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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어야 할 자리 기도의 자리에 있으라

구원의 계획 2011. 5. 7. 10:18

 

내가 있어야 할 자리(마태복음 26:36-46)

                                                       하원식 목사

 

흉한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할 때 흉한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기 있으라"고 하시며 자리를 지정해 주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말씀이다. 사람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자기 본분을 다할 수 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실 때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향해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기내에서는 이런 안내방송이 들려오게 된다. "저희 비행기는 곧 김포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메어주십시오." 이런 방송이 나오면 사람들은 각지 자기자리로 돌아가서 착륙할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계신다. 바쁘게 지나면서 우왕좌왕하던 지난 3 개월을 다시 돌아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앉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자. 여기 있으라고 지정해 주신 자리는 어떤 곳인가

 

1. 기도의 자리에 있으라는 말씀이다.

전 인류 구속이라는 엄청난 일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처절한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 평소 때에도 새벽이나 밤이나 아니면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던 주님이셨다. 그러나 오늘밤은 다르다 목숨까지 대속 물로 주시기 위하는 결심을 하시고 기도하시는 절박한 시간에 여기 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기도하는 자리에 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그 절박한 자리에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제자는 서로 누가 큰가를 자랑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고 가롯 유다는 대제사장의 사랑방에 있었을 것이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동산까지는 갔으나 자고 있었다. 여기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기도하자는 말씀이다. 기도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기도하지 않고는 이 어두운 밤을 지나갈 수 없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십자가의 승리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신다.(롬8:34) 주의 일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본문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깨어 있어 함께 동행해야 한다.(38절-40절)

진지한 기도를 할 때에는 잠이 오거나 졸음이 오는 일이 없다. 우리가 기도 할 때에 깨어있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진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다면 깨어있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은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기에 기도하실 때에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으며,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깨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주님과 동행하는 첩경이요 방편이다. 기도 없이 주님과 가까이 하기란 어렵다. 왜냐면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한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마18:20)

 

그런데 이 말씀의 전후에 기도의 내용이 있음을 유의해야한다. 기도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깨어 있으라고 명 받은 제자들이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육신이 약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졸립다는 이유로 자고 있었다. 특별히 부름 받은 소명감도, 부름 받은 감격과, 감동도, 감사도 하나도 없었다. 여덟 명을 저 아래에 놔두고 세 명만 따로 불러서 특별히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한 부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다 와보니까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도해야 하는 큰 이유는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깨어 있으라는 명을 받은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했다. 잠자고 있었다. 한번 와서 깨어 놓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는데, 또 가서 기도하고 와보니 또 자고 있다. 세 번째로 기도하고 와보니 그때도 또 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라고 했다. 우리 성경에는 이렇게 점잖게 되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자라 자"라는 말이다. 제자들이 자다가 일어나 예수님께 뭐라고 답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으니까 "자라자. 됐다, 됐네. 자라자"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저 깨어 있기를 원하셨다. 얼마나 오래 있기를 원하셨는가? 단지, "한 시 동안", 잠시동안 깨어 있기를 원하셨다.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를 향해 물으신다.

 

2. 고난의 자리이다.

고난의 자리는 누구나 쉽게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예수로 인한 영광은 좋으나 예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싫다. 떡으로 배불리 먹여 주실 때는 많은 사람이 따랐으나 십자가 언덕에는 모두들 가버리고 힘없는 여인들만이 있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십자가 곁에 있을 수 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갔다 (마태복음 26:58은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베드로는 예수의 오른팔이다. 그러한 그가 예수를 곁에서 좇아야 되지 않겠는가 ? 그런데 그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간 것은 결국 그로 하여금 상항에 따라 바뀌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거리를 두고 예수를 믿지 않는가?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가까이 하는 믿음을 가지자. 교회는 3부류의 신자가 있다. (방해꾼 구경꾼 일꾼)  일꾼이 많은 교회는 교회가 부흥한다. 그러나 구경꾼 신자가 많다.

 

예수님과 같이 있지 않고 하속들과 함께 있었다.(요한복음 18:18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현재 그 자리가 베드로가 있을 자리인가 ?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유혹들에 싸여 있다. 환경이 중요하다. 일란성 쌍둥이도 자라 온 삶의 환경에 따라 얼굴까지도 달라진다. 악한 환경 좋지 못한 환경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물든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를 알고 있어야 할 자리를 알자. 우리도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바른 믿음을 갖자. 우리는 베드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베드로가 되지는 않고 있는가? 베드로의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되지 않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첫째, 예수님께서 당하신 영적의 고난이다.

성경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를 알지도 못하고, 죄를 지은 적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이 죄의 잔을 바라보시고 처절한 영적 고통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마셨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악의 쓴잔을 마신 후 체포당하신 때부터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하나님께 버림당한 처절한 영적 고통을 겪으셨다. 죄악의 담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이를 분리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극한 영적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은 심적으로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왜냐하면 가장 신임하고 사랑했던 제자에게 당하신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뜰로 끌려가셔서 밤새도록 모진 고통을 당했다. 예수께서 이 같은 고통을 당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와 있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평소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은혜를 받은 군중들이 그 받은 사랑과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심으로써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으로 버림받고, 아래로는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하고, 버림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른다.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았다.

 

3. 주님이 오시는 자리에 있으라는 말씀이다.

요 20 : 24 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신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오늘날까지도 의심 쟁이로 통하고 있다. 여기 있으라고 하심은 주님께서 오시는 자리에 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실 때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재림 주로 오실 때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기도의 동산과 십자가 언덕에 있던 사람은 재림의 자리에도 있을 수 있다. 오늘 주님께서 있으라고 명하신 자리, 지정석에 있는 사람들은 재림의 주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지정석에 앉아 있자.

 

퀘바디스란 영화를 잘 아시지요. 로마의 박해시대에 베드로는 순교할 각오를 하고 순교하기로 마음에 결심을 했다. 그때에 베드로의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선생님이여, 지금 선생님이 순교하시면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 지금 잠깐 피했다가 다음에 이 로마에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강권해서 베드로가 순교할 마음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피신해 나가고 있었다. 베드로가 알반 언덕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자 환한 빛이 비치더니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났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로마 성을 향해서 들어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퀘바디스 도미네) 할 때 "네가 로마성에 있는 성도들을 버리고 도망가니 나라도 가서 십자가를 져야지 않겠느냐?"는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 그 길로 로마로 돌아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한 내용이다.

 

깨어 있을때 영적싸움의 승리자가 된다.

왜 그렇게 주님께서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깨어 있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익이 따르기 때문이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게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제자들을 주님께서 보시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41절) 기도하지 않으면 육신을 이길 수가 없다. 우리 속 사람이 살려면 영이 살고 육이 약해져야 한다. 반대로 육이 살면 영은 죽게 되어 있다. 육을 죽이고 영이 살기 위해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졸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기도할 수 있는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37절에 "돌아 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 하도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잠을 깨우셨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닥쳐오는 수난에서 자기들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시험받을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이다. 잠에 빠져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특별한 기도절기가 있다. 기도할 때에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몸이 건강하고 자유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신령한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이 되어야 한다. 기도할 수 있는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주님께서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실 때에 기도하시기 바란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을 주실 때에 기도하시기 바란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한다.

 

이제 일어나 함께 가자. 시험받을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이다. 바로 시험이 시작되려는 순간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의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외치신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처럼 다가오는 시험의 때에 승리하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겠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시험을 받을 자리에서 깨어 일어나 기도의 동산으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이다.

본문 41절에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고 했다. 그만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거래를 마치고 영수증을 쓰다”라는 뜻으로 기도의 시간이 끝나고 기도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이제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리고 “보라”는 지금까지 기도하고 준비하였던 상황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했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일어나라는 말이다. 기도했으면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기도했으면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마침내 승리하신 것이다. 밤새 끌려 다니시며 모진 고난과 수모와 고초를 겪으셨다. 군병들에게 조롱을 받으시고 살점이 뜯겨지고 뼈가 드러나는 채찍을 받으셨지만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셨지만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지만 이기셨다. 못 박히고 창에 찔리고 죽임을 당하셨어도 마침내 이기셨다.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셨다. 구속을 완성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땀과 피를 쏟아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기도하시고 사명을 감당하신 것이다. 기도하시고 큰일을 이루신 것이다. 고통을 극복하신 것이다. 마침내 승리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받아 두려움과 방황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가자는 말씀이다. 기도하던 자리에서 이제 영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결 론

기계의 부속은 반드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만약 부속이 바꾸어 들어가게 되면 심각한 위험이 찾아 올 수도 있다. 기계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 자녀는 자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남편은 남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아내는 아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정치인은 정치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지킬 때 서로가 행복하다.

 

자리회복이 있어야 한다.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자리이다. 자기 자신의 자리이다. 자기가 할 일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성도들은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아야 한다. 더러운 자리를 우리는 거룩한 자리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성도가 그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죄악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체면에 끌려, 인정에 이끌려 죄를 버리지 못하면 우리 주님이 슬퍼하신다. 요셉은 자기가 있어서는 안될 자리를 잘 알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고, 간섭하는 사람도 없는 집안이었다. 주인의 부인이 갖은 유혹을 다하였지만 그는 옷을 집어던지고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우리는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위하여 깨어 있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고민이 자신의 고민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민과 자신의 고민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과 자신의 삶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도 엄밀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제자였다고 할 수 없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몸부림을 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그 고통과 고민과 괴로움과 슬픔에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일어나 함께 가자 피곤한 자도 일어나고, 눈이 곤한 자도 일어나고, 그동안 기도하지 못 한자도, 다 같이 일어나고 나 홀로 만이 아니라 고난의 자리에 다함께 골고다를 향하여 일어나자 그러면 제 3일 아침에 영광의 부활이 있다.

 

거가대교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의 가덕도에서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구간을 연결한다. 부산서 거제도까지 가는 시간은 3시간 30분이 걸리던 연결거리를 40분대로 단축 연결함으로써 물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이 사업은 본선 구간인 8.2㎞에 2조1395억원(보상비 950억원 별도), 양 시․도 접속도로 34㎞에 8838억원 등 총 경상사업비 3조1183억원이 투입된 초대형 공사로 패스트 트랙(Fast Track: 공사와 설계를 동시 진행) 공법을 채택, 건설기간을 단축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까지의 거리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연결하여 주셨다.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다리는 두 개의 나무토막을 이어 주시고 그 위에 그분의 보혈을 흘리게 하셔서 연결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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