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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정직과 의를 회복하자.

구원의 계획 2011. 1. 29. 23:07

교회여! 정직과 의를 회복하자.

                   출애굽기 23:4-9 /하원식 목사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제나라에 제상 맹상군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힘도 있고 덕도 있어서, 거느린 식객만 3천 명쯤 되었다. 그리고 자기 고향 고을에, 이름이 설이라는 고을인데, 그 고을에 엄청난 농토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 고을 사람들, 그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한테 소작을 주었다. 그러나 3천 명이나 되는 식객을 거느렸으니, 돈도 많이 들고 쌀도 많이 들어서, 자기 부하의 한 사람인 풍한이를, "설 지방 내 땅에 가서 소작농들한테 바칠 것 다 바치라고 하고, 곡식도 좀 모아 오너라." 하고 보냈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풍한이가 하는 말이 "돈과 쌀을 가져올 때, 주인님께 어떤 선물을 가지고 올까요?" 하자, 맹상군은 "우리 집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네가 보고 혹시 없는 것이 있으면 사오너라." 하고 보냈다. 풍한이가 설 지방에 도착하여, 소작농들을 일일이 다 둘러보았는데, 소작농들 살림이 주인한테 바칠 몫은 고사하고 매일매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고, 다들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풍한이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주인이신 맹상군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그대들은 오늘부터 모든 빚을 탕감 받았노라." 그러고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풍한이가 주인 맹상군한테 보고했다. "소작농들의 형편이 너무나 어려워서 제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님 이름으로.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맹상군의 분노,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맹상군이 묻는다. "이놈아,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단 말이냐?" 풍한이가 답했다. "선물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님 집에는 없는 것 없이 다 있는데,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어서 그걸 가져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옳을 의(義)자입니다. 그 의가 빠져 있는 걸 알고서, 가서 소작농들한테 주인님 이름으로 의를 선포하고 왔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맹상군이 제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왕과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힘을 잃고 정치적 핍박을 받으니까, 3천 명 식객도 다 떠나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입 씻고 다 도망간다. 급기야 맹상군 자신도 먹을 게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때 부하인 풍한이가 제안한다. "주인님, 여기에 계시지 말고 주인님 동네, 주인님 집안이 있는 설로 가십시다." 맹상군이 설 지방으로 갔더니, 그 동네가 융성해 있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동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의로운 주인이 오셨다며, 맹상군을 환대하였고, 맹상군은 고향에 과거보다 더 큰 공헌을 했다고 하는 옛날 사화다. 맹상군 집에 없었던 의가 오늘 우리한테도 부족할 수 있다.

 

 신년 초부터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정동기 감사원장 내정 파문이 자진 사퇴로 2주일 여 만에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지금 온 나라가 비리로 얼룩진 것 같아 한편은 씁쓸하다.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의 청원경찰법 개정 입법 로비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이 국회의원 6명을 정치 자금 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또 건설회사 함바 집 사건으로 온 나라의 권력기관이 전부 연루된 것 같아 씁쓸하다. 엊그제 또 신협 사건도 터지고

 

 우리 한국문화는 정의 문화이기 때문에 정이 진실보다 더 중요 시 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인정의 끄나풀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정의 끈으로 서로 얽혀있고 유지되는 것이 한국인의 삶이다. 여러 가지 인맥이 있다. 교회도 인정에 끌려서 교회 다니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사람들은 정만 통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고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진정한 힘은 정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서로에 대해 참된 진실을 말하고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삶에 있는 것이다.

 

 1. 정직과 의를 회복하자.

 공정성을 해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뇌물이다. 8절에 보면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뇌물, 이것이 우리사회의 아주 큰 문제다. 우리나라만큼 뇌물을 많이 주고받는 나라가 별로 없다. 뇌물은 결국 특혜를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닌가? 뇌물을 받는 사람의 판단을 불공정하게 만들기 위해서 뇌물을 주는 것이 아닌가? 성경 여러 곳에서 뇌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16:19, 10:17.)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되어 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공정하게 판단하신다는 뜻이다. 우리 하나님은 공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바라본다. 우리 한국 크리스천의 약점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신앙이 좋다는 분들 중에 보면 거짓말을 잘 하고 사기를 치며, 정직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을 많이 볼 때가 있다.

 

 2.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중요한 사명을 맡기셨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표본이며(갈 3:6-7) 또한 축복의 통로가 된다. 창세기 18:18-19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실천하는 표본이 된다. 예수님께서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였다(마5:16).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돕고 배려하는 것이다.

 

  정의는 중요하다.

 아모스는 정의를 먼저 물에 비유한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곳이다. 여름철에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다 가을철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말랐던 대지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온 땅이 푸르게 된다. 이처럼 물이 온 대지를 살리듯 나라를 살리는 것이 바로 정의다. 말라기 에서는 하나님을 정의의 태양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말4:5) 고대인들은 태양이 떠오르면서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통치는 정의롭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있어야 역사에 희망이 있다. 의로움이 이 땅을 살린다.

 

  정의는 또한 흐름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흐르고, 강한 자에게서 약한 자에게로, 부유한 자에게서 가난한 자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이 위험하다. 흐름이 막히면 죽는다. 위는 넘쳐서 죽고 아래는 없어서 죽는다. 의는 국가에서 백성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그래서 옛날 왕들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좇아 의를 행하려 하였다. 정의는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약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지키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런 정의가 있어야 나라가 산다.

 

 여러분 국가와 강도 집단의 차이를 아는가? 둘 다 조직과 폭력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것은 정의다. 성 어거스틴은 '정의가 없는 정부는 강도 집단'이라 하였다. 법도 무시하고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일하면 그들은 강도 집단이다. 아모스가 보기에 이스라엘 왕국은 온전한 나라가 아니라 강도 집단에 불과했다. 이런 나라는 곧 무너진다는 것이 아모스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의 역사 법칙이다. 정부의 힘은 정의에서 나온다. 정의로운 정부는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고 국민들을 한 마음으로 모아 발전을 이룰 수가 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민주주의가 된 나라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아모스는 이 정의를 폭포수와 같이 끊임없이 흐르게 하라고 한다. 사시사철 끊임없이 정의가 흐르게 하라고 한다.

 

 정의는 단순히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도 정의다. 정의는 마치 산소와 양분으로 가득한 신선한 피와 같다 할 것이다. 이 신선한 피가 잘 공급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이런 불의를 마음에 품고 그 길을 가는 자는 곧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반대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곧 정의의 마음을 품은 자와 같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할 것이다. 마음에 의를 품은 사람은 눈이 밝다. 의인은 장수한다. 의는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동기 감사원장의 낙마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정의의 소중함을 생각했다. 전관 예우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좌우지간 대형 로펌에서 그에게 한 달의 월급을 1 억이나 주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 할 수 없다. 그는 그 억울함을 장자에 나오는 "두루미는 날마다 멱감지 않아도 새하얗고, 까마귀는 날마다 먹칠하지 않아도 새까맣다(鵠不日浴而白, 烏不日黔而黑)"는 말도 덧붙였다. 정말로 그렇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하겠는가?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을 원하겠는가? 저는 단연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능력은 없어도 정의로운 사람을 원한다. 능력이야 하나님이 주시면 되고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잘 사용하실 수 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능력은 있는데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를 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 잘하는 사람을 택하려고 했다. 다소의 흠결이 있을 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 장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하고 인사를 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스스로 정의의 길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의로운 백성이 많아야 나라가 정의롭게 되고 결국 그 나라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한다. 요즘 시대는 참 정의로운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자기 안전과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매우 비겁한 사회다. 같이 한솥 밥을 먹던 사이도 자기 이익 앞에서는 냉정하게 돌아선다.

 

 정의와 생명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영혼을 살리고, 우리 인간관계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것도 정의라고 말씀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 분이 거룩함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용기와 힘을 주신다. 이 의의 양식을 먹고 이 의를 이루기 위해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란다.

 

 법의 원칙이 무너진다면 남는 것은 사람의 즉흥적 판단뿐이겠지요. 물론 법치가 최선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약속과 약속, 신뢰와 신뢰로 연결되어 유지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차선의 방법인 게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은 정의로운 힘이다. 정의로운 힘이 편만하기를 원하는 것,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 스스로의 가치만큼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심리적 요구다. 누구나 나도 제대로 대우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정의가 중요하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오늘 세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는 십계명의 정신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을 칼로 잘랐다. 잘못한 사람은 격리시키기도 했다. 단절하고 자르고 격리시키고 척결하는 이런 엄격한 공의가 없으면 세상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런데 유대 땅에는 엄격하게 자르고 처벌하는 이런 정의가 넘치다보니, 전부 잘려나가고 남은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정의는 자르고 책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잘못한 사람, 죄 지은 사람을 회개시켜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복원시키는 정의임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법에 대해 지적하면서 아모스 5:24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고 명했다.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가지고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정직히 말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거짓으로 아첨하는 자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여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했다. 또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멸시했다. 지도자들의 부패는 곧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 사회는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움직여졌고, 저울추를 속이는 일이 만연되었다. 아모스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져야 만이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받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였다. 또한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버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법을 순종하며 살아가야 함을 교훈했다.

 

 3. 나그네 보살피기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잠시 집을 떠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자기의 고향을 떠나 낯선 외국인들 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가슴 시린 일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그네, 즉 사회적 약자에게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한 생계 대책을 세우라고 엄중하게 지시하고 계신다. 곡식과 올리브 혹은 포도를 거두고 남은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삼 년에 한 번씩 거두는 십일조도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성경은 먼저 그들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지요? 실패를 겪어본 사람만이 실패자들의 쓰라린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복과 관련이 된다. “당신들이 사는 성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신14:29)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날의 품삯을 받지 못한 이들이 주인을 원망하면서 주께 호소하면, 죄가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신24:15).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신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런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길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삶의 근본을 성찰하는 이 계절, 우리 삶이 이런 성경의 정신을 따라 재구성되기를 바란다. 이방 나그네도 약자 아닌가? 가난한 자나 이방 나그네라고 하여서 불공정하게 대하지 말라고 한다.

 

 가장 비겁한 사람들이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 들이다. 앞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여기서는 가난한 자라고 무조건 모두 옳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시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데, 가난한 자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부당하게 유익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잘못 됐을 때는 잘못 됐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4,5절에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 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 지니라.” 여기서 원수는 철천지  원수가 아니라 재판에서 나와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심판은 항상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판단은 정보도 부족하고, 인간에게는 감정도 있고, 판단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딤전4:8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바울은 이 세상에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믿는 사람조차도 사울을 잘못 판단하고, 의심도 많이 받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의로운 재판장이 나타나실 때 자기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2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정직해야 되고, 둘째는 공정해야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지도자에게는 공정성이 생명이다. 지도자가 공정성을 상실하면 그 지도력은 그 날로부터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의 공정하심의 모습을 본 받아서 우리도 공정한 사람이 되어서 이 사회에 어느 정도 질서를 심을 수 있고 사람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주 의회 의원에 출마한 링컨에게 소속 당으로부터 선거 운동 비로 쓰라고 200불을 보내왔다.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지극히 가난했던 링컨에게는 큰돈이었다. 그 후 선거는 끝났고 링컨은 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이 되었다. 그런데 링컨은 그가 받았던 200불의 선거 운동비 중에서 199불 25센트를 당 본부로 되돌려보냈다. 당 본부에서는 놀랐다.

 

 그러나 돈과 함께 온 링컨의 편지 내용 앞에서 모두들 숙연해졌다는 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선거 연설 회장 비용은 내가 갚았고 또 여러 유세장을 돌아다니는 데는 말을 탔기 때문에 비용이 들지 않았오. 다만 유지 가운데 한 사람이 목이 마르다는 분이 있어서 사이다를 한잔 사준 것이 75센트 들었어. 그 다음은 아무 비용도 들지 않고 무난히 당선되었오"라는 편지였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게 한말이 기억난다. "나는 이제 죽음을 향하여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에스크래피아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빌리고 갚지 못하였구나. 빚을 남기고 가니 부디 잊지 말고 갚아주기 바란다." 깨끗한 가치관과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뒤를 파보아도 떳떳하고 옆을 파보아도 깨끗한, 그래서 링컨처럼 75센트의 명세서를 내놓을 수 있어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로펌에서 전관 예우로 월 1억 원씩 받아온 도덕성의 문제가 두 번째다. 둘 다 감사원장이 되기엔 큰 하자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회의 저명한 인사가 관련된 부패나 비리 사건이 한 번씩 터질 때마다 꼭 기독교인이 개입되어 있고, 그럴 때마다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독선가라는 지탄을 받는다. 더불어 양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를 향해 세상은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 하는 주식회사와 똑같다며 손가락질한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순결한 척, 돈 버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판을 튕겨가며 정해진 법 테두리 바깥의 방법까지도 동원하려 한다고 모든 기독교인을 싸잡아 매도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개독교 라고 한다. 교회는 부패했다는 것이다. 특히 돈을 모으고 쓰는 데 있어서 기독교인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이다.

 

  2011년 새해 첫 주일에 발생한 소망교회 폭행사건은 충격적이었다. 폭행을 당해 얼굴이 퉁퉁 부은 성직자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가해자가 누구인가. 그 교회 부 목사였다. 소망교회가 어떤 곳인가. 부유하고 학식 높은 신자가 많은 교회요, 이 나라를 움직이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가장 많이 출석하는 교회다. 세상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들도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전혀 권세를 발휘하지 못하는 건강한 문화를 가진 교회다.

 

 한국교회 청년들로부터 존경받던 어느 젊은 목회자의 쓸쓸한 퇴장도 충격적이다. 그분은 참 재주가 많은 목회자였다. 야성 넘치는 설교와 현란한 필력에 신자들은 환호했다. 그가 만든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였다. 그는 우리의 자랑이요,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세속의 탁류를 뒤집어쓴 채 목회를 접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온갖 소문의 잡초만 무성하다. 그에게 환호했던 젊은이들은 하나둘 교회를 떠나고 있다.

 

 새해에 우울한 소식이 유난히 많다.

 교회 돈을 펀드에 투자해 낭패를 당한 채 교회를 떠나는 목회자도 있다. 교인이 바친 거액의 헌금을 주식에 투자한 목회자도 있다. 교인들과 덕스럽지 못한 교제로 말썽을 일으킨 목회자 소식도 들린다. 모두 한국교회 차세대 리더였지만 명예롭지 못한 모습으로 교회를 떠났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목사가 CEO 래나 뭐 래나 그런 소리를 쓰기 시작한 목사, 교회경영 이라며 경영 철학을 도입한 목사 모두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죽어야 산다? 어느 분이 쓴 글이 있어 소개한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 명령한다. “죽어야 산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했다. 죽음이 곧 승리의 부활로 이어졌다. 우리는 매일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을 얻는다. 죽을 생각이 없는 교회와 신자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죽여야 산다." 남을 죽이면 나도 죽는다. 교회는 모두를 살리는 곳이다. 자신을 버려야 생명 얻는다. 숱한 약점과 허물을 갖고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다. 가슴을 찢으며 기도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다. 기도하는 교회는 감출 것이 없다. 기도하는 교회는 궁금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투명하기 때문이다. 2011년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케냐 평신도 지도자가 한국교회를 향해 던진 예언이 예사롭지 않다. “한국교회가 음란의 죄, 폭력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한반도에 전쟁이 닥칠 수도 있다.” 한국교회언론회 논평은 “성직자의 삶은 청빈과 순결과 순종에서 떠날 때 이미 탈선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며 “성직자의 영혼은 아침 햇살처럼 맑아야 한다”고 한 초대교회 시대 교부인 어거스틴의 말처럼 이 시대의 성직자는 과연 그런 영혼으로 살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초대교회 순교자 폴리갑이 그의 제자 이레니우스에게 했던 ‘주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전적으로 성직자에게 있다”고 일갈했다. 이어 “성직자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면 마태복음 8장 20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성직자의 진정한 힘은 권력이나 술수가 아니라 깨끗한 영혼에서 기인하는 거룩과 진실, 주님의 자녀다운 명예에서 나온다고 했다.

 

 논평은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직자다운 거룩 성을 회복해야 하고(레 11:45) 하나님의 말씀과 성직자로서의 삶이 일치하는 진실성을 회복해야 하며(잠 12:22), 하나님의 존귀함과 자녀 됨의 명예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잠 22:1)”고 호소했다. 또 “이제부터라도 거룩성과 진실성과 명예심을 회복하기 위해 성직자부터 모든 성도에 이르기까지 3H운동(거룩 진실 명예)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빌립보라는 지역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이곳 빌립보 사람들에게 이탈리아 본토 사람과 동일한 지위와 특권을 허락했고, 이로 말미암아 빌립보인들의 자부심은 그 어느 로마인들보다 대단했다. 이러한 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시민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하늘에 속한 시민임을 알려주길 원했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