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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3) 서신서에 나타난 방언

구원의 계획 2017. 6. 21. 16:36

방언(3)-서신서에 나타난 방언(신비) - 데이빗 롱(국제 동양선교회 총재)

 

(우리는 이미 바울이 그의 서신서 중에 고린도전서에서만 유일하게 방언에 관해 기록했으며 방언에 관해 말한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의 잘못된 사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하던 방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아직 어리고 장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린도전서 14장 구절을 보면 그들이 방언을 마치 "미친" 사람처럼 말한 것 같으며 아무도 그 방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방언은 듣는 사람들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

데이빗 롱(국제 동양선교회 총재)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인 서신서에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순절에 참석했던 지도자들 중 4명이 신약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사도였던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주님의 형제로 전해지는 야고보와 유다였습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그들이 기록한 서신 가운데 단 한 곳도 방언에 관하여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서신서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개인과 성령님의 역사에 관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27번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신약의 서신서 중에 (히브리서를 포함한다면) 14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지만 그 중에 방언에 관해 기록한 서신서는 고린도전서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중에서도 오직 12, 13, 14장 뿐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또한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훌륭하다거나 신령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을 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들이 주님의 일에는 장성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초기 서신 중의 하나로써 A.D. 56∼57년 경에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3차 전도여행 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지고 표적이 일어났던 사도행전의 변화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도들의 인내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함으로 곧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졌습니다(행 28:28).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던 때는 이보다 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방언을 말하고 통역하고 혹은 예언을 했습니다(고전 12:8∼10). 모든 사람이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장 29,30절은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하는 자겠느냐?"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이 그의 서신서 중에 고린도전서에서만 유일하게 방언에 관해 기록했으며 방언에 관해 말한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의 잘못된 사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이 서신서를 통해서 바울은 방언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이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에서는 모든 은사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주님께서 이 은사들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설명해주시며, 또한 은사를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고린도전서에서 다른 여러 은사들을 비교해 주셨으며 방언보다 더 유용한 은사에 대해서도 지적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방언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은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방언에 관해 수다한 논쟁을 하지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또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진리들

 

우리는 고린도 성도들이 논쟁한 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 차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1) 고린도 성도들이 하던 방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했던 방언이 달랐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셨을 것이고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말씀하는 대신에 방언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소개하심으로 혼란을 없게 하셨을 것입니다.

 

몇 가지 다른 번역의 성경은 "알지 못하는" 혹은 "알지 못하는 언어 또는 설교"라는 단어를 방언에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원어에는 없습니다. 혀나 언어를 의미하는 "글로싸"(glossa)는 결코 다른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2)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가 선물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고린도 성도들을 꾸짖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을 더 잘 섬기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믿음이 자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하고 계발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3)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다른 일들에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은사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아직 어리고 장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1∼4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은 서로 분쟁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간음한 자를 출교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었습니다(5장). 그들은 서로 다투었으며 믿지 않는 자를 그들의 재판관으로 세웠습니다(6장),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10장). 그들은 술을 마셨고 주님의 만찬을 질서 없이 지켰습니다(11장).

 

그들은 부활에 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중 앞에서 잘못 가르쳤고 여자들이 가르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14장, 16장).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린아이이며, 여전히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 행한다고 말했습니다(3:1∼3). 고린도 교회는 사도행전 19장 이후의 그리스도인들로서,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때 방언을 말하는 것은 영적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일에 성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방언의 사용

 

성경은 우리에게 방언을 사용한 중요한 세 가지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1)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보통 이교도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은 명백하게 방언의 가치는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군중들에게 방언을 하는 자신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라고 예언했습니다.

 

히브리서 2장 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큰 구원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도 귀중한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 어떻게 그 보응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주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이요,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표적과 기이한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시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함께 증언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순절날 표적이 일어난 목적이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정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에 관한 바울의 기록을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다시 한번 여기서 표적은 믿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또다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명백하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에게 장차 오실 메시야와 하나님의 사자들은 어떤 표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그리스도는 참으로 메시야이며 사도들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듭거듭 그의 청중(믿지 않는 자)들에게 자신은 구약성경에서 메시야가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역을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날 표적을 행한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항상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2) 방언을 사용한 두번째 목적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어떤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순절날 사람들은 놀라고 기이히 여겨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그들은 열 두 나라나 열 세 나라에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군중들 중 얼마는 메시지에 흥미를 느꼈겠지만 대부분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배운 것이 없는 갈릴리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놀라운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열 둘 이상 되는 나라에서 왔지만 그들 각인들은 자기 나라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했던 사도들은 결코 전에 그 언어를 지도 못했고 공부한 적도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들은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변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은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훈이나, 이런 것으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고전 14:6)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두 구절을 통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악기를 예로 들어 말했습니다. "피리나 거문고 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또 나팔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고전 14:7,8) 명백하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방언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메시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만난 사람이 외국인일 때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고린도 성도 중 몇 명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에게 표적으로써, 또한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은사를 자랑했으며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날카롭게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고 쓸데없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구절을 보면 그들이 방언을 마치 "미친" 사람처럼 말한 것 같으며 아무도 그 방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방언은 듣는 사람들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방언 하는 자가 하나님께 방언을 한다면 하나님은 이해하십니다. 또한 방언 하는 자신은 이해할지 모르나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3) 방언을 말하는 세번째 목적은 믿는 자들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오순절날 방언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으며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들에게 더해졌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배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형성의 완전한 모형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주장합니다. 참석한 사람 중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수년 후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엡 4:11∼14).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을 더 이상 누구에게도 유익을 끼치지 못한, 다만 자신의 유익과 과시를 위해서만 사용했으며 바울은 그런 고린도 성도들을 "장성하지 못한 어린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볼 때 우리는 모든 진정한 은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이상 어린아이로 있지 않고 영적으로 장성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성도들은 은사를 다른 목적에 사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어린 아이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실패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것을 다음 세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표적-방언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2) 전달-방언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3) 세움-방언을 알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방언으로 말함으로 놀라운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베드로는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통하여만 구원에 이르고 자라게 된다고 했습니다(벧전 2:2). 오늘날에 사는 우리도 위 세가지 면을 시험해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세가지 원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언은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가장 큰 은사가 아니며 그보다 우리에게 사모해야 할 더 큰 은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4:1,39), 여기서 초기에도 방언보다 나은 은사가 있었지만 고린도 성도들의 대부분에게는 그러한 은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