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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박사의 논증에 대한 반론

구원의 계획 2017. 12. 28. 12:06

조덕영박사의 논증에 대한 반론(“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선포, 어떻게 봐야 하나?”)

 

조덕영박사의 논증에 대한 반론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선포, 어떻게 봐야 하나?”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일까?-

이재현목사

 

서 론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언이후, 이 사태에 대한 논설과 기사가 뉴스를 뒤덮고 있다. 그 가운데는 한국개신교 인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가 올린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선포가 갖는 종말적 의미”와 비슷한 타이틀로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선포, 어떻게 봐야 하나?”라는 단편을 조덕영박사1)가 논술하였다. 이 글은 현재 모 기독교지와 그가 대표로 있는 블로그에 올려져있다.2) 상기 제목들과 관련된 문장을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입력하면, 두 논제가 1, 2순위로 배열되었다.

공교로운 것은 제목은 비슷하지만 결론 도출은 상이하다는 점이다. 마치 서로가 반론 하기 위한 글처럼 보여 질 정도이다. 이것은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언에 대한 단순한 견해의 차이 아니다. 성경해석 특히 종말론에 관한 입장에서 커다란 간극을 갖고 있다. 이에 저자는 조 박사가 주장하는 논증에서 간과하고 있는바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조 박사는 창조신학연구소장과 창조론오픈포럼 대표로 몸담고 있다. 신학자로서 각종 세미나에서 강사로 여러 매체에 기고자로서 한국교회에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저자 또한 조 박사의 공로를 치하한다. 그렇기에 본 글은 이스라엘에 관한 해석 입장 차이를 기술한 것이다. 그의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닌 점을 밝혀둔다.

 

본 론

1. 과연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의 복을 누린 국가요 예루살렘이 그 이스라엘의 복 된 수도였는가?

조 박사는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의 복을 누린 국가요 예루살렘이 그 이스라엘의 복 된 수도였는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논증을 시작하고 있다. 이어 히브리인으로 불린 아브라함은 그의 조상 셈의 여러 자녀 가운데 한 후손인데, “그 많은 히브리인 가운데 겨우 야곱 후손들만 특별한 복을 누린단 말인가? 그런 성경적 해석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조 박사는 아브라함의 6대조인 ‘에벨’에게서 ‘히브리’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을 인용하며, 그렇다면 아브라함 말고도 에벨의 후손이면 모두 히브리인인데, 왜! 그 가운데 아브라함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그 후손들만 특별한 복을 누리느냐는 논리이다.).

조 박사가 말한 ‘특별한 복’은 결국 그들에 대한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논지는 유대인에 대한 구원을 특권으로 보는데 기인하는 것 같다. 조 박사는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구원의 계획은 없다는 말이다.

구원에 특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어떤 이견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구원의 시기가 다르다. 2천 여 년 전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배격했다. 반면 이방인들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교회시대가 개막되었다. 조 박사는 이 후로 유대인에 대한 별도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고, 그들도 교회시대에 포함되어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유대인들이 별도의 구원의 시기가 있다면, 그것은 조 박사가 말한 유대인들만을 위한 ‘특별한 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구원에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로마서 3장 28절, 갈라디아서 2장 16절, 6장 15절을 들면서, 육적 이스라엘이나 역사적 예루살렘을 구원의 특별한 징조로 삼는 신학은 세대주의에서 온 것이고, 개혁 신학일 수 없다고 하였다.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변증>

카이저Walter C. Kaiser Jr, 1933-3)박사는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4)의 오류를 주장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종말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 회복’ 사역은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민감한 주제다. 논란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체신학에 대한 수용 여부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영원히 끊어졌고, 그 자리를 구원받은 이방 기독교인들이 대체했다고 믿는 신학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새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했으며, 개신교에서도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이 이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복 사역을 펼치는 진영에서는 이런 대체신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카이저인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로마서 11장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을 대체한 새로운 계승자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 바울의 사역 전반에 걸쳐 ‘첫째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에서 ‘두 단계의 선교적 양식’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롬1:16,2:10).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그 역사를 제외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선언될 수 없다고 밝힌다. 바울이 취한 두 단계의 방법은 단순한 개인적인 선교 전략의 문제 이상으로 이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를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이 돌아오리라’는 성경 속 예언을 죽었던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영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돌아온다’는 사실로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로 불리는 유대인 중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을 말한다. 종말에 다다를수록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카이저 박사는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강조했다.5) 영화 ‘회복’6)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회복 또한 세대주의로 오인 받는 중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카이저는 이 역시 역사적으로 이루어질 사실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교회는 환난 전 휴거되고, 요한계시록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종말계시이며, 이스라엘 구원에 특권이 부여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성욱 박사도 카이저와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대체신학의 장점은 유대인이 본연적인 백성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바르고 좋다. 다만 약점은 종말에 혈육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25-29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 본문에서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나면, 혈육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이어질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오늘날 혈육의 유대인들이 빠른 속도로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있음은 위의 예언의 성취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재림의 중요한 징조이기도 하다.”7)

그렇다면 이상에서 볼 때 카이저와 정성욱 박사도 세대주의인가? 카이저와 정성욱 박사의 견해는 저자와도 일치하고 있다. 구원의 시기가 분명히 있다. 이방인은 교회시대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고 유대인은 그 이후로 시기가 다를 뿐이다. 그 대표적인 근거가 로마서 11장이다. 교회시대를 상징하는 ‘이방인의 충만수’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은 우둔한’것이다(롬11:25). 그러나 그 기한이 차면 예정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롬 11:2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다(롬11:29).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후손을 선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계획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2. 혈통적 유대인이 멸절되었으므로 그들만을 위한 별도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 박사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26)는 것은 특정시기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로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 패망, 586년 남유대 멸망과 2500년 동안의 이산으로 혈통적(셈족) 유대인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딸 친구가 유대계 독일인데도, 정작 자신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도 모르고, 유대인으로 갖게 되는 생업 이익,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무료로 다녀올 수 있는 등을 예화로 했다. 그러면서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셈족 계열이 아니다. 과연 오늘날 혈통 상 온전한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혈통 상 온전히 순수한 이스라엘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일 것이다.”고 했다.

반증>

혈통적 유대인은 거의 사라졌다는 조 박사의 주장은 사실이다. 성경적인 셈족 계열의 유대인인 세파라딤Sepharadim은 이스라엘서조차도 소수이다. 수많은 핍박과 디아스포라Diaspora로 동화 및 멸절되어 버렸다. 다수이자 이스라엘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오늘까지 국가를 경영하고 있는 실제적인 유대인들은 카자르Khazar 왕국의 후손들인 아쉬케냐짐Ashkenazim이다.8)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며, 그 나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들도 이들이다(특히 미국에서). 혈통으로는 아브라함과 아무 관계없는 민족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성경적 선민으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조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1941-1945 사이 고통 받은 유대인들의 시련을 보여주는 유대 인구 통계 자료를 자신의 글에 옮겼다. 세계 각국에서 당시에 유대인들의 수가 급감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하다. 대표적인 것인 히틀러에 의한 600만 학살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희생당한 이들이 성경적 셈족 유대인이 아니라, 대부분 카자르 왕국 후손인 아쉬케냐짐이다. 그들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닌데도 왜 희생을 당했는가? 철저한 유대교로 자임하고 있는 아쉬케냐짐이 성경적 셈족을 승계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셈족이 멸절했기에 그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이 사라졌다고 본다면, 도대체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택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이방인의 구원으로 마감되는가? “혈통적 유대인이 사라졌기에 그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은 끝났다”고 하는 것은 합당한 논거가 아닌 것이다.

3.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구원이다.

조 박사는 칼빈도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이방인 전부를 포함한 영적 이스라엘을 지칭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온’을 예외 없는 집단적 이스라엘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저자도 동의한다. 이스라엘이라고 모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조 박사도 언급한 것처럼 지금 교회시대인데 이 은혜의 시대에 이방인 모두 구원받는가? 아니다. 예정된 자들만이 구원 받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가운데도 예정된 자들만이 구원 받는다. 그런데 조 박사는 교회시대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방인이 있다고 하면서, ‘온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구원이라고 하면, 전체 이스라엘이 다 구원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지 모르겠다. 특정한 용어와 해석의 유사성이 있다고 모두 세대주의로 취급하지 말기를 바란다. 유대인의 구원 시기는 교회시대가 마친 다음 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주장하면 개혁주의가 아니고 세대주의라고 하는지 저자는 수용할 수 없다. 조 박사는 또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은 성경적 바른 해석과 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 미숙한 주장일 뿐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변증>

이스라엘 회복이 이루어지면 종말이 온다는 것은 문장으로만 보면 바른 정의이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현재 구원 완결을 이루어감으로 종말의 최종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또 미래 구원의 시기로 향해가는 종말의 징조로 보는 입장이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영적대각성이 현재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성취하기 위해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유대교는 물론 이슬람교도들에게도 강한 거부감을 불러오게 된다. 또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정세 등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한다. 현상을 보고 종말을 예단 혹은 속단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것은 종말론에 대한 성경 연구가 부족한데서 온 것이다. 정성욱 박사도 잘못된 이스라엘 회복 운동의 오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스라엘 회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오늘날 교회가 가장 힘써서 감당해야 할 일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교회가 오늘날의 이스라엘 정부와 그 정책을 지지하고, 물질적으로도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물론 혈육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이다. 하지만 이런 선교적인 맥락을 떠나서 육적의 이스라엘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현재의 정치적인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 백성의 중심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교회가 현재 정치적인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도와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9)

성경에서는 장차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7년평화조약(7년환난)을 체결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단9:27).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에게 환호하고 메시아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전 3년 반이 지난 후 적그리스도가 본색을 드러낸다. 제사와 예물을 금하고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이라고 칭하게 된다(단9:27;막13:14;살후2:4). 그제야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된다. 동시에 2천 여 년 전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통치에 맞서 투쟁하다가 재림하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게 된다(슥14:4-5;마24:15-16;계1:7). 이것이 이스라엘 회복이다(이러한 논거에 대하여 ‘7년평화조약’(7년환난)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세대주의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에 대한 논증은 차후에 하기로 하고, 이 변증의 주제인 이스라엘 회복 관점에서 보아주기 바란다.).

전 3년 반 이전까지 유대인들에 이 계시는 닫혀 있다. 그것을 구약 다니엘 12장 4절에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 로마서 11장 25절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 즉 교회시대의 구원의 수가 차기까지 유대인들은 ‘우둔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은 유대인인 원감람나무가지가 꺾기고 대신 이방인인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아 원감람나무에 진액을 공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돌감람나무는 꺾기고 이전에 꺾였던 원감람나무 가지는 붙여지게 된다. 이방인의 구원시대와 유대인의 배교시대에서 역전하게 된다. 이방인 교회가 배교를 하게 되고, 유대인 이스라엘이 구원의 시기가 찾아오게 된다(롬11:17-27.참고/단7:25-26;슥14:1-5). 이 때 이스라엘 회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들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도 부른다(롬11:5). 이 시기가 바로 적그리스도 등장 이후에 즉 7년환난 중 후 3년 반에 있을 일이다.

현재 이스라엘 안에서 유대인 중 구원 받는 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스라엘 회복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회복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종말의 징조로 보아야 맞다. 정성욱 박사도 “오늘날 혈육의 유대인들이 빠른 속도로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있음은 위의 예언의 성취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재림의 중요한 징조이기도 하다.”10)라고 하였다. 저자와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방인 교회시대가 끝나고, 유대인 구원시대가 도래되기 까지는 어떤 능력과 방법으로도 이스라엘 회복을 이룰 수 없다.

메시아닉 쥬라고 불리는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그러면 누군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포괄적으로 교회시대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보아야 한다. 역으로 지금 이방인의 구원시기인데도 준비되지 못한 미련한 다섯처녀 같이 적그리스도의 통치에 떨어질 성도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후 3년 반 동안 뒤늦게 회개하여 짐승표를 받지 않고 처절하게 믿음을 지킬 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은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교회의 남은자들로 유대인 중 이스라엘의 남은자들과 같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계12:17). 이 관계를 이해하면 현재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이스라엘 회복의 완성이라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단 이스라엘 회복이 가까이 오고 있는 종말의 징조로서 보는 것은 합당하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교회시대이후이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교수인 이승구박사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이해를 우리는 문자적인 예루살렘이 아니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온 세상의 회복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11) 이 박사가 말한 온 세상의 회복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해석으로 보인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구원을 주장하는 조 박사와 한 견해이다. 이 역시 현재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사역 자취를 없애버렸다.

저자도 기독교 극우주의자들과 같이 오늘날 예루살렘을 성경적 예루살렘으로 보는 세대주의 입장은 취하지 않는다. 지금의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섭리사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지에 대해 “세대주의와 같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그렇지 않다.” 오늘날 예루살렘을 구약의 예루살렘으로 보는 것과 현재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일은 유대교 시오니즘Judaism Zionism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유대근본주의자들로 선민사상에 젖어 타민족을 배척하고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동조하는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이다. 이들은 기독교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과 같다. 친이스라엘, 극우주의자들이다. 이스라엘 국가숭배, 곧 우상숭배로 나아간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잘못된 세대주의를 유업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스라엘은 이방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사관에 따라 그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회복도 그러한 하나님의 타임테이블 안에 있는 것이다.

결론

 

조 박사는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포하면서, 기독교계에서 여러 논란에 대한 바른 정립을 위해 글을 기고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부제가 그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조 박사의 논증은 종말적 관점을 모두 수몰시키고 있다는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왜! ‘이스라엘’, ‘예루살렘’이라는 말만 나오면 모두 세대주의이고, 개혁주의가 아니라고까지 단언하는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조 박사의 논지가 일정부분 대체신학과 궤를 같이한다고 하여, 대체주의자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와 같이 저자의 글에 세대주의와 용어와 해석의 유사성이 있다고 세대주의로 취급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 박사는 혈통적 유대인이 멸절했으므로 그들에 대한 별도의 구원의 계획은 없고 이방인과 같이 교회시대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셈족이 아닌 아쉬케냐짐이 유대교를 더 신봉하며, ‘시온이즘’Zionism12)을 확산시키고, 그들이 ‘홀로코스트’Holocaus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알리야’Aliya13)운동을 전개하여, 1948년 이스라엘 독립14)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오늘까지 승계된 성경적 유대인들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과정이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아쉬케냐짐 민족의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인가?

‘멜 깁슨’Mel Gibson,1956-이 2004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연출했다.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1946-와 조지 루카스George Lucas,1944-는 이 영화에 “어떠한 투자도 그리고 출연한 배우와는 앞으로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총독 빌라도가 아닌 유대인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유대인이다. 이렇게 미국 내에서 유대인의 힘은 문화계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학계 언론에서 막강하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인데 그들도 대부분 아쉬케냐짐 후손들이다. 그들의 힘이 2천 여 년 동안 전 없었던 지금의 유대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국했다. 이 사실들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는 것은 허상이란 말인가?

이스라엘 국민은 세계 인구에서 몇 퍼센트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그렇다고 유대인을 그 비율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일대일(1:1)이다. 결코 이방인안에 유대인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마쳐진다. 이렇게 말하면 왜 성경적이지 못한 것인가?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유대인의 구원의 시작된다는 이 시기를 ‘마지막 때’라고 말하면, 이것을 세대주의라고 공격한다. 이스라엘 회복이라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적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지금까지 배도한 유대인들이 종말의 시기에 돌아온다는 것은 허구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의 시기가 다른 것을 유대인들에 대한 특권으로 보는데 기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거부한다. 그러면 그들을 선민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였는가? 아니면 오늘날 예수를 영접한 이방인들이 선민 반열에 서게 됨으로 유대인에 대한 선민은 마쳐졌는가? 혈통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기에 유대인은 사라졌는가? 이에 대한 변증을 바로 보고 세대주의와 저자의 논증을 분별해 주기 바란다. 어떻게 자신의 주장만이 개혁주의라고 주장하는가? 개혁주의는 말은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세대주의라고 매도하지 말고 상이한 것이 있다면, 성경적 견해가 다르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오늘날 교회시대인 은혜의 시대에 이방인 모두 구원받는가? 아니다. 택자 만이 구원 받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회복이라고 하여, 그들 모두가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택자 만이 구원받는 것이다. 현대 이스라엘이 셈족이 아닌 아쉬케냐짐이어서, 유대인에 대한 별도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같은 주제로 종말적 시각을 갖는 것은 바른 관점이 아니며 성경적이 아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시대라고 이방인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유대인의 구원의 시기기 다르다고 그것이 유대인의 특권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번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포’는 이스라엘 회복이 다가오고 있는 종말의 징조이다(이스라엘 회복은 종말의 징조 가운데 하나이다.). 종말적 관점들을 사장死藏시키지 말고 마지막 날이 임박한 시점이 오늘임을 것을 경각하고 증거해야 한다.15)

각주)

1) 조덕용박사는 현재 평택대교수로, 창조신학연구소장으로 제직중이다. 북대와 숭실대 산업기술정보대학원(환경화학, 공학석사), 성결교신학대학원(M. div), 평택대신학대학원(Th. M),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조직신학 박사, Th. D)을 졸업했다.

2)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7473, https://blog.naver.com/davidy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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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이저는 복음주의적 관점과 교회에 대한 열정과 함께, 폭넓은 학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고대 근동의 언어와 구약 역사로부터 구약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신학계의 거성이다. 브랜다 이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Ph.D)를 받았고, 현재는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고든 코넬(Gordon-Conwell)신학대학 원 명예총장으로 있으면서 구약과 구약윤리를 강의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Toward Old Testament Theology’, ‘Toward Old Testament Ethics, Rediscovering the Old Tetament’등 다수가 있다.

4) 대체신학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이미 끝났다. 첫째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죽였으므로, 둘째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거의 20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대체한다’는 신학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가톨릭에서 주도한 신학이론이며, 아직도 많은 개신교신학교에서 따르고 있다. 이 신학은 이스라엘이 실족한 결과로 하나님의 목적이 종결되었다는 관점을 취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등 구약의 선지서들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많은 천년왕국에 대한 이스라엘의 약속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이방인이 교회시대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을 계승하고 있다지만 이스라엘의 실족으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29절에 유대인을 택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단 교회시대 구원 받을 성도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지까지 ‘이스라엘 은 우둔’한 것이다(롬11:25). 그러나 그 기한이 차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다(롬11:26). 바울은 이 말씀을 구약 이사야 59장 20절과 27장 9절에서 인용하였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은 신약에서도 변함없이 이행되고 있음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이방인의 구원와 유대인 구원의 시기 즉 교회시대 완성과 그 이후의 차이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원래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고 그에 대한 성경의 모든 언약도 이루어질 것이다. 땅과 백성과 주권이 있어야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수 있으므로 사탄은 오늘도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팔레스타인 땅도 빼앗지 못해 안달이고, 대체신학을 통해 예수님이 왕으로 오심을 부정하고 있다. 재림을 사모하는 신부들은 예수님이 그 땅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겁고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신 말씀처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5) “국내에서 ‘대체신학’에 대한 건강한 논의가 시작됐다”. 이태형. 2012.8.7. www.kukinews.com

6) 김종철 감독이 2009년 제작했다. 2천년 간의 핍박과 고난, 분노와 갈등의 역사가 아직도 남아있는 이스라엘 이 땅에서 사라진 예수의 이름을 다시 세우기 위해 목숨을 건 메시아닉 쥬들의 신앙을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 과격파 유대교 청년단체가 보낸 폭탄소포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크리스천 가정의 ‘아미 오르티즈’ 사건,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가자지구에서 기독교도인 팔레스타인이 이슬람교도의 집단폭행으로 사망에 이른 ‘라미 아야드’ 사건 등을 취재하여 이스라엘의 기독교인과 유대인 관계, 종교적 관점의 이스라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한국교회에 센세이셔널(Sensational)을 일으켰고 특히 수면 아래 갇혀있던 종말론을 공론화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2010년 제5회 모나코국제영화제(5th Monaco Charity Film Festival) 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7) 정성욱, 「정성욱교수의 밝고 행복한 종말론」, (주)눈출판그룹, 2016.3.7, pp.131-134.

8) 전 세계 유대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가 유럽계인 아쉬케냐짐(Ashkenazim:카자르계(Khazar))이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 이슬람권, 북아프리카 지중해계인 세파라딤(Sepharadim:셈족)이다. 세파르디가 유대인의 원래 인종인 셈족에 속한다면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중 대다수 그리고 미국 유대인의 90 % 이상을 아시케나지가 차지하고 있다. 아시케나지는 복잡한 민족 배경을 갖고 있다. 아시케나지는 원래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을 지칭하지만, 오늘날의 아시케나지의 다수는 우크라이나·러시아·폴란드·헝가리 등 중·동구계다. 그러나 이 아시케나지에 대하여 헝가리 출신의 영국 작가 아서 쾨슬러는 <제13支派(지파)>, 역사학자 케빈 부룩은 <카자르>라는 책에서 인종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시케나지의 대부분은 터키계 백인부족의 하나인 카자르(유랑종족이라는 의미)족이 7세기 중엽 동남부 러시아 지역에 세운 카자르 왕국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740년경 유대교에 심취한 불란 왕은 유대교로 개종하게 되는데 이어 신하와 국민들이 국왕의 뒤를 이어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카자르 왕국은 러시아 평원의 유대교 국가가 됐다. 불란 왕이 유대교로 개종한 것은 주변 이슬람국가와 기독교국가들이 서로 자신들 종교를 선택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불란 왕은 기지를 발휘해서 두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신앙이면서 제3의 종교인 유대교를 선택하여 국가의 독자성을 보존하려 했다. 그 후 카자르 왕국이 망한 후 이산민들은 가까운 우크라이나·러시아를 비롯해 헝가리·폴란드·보헤미아·모라비아(오늘날의 체코)·루마니아·불가리아 등지로 흩어졌다. 이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방하며 셈족계 세파르디 유대인보다 더 철저하게 신앙을 지켜왔다.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세파르디는 셈족으로 아랍민족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검고 눈이 밤색이다. 코카서스계 인종에서 볼 수 있는 금발이나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이나 프랑스·영국·러시아 등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외관상 일반 백인과 거의 구별이 안 된다. 이들이 바로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인 것이다(“미국을 지배하는 유대인 파워의 실체”, 박재선, 월간조선, 2008년 12월호, pp.174-187.). 그 외에도 중동 계통을 미즈라히(Mizrahi) 유대인,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계통을 베타 이스라엘(Beta Israel:팔라샤 유대인(Falasha))이라고 부른다.

9) 정성욱, 「정성욱교수의 밝고 행복한 종말론」, (주)눈출판그룹, 2016.3.7, pp.131-132.

10) Ibid. p.134.

11)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어떻게 봐야 하나”. 이승규. 2017. 12. 14. http://www.nocut-

news.co.kr

12) ‘시온이즘’(Zionism):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인 민족주의 운동

13) ‘알리야’(Aliya):‘올라감’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이산(離散)된 유대인들을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운동을 지칭한다.

14) 저자는 이스라엘 독립을 종말의 징조 가운데 하나로 본다. 또 그 연장선에서 제3성전의 재건까지 보고 있다(“이스라엘의 독립이 메시아닉 기독교(Messiahnic Christianity=메시악닉 쥬Messiahnic Jews)의 부흥에 긍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재림에 대한 분명한 징조이기에, “이스라엘의 독립은 재림의 징조 중 하나로 이해될 수”도 있다(정성욱, 「정성욱교수의 밝고 행복한 종말론」, (주)눈출판그룹, 2016.3.7, pp.248.).

15) 독자들은 조덕영박사의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선포, 어떻게 봐야 하나?”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7473)와 함께 김영한박사의 “트럼프의 ‘예루 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 선언을 보면서”(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7238)

를 참고하라. 본고에서 논한 조 박사의 주장은 그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있 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가 그에 비해 소수의 의견임에도 이와 같은 글을 기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 박사에 대한 저자 의 반증은 이스라엘에 관한 성경적 입장 차이를 논술한 것일 뿐, 그의 전 사상이나 인 격을 침해하고자 함은 없음을 재차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