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열흘동안 환난은 몇년일까?
글/장봉운 목사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순교자의 교회’입니다. 서머나라는 말의 뜻은 ‘몰약’(myrrh)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장례를 치를 때 사용하는 향료입니다. 로마 폭군 네로가 박해를 시작한 64년부터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게 되는 313년까지의 박해 시대의 교회입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기까지 로마는 기독교를 자신들의 정권을 위협하는 이교도로 취급해서 극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터툴리안(145~220)은 그의 변증서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잘리면 잘릴수록 더 많은 수로 증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앗입니다.” 요한 사도는 계시록 2장10절 에서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열흘은 10년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가장 극렬한 박해는 303년부터 313년까지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 통치기간에 일어났습니다. 10일 동안 고난이라고 쉽게 해석하는 것은 큰 문제일 것입니다. http://cafe.daum.net/ilmak
계시록 2장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는 박해를 가한 역대 로마 황제 중 마지막 열 번째 군주입니다.
이는 ‘열흘’이라는 말씀이 상징하는 십위(十位)의 군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대 박해 왕의 통치기간을 보면,
①)네로(64년), ②)도미티안(95년), ③)트라얀(107년), ④)하드리안(127년), ⑤)오레리우스(165년), ⑥)스베루스(202년), ⑦)막시무스(235년), ⑧)데시우스(249년), ⑨)발레니아누스(257년), ⑩)디오클레티안(303년) 등입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구약의 ‘고라의 반역’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지도체계에 도전해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성취되기까지는 2050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야 이루어질 세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부르심과 그 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야만 올바른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지도자들이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열어주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 계속 감시하고 다스리는 것이 절대로 아니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만을 고집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고라는 정당한 하나님의 권위로 세워진 지도자에게 대항함으로써 스스로 멸망하는 길로 갔습니다. 고라가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오중 사역과 그에 따른 각종 은사가 직임이 되어 그 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시대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이해’에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분별력이 부족한 것이 이 교회의 영적 문제입니다.
잠언 9:10은 “주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카도쉬)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카도쉬’는 거룩이란 말로 번역되는 것이지만 이 단어는 흠이 없거나 죄가 없는 거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코데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흠 없는 거룩을 의미하며, 신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잠언에 사용된 ‘카도쉬’는 이 ‘코데쉬’에서 파생된 말로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세상과 구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불러내신 것을 의미하는 말로써 ‘성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구별되게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인데 이 때 사용하는 거룩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와는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구별되게 부르심을 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란 우리를 불러내신 분의 의도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슬기(understanding)의 근본인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이 분별력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를 분별해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사단이 광명한 천사를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교묘한 위장전술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은 할 수만 있다면 사역자를 유혹하여 사단의 하수가 되도록 시도합니다. 이 유혹에 휘말려 사단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사단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훼손해서 불신자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듭니다.
오늘날까지 이 분별력이 없어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로 부르심을 받아 구별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슬기이며, 이것은 주님과의 친밀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혈통으로 인식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요 1:13).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하나님의 뜻으로 사람을 세우려하지 않고 여전히 육정으로 세우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가 구원의 징표가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증거는 육신의 표시에 있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보다 쉽게 처리하기 위해서 객관화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제도화하여 지도자를 구분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내세우는 혈통과 육체의 흔적입니다. 이것은 유대주의이며, 오늘날에는 사단의 계략인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구별되지 못한 지도자의 등장은 교회를 급속히 세속화시키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 종교와도 구분이 되지 않는 종교체계로 격을 낮추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가 없는 지도자의 등장은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도 차별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갖추어야 할 영적 증거는 사라지고 대신 학위와 정통이라는 육체의 흔적만 남은 제도로서의 지도자의 출현은 분별력을 상실한 서머나 교회가 지닌 최대 약점이기도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된 감독 제도는 분별력을 잃어가는 교회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를 통해서 교회를 말살하려는 사단의 계략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터툴리안이 설명하였듯이 박해 받을수록 교회는 더욱 자라났으며 씨앗은 널리 펴져만 갔습니다. 이런 전략으로는 교회를 막을 길이 없음을 안 사단은 유대인으로 가장한 무리들을 교회 안에 심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건한 모습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이런 무리들로 인해서 교회는 서서히 분별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으로 주어진 은사는 차츰 자리를 잃게 되고 그 자리를 제도화된 절차에 따라서 나온 지도자들이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다주주의에 의해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성령의 역사는 급속히 인위적인 제도로 대체되게 되었고, 이것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히려 성령의 역사가 더 낯선 것이 되었으며,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다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너무도 낯설어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를 나아준 엄마와 지낼 때는 너무도 친숙했었는데 어떤 이유로 인해서 헤어지고 양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 나은 부모를 만났습니다. 어릴 적에 그토록 친숙하였던 아이는 부모를 보는 순간 아주 낯선 사람을 보듯이 냉랭하고 어설퍼합니다.
어릴 적 재롱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서먹함만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풍성했고 그 감격 속에서 살아았던 1세대의 그 놀라운 친밀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서먹함만이 남아있고, 성령의 움직임에 대해서 너무도 낯설어하는 우리의 모습들을 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격리됨으로써 오는 서먹함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슬픈 일들입니다. 요한 웨슬레를 비롯해서 존 칼빈 등과 같은 초기 교단 교회의 창시자들이 지닌 영성과 열정은 그 후계자들은 제대로 이어오지 못했습니다. 열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제도가 차지하게 되는 것은 그 제자들에게 그런 열정을 일으킬 수 있는 성령의 역사를 스스로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회귀본능을 극복하지 못한 교회의 서글픈 모습이 서머나 교회에서 여실히 나타납니다. 박해 속에서 자라나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화석처럼 굳어져 가는 서머나 교회의 모습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율법으로의 회귀를 봅니다. 자유케하려고 하지 않고 더욱 속박하고 구속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결국 성령을 제한하게 그 일을 낯설어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감동과 그 역사하심에 민감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머나 교회의 분별력 없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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