 이런 경우, 열 사람에게 “나는 일전에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여, 그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가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 잘못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열 사람이 모두 용서해준다면, 그 잘못을 용서받는다. 만일 그 상대방이 이미 죽은 경우에는 열사람을 그의 무덤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무덤을 향해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왜 열 명에게 말 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가 하면, 유대교 예배당에서 기도를 할 때는 열 명이 모여야 기도회가 성립된다고 합니다. 즉 열 명이 돼야 비로소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대학(大學)에서도 열사람의 눈으로 본다는 십목소시(十目所視)는 무수한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 숨길 수 없음을 뜻합니다. 이에서 열은 단순한 열 개의 눈이 아닌 집단(공동체)의 시선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사자성어로 예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하여 열 술이면 한 사람분의 먹을 양식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서도 열은 하나의 집단의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새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되어 열 달 동안 머물어야 합니다. 열(十)의 수는 가장 작은 기본적인 단위이며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구약에는 한사람이 아니고 집단인 열명 단위와 그룹으로 구원하였지만, 예수님은 개인 한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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