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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꿈이 미래를 결정한다(창42:1-9)

구원의 계획 2017. 4. 5. 09:28

현재의 꿈이 미래를 결정한다 (창 42:1-9)

 

성경을 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성경 구절이 많이 있지만 제일 슬프게 하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신명기 34장 4절의 말씀입니다.

"바라만 보고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가 40여년 동안 모진 사막 광야의 생활을 견디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많은 원망과 불평을 견딜 수 있었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수많은 고난과 원망과 불평과 참고 견뎠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고자 애굽의 왕궁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청청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바라만 보고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이 말씀의 원어의 뜻은 네 지신이 겸손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공식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끝없이 안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환경이, 여건이 얼마나 힘들다 할지라도 이 한 말씀을 꼭 붙드십시오.

'겸손으로만 무장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십시오. 더 겸손하십시오. 누가 하나님께 모세만큼 신뢰를 받고, 또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모세만큼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그 또한 한 순간의 마음의 흐름을 감당하지 못해서 백성의 불평과 원망 앞에 반석을 치고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마다 때마다 겸손함으로 내 마음의 흐름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내 안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비전을 받은 사람은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재능이 탁월한 엘리트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끝까지 겸손하면 때가 이르면 너를 세운다"는 말씀이 우리의 남은 생애에 이정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 해를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붙들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십시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먹이시고 배부르게 하십니다.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때마다 건지시고 아름답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의 사명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비전 속에 모든 사람이 감격하고 감동하고 뛰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찾아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과 편리함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섭리로 그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이 지치고 환멸에 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소망을 전파하십시다.

"주여! 이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작은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을 건강하게 하십시오. 생각이 병든 인생은 육신이 병든 사람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람인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느 때나 긍정적인 생각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적인 생각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캄캄한 밤길을 거닐지라도 생각까지 캄캄해지면 안됩니다.

 

우리는 똑같은 상황에서도 불평할 수 있고,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 앞에서도 부정할 수 있고, 긍정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구렁으로 빠질 수도 있고 최선의 삶, 최고의 행복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의 차이입니다.

 

어떻게 해야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 주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부정은 긍정으로 바뀌어집니다. 불행은 행복으로 바뀌어집니다. 마이너스는 플러스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부정은 사라지고 긍정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기쁨과 행복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괴로움을 긍정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분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느 시골에 이름 없는 한 양치기 소년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갑니다. 주인의 집에서 의롭게 살려다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고 지하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암울한 지하 감옥에서 모든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살아가지만 그 소년은 항상 건강한 생각으로 꿈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 소년의 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아이가 한없이 어리석게만 보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비참해지고 초라해질수록 그는 자신의 꿈을 더 분명하게 그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임금의 마음을 사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임금이나 가지고 있을 수 있던 어인을 받고, 세마포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옷을 입고 대신들 앞에 섭니다. 만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요셉입니다. 아마도 오늘처럼 매스컴이 있었다면 세계가 떠들썩했을 것입니다.

"노예 소년이 대 제국의 국무총리가 되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인 41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렇게 본문의 42장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극심한 기근 때문에 각 나라의 백성들이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일행들 속에는 요셉의 형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양식을 사러 애굽에 온 형들이 애굽의 총리가 된 동생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눈앞에 위엄 있게 앉아 있는 그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을 포함한 열 한 형제들은 똑같이 양치기 야곱의 아들로 태어나 한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요셉의 나이 17살에 헤어져 20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동안 요셉은 노예로 팔려와서 수많은 굴곡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제 요셉은 37세의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20년 만에 만나보니 요셉과 다른 열 형제들과는 그 차이가 너무나도 엄청나게 커져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은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애굽의 총리입니다. 그런데 다른 열 형제는 여전히 양치기로 살아갑니다. 더구나 먹을 것이 없어서 양식을 사러 온 상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행색은 거지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의 차이는 환경적인 차이나 신분의 차이보다도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무르익은 성품, 빛나는 인격, 지금 세계적 경제공항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요셉의 지도력에 비해서 여전히 서로를 원망하고, 문제를 다룰 줄 모르는 초라한 인격들, 우왕좌왕하는 형제들의 리더십 너무나도 큰 간격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토록 큰 차이가 나게 만들었을까요? 꿈의 차이입니다. 꿈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요셉과 형제들, 그들은 똑같이 문제 많은 콩가루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험산 계곡을 지나며 자신을 다듬어 왔습니다. 그러나 열명의 형제들은 요셉의 꿈을 시기하고, 원망만 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과 요셉을 향해 악한 계획을 세우고 거침없이 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만나보니 하늘과 땅 만큼이나 그들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씨앗 중에 제일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러나 꿈의 씨앗은 겨자씨보다도 더 작습니다. 꿈을 꿀 때는 그 씨앗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고 또 자라다 보면 그 차이는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요셉, 그는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남의 꿈을 찢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만나보니 찢은 것은 요셉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찢겨진 것은 요셉의 채색옷이 아니었습니다. 형들 자신의 인생을 찢은 것이었고, 자기 믿음과 자신의 꿈을 찢은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얼마만큼 행복한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이 인생의 방향과 크기를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그 꿈이 인생의 색깔과 가치, 의미, 태도... 그의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좋은 꿈은 자기 자신이라는 담을 넘어 자기 가족과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20년 만에 만났던 열 한 형제, 이제 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꿈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였다. 꿈이 인생을 결정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현재의 꿈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꿈이 내일을 결정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꿈이 미래의 여러분을 결정할 것입니다.

 

흔히 듣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양계업자가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서 달걀과 함께 부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독수리가 자신이 독수리인 것을 알지 못하고 어미 닭을 쫓아다니며 먹이를 쪼아먹고 있었습니다. 양계업자는 닭이 아닌 독수리를 날개하기 위해서 담장 위에 얹어 놓아도, 지붕 위에 올려놓아도 비틀비틀 거리다 떨어지곤 했습니다.

 

이 독수리를 하늘 창공으로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서 높은 절벽 위로 독수리를 안고 올라갔습니다. 마침 절벽 위를 날으는 독수리 떼가 보였습니다. 그 독수리를 보여주며 "얘야, 너는 독수리란다."라고 말하면서 벼랑을 향하여 힘껏 집어 던졌습니다. 처음에는 비틀비틀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듯 보이더니 곧바로 날개를 쫘-악 피고 캬악- 소리치며 창공을 솟아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를 독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병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독수리 인생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독수리 같은 인생이 되어서 더 높이, 더 힘차게 꿈을 향하여 날아오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꿈을 안고 달려가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꿈을 안고 달려가는 사람은 결코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쟁이가 되십시오. 꿈을 안고 내일을 향해 날아오르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은 흉년이란 삶의 위기 상황 속에서 야곱의 자식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보십시오. 야곱의 열 한 아들들은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속수무책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우유부단한 성격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기근이라는 문제 앞에서 문제만 묵상하고 있습니다. 가족에게 밀어닥친 문제 앞에 압도당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꿈이 있는 자와 꿈이 없는 자의 차이입니다. 꿈이 없는 자는 문제 앞에 망연자실합니다. 문제 앞에서 그저 그 문제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자는 문제를 보지 않습니다. 그 문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기대합니다. 그 문제 속에서 역사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합니다.

 

이 기근 속에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숨어 있음을 요셉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그 가족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곡식 문제로 큰 일을 행하실 것을, 흩어진 가족이 만나게 될 것을, 애굽으로 들어가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게 될 것을 이미 하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알 길이 없었던 야곱과 열 형제들은 마치 병아리 새끼들처럼 아버지 그늘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만 보고 있느냐?"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이것이 바로 꿈이 없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꿈꾸는 독수리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늘 꿈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면 그것을 내 꿈으로 붙들었습니다. 소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기도해서 꾼 꿈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문제는 언제나 또 다른 기회가 되었습니다. 과거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원망하고 원수를 묵상하고 분노를 품고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꿈이 있는 자와 꿈이 없는 자의 차이입니다.

 

이제 야곱은 병아리 같은 자식들을 애굽으로 내 쫓듯이 떠나보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잠언 기자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그렇습니다. 비록 야곱은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식들을 애굽으로 내 쫓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기근을 통하여 요셉의 형들을 요셉 앞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형들이 애굽까지 왔지만 요셉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애굽은 대단히 큰 나라입니다. 양식 판매는 애굽 전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창고지기가 아닙니다. 양식을 사러온 걸인 행각들을 일일이 만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체를 관리하는 총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열 형제가 요셉 앞에 오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이때쯤 자기 가족들이 애굽으로 쌀 사러 올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역, 아니면 적어도 가나안에서 오는 상인들은 요셉 자기 앞으로 직접 데리고 오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요셉 앞에 나아온 형들의 행동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그들은 별 생각 없이 큰 권력을 가진 애굽의 총리에게 왔으니 땅에 엎드려 절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9절 말씀에서는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고 옛날에 꾼 꿈을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외에도 형들이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한 장면들이 창세기 43장 26절, 28절과 44장 14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20년 만에 만났다. 만약 그 요셉이 저와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나를 죽이려고 외국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린 인정 없는 형님들에 대해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차분하게, 지혜롭게 이 사건을 대처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복수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형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인가? 양식을 넉넉하게 싸서 아버지 곁으로 보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웠겠습니까? 남은 식구, 특히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 있을까? 흉년은 앞으로 7년이나 계속될 것인데 어떻게 사랑하는 내 가족을 이곳으로 인도하여 살릴 수 있을 것인가? 부족한 나를 통하여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꾼 꿈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 순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할까? 요셉은 진지하게 이 사건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요셉이라는 인물의 됨됨이입니다. 총리로 지명 받고 그 향연이 계속되고 있을 때에 이제 꿈이 이루어졌구나 하고 부귀영화에 도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라를 살피기 위해 안락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총리가 되는 것이 꿈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섬기는 것, 나라와 세상을 살리는 것이 목적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사브낫바네아다. 내가 세상을 살린다. 요셉은 자신이 살아온 목적과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조그마한 성공과 성취가 있다고 너무 쉽게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성공은 위기일 수 있습니다. 성공 자체가 목적인 줄 알고 너무 쉽게 허리띠를 풀고 성공에 눌러앉아 본래의 사명, 본래의 목적, 초심을 잃어버리는 삼류 졸장부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공과 권력을 움켜쥐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손을 펴고 나누고 섬기라고 준 것입니다. 권력은 움켜쥐면 주먹이 되고 힘이 되어 사람을 다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먹을 펴면 사랑의 보자기가 되어 아픈 사람을 감쌀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은 높은데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낮은 데로 내려가는 것임을 요셉은 알았습니다.

 

요셉이 꿈을 붙들고 살아온 것 같지만 꿈이 요셉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기도를 붙들고 살면 내가 기도를 붙잡은 줄 알았는데 기도가 나를 붙잡아 줍니다. 내 삶은 시시한 삶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사브낫바네아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는 영광스런 삶이다. 요셉은 자기 선언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끊임없이 자기 선언을 하셔야 합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간 존재가 아니다.

나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나로 인하여 우리 교회가 부흥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에 엎드려 절하며 쩔쩔매는 형들을 보면서 요셉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형님들 제가 요셉입니다." 보라는 듯이 자기를 밝히고 자랑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빨리 쌀을 실어보내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동생의 안부가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고향 땅의 소식은 얼마나 듣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자기 감정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꿈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차분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감정으로 꿈을 다치게 하지 마십시오. 성급한 판단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멈추게 하지 마십시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이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때때로 너무 성급한 판단과 감정 때문에 꿈을 그르칠 때가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요셉에게 있어서는 빈 자루에 양식을 채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의 빈 가슴에 하나님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말씀과 꿈을 채워주고 싶었습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꿈이 얼마나 정확하게, 얼마나 섬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서투른 동정과 어설픈 감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꿈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나를 넘어서 내 형제들에게, 내 형제들을 넘어서 내 가족과 가문, 그리고 민족과 열방을 향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제할 수 없는 그 격한 감정의 순간에도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친 세상 한복판에서 거칠게만 살아왔던 요셉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마음 밭은 상처로 얼룩진 가시밭 같았을 것 같은데 지금 따뜻한 온기가 한껏 느껴집니다. 요셉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청년시절을 보내며 잔인하고도 차가운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 밭이 얼음장이 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마음을 복수심과 원한으로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지켰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것이 성공이요 승리임을 알았습니다.

 

형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동생 베냐민에 대한 그리움이 속속 베어있습니다. 창세기 42장 본문에서 베냐민을 지칭하는 말이 대명사까지 합치면 16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통역을 세워 심문을 하는데 형들이 히브리말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요셉은 다 듣습니다. 자신이 형들에게 매달려 애걸하던 상황을 형들이 말하자 요셉은 그 방을 뛰쳐나가 엉엉 울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43장에서는 동생 베냐민을 보고 웁니다. 45장에서는 큰 소리로 웁니다. 방성대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꿈꾸는 자 요셉에게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하면서도 감옥에서 엎드려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물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눈물은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픔을 치료해 줍니다. 눈물은 영혼을 맑게 해 줍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 우는 눈물, 감사해서 우는 눈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우는 눈물이라면 더욱 아름다운 눈물입니다.

꿈을 이루는 자는 마음이 따뜻합니다.

 

소위 감성지수가 높습니다. 감성지수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좋은 방향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감성지수란 타인의 감정도 잘 이해하고 함께 감정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감성지수란 자신과 타인 그리고 공동체를 행복하고 기쁜 방향으로 동기 부여해 주는 능력을 말합니다. 요셉을 비롯한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현재의 꿈이 당신의 미래 인생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꿈을 꾸고 계십니까? 그 꿈을 꾸며, 꿈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하십니까? 당신의 행복한 꿈은 가족을 살립니다. 이웃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꿈은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꿈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꿈의 질적인 차이가 인생의 질적 차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현재의 꿈이 미래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주 안에서 꿈을 꾸십시오. 나를 향한 꿈을 말입니다. 내 가정을 향한 꿈을 말입니다. 내 교회를 향한 꿈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득 안고 뜨거운 헌신으로 달려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