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나?(요일 3:1~6)
조용기 목사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서론>
‘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나’이 제목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만 성결하게 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단번에 받되 주님의 형상을 닮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만 됩니다. 마귀는 죄의 유혹을 갖고 성결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삶이란 일평생 죄와 죄를 짓게 하는 마귀와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전쟁은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완전히 다 이루셨습니다.
이미 구원은 더 이상 우리가 성취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이 거룩하고 성결하고 깨끗하게 되는데 많은 투쟁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는 "모든 범죄는 그 속에 천벌과 사라지지 않는 고통의 씨를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릅니다. 우리는 죄가 불법이요, 법을 어길 때는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죄는 불법이요 형벌이 따른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가차 없이 형벌이 다가왔습니다. 아담은 죄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죄를 짓고도 평안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죄의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서 아담과 하와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다가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 벌거벗은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동안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수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광채와 영광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마자 영광이 떠나가 버리자 순식간에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들은 빨리 무화과나무를 엮어서 앞치마를 해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3: 10절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다정하게 지내던 그들이 죄를 짓자마자 벌거벗은 수치를 피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반갑고 즐겁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소망차고 기뻤는데 죄를 짓자 하나님이 두려워지고 무서워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숨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당장 그들 생활 속에 수고와 가난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 3:17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저주는 수고와 고생의 삶을 가져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말할 수 없이 수고롭고 고생스러운 것은 저주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 하나님은 가차 없이 그 죄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육체적인 죽음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질병과 노쇠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창 3:19에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입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즐겁게 지내며 죽음이란 그림자도 없던 그들에게 갑자기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들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을 때 그 비극적인 심정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어디를 보나 죽음으로써 보응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는 우리 육신의 옷을 벗기지는 않지만 양심을 벌거벗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벌거벗게 되면 마음에 고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양심이 벌거벗어서 마음에 개인적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번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32:3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입을 열어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종일 마음에 고통이 있어 뼈가 쇠하여질 지경이 되었다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많은 육신의 병이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양심에 고통으로 뼈가 쇠하여질 정도니까 오장육부가 성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 고침 받기 위해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 3: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죄는 반드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가 들어왔는데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용서와 의가 들어오면 평안하지만은 죄는 마음에 불안, 초조, 절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는 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렘45:3에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한다.
죄의 탄식이 있는데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행복의 가장 조건이 평안입니다. 돈 많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권력 많다고 행복하지 안구요.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자동차 타고, 좋은 옷 입고 산다고 평안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를 지은 사람은 바깥의 문풍지 소리만 나도 간이 덜컹 내려앉는 것입니다. 다리를 펴고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전화벨만 울려도 간이 덜컹 내려앉는 것입니다. 언제 내 죄가 폭로되고 내가 사정당국에 조사를 받고 체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떨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4: 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죄의 결과로 형벌을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늘 두려워하지 죄가 없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으면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값인 저주와 질병이 떠나지를 않지요. 죄가 들어오면 언제나 우리의 삶에 저주가 다가오고 우리의 삶속에 질병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시107:10~12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죄를 짓고 반역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살도록 내버려 놓으면 그 영혼은 영원이 버림받을 수밖에 없지요. 죄의 대가를 받고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워지면 통회하고 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고통을 가져오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안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삶을 가시방석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에 복음을 듣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은 동경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의 마지막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제가 여러분께 읽어 드리겠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경제 문제는 군대 문제입니다. 군대 문제는 정치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 문제는 도덕의 문제입니다. 도덕의 문제는 종교 문제입니다." 결국 맥아더장군이 연설한 연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종교가 바로서야 양심이 바로서고, 양심이 바로서야 올바른 정치를 하게 되고, 올바른 정치를 잘해야 평화가 다가오게 되고, 평화가 다가와야 경제도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이 종교에 있고 종교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올바르게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서 GNP가 향상 되었다는 보고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더 잘살게 되려면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마음에 깨끗함을 얻고 양심적인 삶을 살면 살수록 우리 사회가 평안하게 되고 우리 경제가 발전하고 향상하게 될 것인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신앙문제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해야 우리가 축복을 받고 행복하지요. 가정에 부모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자녀들이 다 평안하게 자라고 가정에 행복이 넘치지요. 부모의 마음속에 슬픔 있으면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고 자녀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죄입니다. 누가 우리를 가장 사랑합니까? 부모, 형제도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하나님이 우리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몸 찢고 피 흘려 대가를 지불하고 값 주고 사셨으니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 앞에 눈동자와 같이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눈동자에 상처를 입히고 마음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사랑은 배신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치 않으신다면 우리에 대하여 무관심 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뭡니까? ‘60억 인구 중에 한사람인데 내가 잘했다고 뭐 하나님이 기뻐 할 것이 있으며 내가 죄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상처를 입겠는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이 내던져 버리고 무관심할 것 아닌 것입니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 거수 일 투족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요일3: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사1:2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 말씀을 순종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집안에 일찍이 들어오고 착하게 살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뻐하는 것입니까? 자식이 잘된다고 해서 당장 부모에게 무슨 큰 이득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공부도 안하고 깡패하고 돌아다니고 폭력배에 속하게 되고 게임이나 하고 돌아다니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입습니까? 부모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부모가 고통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TV나 신문을 통해서 많은 젊은 청소년들의 비행을 봅니다. 내 자식이 아닐 때는 그냥 이야기로 보는 것입니다. 감정이 그곳에 개입되지 않습니다. ‘아, 어느 자식이 범죄를 했구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순경하고 문제를 일으켰구나. 범죄 했구나.’ 그냥 이야기 거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내 자식이 되면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다가오는 것은 내 자식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이 거기서 유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으시면 우리가 잘살든 못살든 무슨 상관하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든, 안 살든 무슨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친자식으로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시고 분노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대단히 마음에 근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고 우리가 무슨 복을 받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노아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근심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창 6:5~7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한탄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고해도 듣지 아니하고 채찍을 때려도 대답하지 아니하고 방탕의 길로 달려갈 때 오죽해야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은 인생을 파멸하시고 지상에서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 관심이 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째왕인 사울은 하나님이 택해서 임금으로 삼았지만 사울 왕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 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삼상15:11에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 하였음 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시면 내게 올 자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아무도 알려지지 않은 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리지 않고는 예수께로 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시고 보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께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자녀를 많이 길러 보십시오. 열 자녀 중에 한 자녀라도 잘못되면 괴롭지 않습니까? 열손가락 깨물어 보십시오.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는가. 다 아파요. “아이고 새끼손가락 이니까 너는 깨물어봤자 안 아플 것이다.” 깨물어 보세요. 아프지. 하나님은 잘난 사람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장 못난 사람도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으므로 여러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다 하나님의 눈동자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깊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되면 하나님이 무릎을 치고 웃으시며 좋아하시고 여러분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근심하시고 슬퍼하시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고난 받아 죄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주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에게 평생에 죄를 다 사하시고 용서와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로 받고 주님 안에서 우리 사는데 자꾸 죄를 지으면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수고와 고생해서 자식들을 먹이고 잘 입히고 공부를 시키는데 부모의 수고를 모르고 자식이 방종하면 부모의 고생이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탄식하게 되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오느냐. 고생의 떡을 먹고, 수고의 물을 마시는가!’ 자식들 잘되라고 이렇게 하는데 자식이 잘못되니 이 고생과 수고가 무슨 효과가 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 짊어진 것을 탄식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상처위에 또 상처를 가하게 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죄에 끌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배신하면 얼마나 괴로운 것입니까? 죄는 마귀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지 주님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를 사죄해서 주님을 거역하도록 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따라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마귀는 춤을 추고, 손바닥을 치고 잘한다고 발을 동동 구룹니다만 그만큼 예수님은 마음에 고통을 당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다 당신의 못자국난 손을 들여다 보고 옆구리를 만져 봅니다. ‘내가 과연 쟤를 위해서 못 박히고 창을 받았는데 이것이 효과가 있는가. 너무나 나의 고통을 무용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주님이 탄식할 것입니다.
마 26:28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님께서 우리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성찬 때 살을 찢어서 우리를 주시고 피를 흘려서 마시게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영혼이 구원받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 하라. 천국까지 올라오라고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우리에게 살을 찢어주고 피를 흘려 주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이외에 그런 사랑을 베푼 이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짓밟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엔도우 슈사꾸라는 일본 소설가가 <침묵>이라는 소설을 지었는데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선교하던 신부가 일본 도쿠가와 정권의 고문에 굴복하여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가장 존경했던 세 명의 제자가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적해 들어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은 결국 잡혀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 고문은 예수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여놓고 그것을 짓밟으라는 것입니다. 이 제자는 차마 예수님의 상을 밟고 지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내 상을 짓밟으라. 내 상을 밟고 지나가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와서 내가 안 밟힐 때가 있는가. 사두개교인, 바리새교인, 교법사, 대제사장 모두 다 나를 짓밟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를 밟고 지나가라!" 제자는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왜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주님은 잠잠하고만 계십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나는 늘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서 벌을 내리지 않고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하면서 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무슨 힘이 없어 주님을 모욕하는 사람을 심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베풀려고 하니까 끝까지 참고 주님이 고통을 당하고 침묵을 하면서라도 끝까지 한사람이라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때려 쳐 죽이기 시작하면 남을 사람 한사람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침묵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냥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짓밟고 죄를 지어도 주님이 가만히 있어 잠잠한 것 같지만은 주님은 그 침묵한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하나님이 마음에 평안하게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을 효과 있게 마시는 것입니다.
3.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요일3:2~5에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우리는 장차 예수님의 모습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이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모습대로 우리도 변화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목적은 나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고 승천해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처럼 되신 것은 내가 장차 예수님처럼 되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와 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될까요? 나도 예수님처럼 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니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우리가 도저히 꿈꾸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할 영광스러운 미래가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귀한 소망을 가지고 약속을 받은 이상 그리스도처럼 깨끗하게 살고 죄를 멀리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버리고 살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자식 낳은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순종하고 잘되면 자식 낳은 기쁨이 마음에 넘치지요. 자식이 어떻게 부모에게 효도를 합니까? 부모에게 먹을 것, 입을 것 갖다 주고 호의호식하게 만드는 것 만 효도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이 건강하고 범사에 잘되면 부모가 기뻐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이 잘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변화를 받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낼 때 자식 낳은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53:11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난 다음 주님이 수고한 것을 기뻐합니다. 엄마가 자식을 낳을 때 얼마나 고통을 당합니까? 몸부림치고 부르짖고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자식을 낳고 자식이 응아 소리를 부르고 태어나서 피 덩어리를 가슴에 안겨줄 때 얼마나 마음에 기뻐합니까? 수고한 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의 수고한 결과를 보고 생명 태어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꼭 한가지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몸부림치고 고통당한 것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생살이 찢어지고 생살에 가슴에 창을 박고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며 몸부림친 것은 자식 낳기 위한 것입니다.
영적인 자식을 낳는 고통과 수고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잘 섬기면 내 고생한 보람으로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야 내가 십자가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다. 내가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정말 보람이 있다.’ 주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되요. 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지언정 하나님을 모욕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탐욕을 똑같이 섬기므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모시게 되고 죄를 지으므로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사람이 하나님과 마귀를 똑같이 섬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을 섬기고, 마귀를 미워해야지 마귀는 곧 죄인데 죄를 하나님과 똑같이 섬기면 하나님을 모욕되게 하고 망령되게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보답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거룩하게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라도 하나님이 재물로 내놓으라고 할 때 두말하지 않고 순종하여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장작을 펼쳐 놓고 아들을 묶어서 장작에 얹어 놓고 칼로써 그 목을 자르려고 한 것입니다. 그 외독자 이삭까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내놓겠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과 믿음, 순종을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크게 사랑한 것입니다.
창22:12에 보면 “사자가 이르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창22:16~18절에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합니까?“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준행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복을 안주시면 누가 복을 주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른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고 나가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일을 맞으며 잎사귀가 마르지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십니까?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하면 부모가 어찌하든지 자식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처럼 야훼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고 살면 하나님이 가만 계시지 않고 하늘의 복과 땅의 복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4. 죄를 거부하는 단호한 결단
그러므로 우리는 단호한 마음에 결단을 하고 죄와 싸워서 죄를 물리치고 죄를 짓지 않고 살기로 마음에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마음에 결단을 하지 않고 그냥 좌로 우로 늘 치우치면 안돼요. 요일 3:6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 산에 다 모아놓고 난 다음에 거기에서 결판을 내린 것입니다. 아합 왕과 그 아합 왕을 따르는 바알의 선지자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다 모아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야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왕상 18:21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야훼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지니라”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고후 6:15~16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두리 뭉실하게 섞어서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도 모시고 살고, 마귀하고도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의도 행하고 죄도 행하고 거룩도 행하고 불법도 행하면서 그저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된다. 너처럼 그렇게 모나게 살아서 되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 많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보고 이래도 욕을 하고 저래도 욕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해서 두리 뭉실하게 살면 “저것도 예수 믿는다고 가짜다.” 나이롱 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주님을 따르면 미쳤다고 저것 완전히 미쳤어. 세상에 살지 못할 사람이라고 이래도 욕을 하고 저래도 욕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욕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칭찬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면 그 길이 우리가 택해야 될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깨뜨려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종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종은 섬기는 자 아닌 것입니까?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마귀가 주인이 되던 예수님이 주인이 되던 어느 주인이든지 주인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을 섬기고 따르는데 죄를 주인으로 섬기면 마귀를 주인으로 섬기면 죄의 종이 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롬6: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의 종이 되면 결국에는 죽음에 가고 의의 종이 되면 결국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롬 6:19에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육체의 정욕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이상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들이 매일같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이상 육체를 통한 육신의 정욕이 우리에게 항상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싸우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세상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고 우리가 입고 사는 육체가 우리에게 항상 가시노릇을 합니다.
롬8:5~8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 이생의 유혹 이 모든 것이 우리 육신을 따라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경성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한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과 말씀에 서서 끊임없이 마귀와 귀신과 세상과 육체의 유혹을 대적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가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시대에 유명한 교부였던 암브로스는 육체의 정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삼손은 사자를 죽일 수 있었으나 자신의 정욕을 죽이지 못한 사람이었고, 삼손은 원수의 쇠사슬을 쉽게 끊을 수 있었으나 자기의 정욕의 쇠사슬을 끊지 못한 사람이었다. 삼손은 원수의 보리밭에 불을 지를 수 있었으나 자기는 한 여인이 지른 정욕의 불에 타 죽어 버린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 이생의 유혹 등의 육체의 정욕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삼손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 성령의 기름부음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사자도 이겼고, 블레셋 사람도 쳐서 이겼고, 원수의 진을 훼파했으나 자기 육신의 정욕은 이기지 못하여 데릴라의 유혹에 빠져 결국에는 눈알이 빠지고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마음에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되요. 나는 너무나 힘이 약해서 어찌합니까? 예수를 믿기는 믿었어도 거룩하고 깨끗하게 삶을 살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이 보혜사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것입니다. 어머님이 어린 아이를 항상 도와주어야 어린 아이가 실수하지 아니하고 넘어져 상처입지 아니하고 위험한데 빠지지 아니하고 자라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손길이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고 성령님과 함께 살아야 죄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들어왔는데 자기 힘으로 어떻게 광야를 지나갑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이 있고 밤에는 불기둥이 있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갈 때 그들은 광야를 지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우리에게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롬8: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은 해방을 받은 사람이고 끊임없이 해방되고 있는 이유는 성령이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가 둘러 진 치지요. 귀신이 둘러 진 치지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이 우리를 괴롭히지요.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는 항상 해방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은 해방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자유와 해방케 하므로 내가 약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바라보십시오. 마귀를 바라보지 말고 성령을 바라보고 귀신을 바라보지 말고 성령을 바라보고 육신의 정욕을 바라보지 말고, 나와 함께 계신 성령을 바라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성령이 능력 주는 자로써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롬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그러므로 여러분 연약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도우는 자가 와서 계신 것입니다. 연약하지 않은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스스로 죄악을 이기고 스스로 거룩하고 성결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죄에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항상 마귀와 귀신의 공격을 받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의 유혹을 받고 있는데 여러분 이곳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 것입니까?
자랑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원수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이기고 또 이기게 하시는 성령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이 보내 주셨기 때문에 우리보고 깨끗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하지만 성령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항상 성령이 같이 계신 것을 의식하십시오. 성령께 기대십시오. 성령께 손을 내미십시오. 성령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 없이는 우리가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 없이 우리가 거룩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은 끊임없이 우리가 추구해야 되고 의지해야 될 것입니다.
<결론>
성경은 죄를 누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부패의 씨앗입니다. 죄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부패하게 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썩은 것에 쉬파리, 구더기가 득실거리듯 죄가 있는 곳에 마귀와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것입니다. 요일 3:7~8절에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의 생애 속에 마귀의 일을 멸합니다. 귀신의 일을 멸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단번에 믿음으로 용서와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들은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매일매일 싸워서 육체의 정욕과 마귀를 이기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 200장 다 같이 한번 힘차게 부르십시다.
1.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참 깊고 넓도다. 구원하는 크신 능력 다 찬송 할지라.
2. 죄악 세상 이김으로 거룩한 길가는 나의 마음 성전삼고 주께서 계시네.
3. 주 예수를 깊이 아는 놀라운 그 은혜 하늘나라 즐거움이 매일 새롭도다.
후렴) 찬송하세 주의 보혈 그 샘에 지금 나아가 죄에 깊이 빠진 이 몸 그 피로 씻어 맑히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믿고 단숨에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영광을 얻었으나 거룩하게 사는 일에는 끝없는 투쟁과 싸움이 필요하옵니다. 이 투쟁과 싸움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와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으로 항상 성령님께 의지하고 성령님의 손을 잡고 죄와 마귀를 이기고 거룩하고 성결하고 깨끗하고 진리를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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