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출애굽기 3;13~22)
설교: 김병삼 목사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3-22]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봄비로 내리는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지난주 변화산 설교를 준비하려고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제주도가 90년 만이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싹 타들어 가던 초목이 하룻밤 소낙비로 푸름을 회복한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많은 사람이 사업이 안 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이름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지요.
하지만 이름만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름이 어떤 능력을 갖추느냐의 문제입니다.
‘짝퉁’이라는 것 역시 잘 나가는 이름이나 물건을 비슷하게 바꿔나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제가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이단’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흉내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목포에 갔을 때, “목포 만나교회”라는 사인을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우리교회의 로고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천지 이단이 우리 교회의 이름과 로고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신뢰감을 얻기 위해 만나 교회를 사용한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해보시지 않았나요?
얼마 전까지 저는 우리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단이 많이 들어와 우리 교회에서 변화되는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짝퉁이 처음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진짜 앞에서 자신의 짝퉁스러움을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름을 도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알기 위해 참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단을 무서워해서 그들을 알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참된 진리를 아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제가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완벽하게 해석해 준다는 단체가 있다면 대부분이 이단이라는 것, 요한계시록을 완벽하게 해석해준다는 성경공부 대부분이 이단이라는 것.
아무나 알지 못하도록 계시한 성경을 완벽히 아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이 완전히 아는 것이 가능한가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은 대부분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사명자가 되어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사명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 보내는 이가 있고, 그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보내신 이의 ‘권위’입니다. 누군가 “이 사람이 보냈다!”라고 하면 신뢰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모세에게서도 “하나님은 어머니에게 들어서 알던 하나님, 혹은 역사 속의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에게도 분명한 확신이 없었고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물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확실성”입니다.
권위는 또한 신뢰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신뢰하지 않는 권위는 압력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세 앞에 주어진 사명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장정만 60만이 넘는 민족을 이끌어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들이 따라오겠습니까? 자신을 보내신 이가 누구인지 사람들이 신뢰할 수 없다면 그들이 모세를 따르겠냐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사명은 우리를 보내신 이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
송명희 시인이 썼던 초창기 시에 [그 이름]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알았을 때, 그 이름은 ‘보석’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누군가의 능력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이전에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고 놀라운 사명자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 역시 숨겨진 비밀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아는 순간 그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석’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그 하나님의 이름이 밝혀집니다.
문희곤 목사가 쓴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책에 아주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값을 하신다!“
그 이름이 능력입니다. 이름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가장 큰 재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기독교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다 해도, 교회의 잘못으로 세상 사람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름값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고, 만나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설명이 필요하겠죠?
모세가 하나님께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본문 1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가 아무리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모세의 처지나 형편 능력을 가지고 애굽에서 그 민족을 구원하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을 애굽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전의 떠돌이 생활에 비하면 훨씬 더 풍족한 생활을 했죠. 그리고 그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그들은 조상 적부터 믿었던 하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30년 애굽의 생활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여전히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나는 너희가 찾거나 불러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희 조상 적부터 너희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신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수많은 귀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알 때, 기뻐 찬양하고 경배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굴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지요.
어쩌면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진다고 말할 때, 수없이 많은 신 중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일본에서는 귀신도 가미사마, 여호와 하나님도 가미사마이며, 한국에선 무당들이 섬기는 천지신도 하느님이고 천주교가 섬기는 신도 하느님이라 부릅니다. 통일교가 믿는 문선명이도 자칭 하나님입니다. 봉천동에 가면 자칭 하나님 어머니도 있습니다.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영어로는 “I am who I am”이라고 하는데, “나는 곧 나다.” “나는 있으니까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에ㅎ 예흐, 아셀 에ㅎ 예흐”로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나는 내 스스로 존재하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한 마디는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영원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절대적 신분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떤 누구도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유물론자들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하지요. 오늘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전부터 계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4절과 8절, 2장 8절에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라고 하셨고,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며 마지막이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또 현재도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계시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 의존의 존재입니다. 하나님 없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 궁극적인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사명자가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늘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길이고, 너희의 진리이고, 너희의 생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준비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평강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십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누구도 항거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그 무엇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백지수표와 같은 분이십니다.
“I am that I am”은 “나는 네가 필요한 그 무엇이다.”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8편 2절에 보면, 다윗은 “나는 …이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히 이해했던 사람이라고 보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이셨고 그의 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원하는 모든 것이셨습니다.
새찬송가 441장을 잘 아시지요? A. B 심슨이라는 분이 지은 찬송 시입니다.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 원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 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나의 마음속에 지금 오셨네
나의 생명 되는 내 주 예수님, 영원토록 모셔 내 기쁨 넘치네
새찬송가 96장은 밀러라는 분의 고백적 찬송 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새찬송가 93장은 W.L. 톰슨이라는 분의 찬송입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친구 되시니 그 은혜를 간구하면 풍성히 받으리.
햇빛과 비를 주시니 추수할 곡식 많도다. 귀한 열매 주신 이는 주 예수
3, 4절은 예수는 나의 기쁨, 소망, 보호자 축복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나는 …이다.’라고 당신의 이름을 설명하여 주셨기 때문에, 다윗이 했던 그런 고백, 아브라함의 그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심슨이 했고 밀러, 톰슨이 했던 그런 고백은 우리가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누구시라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제가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인용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짐 엘리엇의 이야기죠. 1956년 휘튼 칼리지 출신의 젊은 다섯 명의 선교사가 에콰도르 정글 속 원시 부족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 살해당한 이야기 말입니다.
순진한 이 청년들이 왜 창에 찔려 죽도록 하나님께서 버려뒀느냐는 의문 속에서도, 이 사건은 풍요와 번영에 잠자던 북미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깨운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면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우카 족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자신들을 찾아와서 무자비한 일을 자행했던 외부인들을 생각하며 선교사들을 살해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공격을 받고도 도망가거나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가진 총을 사용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아우카 족을 죽이느니 죽기를 택한 선교사들을 이해할 수 없는 태도는 그들의 의식을 괴롭혔습니다. 게다가 근처 마을에 머물며 동족 여인을 돌보는 짐 얼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과 스티브 세인트의 누이 레이첼 세인트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여인들을 초청했고 자신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에서 성경이 번역되었고, 살해자 중의 한 명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아우카에서 와오리니로 이름을 바꾼 부족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 그가 사랑한 것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CCM가수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은 어느 날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의 아들인 네이트 세인트와 만나게 되고 모든 사연을 접하게 되고 나서 2001년 [Declaration]이란 앨범을 발표합니다.
이 앨범에서 그는 기꺼이 목숨을 바친 5명의 순교자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며, 창으로 찔러 죽였던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민카이’와 그를 용서한 네이트 세인트가 함께 공연을 하면서 많은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민카이의 노래 중 가슴 뭉클한 곡이, “God is God”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마침내 복음을 접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와오라니 족의 고백을 그린 노래죠.
50년 전, 에콰도르의 구름 뒤로 그 얼굴을 숨기신 하나님의 깊은 경륜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드러납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쓴 [영광의 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교회사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도 간단한 공식을 세우려는 유혹을 받는다. 다섯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 와오라니(아우카) 부족에 이만한 숫자의 그리스도인이 나와야 한다는 유혹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인과관계는 하나님 손안에 있다. 그대로 그분 손안에 두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내 정의감을 만족하게 할 방법으로 행동하시기를 내가 그분께 요구한다면, 그것은 내 마음속 왕좌에서 그분을 밀어내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조롱하는 것과 똑같은 정신이다.
“이러 이러한 결과가 따르지 않는 한 하나님은 다섯 남자에게 이렇게 행하실 권리가 없다.”라고 말하는 태도에는 불신은 물론 반항마저 들어 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영성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뿐이다. 사역도 하나님의 것이요. 소명도 하나님의 것인 까닭이다.
모세는 이 위대하신 이름과 능력을 갖추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의 이름을 친히 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서 평생을 그분과 동행하며 그의 종이 되었는데, 그는 대단한 일을 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왕궁에서 자라면서 40년이나 공부를 하고도 실패만 했던 별 볼 일 없었던 사람이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위대한 생애를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산기슭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아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연히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위대하신 이름을 가지신 분에게 붙들려 그의 심부름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순간 그의 삶이 의미가 있기 시작합니다.
그 모세가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때 실패하고 40년이나 도피생활을 하던 미디안의 목동 모세는 그 시대 세계의 지배자였던 애굽 왕 바로를 맨손에 지팡이 하나로 정복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민족 200만 명을 애굽에서 해방시켰고 독사와 전갈과 살인적인 태양빛만 내리쬐는 광야 사막에서 40년 동안이나 살아남게 했고,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했습니까? ‘나는 …이다.’라고 하신 그분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다.”라고 하신 그분께서 광야생활 내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이 필요할 때는 물을 주셨고, 승리가 필요할 때는 승리를 주셨고, 음식이 필요할 때는 음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물이셨고 음식이었고 그늘이었고 빛이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다른 무엇도 이제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밝혀 주시고 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누가 보내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신, 하나님의 대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하나님의 대사로 하나님의 사자로 애굽에 보내십니다. 당시 왕의 사신을 파견할 때는 왕의 패나 자신의 이름이 적힌 도장을 찍어 줌으로써 임무를 위임하였습니다. 더욱이 당시 애굽인은 많은 신을 섬겼는데 애굽인들은 신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 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40년 전에 백성에게 당해 보았습니다. 싸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갔을 때 “누가 너를 주제와 법관으로 삼았느냐?”라고 항의하였습니다. 누구의 권위로 이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존자 하나님 야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이미 40년이 흘렀습니다. 전혀 생소한 사람이 어느 날 백성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합니다. 모세가 노예 생활하며 갖은 고역을 감당하고 탄식하는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너의 고통을 보았고, 부르짖음을 들었고 우고를 알았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그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너희를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너희 조상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듣겠습니까? 대단한 군대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닙니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닙니다. 80세가 된 지팡이를 든 초라한 목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자존자가 너를 보낸다고 말씀합니다. 모세에게 추상적이었던 하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만난 모세에게 그 이름은 확신입니다. 담대함입니다.
사명의식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앞에 직면한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 가노라 (삼상 17:45)”
이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로 들어온 언더우드는 기도하였습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는 땅에 저희를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복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가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언더우드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어 주셨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광야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질병과 재난과 유혹과 위험이 가득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래서 부득불 시련과 곤경을 만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온갖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기 위해서 ‘나는 …이다.’라고 우리 앞에 당신의 은혜와 능력을 약속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친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분을 가까이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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