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자료/기독자료

성경이 말하는 방언(Tongues)

구원의 계획 2017. 8. 16. 09:53

성경이 말하는 방언(Tongues)

 

김종명 (Joshua J. Kim, 태국 선교사, D.Miss)

 

   창세기 2:18-19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혼자 거하는 아담을 위해 돕는 베필을 만드실 때 생겼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흙으로 각종 들짐승들과 새들을 만드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카라’) 보시려고 그들을 아담 앞으로 인도해 오셨다. 아담은 그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 줬는데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인간은 이렇게 처음부터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던 존재다(호모 로쿠엔스, Homo loquens). 의미있는 소리로 만들어진 단어와 문장을 사용할 줄 알았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현생 인류는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 언어(‘싸파’)를 사용했다.

 

   창세기 11:1-9에는 온지면에 흩어져 땅을 개발하며 살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the cultural mandate)에 불순종하여 바벨탑을 쌓아 그들의 이름을 높이고, 그 탑이 보이는 데까지만 가서 살려는, 불순종의 정신이 가득찬 인류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당시까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인류의 의사소통을 막으셨다(“Let us go down and confuse their language so they will not understand each other”). 그 후 온 인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지어 온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 그룹들이 민족을 이루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다양한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현재 지상에는 6,000여 개가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서로 분리된 체 격리, 고립되어 단절된 의사소통을 해 온 인류는 그런 의사소통의 단절로 인해 전쟁같은 압박을 통해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신다(11:29 이하).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한 민족(나라)을 이루시고 그 히브리 문화와 언어 속에서 온 인류를 위한 복음을 완성하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위한 복음이다.

 

   요엘 2:28-32를 보면 말세에 성령을 온 세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14-21, 오순절 성령강림시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인용했던 말씀으로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성령강림시 나타난 방언 이적이 이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선포했다.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 우리가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르는 선교위임령이 나타나 있다. 이 위임명령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는데 그 중 마가복음 16:15-20을 살펴보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하시며 그 결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함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며 믿는 신자들에게는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 2) 새 방언(new languages, ‘글로싸’)을 말할 것, 3) 뱀을 손으로 집고, 독을 마셔도 해함을 입지 않을 것(하나님의 보호), 4)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 나을 것, 이렇게 4가지의 표적이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도들과 신자들이 새로운 문화권 속에 들어가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새 언어를 말해야 했던 것은 실로 당연시 되는 전망이었다.

 

   사도행전 1:8을 보면, 예수님은 장차 성령이 오시면 믿는 자들에게 권능을 주어 당시 복음이 전파된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하셨다. ‘땅끝이란 말로 축약했지만 기독교 복음은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와 지중해 연안 유럽 신대륙(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아시아로 계속 전파되어 왔다. 기독교 복음이 각 문화권에 뛰어들 때 마다 이 복음은 그 해당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상징과 기호 체계들, 특히 언어로 설명되어져야 했다. 히브리 문화와 언어 속에서 형성된 하나님의 복음이 그 문화와 언어를 뛰어 넘어 이제는 다른 문화들 속에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야 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2, 드디어 오순절 성령강림의 증표로 방언기적이 나타난다. 이 기적은 같은 성질의 기적이 계속 되풀이 될 것을 기대하거나 전망하지 않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한 증표로 단회적으로 행해진 기적이었다. 성령충만을 받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배운 적이 없는, 당시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15개 지역 이상에서 사용되던 유창한 지역 언어들로 예수님을 증거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과 방언 기적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저주를 해소시켜 이제 모든 문화와 언어권에 사는 만민이 하나님과 전 세계 모든 민족들과 개인들과 평화의 의사소통을 하게 될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성령강림과 방언 기적은 복음이 사마리아로(8:17 이하), 가이사랴 지역으로(10:44-46, 고넬료 가족), 에베소 지역으로(19:1-7, 소아시아) 점층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몇 차례 좀더 단순화된 형태로 거듭 제시되어, 성령이 약속대로 모든 믿는 자 위에 오시는 것을 표징으로 확증시켰다. 곧 기독교 복음이 새로운 지역(문화적, 민족적, 언어적)으로 전파될 때 마다 새 방언(new language)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받으셨음을 확증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복음은 타문화권(언어권)과 적극적으로 교섭하며  역동적으로 전파되어왔는데, 이에 관한 한 학파의 관점을 살펴보자.

 

   아프리카의 존 음비티(John S. Mbiti), 라민 싸네(Lamin Sanneh)와 크와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아시아의 이문장과 화융(Hwa Yung),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유럽의 앤드류 월즈(Andrew F. Walls)는 지나온 선교역사 속에서 어떤 하나의 현상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앤드류 월즈는 기독교 역사를 유대시대, 그리스-로마시대, 이민족시대, 서유럽시대, 유럽의 팽창 및 기독교의 쇠퇴시대, 그리고 현재의 남반부시대로 구분하고 조망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생명력은, 그 전체 역사를 통해 볼 때, 언제나 "타 문화권으로 전파됨으로써 유지되었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와 여러 면에서 비교할 수 있는 이슬람이 중동의 특정 문화를 고정불변의 중심으로 둔 채 '하나의 이슬람 문명'을 확장(또는 축소)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시대마다 중심 자체가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타문화를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무한한 '번역 가능성'(translatability)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기독교 역사의 첫 시대부터 복음은 타문화어로 '번역'됐다. 기독교가 '유대 그리스도인'의 종교, 곧 유대교의 한 종파에 머물지 않고 이방 세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안디옥에서 '구브로와 시돈'의 무명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어를 사용하던 이방인 몇 명에게 유대 민족의 구원자, '메시아' 예수를 모든 인류의 구원자인 ''(키리오스)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라는 용어는 당시 지중해 동부 지역의 여러 종교집단들이 자기들의 신을 부를 때 사용했던 말이다. 이러한 "과감한 타문화 번역과 기묘한 상징 빼앗기"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적 율법 준수와 할례를 고집하고 자기네만의 구원자 '메시아'를 고집하려했던 일부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종교를 넘어 오늘날 세계 모든 민족과 종족의 '난 곳 방언으로' 고백될 수 있는 복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http://m.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35216, 김은홍) 기독교 복음이 새 문화권의 새 방언(new language)으로 설명되지 않았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AD 1세기 이후 초대교회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교통의 발달로 소아시아, 특히 그리스 항구도시들에는 여러 문화권, 언어권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 결과 그 도시들 속에 있는 교회(그리스도인의 모임)에는 다양한 언어권 출신의 신자나 관심자들이 모일 기회가 많았다. 특히 그리스의 고린도’(Κόρινθος)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고린도는 그리스 문화권 속의 국제적 항구도시로 많은 신전들이 자리잡았고, 당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25,000여 명의 유대인 사회에 전도한 바울의 사역으로 다수의 유대적 그리스인들과 다른 문화권/언어권에 속한 사람들도 기독교 복음에 반응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전후서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라는 구절이 여러 번 등장한다. 또한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성적 방종에 관한 경계의 글도 여러 곳에 나타난다. 이런 다문화, 이교문화, 다중 언어적 상황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였기에 바울 사도는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생활과, 특히 교회 모임시 의사소통상의 질서를 잡기 위한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방언사용에 관한 가르침이었다(고전 12-14).

 

   당시 로마의 호수로 불렸던(Mediterranean was a "Roman Lake") 지중해 연안은   무역활동을 통해 다양한 지역 문화와 지역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교육을 받은 로마인들은 헬라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교육을 받은 헬라인들도 어느 정도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유창함의 정도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 직업에 따라 다 달랐다. 당시 라틴어(Latin)와 헬라어(Koine Greek)가 지배적인 주요 언어였다고 하지만 문학적 자료들과 역사적 사료들을 보면 지중해 연안에서는 그 두 언어 말고도 페니키아/카르타고어

(Punic/Carthaginian or Phoenicio-Punic)), 이집트 콥틱어(Coptic),  예수님의 모국어로 여겨지는 아람어(Aramaic),  시리아어(Syriac) 등의 다양한 언어들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어 사용자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그룹으로 교회 모임에 참석했을 경우 모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관건 중의 하나였다.

 

   고린도전서 12:4-11을 보면 은사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이 있다. 여러 가지 은사를 소개함에 있어서 바울 사도는 맨 마지막으로 방언 말함의 은사방언 통역의 은사를 짝지워 소개한다. ‘Speaking in different kinds of tongues’‘The interpretation of tongues’는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바울의 가르침대로 방언은 통역이 가능한 언어(외국어)였다. 오순절 신학에서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2, 14장의 방언은 서로 다른 것이라며, 오늘날의 방언 현상으로 나타나는 언어적 현상은 통역이 불가능한 것임을 애써 감추려 하지만, 이런 두 종류의 방언(외국어, 신비한 언어) 이론은 성경의 지지를 조금도 받지 못한다.

   방언이 통역 가능한 언어(외국어)라는 것은 언어의 일반적 특징들 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음운론(Phonetics), 형태론(Morphology), 통사론(Syntax), 의미론(Semantics), 비교 언어학 등에 의한 분석과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절을 히브리어, 영어, 한국어, 태국어로 써서 위의 언어학 영역들로 분석해 보면 최선의 통역을 위한 통일성 있는 문법적 원리, 원칙,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고린도전서 13:1에서 바울은 사람이 많은 방언들(언어들)을 말하고 심지어 천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14장에서 바울 사도는 방언의 가치와 올바른 방언 사용의 원칙들을 제시하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예언은 자국어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방언(외국어)보다 좋다.

 2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는 통역자가 없으면 하나님만 알아 들을 수 있을 뿐이다.(no one understand him)  통역이 없으면 마치 알수 없는 신비한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3이해할 수 있는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만,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 통역이 있어야 교회의 덕을 세운다.

 5방언이 통역되지 않으면 예언만 못하다.(청중이 이해할 수 없으므로)

 6바울 사도 자신의 사역을 예로 듦. 만일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가서 외국어로 말하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계시, 지식, 예언, 가르침을 주지 않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반문)   의미없이 울려 퍼지는 거문고, 나팔소리와 같다.

 

 9가능하면 교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한다.

 10뜻이 없는 소리는 없다. (통역이 없으면 뜻이 없는 소리와 같다)

 11말의 뜻을 모르면 의사소통상 몰지각한 사람이 된다.

 13방언 말하는 사람은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14-17방언(외국어)으로 기도(pray), 찬미(sing), 축사(praise), 감사(thanksgiving)를 하면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공감할 수 없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유창하게 통역할 줄 모른다면(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이 모국어 만큼 그 외국어를 유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본인에게도 별 유익이 안된다. 영적, 지적으로 의미는 알아도 마음으로, 정서적으로 확 다가오지 않는다. (외국어를 능숙히 알지 못하는 경우, 예를 들면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의 라틴어 미사 집전, 태국어를 막 공부한 사람의 태국어 기도문 읽기,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의  영어로 기도하기 등. 영어를 거의 잘 못하는 브라질 사람이 영어를 잘 모르는 한국 사람과 대화하는 경우 처럼, 라틴어를 잘 모르는 헬라 사람이 라틴어를 잘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라틴어로 말하는 경우)  

      

 18바울 사도는 여러 가지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9교회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말 다섯 단어로 남을 가르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일만 단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

 21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방언이 외국어임을 암시해 준다.

 23교회에서 통역없는 방언 사용은 불신자들이 보고 미쳤다고 하기 쉽다.

 26고린도 교회의 예배 모습. 모일 때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과 방언 통역이 있었다. (방언과 방언 통역은 다른 외국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관심자들의 방문시 있었던 모습임이 틀림없다. 태국교회에도 가끔 외국인 설교자, 간증자가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는 경우가 있다.)

27모임시 방언(외국어)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의 지침으로 두 명 또는 최대한 세 명 정도가 차례대로 한 명씩 말하고 반드시 통역자가 있어야 한다.

 

 28통역자가 없으면 외국어로 말하는 사람은 말하지 말고 조용해야 한다(should keep quiet).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므로 회중에게는 말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적어도 그 말을 하는 자기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9예언(미래의 길흉화복을 말하는 무속적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설명, 선포하는 행위)은 두 세 명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바르게 예언하는지 분변한다. 계시는 예언보다 우선시된다.

 

 33하나님은 어지럽고 혼란스런, 갈등, 부조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예배는 질서있고 화평한 분위기 속에서 드려져야 한다. (오늘날 일부 은사주의 교회들의 예배의 분위기를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강조되어야 하겠는가?)

 39그 언어권의 주요 언어로 예배를 드린다고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에게 말을 하지 말도록 금해서는 안된다. 소수의 외국인도 말할 자격이 있다. 간증, 나눔의 기회를 줘라. 단 회중의 유익을 위해 통역은 있어야 한다.

 

  끝으로 요한 계시록 5:9-10(예수께서 만민들 속에서 사람들을 사서 드리시고 제사장 삼으심), 7:9(만민들 속에서 나온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송함), 14:6(만민들에게 전할 복음을 가진 천사들)에는 각 족속(every tribe), 각 방언(every language), 각 백성(every people), 각 나라(every nation) 출신의 만민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는 장차 복음이 문화와 언어를 초월하여 만민에게 전파되고, 만민들 속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나오고, 그 구원받은 이들이 장차 어린양의 보좌 앞에 모여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전망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봤듯이 성경은 방언을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외국어라는 뜻 이외에 오순절 주의자들이 말하는 황홀경 속에 말하는, 이해와 통역이 불가능한 신비한 언어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 현상의 의미에 관한 선교적 성경해석

 

  20세기 초인 19064월 어느 날,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자인 윌리암 시머(William J. Seymour, 1870-1922)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가, 312번지의 한 낡은 교회 건물에서 사도의 신앙 선교회’(Apostolic Faith Mission)를 설립하였다. 그는 감리교 감독교회의 목사였던 찰스 폭스 파함(Charles Fox Parham, 1879-1929)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는데,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나는 사이 그 거리에 큰 부흥이 일어 났고, 그 부흥의 특징은 방언’(실재하는 언어, 외국어가 아닌 소위 통역 불가능한 소리로서의 소위 날랄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오순절주의’(오순절 운동, Pentecostalism)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 용어는 사도행전 2:1-4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들이 경험한 방언 현상이 결코 사도행전 2장이나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말하는 방언(외국어)이 아니었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신비해 보이는 경험을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으로 믿어 버린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이 새로운 개신교 안의 운동은 100여 년이 지난 2000년 현재,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약 5억 명의 교세를 이룬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하였다.[1]  오순절 주의(Pentecostalism)는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도시 빈민들과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 속에 급속히 전파되고 있고, 이러한 성장 추세는 개신교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오순절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 특히 병고침과 방언 말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점은 그 운동에 동참하는 구성원들에게 개인적인 은사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 신앙의 주관적 확신을 갖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성령강림이라는 위대한 구속사적, 교회사적, 선교사적 사건의 증표인 방언의 의미를, 구원받은 신자가 2차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은사체험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이해를 개신교 전체에 확산시키는 영향을 가져왔다.[2]      

  본 연구에서는 과연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시 나타난 방언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기도의 능력, 신유의 능력, 성령충만, 능력충만이라는, 신자 개인적 차원의 은사의 덕목으로서의 방언(통역될 수 없는 무의미한 소리들의 모음)인지, 아니면 구속사적, 교회사적, 선교사적으로 광의(폭넓은 의미)를 지닌 성령오심의 표징으로서의 방언(외국어)인지를 연구,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방언에 대한 오순절주의적 이해와 현상, 그리고 그에 대한 비평적 견해들

 

  오순절주의의 시작 전에 있었던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은 방언, 예언 같은 몇 은사는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초대교회 시대, 사도시대에만 있었던 독특한 현상으로 이해했고, 그 이후에는 중지되었다는 은사 중지론(cessationism)을 따라왔다.[3] 그렇지만 예언, 방언, 축귀 등을 통해 성령의 은사의 개인적 체험을 강조한 오순절주의는, 초기에 오순절주의자들의 모임시 나타나는 방언 현상에 대해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광란, 광신적이다는 경멸적인 인상을 받았으나, 1960년대에 일어난 신은사주의적 갱신운동(neo-charismatic renewal)을 통해 백인 중산층에서도 환영을 받게 되었고, 1960년대 말 미국교회 안의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안에서도 방언 현상들을 경험하기 시작하자 큰 지지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남침례교회에 속한 교회들을 제외하고, 심지어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도 은사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비교적 개혁신학의 전통 위에 보수적으로 성장하던 한국교회에도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비롯한 여러 오순절주의, 성령주의 교회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성령운동을 표방하는 복음주의적 대형교회들을 통해서도 소위 복음주의적 은사운동이 실천되어서, 오늘날, 개혁주의적 또는 복음주의적 교회들의 신학 노선과는 달리 목회사역과 예배생활, 성도 개인들의 신앙생활에 오순절주의적 은사주의의 영향이 점차 확산되어 보편화되고 있는데, 성령충만한 능력있는 기도생활을 위한 방언 말함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고 있다문제는 이러한 방언의 강조를 위한 가르침의 근거로 사도행전 2, 오순절 방언 현상이 동일한 성질의 모범적 사건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은사 중지론의 입장을 따르는 그룹은 크게 개혁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개혁주의에 속한 교파는 대부분 장로교에 속한 이들이며, 개혁파 침례교도 소수 있으며, 세대주의 신학은 오늘날 미국 침례교회 안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은사 지속론을 따르는 그룹에는 소위 성령운동을 하는 그룹으로 구 오순절 운동, 신 오순절 운동(은사주의), 3의 물결(빈야드 운동), 신사도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그룹 안에는 여전히 이같은 오순절 은사주의에 대한 거부 세력이 있지만, 개신교의 연합을 위해,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신앙의 개인적 체험이 강조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분위기를 인해 점차 오순절주의를 용납하고 있는 상황이며, 더나아가 오순절적 은사주의를 각 교파의 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아 지고 있다이런 경향에 대해 데이비드 웰스는 오늘날 복음주의가 교리를 중시하지 않음으로 인해, 다양한 신학적 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 신학이 실종된 잡종 신학처럼 되어, 복음주의 안에는 복음주의 카톨릭 교도, 카톨릭적 복음주의자, 복음주의 해방 신학자, 복음주의 여성신학자, 복음주의 에큐메니스트, 젊은 복음주의자, 정통 복음주의자, 급진적 복음주의자,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 복음적 자유주의자, 은사주의적 복음주의자 등의 다양한 그룹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말한다.[4]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신약성경은 크세노랄리아’(외국어로 말하는 것)글로소랄리아’(방언으로 말하는 것)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희랍어 비평본문을 담은 NA27판은 사도행전 2:4나 고린도 전서 14:2에서 다같이 말, 언어, 혀의 의미를 지닌 글로싸라는 단어를 두 경우에 다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오순절 주의자들의 주관적 해석일 뿐 성경적 논거는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5]

 

  사실 방언 현상은 기독교의 오순절주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나 이슬람교, 무교 등에서도 방언 현상이 빈번히 관찰, 보고된다. 방언이란 대개 무아지경에 빠져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말로 표현하는 양상을 띄는데, 아주 사사로운 음성, 소리를 기도 같은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방언 현상의 소리는 보통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가 아니며, 외부 관찰자들은 그 의미를 해석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옥성호는 그의 책,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에서 말하기를,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은사와 방언, 방언의 가치와 사용에 관한 가르침을 말한 것은 고린도 지방이 이방신을 섬기는 여제사장들과의 성적 접촉시 신탁으로서의 방언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교적 방언 현상과 기독교의 방언을 구분하기 위해 그런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설명한다.[6]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성령세례의 증표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이전의 전통적 개신교인들은 신자들이 회심할 때, 세례받을 때, 거듭날 때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이런 오순절적 이해는 성결교 신학의 연장선 속에서 방언, 성령 세례가 소위 두 번째 축복’(The second blessing)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축복, 성령 세례가 방언말함을 동반했다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이점은 아주 중요하다).[7]  오순절주의는 모든 믿는 자들의 평등주의, 개인적 성령체험을 통한 능력 강조, 효과적인 언어와 의사소통 형식 사용,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 창출 등 많은 대중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때로 성령의 능력을 말씀의 권위보다 앞세우는 경향,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의 상이성, 삼위일체 신앙에 대해 부분적으로 양태론 (modalism)적 이해(사벨리우스(Sabellius)주의적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점, 번영신학적 가르침 등에서 전통적 개신교와 여전히 갈등을 빚고 있다.[8]

 

2)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2) 현상의 특징

 

  성령의 첫 강림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모인 다양한 문화권 출신의 people group에 이해되어 지게 하기 위해 당시 사용되고 있던 다양한 언어들로, 더 정확히 말해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의 언어들로 복음이 통역되었다는 사실에 오순절 방언의 선교적, 선교역사적 의의가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시 나타난 방언의 기적은 바벨탑 사건시 있었던 언어를 혼잡케 한 하나님의 심판의 영향력을 뒤집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는 각 복음서 후반부에 다양한 형태로 기록된 지상명령과, 사도행전 1:8에 예수님의 의해 전망된 것 처럼, 장차 복음이 모든 언어적, 민족적(혈통적), 종교적, 문화적 경계선을 뛰어 넘어 전파될 것이라는, 즉 모든 언어로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상 각 문화권에 증거될 것에 대한 예언 성취적 표적이었다.

 

  성령강림시 있었던 방언은 당시 실제로 사용되고 있던 언어였기에  외국어로서의 이해가 가능했다(2:5-13). 이 방언은 단순히 외국어였던 것 뿐만 아니라, 특정지역의 지방어(사투리) 차원으로 그 특정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낼 만 했다.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인 사도들에 의해 말해지는 방언은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의 각 출신지역(15개 이상이 기록됨)에서 사용되던 바로 그 언어들이었다. 그것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똑같은 차원의 본토 발음 그대로였다. 이런 기적을 어디서 또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에 대한 증거였다(2:11). 하나님으로 부터 무엇을 구하고자 드린 간구적 내용이나 병 치료를 위한 기도 내용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 사역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을 알게 하려고 증거한 것이다. 즉 그 방언은 외국어로서 직접적으로 전도(선교)를 위한 것이었고, 그 목적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전도에 응답하였는데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 방언 말함은 베드로의 설교 처럼, 선지자 요엘을 통해 하신 예언의 성취였다.(2:16)  선지자 요엘이 장차 임할 말세에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에 대해 예언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다. 초대교회 계시의 통로였던 사도들, 그 중에 베드로를 통해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된 것이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해석, 곧 요엘서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줄 것에 대한 예언이 오순절 방언 사건으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 바르고 정당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시 일어난 방언 사건은 성령세례의 증거가 곧 방언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오순절 주의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임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신자가 받아야 할 2차 성령세례를 통해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는 방언을 말한 사람들이 몇 명인지 정확히 알수 없기에[9] 이 방언 사건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회심 후 2차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개인적 차원의 사건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제자들과 불신자들을 위하여 성령강림의 증표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한 표증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그 날 성령강림의 표증으로 나타난 현상들은 방언 만이 아니었다. ‘바람소리’(청각적), ‘불의 혀’(시각적)도 동시에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님이 특정한 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 속에 성령이 오셨음을 확실히 인식하게 하기 위해 허락하신 다감각적 특별계시 차원의 일이었지, 개인적 차원의 덕으로서 모든 신자들이 경험해야 할 사건으로 주어진 일은 아니었다.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인 회심시 있었던 방언 사건이나,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 고넬료 회심시 있었던 방언 사건이나,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의 세례요한 제자들에게 있었던 방언 사건도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을 향해 지역적으로 확산되어 나갈 때, 인종적으로 유대인 >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 >이방인으로 초문화권 선교에 진일보 할 때마다 동일한 성령을 주셨음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특별히 허락하신 역사, 사도행전 2장 사건에 부속된 성격의 하위 사건들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2-14장의 방언이 서로 성격이 다른 방언이라는 오순절 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적 지지를 조금도 얻지 못한다. 자신들이 경험하는 방언 현상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 은사임을 주장하기 위해 그 양자의 구분을, 하나는 일반 언어(외국어), 또 하나는 일반인들이 이해, 통역할 수 없는 신령한 언어로 구분하고 있을 따름이다.

 

  설사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들의 방언 현상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 방언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 방언을 공적인 모임에서 사용하는 규칙, 바울사도의 가르침(고전 14:27-28,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여러 명이 있다면 반드시 통역을 두고 한 사람씩 차례대로 할 것, 방언 통역자가 없으면 방언 말하는 사람은 잠잠할 것 등)은 마땅히 교회 안의 질서를 위해 지켜져야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규정이 지켜지는 예는 거의 없다.[10]     

 

3) 오순절 방언의 의미에 관한 선교적 성경해석

 

(1) 오순절 방언은 일차적으로 바벨탑 사건을 인한 저주를 푸는, 그 저주를 풀고 대신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었다.[11]

 

  창조 이후 인간은 동일한 구어를 사용하였음이 틀림 없다(에덴 동산의 언어). 그러던 인간이 창세기 11, 바벨탑 사건을 통해 그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언어의 혼잡과 그로 인한 분리, 분열, 다툼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한 분리, 분열, 다툼은 불순종이란 죄의 결과였다. 높은 탑을 쌓아 스스로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쌓은 바벨탑 사건은, 온 땅에 충만하기 까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1:26-28)에 대한 불순종이었고 더 적극적으로는 도전과 반역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2]

 

  오순절 방언 사건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바벨탑 저주를 풀고, 창세기 12,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안에 약속된 열방에 까지 미칠 축복을 선포하시고 성취하는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크레익 오트(Creig Ot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자들은 오순절의 기적을 통해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않는 언어(방언)로 복음을 전하였는데(2) 이것은 교회의 탄생과 성령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뿐 만 아니라, 바벨탑의 저주가 극복될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의 오순절 순례자들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나 라틴어를 알았기 때문에 언어(방언)의 기적은 이러한 청중들을 불가피하게 동질감을 갖게 했다. 방언의 기적은 더 큰 어떤 것을 암시한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세상 모든 나라들에게 복을 줄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이방인들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의 말을 배울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는 곧 그들 자신의 말로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13]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은 사도행전 2:2-4에 나오는 바벨에 대한 암시들과 함께,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민족들의 목록과 연결시키면서 예루살렘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천하각국’(2:5)을 나타내고, 사도행전의 보편적 취지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14]  따라서  베드로가 군중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호소한 것은 죄사함의 약속이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그것은 이사야 44:3, 요엘서 2:32을 나타낸다)을 위한 것이라는 단언이다.[15] 

 

  불순종의 결과 언어의 혼잡이 일어나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그룹 별로 문화적 동질체를 구성하여 각기 온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인류, 그 결과 다시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류에게, 이제부터 성령의 역사로 모든 언어권(문화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에 의해 그들의 난 곳 방언으로 예수님의 복음이 들려지고, 그 복음에 반응하는 이들이 전세계적, 전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들어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될 것을 보여준 강력한 기적이었다. 이것은 마치 수 천 개의 조각으로 조각난 퍼즐 조각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 하나의 통일된 그림으로 맞추어질 것이라는 선포였다바벨(‘수다스러운 혼란이란 뜻)의 사건 이후, 세계는 수다스런 혼란과 그를 인한 분열의 세계가 되었다. 그 세계에 예수님은 복음의 빛을 비추어 그 세계를 복음 안에서 통일시키시며, 정돈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다.[16]

 

(2) 오순절 방언은 전세계적, 전우주적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선교가 수행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이 교회의 설립은 예수님의 비전이요, 약속이요, 의지였다(16:18).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결과는 분리된 양자의 관계 회복, 하나됨, 통일, 일치인데, 예수님은 그 대속사역을 이루실 때 장차 그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그 복음에 응답하는 이들이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사신, 당신의 몸으로 비유된 교회에 들어와 살기를 기대하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결과,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했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단지 한 지역교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설립에 관한 약속의 첫 성취였고, 이 교회는 이제 온 세계, 각 나라와 민족, 언어권들 속에 설립될 것이었다. 오순절 방언의 기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오순절 방언 사건은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전세계 믿음의 반석(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고백)이 발견되는 곳마다 모든 문화권 속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와 전망이 실현된 사건이다.

장차 전세계 교회는 요한 계시록 7:9-10(5:9-10)의 각 족속(every tribe), 각 방언(every language), 각 백성(every people), 각 나라(every nation)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 백성들이 될 것이었다.

 

(3) 성령강림의 사실과 성령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증표적 사건이었다.

 

 성령은 선교를 수행하시는 주체요, 원동력이다(1:8). 교회의 탄생과 선교 사역의 수행은 성령의 오심의 결과였다. 성령은 전도자를 세우시고, 그들의 증거를 인도하시고 그 증거에 능력을 더하실 것이며, 그 결과 회심자들이 있게 하시고, 그 회심자들을 자라게 하시고,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 교회를 강화시키신다(4:12). 성령은 모든 선교의 과정을 인도하시고, 교회로 하여금 그 비전을 세상 끝날까지 추구하게 하신다.

 

  이런 성령의 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모든 인류가 인지하고 인정하도록 확실한 기적으로 나타내 져야 했다. 수 십 명, 적어도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언어 숫자 만큼인 십 수명의 지도자들에 의해 배운 적이 없는 언어로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증거한 그 사건은, 그것을 체험한 사도들과 그리스도인 무리에게와, 그것을 지켜본 다양한 지역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기적으로 여겨졌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얼마나 강력한 기적이었던지, 그 같은 기적을 설명할 길이 없던 이들은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24:49)는 명령을 받은 사도들은 약속하신 성령이 정말 오신 것인지를 확신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확신을 위해서 소위 평생 한 번도 배운 적도 없는 방언(외국어)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도였을 것이다.

 

(4) 오순절 방언은 장차 선교를 통해 종말의 때 모든 문화권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 백성들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하는 예언적 역사였다.

 

  스티븐 B. 베반스와 로저 P. 슈레더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종말론적 성취로 보고 있다.[17] 성령강림에 관한 베드로의 설교(2:14-40)에서 그는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 (2:17)했는데, 요엘은 종말의 때 모든 인류에게 성령이 임할 것을 예언한 선지자다.

 

  또한 그들은 이 성령강림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요엘서 3:1 인용, 앞으로 먼 곳으로부터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실 이들에 대한 언급(2:39))는 교회탄생의 표지요,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하였다.[18]

 

          요한 계시록 7:9-10(5:9-10)은 온 세계교회가 선교명령을 완성했을 때 가져올 천상의 모습,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great multitude that no one could count, from every nation, tribe, people and language, standing before the throne and in front of the Lamb. They were wearing white robes and were holding palm branches in their hands. And they cried out in a loud voice: "Salvation belongs to our God, who sits on the throne, and to the Lamb." 

   여기서 각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온 세계 각 문화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특히 방언(언어)은 각 문화의 경계를 구분짓는 본질적, 핵심적 요소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의 흩어짐은 바로 혼잡해 지고다양해진 언어 그룹을 따라 분열되고, 흩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에덴 동산 시대 이후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는 바벨탑 사건 이후, 수백, 수천개의 언어로 나뉘었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나라와 민족을 이루어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서로에게서 분리된 채, 오늘 날과 같은 수 많은 다양한 문화들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각각 다른 언어(구어, 문어)와 역사, 삶의 방식,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과 각 민족들로부터 분리되어 사는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장차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회복, 화해, 연합,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사도들에게, 사실은 그 이전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에게 장차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문화권에 전파되어야 하기에 때가되면 모든 믿는 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각 문화권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외국어(방언)를 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16:15-20). 그 목적과 결과는 온 세계에서 하나님의 왕국 백성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케 될 일이었다. 기원 전과 서기 원년 전후에는, 여행의 위험과 타민족의 위험을 무릎쓰고 타문화권을 여행하는 일은 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시도되는 일이었다. 특히 외국어를 말하고 통역하는 일은 다중문화에 노출되어 삶을 사는 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마르코 폴로의 시대(AD 13세기)까지도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타문화권에의 여행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 복음의 가치와 능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안 초대교회 성도들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했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그 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어지는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언어를 달리하는 각 문화권 속에서의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예수님의 전망(28:18-20, 16:15-20, 1:8)을 따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되는 사명을 감당한 결과는 요한 계시록 5, 7장에 나타나 있는 모습처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모든 문화권에서 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서 그의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었다.

 

(5) 오순절 방언은 하나님께서 모든 문화에 공평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새로운 관점을 주는 사건이다. [19]

 

  이 새로운 관점의 분수령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었다. 곧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모든 민족들이 각기 난곳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음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복음전파를 위해 히브리 언어(문화), 헬라 언어(문화)가 배타적인 절대적 언어(문화)가 될 수 없었다신약성경 자체도 예수님이 사용하신 갈릴리 지역의 지방어인 아람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것도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다. 이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복음은 장차 각 문화권 속에서 각각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 통역되어 설명되어져야 했다. 이는 장차 모든 나라와 백성, 민족과 언어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고 그 결과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많은 수의 구원받는 사람들이 나올 것에 대한 예표였다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처럼 모든 언어, 모든 문화로 번역이 가능한’(translatability) 온 세계에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20]  

 

  결론적으로 말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방언 사건은 각 지역 교회나 각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차원의 삶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것이 기대되지 않는[21] 구속사적, 교회사적 그리고 선교사적 사건이었다.

 

  오순절 방언 사건은 일차적으로 바벨탑 사건을 인한 저주를 푸는, 그 저주를 풀고 대신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전세계적, 전우주적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성령강림의 사실과 성령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증표적 사건이었고, 장차 선교를 통해 종말의 때 모든 문화권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 백성들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하는 예언적 역사였다. 더 나아가 오순절 방언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문화에 공평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새로운 관점을 주는 사건이었다.

         

오늘 날 오순절 주의가 기도, 전도, 선교 등에 열정을 불어 넣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22], 성령강림이라는 중대한 구속사적, 교회론적, 그리고 선교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을 개인적 은사 체험과 관련된 해석을 하는 것은 그 광대한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경 속의 거대한 주제의 큰 강 같은 흐름을 작은 개울 정도로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보다 더 큰 오류가 어디 있겠는가? 성경을 보다 거시적인 안목 속에서 해석하기 보다, 보다 작은 안목 속에서 특별한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하려고 자신의 의지를 불어 넣어 주관적 해석을 하는 일은 비성경적 신비주의를 낳을 가능성을 크게 만든다. 즉 사도행전2장의 방언 사건을 구속사적, 교회사적, 선교사적 거대 안목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순절주의적 은사운동과 관련하여 해석하게 된다면 그 큰 위험을 떠안게 될 것이다.

         

원초적으로 오순절주의는 말씀과 성례 가운데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성령의 사역이 분리되는 비역사적 신비주의 형태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고,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특정한 개인적 은사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해 겸손이 상실되고, 성령의 임재로 나타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놓칠 수 있다는 신학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봐야 할 것이다.[23]    

         

<참고 문헌>

McGrath, Alister E. 박규태 역, 2009.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Christianity’s Dangerous Idea)(서울: DMI Press)

오트, 크레익 (Craig Ott) , 홍용표 외 역, 2012(영문판 2010, by Baker Academic). 선교신학(Encountering Theology of Mission), (부천: 도서출판 존스북)

베반스, 스티븐 B. 슈레더로저 P. (김영동 역), 2011.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서울: 도서출판 케노시스)

이문장, 앤드류 월즈 외, 2006. 기독교의 미래(The Future of Christianity), 서울: 청림출판

라이트, 크리스토퍼. 정옥배/한화룡 역, 2010(영문판 2006).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 (서울: IVP)

뉴비긴, 레슬리,  2010 (영문판 2003).교회란 무엇인가?IVP

스토트, , 2009 (영문판 2007). 살아있는 교회IVP

김우현, 2007. 하늘의 언어 (서울, 규장)

웰스, 데이비드. 2007. 신학실종 (서울, 부흥과 개혁사)

Chavda, Mahesh. 2004. 방언체험 (서울, 규장)

옥성호, 2008.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등등

 

성경적 방언 사용에 관한 개인적 권면

(* 이 글은 김종명 선교사가 한 그리스도인들의 밴드에 올렸던 글로

이미 소개해 드린 앞의 두 글보다도 더 먼저 썼던 내용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대강 나눌 내용은 어떤 분들에게는 휘발유가, 어떤 분들에게는 얼음이 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1984년도에 오순절교파 쪽에서는 방언체험. 성령체험. 성령세례 등으로 부르는 그런 체험을 했고, 그 후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계속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생때 전도를 위해 고심하던 제가 홀로 기도에 전념할 때 회개와 함께 방언 현상을  경험한 것입니다. 1960-1980년대엔 한국에서 오순절파, 조용기 목사님 교회에서만 방언을 가르쳤는데 지금은 장로교에서도 조차 이 신비해 보이는 영적(?) 운동을 도입하여 방언을 강조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의 성령체험 후의 성령론에 관한 신학적 선회(?)CGN-TV를 통한 성령운동의 전파(비록 그것이 의도성이 없었다 하더라도) 등도 장로교단에서 조차 방언을 묵인 또는 용인(더 나아가 도입)하는데 한몫 단단히 기여했습니다저는 상당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특정 기도운동에 참여하며 방언같은 영적체험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방언에 관한 저의 성경적 권면이 끝나도 여러분의 개인적 확신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방언은 성경의 바른 해석 보다 체험중심의 신앙인들에게 엄청난 확신을 주는 필수사항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오순절파 교인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성경적 가르침을 나누어도 이젠 수적으로 밀려 성경적 가르침 보단 체험적 현상이 더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방언을 하늘의 언어라고 믿는 분들이 늘고 있지요.

       

그러나 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언은 언어, 외국어입니다. 마가복음 1615-20절에 우리가 말하는 방언이란 말이 신약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믿는 자들이 새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타문화권에서의 전도(선교)를 전망한 언급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시 임한 방언도 외국어였죠. 특히 난곳 방언이라 불린 당시 실제 사용하던 지역 언어들이었습니다. 성경에 그 타문화권 지역명이 10여 지역 이상이나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신약의 방언은 모두 '글로싸' 라는 헬라어로 외국어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1900년 전후, 오순절파의 탄생과 때를 같이하여 등장한 방언현상의 경험으로 오늘날에는 방언이 오순절파의 가르침을 따라 두가지 의미, 1) 외국어(사도행전 2), 2) 외국어가 아닌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로 소위 하늘의 언어’(고린도전서 12-14)로 사용된다는 주장이 성경적 논거가 전혀 없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초기 오순절 주의자들이 경험한 소위 날랄라 방언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 방언이라고 무조건 전제해 놓고 출발한 것 때문에 이런 논거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사실 성경은 장차 유대땅 안에서 유대인 말로만 전해지던 복음이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을 뛰어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긍극적으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전망합니다. 이런 타문화권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될 것이란 전망과 예언을 따라 사도를 중심한  그리스도인들(타문화권 전도자들)은 외국어를 말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후, 복음이 한 문화권을 초월해 나갈 때마다 성령세례를 받고 새 방언으로, 즉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록합니다(, 고넬료 가족, 10/ 에베소인들, 19) 당연히 그들은 방언’(사실 그들의 자국어 였지만 유대에서 사용되던 언어를 중심으로 보면,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외국어였죠)으로, 각각 라틴어(당시 로마어), 헬라어로 하나님을 높였고, 유대인이 아닌 이런 외국인들이 외국어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유대인 사도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가장 확실히 보게한 증거였습니다. 그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된 언어는 오직당시 유대인들이 쓰던 언어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복음이 문화권을 뛰어넘어 전파되자 그 지역의 지역언어로, 복음을 받아드린 자들의 모국어로 하나님을 높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 민족이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당시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고전 12, (13:1), 14장의 방언의 은사도 역시 외국어를 의미합니다. 바울사도가 교회내 방언 사용은 반드시 통역이 있을 때 두 세명을 차례를 따라 하게 하라고 했는데, 방언은 통역이 가능한 실제 사용되는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1900년 전후로 오순절주의와 함께 교회사에 새롭게 등장한 요즘 방언(방언 현상)은 객관적 통역이 불가능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방언현상을 경험해본 분들은 바울의 권면대로 통역의 은사를 구해보십시오. 그러면 오늘날 소위 날랄라 방언은 통역이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건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끔 통역한다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이 언어적 통일성과 객관성이 없는 거짓 통역임은 제가 5분 안에 증거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들은 객관적 통역이 아닌 주관적 느낌을 영적인 것으로 포장하여 그럴싸하게 나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나오는 조용기 목사님의 방언에 대한 스스로의 통역이 그런 주관적 통역임은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오순절식 방언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분이 있으면 제가 안수하고 10-30분 안에 방언현상을 경험케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각 개인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개인차가 좀 있겠지만요왜냐면 날랄라 방언은 영적현상이 아니고 언어적, 심리적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분위기를 만들고 말을 빨리하라는 등의 주문으로 격려해주면 대부분 경험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오순절주의 신자들 중에 대다수가 어떤 은사 집회에 참석하여 그런 분위기 가운데 방언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자타가 다 아는 일입니다.

       

모든 언어는 음성학/phonetics. 통사론/syntax. 의미론/semantics 등등의 언어적 통일성, 대치성, 대응성을 가지기에 통역할 두 언어를 잘 아는 분들은 객관적 통역이 가능합니다. 즉 음성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소리나는 네 언어의 문장은 형태론적으로, 의미론적으로, 통사론 적으로 대치, 대응을 이루어 상호 통역이 가능합니다.

 

1.In the beginning God created heavens and the earth

  (인 더 비기닝 갇 크리에이티드 해븐스 앤 디 어쓰)

2.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3.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엣 하쒸아마임 웨 엣 하아레쯔

4.나이 빠톰마까안 프라짜오 네라밋싸앙 (f)파아 래 패앤딘

 

이 언어들은 각각 창세기 11절에 대한 영어, 한국어, 히브리어, 태국어에 대한 한글 음역들인데 이런 언어들은 각각의 음절, 단어, 문법적 요소들이 일대일 대응을 이루어 객관적 번역, 즉 음운론적/형태론적/통사론적/의미론적으로 언어학 전반에 걸쳐 통일성 있는 통역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날랄라 방언은 언어가 아니기에 그런 통역이 불가능합니다다만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는 이들에 의해 주관적 해석, 솔직히 통역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언어학적 통일성이 없는 말은 통역이 불가능합니다. "차나 얀 싸라 밍글 파 치 티아후 싸민..." 이런 소리를 누가 통역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이 이기는 그에게 천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 낙심하느냐? 믿음을 가지고 더 열심을 내라..."라고 통역한다면 그 음성과 우리 말 통역 내용을 음운론적 / 형태론적 / 통사론적 / 의미론적으로 상호 대응시켜 문법에 맞게 분석하라면 못합니다. 왜냐면 그런 방언 현상으로 나타나는 소리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언현상은 이방종교에 더 풍성합니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특히 무교, 신과의 직통계시를 중시하는 종교일수록 더 풍성합니다. 제가 태국 방콕의 북부, 클롱루앙에 살때 저희 오른쪽 옆집, ‘쓰부라는 개를 키우던 여인이 있었는데 주야로 매일 한 두 시간을 방언을 했습니다. 처음엔 오순절파 교인인줄 알고 반가웠는데 알고보니 무당,  무속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에게 언어를 말할 능력을 주셨기에 우리가 무의식 중에, 또는 의식이 있는 무아지경에서, 아니면 자신의 의식 사용 의지를 수동적으로 둔 채 기도할 때 어떤 음성학적 소리를 내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몇 이방종교나 오순절파에서 그것을 신비한 영적현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기도는 절대 무아지경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의식을 가지고 해야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무교의 신들림 현상은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회사에서 이런 현상이 의미있게 여김받은 것은 1900년을 전후한 오순절파의 등장 이후입니다. 그것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신학적 이견을 인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고, 기도를 오래하는 능력도 아니고, 신유를 위한 특별 주문도 아니고, 신령한 신자를 증명하는 표지도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적, 심리적 한 현상을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 잘 못 알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부정적 의미가 더 큰 것입니다.

        

2장의 방언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수천의 언어와(6,000여 언어)  문화권으로 흩어진 전세계의 나라, 민족, 백성, 방언(언어)들 속에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증거될 것을 확증하기 위해 보여주신 단회적인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바벨탑 사건의 저주를 풀고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로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시겠다는 성삼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구속의 전망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언이 아직도 성경의 방언이라고 믿고 싶은 분들, 그래서 제 설명이 듣기 싫은 분들에게 한 말씀 드립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고 확신하지만(그래서 할 수 만 있으면 그런 날랄라 방언을 그만 두도록 권하고 싶지만) 자신의 방언이 성경이 말하는 은사라고 그렇게 굳게믿고 있는 형제, 자매의 믿음을 깨뜨려 낙담시키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믿고 방언을 하고자 하시면 하세요. 단 방언은 근본적으로 기도보단 전도를 위한 것이고, 사도 바울의 권면 처럼 통역이 없으면 교회의 공식적 모임에선 잠잠함이 옳고, 뜻모르는 방언 일만 단어를 말하는 것보단 뜻을 깨닫는 다섯 단어의 가르침이 더 가치있음을 알고, 그런 방언적 음성 말함을 영적 성장의 증표로 여기거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증표로 여기거나 기도와 신유의 능력으로 여기는 실수와 특권의식은 갖지 마시길 바랍니다. 참된 기도는 뜻도 모르며 장시간 중언부언하는 소위 날랄라 방언기도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모국어나 적어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통역가능한 수준의 외국어로 신중하게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저는 태국 선교사로 태국어란 방언을 말합니다. 오순절 방언은, 사도행전 1:8의 성취를 위해 성령강림의 증표로 주신 어마어마한 기적이었습니다. 바울 사도 같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들은 타문화 선교를 위해  여러가지 방언을 말했습니다. 최근 복음주의 로버트 클린턴의 최신 은사론에는 은사에는 선천적 재능 쁜 아니라 학습과 훈련을 통해 발전된 기술도 포함되는 것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론적으로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경험할 수 있으나, 요즘은 외국어를 보다 발전된 학습 방법들을 통해 어린 나이때부터 학습합니다. 이미 세계가 세계화되어가고 있으니까요.

       

방언에 대한 가치있는 연구는 앞으로 선교학적 접근을 통해 더욱 밝혀질 것입니다. 복음이 유대 문화권을 뛰어넘어 퍼져나가자 소아시아,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들, 특히 고린도 같은 무역 중심지의 교회에는 여러 문화권/언어권 출신의 구도자들, 관심자들, 신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국어 간증이나 나눔은 통역이 있을때만 허락하라고 말한 것입니다여러 언어권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을때 질서있는 의사소통을 위해서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이만 마치고자 합니다. 다음에 만나서 더 확실한 나눔의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

 

 

[1] 박규태 역, Alister E. McGrath,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Christianity’s Dangerous Idea)(서울: DMI Press) 2009. pp.627-629.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오순절 혁명에 대해서는 15(pp. 667-703)에 잘 요약되어 있다. 스티븐 B. 베반스, 로저 P. 슈레더 (김영동 역),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서울: 도서출판 케노시스) 2011. pp. 481-485에도 이에 관한 좋은 요약이 있다.

[2] 앞의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pp.684-685

[3] 이에 관한 가장 좋은 연구서는 John Ruthven, on the Cessation of the Charismata: The Protestant Polemic on Postbiblical Miracles (Sheffield, UK: Sheffield Academic Press, 1993)일 것이다. 개신교 첫 400년 동안은 은사 중지론이 철저히 대세를 이루었으나 오늘날은 이러한 은사 중지론이 소수설이 되었다. 오순절주의는 이런 은사 현상이 오늘날에도 일어난다고 주장하는데, 이제는 이런 주장이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앞의 책,  p.753)

[4] 데이비드 웰스, 신학실종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7), p.203

[5]  Alister E. McGrath,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Christianity’s Dangerous Idea) p.683

[6]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pp.91-114.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은사 중지론적 입장에서 오늘날 방언 현상이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고 논증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 전서 14장과 사도행전을 비교하며 성경적 방언의 의미를 탐구하고, 오늘날 비성경적 방언의 현상과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사도행전의 방언이나 고린도 전서의 방언은 둘 다 동일하게 외국어로서의 방언임을 주장하고 있다.

[7] Alister E. McGrath,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Christianity’s Dangerous Idea) p.685

[8] 앞의 책,  p.696-699

 

[9]아마도 사도들에 국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10]  성공회 신조 24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교회 안에서 공적인 기도를 드리거나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다.” (존 스토트살아있는 교회.  IVP, 2009 (영문판 2007).  p. 46에서 재인용)

[11]스티븐 B. 베반스, 로저 P. 슈레더는, “오순절 사건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은 그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아주 넓은 광범위한 지역, 전세계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며(“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외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이라”(2:9-11)), 그러한 국제성은 바벨탑의 저주 사건(11:1-9)을 뒤엎은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스티븐 B. 베반스, 로저 P. 슈레더 (김영동 역),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서울: 도서출판 케노시스, 2011, pp. 59-60)

[12]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보냄받은(9:1) 인간은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지면에 퍼져’, ‘흩어져나갔으나(9:19, 10:18, 32),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완고함을 나타내어 흩어지기를 원치 않았다고 지적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정옥배/한화룡 역,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 (서울: IVP) 2010 (영문판 2006))

[13]크레익 오트(Craig Ott) , 홍용표 외 역, 선교신학(Encountering Theology of Mission), (부천: 도서출판 존스북) 2012 (영문판 2010, by Baker Academic), pp.67-68.

[14]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 p.648에서 재인용

[15]크리스토퍼 라이트, 앞의 책, 같은 페이지

[16]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창 11, 바벨 이야기에 온 땅이라는 말이 5번 등장하며(11:1, 4, 8, 9(두 번)), 세계적인 혼란과 흩어짐으로 끝나는데, 12,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통해 세계 모든 민족을 위한 세계적인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p.256)

[17] 스티븐 B. 베반스, 로저 P. 슈레더 (김영동 역),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서울: 도서출판 케노시스, 2011, pp. 58-61

[18]  앞의 책, p.60

[19] 이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고하라. 라민 싸네(Lamin Sanneh), ‘복음의 토착화: 그 무한한 가능성’, 이문장, 앤드류 월즈 외, 기독교의 미래(The Future of Christianity), 서울: 청림출판, 2006. Pp.49-53.

[20]  무한한 번역 가능성(translatability)’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라. 크와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아프리카 신학이란 무엇인가?’, 이문장, 앤드류 월즈 외, 기독교의 미래(The Future of Christianity),  pp.213-217.

[21] 만일 오순절 방언사건이 동일한 성격과 의미를 가지고 되풀이 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사도행전 몇 곳(8, 10, 19)에 나타난 경우들 처럼 성령의 오심을 아직 못들어 본 선교지의 경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그것은 반드시 이해와 통역이 가능한 인간의 말이어야만 할 것이다. 오순절 방언이 그랬던 것 처럼.

[22]앨리스터 맥그래쓰는 시대적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개신교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오순절주의는 개신교의 성경독법에 일어난 작은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다. 즉 성령이 사도시대와 똑같이 오늘 날에도 살아 역사하심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한 것이 오순절주의다라며 오순절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언급하고 있다. (Alister E. McGrath, 박규태 역,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Christianity’s Dangerous Idea) p.740)

[23] 레슬리 뉴비긴, 교회란 무엇인가한국어판의 부록으로 실린, 최형근 교수의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해설 중에서, p 195.


'기독 자료 > 기독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나안에 살던 일곱 족속들   (0) 2018.01.14
방언에 대한 성경구절  (0) 2017.08.16
성령에 관한 성경구절  (0) 2017.08.16
칼빈의 삼위일체론  (0) 2017.06.21
삼위일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0) 2017.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