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마12:1~8)
오늘의 연구본문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있습니다(막6:23~26; 눅6:1~5). 그런데 세 본문을 비교하면서 읽으면, 서로 완전히 같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각 복음서 저자들의 편집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마가복음 본문 편집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들보다 먼저 기록된 복음서라는 관점에서 세 본문을 비교해 보면 마가복음의 본문이 마태복음(혹은 누가복음)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당장에 마가복음 저자가 ‘아비아달 대제사장’이라고 쓴 표현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삭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누가복음의 본문을 읽으면 마치 다윗이 너무 배가 고파 제사장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성전에 들어가 진설되어 있는 진설병을 마음대로 집어 먹은 것처럼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저자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관점에 근거하여 ‘아니다’라고 판단되면 삭제했고,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도 뺏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마가복음에 없는 내용을 추가 첨가, 부연하고 있음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절~8절은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밭 사이로 가다가 배고프다는 이유로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이 계기가 되어 벌어진 논쟁입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바리새인들의 주장과 ‘배고파서 행한 일’은 다윗이 시장했을 때에 행했던 것에 해당함으로 안식일 법 위반이 아니라는 예수의 입장이 대립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프면 안식일 법을 위반해도 된다는 뜻인가?
이에 더하여 마태복음 저자는 5절에서 제사장들은 안식일 날 안식일 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 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하면서 6절~8절의 내용을 덧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입장을 보면 배고플 때 먹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율법준수 행위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행위가 안식일을 준수를 대체할 수 있는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안식일 날 제사(예배)를 드리기보다는 자선사업,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안식일 준수법의 법 정신에 더 충실하다는 뜻이 되는가?
비슷한 본문, 그러나 마태복음을 통해 받는 안식일 준수 교훈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마태복음이 전하는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숙고한 후에 그 결과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기존의 안식일 법은 문자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인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이 되면 금지행동 강령에 해당하는 모든 행동들을 금해야 했습니다(출20:10; 31:14~15; 35:2~3; 렘17:21~22참조). 만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금지행동 강령을 어길 시에는 이미 율법을 통해 경고된 죽음을 받아야 했습니다(민15:32~36; 느13:15~18비교참조).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삶을 기쁘게 하고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서 생기가 돋고 다음날부터의 삶에 대해 기대와 의욕, 희망과 가슴 벅참이 넘쳐나야 하는데 오히려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될 만큼 부담스럽고 짐스럽게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안식일 기피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암8:5참조).
예수의 안식일에 대한 관점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날’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안식일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에게 종속된 날’이기 때문입니다(막2:27참조). 그렇다면 사람이 안식일로 인해 괴롭거나 피곤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나아가 기쁨이 없거나 안식일 준수가 인생에 걸림돌로 여겨지면 안 됩니다.
만일 안식일 준수문제로 인해 인생이 더 피곤해지고 부담스러워지고 괴롭게 여겨진다면 그런 안식일은 전격적으로 재해석 되어 안식일 준수의 의미가 새로워지도록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안식일 법 재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지켜야 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이 되게 해야 하며 그 날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를 ‘상위법의 권위 개념’을 통해 안식일 준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상위법의 권위 개념’이라는 말은 안식일 법을 위반해도 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말합니다. 예외 행위란 그 행동이 안식일 준수와 관련하여 예외규정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지 않은 행동으로 간주되는 경우들을 가리킵니다(민28:9; 왕하11:5~8; 대상9:32; 23:31; 대하2:4b↔요7:22~23비교참조).
예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상위법의 권위 개념’을 통해 제자들의 행동을 두둔하셨습니다(1절~8절). 그러므로 안식일은 ‘사람을 최고 위치에 놓고 사람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날’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가르치심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 법 논쟁의 핵심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 날 밀밭 사이로 가시는 중에 제자들이 배고프다는 이유로 추수에 해당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밀밭 사이로 가는 중에 밀 이삭을 잘랐다는 행위가 문제로 지적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잘라 먹은 행위’가 안식일이라는 특정의 날에 행해졌다는 사실이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던 겁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잘랐기 때문에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추수행위를 했다는 것이지요.
안식일에는 곡식을 자르는 추수행위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출34:21). 비록 낫을 대고 자른 것은 아니지만 밀 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추수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견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지적했던 겁니다(2절).
바리새인들의 이런 지적에 대해 예수께서는 ‘다윗의 경우’를 들어 반박하셨습니다(3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요점은 ‘다윗도 배고플 때에 율법의 규정을 어겼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에 늘어놓은 진설병은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 있는데(레24:9) 그것을 다윗과 그 일행이 먹었기 때문입니다(삼상21:3,6). 그렇다면 다윗과 그 일행은 ‘배고픔’을 이유로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다윗과 그 일행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먹고도 율법을 위반했다고 지적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배고파서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졌던 진설병을 먹은 것은 율법의 규정을 위반하는 범법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규정을 넘어서는 예외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행위가 안식일에 행해진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먹은 것은 예외규정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다윗의 행위가 안식일 날 행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외규정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이지요.
하지만 레24:8에 의하면 진설병은 인식일마다 진설됩니다. 그렇다면 진설되었던 떡을 물려내는 것도 안식일에 행해진다는 논리가 됩니다(삼상21:6 비교 참조). 안식일마다 떡을 드려 진설해야 한다면 진설된 떡은 새 떡이 진설될 때까지 제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먹은 진설병은 안식일 날 물려낸 떡이라는 시각이 생깁니다. 안식일 날 물려낸 떡을 그 다음날 다윗과 그 일행이 도착하여 먹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안식일 날 물려낸 그 떡을 안식일에 도착해서 먹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비다.
따라서 다윗과 그 일행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것은 안식일 날 행해진 사건이므로 다윗과 그 일행이 행한 행동들은 두 가지의 율법규정에서 모두 예외로 인정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은 것도 예외, 안식일 날 먹은 것도 예외에 해당하는 행위였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마태복음이 전하는 제자들의 행위와 그에 대한 예수의 변호는 ‘배고픔을 면하는 일’은 율법의 예외조항에 해당하는 사안이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독자적인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
여기서 잠깐 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6절에 ‘성전보다 더 큰 이’는 헬라어 본문에는 ‘성전보다 더 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6절을 ‘성전보다 더 큰 이’로 보면 예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되는데 ‘성전보다 더 큰 것’으로 헬라어 본문에 충실하면 예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앞과 뒤를 오가면서 ‘더 큰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7절은 호세아 6:6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호세아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6절과 7절을 이으면 7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 성전보다 더 크지 않느냐는 의미가 되므로 ‘성전보다 더 큰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한편 복음서 저자는 ‘성전을 예수의 몸’과 연관시키므로 성전으로서의 예수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6절은 결국 제자들의 행동을 상위법 개념으로 두둔하시는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심할 수 없게도 가장 최고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므로 안식일 날 ‘자비’를 행하는 것은 예외 행동으로 지정되어야 마땅하다는 관점인 겁니다.
또 마태복음 저자에 의하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에 의해 허용된 일로 해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율법을 어겼다고 지적될 수 없다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8절).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의 주인은 야웨 하나님이십니다(출20:10; 레23:38; 신5:14; 신12:9; 수1:13; 사58:13). 그런데 마태복음에 의하면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이신 예수이십니다(8절). 그렇다면 예수는 야웨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8절 말씀은 마태복음 저자가 드러내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 이전의 신앙고백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구약의 야웨 하나님=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수식적 동일개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준수의 진정한 참 뜻
그렇게 볼 때 안식일 날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것은 안식일을 가장 안식일답게 만드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배고픈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행동에 해당하기 때문에 안식일법보다 높은 ‘것’이며 성전보다 높은 차원에서 행해지는 행위로서의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가 안식일 법에 막혀 베풀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식일 법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지 않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고 그 은혜를 서로 나누므로 안식일을 가장 복스럽게, 가장 적절하게, 가장 참되게 준수하는 행동이 진정한 안식일 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비를 베푸는 것을 핑계 삼아 의도적으로 안식일 준수를 회피하는 행동은 변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이후에 나타나는 두 사건도 역시 같은 안식일 날 ‘회당’에서 발생된 일임을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안식일 날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12:9,22).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께 예배드리면서 지내는 주일을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 또는 어떤 일을 행동하면서 주일이라는 시간을 맞으며 보내야 할까요? 한주일의 첫날인 주일을 맞으실 때, 그리고 보내실 때 주의 자비가 나누어지고 곤고함이 해결되는 생명돋움의 기쁨이 풍성하게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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