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2)-성경에 나타난 방언들(신비)
(방언을 말한 것으로 나타난 기간은 초대 교회 당시의 짧은 기간입니다. 결론적으로 방언을 한다는 것은 사도 시대나 사도 시대 이후에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고 난 얼마 후에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때에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어디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곳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
데이빗 롱(국제 동양선교회 총재)
우리는 구약에서 방언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던 요셉, 마리아, 침례 요한의 부모였던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방언을 말한 사실이 없습니다.
우리는 후에 신약에서 기적적으로 행해진 방언에 대해서 살펴보겠지만,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밝혀드리고자 합니다. 방언을 말한 것으로 나타난 기간은 초대 교회 당시의 짧은 기간입니다. 즉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기간부터 고린도전서(이 서신서를 A.D. 56∼57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할 때)를 쓴 기간까지 25년 내지 27년간입니다. 그 외에 방언을 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유다는 오순절을 경험했던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이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곱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이 서신들을 상고해보면 성령님과 성령님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27번 나타나 있지만 방언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만약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했다면) 14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초기(A.D. 56∼57년)에 기록한 서신 중에 고린도전서에서만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 방언에 관해 기록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방언을 한다는 것은 사도 시대나 사도 시대 이후에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약시대 이후
사도 시대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해야 한다고 특별히 가르쳤던 몬타너스(Montanus)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AD. 130-180년)는 "그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몬타너스는 거짓 교사였고 악신에 들렸었으므로 그가 믿고 행하고 가르쳤던 것을 믿거나 행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헬라 그리스도인들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크리소스톰(Chrysostom 4.D.347∼407년) 은 "고린도전 12장 1,2절은 지금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기록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인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사도 시대 이후로 방언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을 보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방언에 관해 기록된 성경 말씀
우리는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 방언에 관해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마가복음 16장 17절-믿는 자는 방언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 사도행전 2, 10, 19장-방언의 은사가 행해짐
● 고린도전서 12∼14장-방언이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함
이 구절들은 방언에 관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입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조심스럽게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행하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느낌과 경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려고 노력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방언에 대한 약속(막 16:17 -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마가복음 16장 17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마가복음 원본에 있었는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본을 진정으로 연구해 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마가복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주님의 약속은 열흘 후에 실제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방언을 말할 뿐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신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도행전에서 독을 마셨어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고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이후에서 이러한 일을 행했다는 기록은 읽을 수 없습니다.
실제적으로 몇몇 말씀은 명확하게 사도들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지 못했으며 사도 자신이나 그들의 동역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고후 12:8,9; 갈 4:12∼14, 빌 2:26∼30; 딤전 5:23;4:20).
주님은 이 은사를 마가복음 16장에서 "믿는 자"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지혜롭거나 신령하다는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성취(행 2장)
믿는 자들이 새 방언을 말할 것이라는 약속이 사도행전 2장에서 사실로 성취되었는데 하나님은 완전한 새롭고 색다른 어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고 영원토록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먼저 복음을 유대인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부분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표적의 가치
표적과 기적은 항상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표적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했고 경고도 받지 못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오셨을 때 일어나는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표적과 기적을 행하셔서 구세주라는 것을 증거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이 방언의 표적으로 그들의 불신을 정죄하신 것입니다.
오순절날에 하나님께서 큰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표적은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바를 성취하신 것이며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표적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대단히 큰 실수라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이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9절은"하나님께서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푸시겠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2장 3,4절은 "구원은 처음에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친히 표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표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신령한 사역이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표적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언어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으며 듣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 나라 말로 듣고 이해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말한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면 그러한 표적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그가 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언어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저에게 전해 주었고 그 언어가 바로 제가 아는 언어였으며 그러므로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진정한 기적이 될 것이며 또한 기적으로 증명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시작했을 때 도무지 시끄럽기만 하고 저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만 흔들게 된다면 그것은 표적으로써의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듣는 은사였을까?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기적은 모르는 언어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듣는 은사였다고 말합니다. 즉 이것은 사도들이 자신들이 아는 말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몇가지 이유로 볼 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사도행전 2장 4절은 "저희라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명백히 증거합니다.
(2) 그것은 새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약속한 마가복음 16장 17절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펴볼 때 모순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나라 말로 말할 때에만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그것은 성경에 언급된 다른 말씀들을 살펴볼 때 일치하지 않으며 말씀에는 항상 "말했다"고 했지 "듣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행 10:46; 19:6; 고전 14:2). 또한 그것은 오순절날 기적은 듣는 것이고 다른 말씀들은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모순됩니다.
(5) 성경에는 통역이 있을 때에만 방언을 하도록 말씀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들을 수 있다면 통역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언이라는 두 단어
사도행전 2장 안에는 방언이라는 두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4절과 11절의 방언이라는 단어는 원래 사람의 입 안에 있는 혀, 혹은 방언, 혹은 사람이 말하는 언어로 항상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나 6절과 9절은 지방에 따라 다른 식으로 말하는 사투리 혹은 언어를 의미했습니다.
브루기아인과 밤빌리아인은 헬라어를 말하지만 그 억양은 다르게 말을 했습니다.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은 페르시아어를 말하지만 각각 발음하는 억양은 다릅니다.
누가는 조심스럽게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듣고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이 기록을 통하여 사도들은 듣는 사람들이 알고 이해하는 언어를 말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 안에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 "모르고", "이상한"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더해짐(행 10장)
신약에서 방언에 관한 세번째 기록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번째로 주님을 믿고 교회에 더해지는 이방인에 관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은 한 몸으로서(고전 12:13) 성령에 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이방인을 교회에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며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받으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방인을 멸시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후에 말하기를 이방인 신자들은 성령님이 임하실 때 큰 이적에 함께 할 수 없었지만 후에 더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거절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해 주시고 유대인들이 오순절날 받았던 기적적으로 일어난 방언의 은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성령님이 이방인들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그와 동행했던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방언을 말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영접하신 것 같이 이방인들도 영접하셨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방인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방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자신이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갔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그 당시에 베드로는 매우 중대한 발언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실 때에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하신지라"라고 했습니다. 오순절날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동일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항상 일어나는 일은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유대인들이 믿을 때 임하시는 것같이 임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적적인 표적의 은사가 다시 일어났을 때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은 놀랐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자들(행 19장)
사도행전 19장에서 우리는 세번째로 방언에 관한 기록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유대인이나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들과는 다른 사람들인 것을 보게됩니다.
이 열두 사람은 구약 신자들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전파한 메시야의 오심과 그분의 왕국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들은 것을 믿었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또한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믿었을 때 일어났던 표적이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언의 은사는 새로운 그룹의 사람들이 교회에 영접될 때에만 주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첫째가 유대인, 그 다음이 이방인, 그 다음이 구약 신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때 똑같이 모든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즉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방언을 말했던 사람들은 이 은사를 얻기 위하여 요구(기도)하거나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방언을 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방언을 하면서도 놀랐던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방언의 은사가 주어질 때는 경건하건 안하건 관계없이 또는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방언을 했습니다. 또한 방언의 은사는 사도행전 2장에서와 같이 처음으로 구원받았을 때,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을 때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세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고 난 얼마 후에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때에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어디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곳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신약에서 오직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요한복음 1장 33절에 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또 한번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입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모두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모든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기이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13절의 "모두"라는 말은 사도행전 2장에서 역사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는 성령의 세례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었고 그들 안에 죄가 있었으며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영적인 어린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은 후에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성경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원받는 순간 성령님을 받으며,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성령님으로 인쳐주시는 것입니다.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에 대하여 모두 연구하여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가복음 16장에서 주 예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특별한 표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새 방언"입니다. "새로운"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 자체가 새롭다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람에게 새롭다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새로운 것이라면 헬라어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어야 했습니다.
(2) 이 약속대로 사도행언 2장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표적으로써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이 은사가 주어짐으로 사도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들이 전에는 알지도 못하고 말한 적도 없는 언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언어였습니다.
(3) 이 방언은 사도행전에 단지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첫째가 이방인이 교회에 영접될 때였고 두번째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이 사람들이 방언을 계속했다거나 혹은 정기적으로 일어났다고 우리가 믿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처음에 일어 난 것같이"라고 말하여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4) 성령님을 받았을 때 몇몇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5) 그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이 시작될 때(그들이 주님을 믿었을 때-행 10:9), 혹은 사도행전 2장에서와 같이 교회가 시작될 때 방언의 은사를 받았지 주님의 일을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였을 때 받지 않았습니다.
(6)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성령의 "두번째 세례"가 있다고 믿기가 어려우며, 방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믿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믿는 순간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엡 1:13). 그 후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엡 5:18),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며(롬 8:14),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갈 5:16).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힘썼다는 기록은 읽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단어는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는 한(동일한) 성령으로 이미 세례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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