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이 뭔지나 알고 찬송합니까?
글:김병덕 목사
이사야43:21절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과유불급 [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든지 지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를 보면 너무 지나쳐서 넘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도 지나치면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다고 한 번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넘치게 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선한 일을 했습니다.
너무도 좋은 일이고 모든 사람이 들어서 칭찬을 받아야 할 일인데 그 일을 보는 사람에게 다 이야기 하고 또 들은 사람에게도 또 이야기를 하고 한다면 아마 좋을 일을 한 사람이 나중에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를 볼 때 마다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칭찬을 하고 한다면 나중에는 그것이 칭찬이 아니라 조롱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가 선한 일을 했어도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칭찬을 해야지 난감할 정도로 부끄러울 정도로 칭찬을 하고 있다면 그는 그렇게 칭찬을 하는 사람을 나중에는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독교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번을 해도 좋고 아니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그것만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그럴 만한 일이고 바르게 칭찬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바르게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칭찬을 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어찌 과유불급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찬송이라는 것이 전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을 가지고 찬송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시대 찬송가나 그리고 복음송가 등은 찬송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는 노래에 불과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성도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 그리고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그리고 복음송이 복음과 반대되는 내용이라면 그것은 찬송이 아니라 조롱을 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몇 가지 찬송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57장 즐겁게 안식할 날” 과연 이 찬송가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복음을 아는 성도라면 이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내용을 노래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요일이 안식일 입니까?
이 찬송가의 가사는 정말 복음에 반대되는 내용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요일 한 날만 새 양식을 먹는 날 입니까? 그리고 일요일 한 날만이 우리가 안식을 하는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찬송가를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이 가사는 조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롱하는 가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안식을 누리고 있는데 어찌 일요일 한 날이 안식일이 될 수 있으며 또 그 날에만 우리가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 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찬송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송이 아니라 조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날을 안식을 하고 있는데 마치 한 날이 일요일이 안식일인 것으로 율법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에 하늘로서 새 양식이 내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른 날은 하늘로서 새 양식이 안 내린다는 말입니까? 다른 날은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예배를 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이 날만 하늘로서 새 양식이 내리는데 굳이 왜 수요일 날 모이고 금요일 날 모이고 또 구역 예배라고 하면서 모이고 또 매일 새벽에 왜 모이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한 날을 정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성경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또 하나를 보겠습니다.
“59장 성전을 떠나가기 전” 성전이 있습니까? 교회가 성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46년간 지은 이스라엘 성전을 무너뜨렸는데 이 시대는 자기들이 지은 건물을 보고서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없는 성전이 지금 한국 땅에는 수많은 성전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들어 온 것을 마치 성전 뜰에 들어 온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있는 곳을 지성소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거룩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누가 강대상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무슨 큰 일이 날 것 같이 그곳을 신성시 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이 찬송을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가슴을 치며 통탄을 할 일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성전은 다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보이는 건물을 지어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신성시 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물건들이 성물입니까?
참으로 답답 합니다. 강대상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깟 나무 조가리가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하긴 요즘에는 더욱 신성하게 하려고 아주 비싼 크리스털로 만들어서 신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보이는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이제 보이지 않는 성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그 건물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구약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건물을 자기들의 마음에 좋은 대로 지어 놓고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찬송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과유불급 [過猶不及]입니다.
목사인 저도 찬송가를 배우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목사들이 자기 은사를 자랑하기 위해 새 복음송가가 나오면 그것을 배워서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적이지도 않고 찬송을 하는 것도 아닌 그것을 먼저 배워서 가르치고 있고 그런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을 아주 대단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답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노래를 배우다가 세월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런 노래를 먼저 배우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이 백성이 찬송을 하게 지었다는 그 말씀대로 마치 자기가 이 백성이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에 예수가 들어간다고 다 찬송이 아닙니다. 실제 그 가사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내용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을 모르고 내 백성을 나를 위해 찬송하게 하려고 불렀다는 그 말씀을 아주 충실히 따라 하려고 아니 찬송을 하는 그 모습으로 마치 내 백성이 된 것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찬송이 미쳐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찬송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부르는 찬송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안 하느냐면 무조건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다 좋습니다. 예수만 들어가면 하나님만 들어가면 그 내용이 구원의 감격이 빠진 것을 어떻든 간에 그리고 부조건 많이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자기는 하루에 기도를 한 시간 하고 찬송을 한 시간 하고 성경을 한 시간 본다고 합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참 좋게 생각되고 그가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6장 4-6절에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찬송이 무엇입니까? 미덕을 기리고 칭찬하는 것을 찬송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곡조 있는 노래로 부르는 것을 찬송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 미덕을 기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앞서서 말씀을 드렸지만 미덕을 기리기는커녕 오히려 그 미덕을 폄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덕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성경을 모르고 부르는 그 내용이 정말 복음적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부르는 찬송은 찬송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남들이 하니까 아니 교회에서 부르니까 따라 부르는 것은 찬송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평생 동안 찬송가를 부르면서 살았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못 받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정말 진정한 찬송을 했다면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우리와 같이 찬송을 불렀지만 그들의 다수는 모두가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찬송의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조금이라도 내 구원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면 그는 찬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노래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증이 없다면 그는 그저 세상 노래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 나온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 다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5:19절을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생각해 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반드시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골로새서3: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도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임입니다. 반드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시대 찬송가나 복음송가들이 신령한 노래인가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령하지 않는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기도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합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찬송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다음에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을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눈 지그시 감고 감상하면서 자기 도취에 빠져 버립니다. 신령한 노래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라고 하니까 다 마음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마음은 믿음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원 받을 믿음이 있는 그 자체가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마음으로 찬송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으로 찬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자기 입술로는 찬송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 그들의 마음으로는 전혀 찬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입술로 하는 찬송은 내가 하루에 한 시간을 찬송을 하든지 몇 곡을 찬송을 하든지 하지만 마음으로 하는 찬송은 늘 생각이 날 때 마다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영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육적으로 사람들은 미쳐 있습니다. 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영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육적으로 입술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는 것 같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찬송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 입술로도 찬송을 하지만 내와 하나님의 개인적으로 볼 때는 마음으로 찬송을 해야 합니다. 늘 구원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그 자체가 바로 마음으로 찬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루 종일 찬송가를 듣고 부르면 뭐 합니까?
그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없고 하나님을 감사하지도 않고 있다면 그의 찬송은 세상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감정에 빠져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과 교회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내 마음에서 찬송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기감정에 불과 합니다. 찬송하면서 눈물 흘리면 잘한 찬송인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온전하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가고 부르는 복음송가라고 부르는 그 노래들의 가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대하는 내용인 줄도 모르고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고린도전서10:4절을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노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담겨 있는 내용의 가사를 곡조로 노래하는 것이 신령한 노래입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부르고 있는 찬송가에 신령한 노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노래를 부리기를 좋아하고 아주 미쳐 있는 이 시대에 부르고 있는 노래들이 과연 얼마나 신령한 노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정말 예수만을 노래하고 있는 가사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한번 찬송가를 1장부터 해서 558장까지 그 내용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심코 부르고 있는 찬송가들이 실제 복음에 반하는 내용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참 성도면 다른 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 만을 노래합니다. 그 내용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나타나는 그런 내용의 가사이어야 신령한 노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신령한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가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미덕을 기리고 칭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입술로 하는 노래입니다. 실제 찬송은 내 마음에 믿음이 있어서 정말 주님을 생각할 때 마다 감사가 절로 나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찬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없고 그저 세상 노래와 별로 다를 것이 없이 자기감정을 위해서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 하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고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찬송이 아닙니다. 찬송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믿음을 주셔야 내 마음이 찬송을 할 수 있고 또 내가 신령한 것을 알아야 내 입술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분별을 해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사에 예수그리스도가 있고 하나님이 있고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으면 마치 신령한 노래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찬송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서 그 은혜와 사랑에 깊이 감사를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찬송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찬송은 하려 하지 않고 있고 그저 자기들이 입술로 부르는 그 찬송에 절제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대상25:3절을 보면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구약도 똑 같습니다.
신약의 모임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그들은 신령한 노래를 했고 또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여기도 노래와 찬양을 따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입술로 부르는 노래와 내 마음에서 감사가 나와 마음으로 찬송을 하는 것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신령한 노래를 해야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부르고 있는 그 노래가 신령한 노래가 아니라면 감사가 나오지도 않고 찬송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해야 감사할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나님께 찬송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해서 다 신령한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노래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미덕을 기리고 칭찬을 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 내용에 담겨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찬송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찬송가들이 있고 그것을 배우느라 예수 그리스도의 미덕을 알 수 있는 시간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야 그 찬송이 신령한 노래인가를 알 수 있는데 모르니까 그냥 남이 하면 따라 부르고 그저 감정에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찬송가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직 믿음도 없고 그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찬송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그들은 세상 가수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서 찬송가를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내 열심이 남을 사망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에 사로 잡혀서 서로 경쟁을 하듯이 찬송가를 만들어 내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감사로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노래에 미쳐 자기가 진리 안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정말 찬송을 배우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들을 빼앗기고 있고 또 그것을 만들어서 인기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저는 솔직히 성경을 50번을 읽고도 아직도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늘 부족해서 시간이 날 때 마다 성경을 읽어서 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알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 나오는 찬송가를 배울 시간도 없습니다. 아니 배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바로 알지 못하는 내가 입술로 부르는 그 찬송이 무슨 의미가 있고 그 찬송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성경을 한 자라도 더 보고 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신령한 노래 불러야 합니다.
제가 그것을 나쁘다고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를 보면 안타깝게도 노래에 미쳐 있고 그것에 대해서 절제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집회를 할 때 노래만 많이 부르면 마치 은혜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그런 행위들이 다 자기만족에서 나오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나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런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면 그는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찬송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감사가 넘쳐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이 절제입니다. 왜 마지막에 절제를 말씀을 하느냐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절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타락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절제를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내 마음에서의 찬송을 절제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내 입술로 부르고 듣고 하는 찬송 절제를 하지 못하면 그것에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미덕을 아는 것에 소홀히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스스로 그물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듣고 부르는 것은 절제를 하시고 내 마음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늘 찬송이 넘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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