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최초에 누가,언제,왜 기록했을까?
성경은 책이다.우리는 이를 당연시한다.하지만 성경이 처음부터 책이었을까?구약 성경은 본래 구전으로 전해지던 유대 전승이었다.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기록되기 시작한다.UCLA의 월리엄 슈니더원드 교수는 성경의 탄생을 둘러싼 최대의 쟁점이'저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언제 씌여졌는가'라고 말한다.어째서 그렁가?성경의 저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유대 공동체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반면에 '언제 싀여졌는가'라는 물음에 구술 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는 문명사의 대전환이 함축되어 있다.
글로 기록된 경전의 탄생은 인류의 종교 문화에서도 혁명적인 사건이었다.물론 이에 대한 저항은 거셌다.구전의 토라(율법)와 기록된 토라는 때로 대립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다.유대교에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주된 갈등 원인도 이 문제엿으며,나사렛 예수와 제도화되기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 역시 구전의 가르침을 옹호했다.
도대체 고데 세계에서 무순 일이 이러어났기에 예언자의 시대가 저물고 '기록된 말씀'이 경전화 되었을 까?이 질문은 성경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우리를 인도해줄 것이다.
"월리엄 슈니더원드는 이 시대 성경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즉 고대 이스라엘의 전승이 언제 기록되었는가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고대 이스라엘의 문자성과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을 철저히 논하면서 슈니더원드는 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배경에 대해 폭넓은 문화적.역사적 질문을 던진다.이 책은 분명 성경학과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핀겔스타인(텔아비브 대학 고고학 연구소 소장)
포로기 이후 누가 유대 공동체를 이글었을까?
페르시아 시기에 다윗의 자손들은 자취를 감추었고,그 결과 왕실 중심의 성경 기록 시대도 끝났다.에스라-느헤미야기는 예루살렘의 유대 공동체가 남긴 몇 안되는 기록의 하나인데,여기에는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왕들만 언급되어 있다.이 책들에서 다윗 왕은그저 성전을 세운 인물일 뿐이다.
페르시아 시기에 유다의 통치자는 제사장이었다.고고학적 자료와 비문,문헌 등을 통해 당시 예후드를 다스린 이들의 목록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목록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오직 처음 두 통치자 세스바살과 스룹바벨만이 다윗의 계보에 속한다는 점이다.다윗의 이 마지막 자손들은 엘라단과 더불어 여호야긴 왕실의 마지막 인물들일 것이다.왕족이 유다 사람들을 다스린 것은 이들이 마지막이렀다.권력은 이제 성전과 그곳에서 일하던 제사장에게로 넘어간다.
예후드의 통치자들
통치자 연대
세스바살 |
기원전 538년 |
스룹바벨 |
기원전 520년 |
엘라단 |
기원전 6세기 말 |
느헤미야 |
기원전445~기원전433년 |
바고히 |
기원전 408년 |
예헤제키야 |
기원전 4세기 |
예헤제르 바흐세 |
불확실 |
페르시아 제국으 경제 정책에 성전을 활용했는데 ,고대 근동에서 신전이 세금과 공물을 거둬들이는 역활을 했던 데서 착안한 것이었다. 성전과 그곳의 제사장들을 이 시기에 유대교의 중심을 이루는 가장 특징적인 세력으로 등장한다.
다윗 계보의 왕실은 기원전 4세기에 제사장들로 완전히 대체된다.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기원전 4세기에 중엽의 동전에는 의미심장하게도'제사장,요하난.이라고 새겨져 있었다.무엇보다 흥미로운 증거는 기원전 300년 무렵 여행가 아브데라의 헤카테우스가 남긴 기록이다.이집트에 관한 그의 보고서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모세는 온 나라를 이끌기 우해 누구보다 고상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뽑아 제사장으로 임명했다...이 사람들은 또한 재판관으로도 임명되어 모든 다툼을 해결하도록 했고,율법과 규례를 맡겼다.이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왕이 전혀 없었으며,백성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은 제사장은 언제나 우월한 존재로 여겨졌다."
헤키테우스는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였고 기원전 321년에 이집트로 피신했던 에제키아누스라는 이름을 그리스어싣으로 명명한 것으로,둘은 동일 임물로 볼 수 있다.기원전 4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동전 위에는 '통치자.예헤제키야'라고 씌여져 있다.동전에 새겨진 이런 문구는 페르시아 시기에 제사장과 통치자,성직과 세소직이 점점 동일시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남 유다 왕국 역대 군주들 중 가장 착하고 훌륭한 임금이었던 히스기야(히즈키야/헤제키야. 영어식: '헤즈카이어')도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그도 말년에 범죄하여 나라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니까요. 그러나 정작 징벌은 당대가 아닌 후대에 옵니다. 이 범죄는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기를 가져 오게 되는 주요인입니다
또한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기원전 366-기원전343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반란 가운데 한번쯤은 유다의 지도층인 제사장들이 참여했음을 알려준다.'고대의 민족 문자'로 된 글귀를 새겨넣었다.언어인류학자들에 따르면,언어 그중에서도 특히 문자는 저니적,민족적 이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결국이 동전들은 당시의 유대 민족주의 운동을 제사장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람어가 판치는 세상에서의 히브리어
페르시아 점령기에 히브리어는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었다.페르시아의 제국 행정에서 사용된 아람어의 빠른 확산으로 인해 히브리어는 그 존재조차 위협을 당하기 때문이다.페르시아 시기로 연대가 추정되는 수백여 개에 달하는 아람어 문헌 이 발굴되었는데,이는 시골 산간의 사람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칠 정도로 팔레스타인에 아람어가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를 증거한다.
페르시아 시기에 히브리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문화적 일체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이념적 주장을 담고 있었다.아람어를 사용한 수백여개의 토기조각 문서,인장,파피루스 문서,글이 새겨진 공예품과는 대조적으로 ,히브리어 기록물은 그 수가 너무나 적어 페르시아 시기에도 히브리어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겨우 알게 해줄뿐이다.히브리어 기록물의 개수는 다섯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만큼 적다.
기원전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제사장.통치자.등의 말을 옛 히브리 문자로 기록한 동전이 몇 개 있을 따름이다.그러나 옛 히브리어 문자를 부활시킨 이 동전 몇 개의 존재는 히브리어가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시기에 완전히 소실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페르시아 시기 후반의 유대 공동체에서 히브리어의 이념적 역활을 알려준다.예헤제키야의 동전들이 제조되고 한 세기쯤 지난 다음,하스몬 왕가 사람들도 자신들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에 일부러 히브리어를 새겨 넣곤 했다.기원전 2세기에 일어난 바르 코크바의 반란에서도 동전에 고대 히브리어를 새겨넣었다.비록 그 시기에는 히브리어 사용이 상징적인 용도에 그쳤고,동전에 새겨진 히브리어 자체도 실수 투성이였지만 말이다.분명한 사실은 히브리어를 계속 말하고 읽었다는 점이다.일부 성경은'이때 히브리어로 기록되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의 (예레미야서와 사무엘기를 포함한)성경 사본들은 히브리 성경을 베끼며 그늘을 짙게 드리웠을 뿐이다.
아람어는 제2성전기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 대다수의 모국어가 되었다.가령 나사렛 예수의 모국어가 되었다.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계속 사용하기는 했다.유대인의 성경은 대개 히브리어로 되어 있었다.히브리어는 기도할 때 사용하는 언어였고,종교적 가르침과 토론,논쟁을 벌일 때도 사용되었다.카르벳 쿰란 교단은 자신들이 문헌에서 아람어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지만,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아람어는 유대인의 모국어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에도 쓰였고,이란에서 터키,이집트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서기관들의 공용어였다.
페르시아 시기로 연대가 추정되는 문헌을 수없이 많다.이는 아람어로 된 문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아람어는 점토판,금속판,돌판,파피루스 등에 기록되어 보존되었다.결혼증서에서부터 아히칼 이야기와 같은 지혜문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문학 장르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이집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작성한 한 편지는 엘레판틴에 성전 건축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인데,이 또한 아람어로 씌어졌다.경제나 외교,행전 관련 문서,계약서,인장에 들어간 글도 마찬가지였다.이는 페르시아 제국 차원에서 아람어 사용을 강요했다기보다는 지방 정부에서 자체적으로 아람어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유다에서 발견된 인장 자국은 모두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시기의 텔 엔 나스베(미스바),그리고 기원전 500년 전후 예루살렘의 지방행정 구조를 말해준다."라고 했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인장으로 (이사야 18장)
예제벨 왕비의 오팔 인장. 히브리어 이름과 이교 상징물이 새겨졌다.
네리야의 아들인 서기관 바룩
최근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은 진흙으로 만든 인장을 발굴했습니다. 7세기 히브리 문서로 확인된 문서에 찍혀 있던 인장이었죠. 문서는 7세기 후반이나 6세기 초의 히브리 문서입니다. 그 인장에 나온 이름은 네리야의 아들인 서기관 바룩이었죠. 만약 바룩이 신명기의 역사가인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보는 이 인장은 곧 성서의 저자 중 한 명의 서명인 셈입니다.”
페르시아 시기에 글은 아주 다양한 소재 위에 기록되었다.아람어는 대제국의 행정언어였으므로,아람어로 된 문헌이 그토록 많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사실 아람어 문서는 대개 예후드 밖에서 발견되었다.그러나 예후드에서도 상당량의 아람어 문헌이 발견되었다(행정,경제,법에 관한 문서)
에스라기와 다니엘서의 많은 부분이 아람어로 기록된 것도 이러한 상황에 부합한다.더욱이 아람어가 후기 성경 히브리어와 랍비 히브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히브리어(Hebrew)는 아람어(Aramaic)와 알파벳이 같고 문법 규칙도 비슷한 점이 많아서 매우 가까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구약 성경은 순수하게 히브리어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아람어로 씌어진 내용이 일부분 포함되어 있으며, 어떤 부분은 아람어로 기록하였던 것을 나중에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을 정도로 두 개의 언어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구약 성경 중에서 아람어로 씌어진 구절이나 본문이 있는 곳은 네 개의 책에서이다. 아람어 본문이 제일 많이 나타나는 곳은 다니엘서인데 2장 4절부터 7장 28절까지 다섯 가지 이야기를 아람어로 기록하였다. 다음으로는 에스라 4:8-6:18에서 성전 건축의 방해 끝에 준공되는 과정까지와 7:12-26에서 에스라의 영도로 제이차 귀환하는 내용을 아람어로 기록하였다. 특히 에스라 4:7은 이후의 내용을 아람문자와 아람의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다고 알려주고 있다. 다음은 예레미야 10:11에서 우상숭배자들을 저주하는 내용의 한 구절이 아람어로 되어있고, 마지막으로 창세기 31:47에서 야곱과 라반이 미스바에서 언약을 맺으면서 '갈르엣'과 '여갈사하두다'라고 부른 말이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좁은 의미로는 다메섹을 수도로 하며 북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아람'이라는 나라에서 사용한 언어를 가리키지만, 일반적으로 아람어라고 할 때는 셈어 계통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역과 수리아(Syria) 지역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한 고대 근동의 대표적 언어를 뜻한다. 따라서 아람어는 지역에 따라 크게 갈대아 아람어와 수리아 아람어로 나누는데, 성경에 사용되고 히브리어에 영향을 많이 준 아람어는 그 중에서 갈대아어(Chaldee)로 불리는 아람어이다.
아람어가 히브리어에 영향을 끼친 역사를 살펴보려면 먼저 히브리어의 역사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최초의 히브리어는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 오는 시기인 BC 21-20 세기경에 사용된 셈어(Semitic)인데, 이때 그들이 사용한 히브리어는 그들의 본향이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어와 악카드어와 관련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그들이 가나안에 거주하면서부터는 가나안어에 동화되어 발전한 것이 최초의 히브리어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후 히브리어는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이거하면서 약 400 동안 함어(Hamitic)인 애굽어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BC 15세기경 모세가 성경을 최초로 기록할 때의 히브리어 서체가 현재의 아람형 장방형 문자(Aramic Square Letter)가 아닌 애굽의 상형문자를 모방한 예리한 서체임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출애굽 후에 가나안에 다시 정착하면서 히브리어는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히브리어는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문명을 교류하면서 셈어와 함어의 영향을 골고루 받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아람어의 기원과 유래
1) 셈어의 중북부 어군 또는 북서부 어군에 속하는 언어.
2) BC 1000년 무렵부터 시리아·메소포타미아에 많은 소왕국을 세운 아람인의 언어로 3000년의 역사를 가진다.
3) BC 10세기∼BC 8세기의 언어를 고(古)아람어라 하고 계속해서 BC 4세기 무렵까지의 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페르시아 각 제국에서 사용된 아람어를 제국아람어라 한다. 이 시대 아람인들은 정치적 자립을 잃었으나 아람어는 중동 일대의 공통어로서 이집트·에게해·카스피해·인더스강에 걸친 영역으로 퍼졌다. 유대인의 헤브라이어도 점차 아람어로 바뀌어 《구약성서》 일부분의 아람어도 이때에 유래한다.
4)BC 7~6세기에 아람어는 차츰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근동지방의 링구아 프랑카(국제혼성어)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5)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시대에 아람어는 히브리어 대신 유대인의 언어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과 〈에즈라〉는 아람어로 씌어 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유대 율법과 주해를 집대성한 책)와 예루살렘 〈탈무드〉도 마찬가지이다.
6)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7) 아람어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시기는 BC 300경~AD 650년경이었고, 그후 아람어는 아랍어에 밀려났다.
8) 아람어는 동·서방언으로 갈라졌는데 서아람어는 나바타이어·팔미라어와 같은 북아라비아어와 팔레스타인방언이고 동아람어에는 시리아어와 메소포타미아방언이 포함된다. 특히 시리아어는 1세기 이후의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언어이고, 풍부한 그리스도교 문헌을 낳았으며 번역을 통해 고대 그리스문헌을 널리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세기 이후 아람어는 이슬람과 아라비아어의 세력 신장으로 점점 사용영역이 좁아졌으며 지금은 이란·시리아·구소련 등지에 동·서 두 방언의 사용자가 몇 십만 명 남아 있을 뿐이다.
아람어가 새겨진 주화
북셈계 알파벳의 한 종류로 자음만으로 표시되는 22개의 문자로 되어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쓴다.
BC 10세기의 비문에 남아 있는 문자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이후 제국아람어기를 거쳐 아람어가 동·서로 분열됨에 따라 나바타이문자·팔미라문자·시리아문자 등이 탄생하였다.
또한 동쪽으로 전해져 아람어 이외의 언어 표기에도 이용되어 페플레비·소그드·위구르·몽골·만주 등의 여러 문자가 만들어졌다.
서방파방언에는 구약성서의 아람어나 사마리어, 또 그리스도가 쓰던 크리스트 팔레스티나 아람어 등이 있는데, 시리아의 일부에서는 현재도 쓰이고 있다.
동방파방언에는 바빌로니아 탈무드, 시리아어 ·만데아어 등이 있고, 현재도 아르메니아나 메소포타미아의 일부에서 쓰인다.
아람어는 고대 바벨론 문명의 언어인 악카드어의 언어적 유산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BC 14-13세기경 아람인들이 가나안 북방으로 이주해 오면서 가나안어에 영향을 줌으로써 히브리어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고학을 통해 발견되는 증거로는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 시대인 BC 9세기경 아람어 기명(Inscription)들이 가장 오래된 것들이어서 이전 시대의 아람어 역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람어가 히브리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BC 722년 북왕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살만 엣셀 왕이 앗수르를 비롯한 바벨론, 구다, 하맛 등지의 아람어를 사용하는 족속들을 북 이스라엘 땅 사마리아에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면서부터이다.
북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여세를 몰아서 남 왕국 유다에게도 총공세를 퍼부었는데, 열왕기하 18:26에 보면 당시의 앗수르 장수 랍사게는 유다 백성들에게 투항을 권유할 때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동시에 구사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유다 마저도 앗수르 후신국(後身國)인 바벨론에 의하여 BC 586년에 멸망당한 후 바벨론 포로와 팔레스타인의 이민족 이주정책이 계속됨에 따라 히브리어는 아람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후 BC 538년에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여 아케메네스(Achaemen
es) 왕조를 세운 고레스는 아람어를 바사 제국의 공용어로 채용하였다. 그 이전의 아람어가 구어(口語)로서 발전하였다면 바사 왕국에서 아람어는 공식적 행정 언어로서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아람어가 국제 공용어가 되면서부터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까지 사용하게 되자 아람어는 구문법과 어휘에서 다른 언어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독특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바사 시대 근동에서 계속 사용되어진 아람어는 BC 3세기경 헬라가 근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표준어로서의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헬라어에게 제국 공용어의 위치를 내어주고 말게 되었다. 그 후 아람어는 제국 공용어가 아닌 각 지방의 방언으로 해체되어 나름대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아람어는 동부 아람어와 서부 아람어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동부 아람어는 수리아어, 바벨론어, 탈무드의 아람어, 만다어 등이 포함되며, 서부 아람어는 팔레스타인과 사마리아 지역의 아람어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일상 언어로서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히브리어는 종교적으로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따라서 바사가 망하고 헬라 시대에 비록 헬라어가 표준어가 되었어도 완전히 다른 체계의 언어인 헬라어보다는 친숙한 아람어를 버리지 않았다. 두 언어간에 적어도 문자는 완전히 일치하는데, 그것은 BC 3-2세기경에 히브리어 알파벳을 고안할 때 아람어의 각문자(角文字)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음운 현상이 비슷하고 단어 또한 서로 비슷한 것들이 많이 있다. 한 마디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가장 가까운 형제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스텐은"70인역은 번역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 당시 사용되던 히브리어식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하면서.이 범역본에 나오는 여러 변칙적 표현들을 지적한다.재미있는 한 예로,성경 전체에서'외국인 거주민'을 뜻하는 성경 히브리어 단어는 '게르'이다.그러나 제2성전기의 종교적 변천 과정을 거쳐 이 히브리어 단어는 사해사본이나 랍비문학에서'개종자'라는 의미로 바뀌었다.70인역에서는 이 단어'게르'를 개종자로 번역함으로써 번역자들이 당대,즉 후기 히브리어를 바탕으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중요한 점은 기원전 3세기의 히브리어는 이미 너무나도달라져서 히브리어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따라서 히브리어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때,성경의 기록 시기를 페르시아 시기 말이나 헬레니즘 시기로 잡기는 불가능하다.
사실은 이 글자는 아람어 글자예요. 히브리 사람들이 페르시아 시대 이전에 쓰던 글짜다.
페르시아 시기의 글쓰기와 성경
페르시아 시기에 히브리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언어가 되었지만,글쓰기 자체의 역활은 더욱 중시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표준 아람어를 고대 근동 전역의 공용어로 채택했다.이 '공식 아람어'는 ㄴ이란에서 이집트까지 거의 동일한 형태로 사용되었다.아람어의 이런 획일성은 페르시아 제국이 강력한 형태로 사용되었다.이람어의 이런 획일성은 페르시아 제국이 강력한 행전체계를 수립하고 각 지역에 서기관들을 퍄견했음을 말해준다.이람어의 영향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기록된 성경 부분에 자연스럽게 나타난다.특히 에스라기도 상당 부분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히브리어가 지속적으로 쓰이던 때조차도 공용오인 아람어의 영향은 고스란히 히브리어에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아람어는 성경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에 기록된 책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아람어가 널리 사용되던 시기에 그 책들이기록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성경을 구성하는 책들은 대부분 그연대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성경의 기록시기를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성경 각 권의 연대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다만 에스라-느헤미야기와 역대기는 확실히 페르시아 시기의 작품이다.
다니엘서의 연대는 헬레니즘 시기이다.다만 다니엘서에서 아람어로 기록된 부분은 페르시아 시기에 씌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에스더기의 연대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2세기 사이인 것은 틀림없지만,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럽다.이 책은 언어나 내용상의 특징으로 볼 때,페르시아나 헬레니즘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욥기는 도입부에 산문 해설 부분이 있는데,이는 페르시아나 헬레니즘 시대에 첨가된 것이다.즉 운문 형식의 글은 더 이전 시개의 것이겠지만,나중에 편집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다.아가서와 전도서의 연대는 아직도 논란 중에 있다.왜냐하면 이 책들에는 아람어의 영향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많은 언어상의 변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많은 학자들은 이 책들에 히브리어의 다양한 사투리가 반영되어 있으며,따라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지어졌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았다.여기서 많은 경우,증거에 대한 평가는 언어적 자료에 관한 추측에 상당히 의존한다.그러나 성경에서 아람어의 지대한 영향을 보여주는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서기관이 사용한 언어가 아람어였고 시리아-팔레스타인의 고유 방언 역시 아람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감안할 때,후대에 기록된 글에는 아람어의 영향이 깊숙히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이런 영향은 전체 성경의 일부에서만 나타난다.왜 그렇까 답은 간단하다.페르시아 제국 시기는 성경의 각 권이 처음으로 기록된 시기가 아니라 이미 있던 자료의 수집과 편집만이 이루워졌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에서의 유배생활 후에, 나라의 많은 유대인들이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말하고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관계된 셈어이다. 앗시리아와 페르시안 제국의 시대로부터 근동지역에서 통용이 되는 공용어였다. 많은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의 유배기간 동안에 아람어를 배웠다. 성경의 두 개의 책들, 즉 에스라와 다니엘은 아람어로 쓰여졌다. 느헤미야 8장에서는 율법학자인 에스라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토라의 내용이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지시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후의 몇 세기동안 히브리어의 복원(revival)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특히 이러한 경향은 기원전 2세기의 민족주의자들이었던 하스몬 (Hasmonean) 통치자들 하에 더욱 두드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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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시기에 서기관들이 배운 어어는 당연히 아람어였다.이는 에스라=느헤미야기에 명벡히 나타난다.예를 들어 느헤미야기 8:8에서는"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이 본문은 기원전5세기에 예루살렘의 청중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토라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이 본문에서'통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메포라쉬'가 시사하듯이,하나님의 율법책은 '통역'또는 '번역'되어야 했다.(스라기4:18)
여기서 히브리어 '메포라쉬'는 아람어에서 차용한 말로,페르시아 제국에서 행정상의 전문 용어로 쓰인다.말하자면 이 표현을 통해 느헤미야기의 저자가 페르시아의 행정기관에서 아람어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예루살렘에 있던 제사장 신분의 도시 엘리트들은 아람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람어를 일상적으로 사용 했을 분만 아니라,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람어로 정식 서기관 교육을 받았다.이 교육은 페르시아 제국의 든든한 후원으로 이루워졌다.
반면에,히브리어로 서기관 교육을 받고자 해도 이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은 거의 없었다.구어체 히브리어는 꾸준히 사용되었지만,아람어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실제로 느헤미야는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통해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그때에 내가 또 보니,유다 남자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의 여자들을 데려와서 아내로 삼았는데,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절반이 아스돗 말이나 다른 나라 말은 하면서도,유다 말으 못하였다."(느헤미야기13:23-24)'아스돗 말''다른 나라 말'은 모두 아람어의 다양한 방어을 가리킨다.이 구절은 히브리어의 명백이 이어지기는 했으나 ,아람어가 깊숙히 침투해 있었던 서실을 함축하고 있다.그러나 느헤미야기 자체가 아람어의 영향이 짙게 밴 후기 히브리어로 씌여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느헤미야는 고전 히브리어로 글을 스지 않았다.느헤미야가 히브리어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개탄했을 때,그것으 고전 문어의 소실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문학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당시의 구어체 히브리어 구사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성경,더 나아가 유대 문학에는 역사적 공백이 존재한다.가장 큰 공백은 기원전 6세기~기원전 2세기였다.성경의 모세오경에는 유대 민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왕정에서 바빌론 유수까지는 산문으로 자세히 설명해두었다.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대강 넘어간다.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제외하면,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를 다룬 유대 문학은 찾아보기 어렵다.스룹바벨과 그 동시대인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무대에서 퇴장하고 기원전515년에 성전이 완성된 이후부터,전통적으로 기원전 458년으로 알려진 에스라의 등장 시기까지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이 문에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고대의 유대인이라는 책에서 이 시기의 역사를 기록해보려고 했다.이 책은 모세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요세푸스 당대까지 유대인의 역사를 들려준다.유대 문학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마카베오서.(구약성경의 외경으로,카톨릭에서는 정경으로 채택)에서 다시금 유대인의 역사를 다루게 된다.
기원전 3세기에,히브리 문학은 다시금 부흥한다.마카베오서 상권,집회서,요벨서,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니엘서는 기원전 2세기에 씌여졌다.
[신구약 중간사 특강1] 마카비 혁명과 하스몬 왕조시기 - 김재구 교수
이는 민족주의를 앙양하려는 뜻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로한 하스몬 왕가 덕분이었다.
John Hyrcanus I
Aristobulus I
하스몬 왕가 사람들은 고대 히브리어 문자를 되살리려 했고 동전 위에 이 문자를 새겼다.쿰람 교단도 히브리어 사용을 정체성 확립을 위한 강력한 이념의 일환으로 삼았다.
그들은 사해사본에 들어 있는 많은 새로운 문서를 작성했다.이들의 히브리어는 성경의 히브리어나 기원전7세기의 문헌에서 사용된 히브리어와는 판이하게 달랐으며,이후 랍비 히브리어(미슈나 히브리어)의 모체가 되었다.아람어느 계속해서 히브리어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쳤다.페르싱 제국시기에 일단 아람어가 고대 근동이 공용어가 되고 나자 히브리어에 대한 아람어의 침투를 막을 수 없었다.
우리가 성경 히브리어를 연구할 때 부딪히는 문제 가운데 이스라엘 왕정과 페르시아 시기 사이에 서기관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다.바로 앞 장서 지적했듯이,서기관 전통은 바빌론 포로기를 포합해서 기원전6세기 내내 제한적으로나마 지속되었다.사람들이 거의
더난 가난한 유다 지역에서 서기관 조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그결과 서기관과 히브리어는 분리되었다.페르시아 시기의 역사를 다룬 연구서(페르시아 지배하의 유대교)에서 '문명률이 너무 높아서 사람들은 글로 기록된 율법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율법이란 글자에 의존하는 기록된 문장이라기보다는 습관이었다"고 주장한다.특히 사람들이 주로 농업과 목축에 의존하며 작은 마을에서 살던 페르시아 관할의 예후드에서 문명률이 상당히 높았음은 분명하다,그러나 글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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