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이 사는 길이다(요한복음 12:24-26)
하원식 목사
다미엔은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다미엔은 소록도와 같이 외딴 섬, 하와이 군도의 하나인 모라카이에 나병 환자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벨기에에서 이곳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다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빈정되며 비웃기까지 했다. “너는 건강한 몸이기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처럼 날마다 몸이 썩어간다면, 그렇게 말하진 못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처음부터 굳게 닫혀져 버렸다. 다미엔은 고민에 싸여, 제단 앞에 나아가 기도했다. 그러자 다미엔은 기도하던 중에 “너는 저들의 심정이 되어 보았느냐?”는 음성을 듣고, 그는 크게 회개를 하였다.
내가 죽어야만 복음이 전파된다. 그러고 나환자의 피를 자신의 몸에 넣었다. 그리고 그도 문둥병자가 되었다. 얼마 후 다미엔은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떨어져 나갔다. 죽음의 병이 찾아온 것이다.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간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선 다미엔은 외쳤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문둥병에 걸린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럴 때에 수많은 문둥병자들은, 전류에 감전된 듯한 감동을 받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후일 사람들은 다미엔을 부를 때, 거룩한 성자, 세인트 다미엔이라고 불렀다.
우리 예수님 타락한 인간,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고, 흠과 점과 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인간과 같이하기 위해서 2천 년 전 이 땅에 내려오신 것. 주님은 작은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서, 죽어 주신 것. 작은 할 알의 밀 알이 되어 그가 죽어 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속의 대 사건을 이루게 된 것.
1. 생명 있는 밀 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근본이 살아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이 죽었는데 무슨 열매인가? 씨라고 다 싹이 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없는 씨앗은 아무리 뿌려도 싹이 나지 않는다.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한다. 생명은 신비하다.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지내고 태어난 어린 생명을 보세요. 신비하다. 그 중에 하나는 닮았다는 점이다. 틀림없이 엄마나 아빠를 닮는다. 눈매며 코와 입이 닮는다. 우리 손녀가 사진으로 보는데 많은 사람들이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우리가 생명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닮아야 하는가? 예수를 닮은 데가 있어야 한다. 자녀가 태어났는데 부모를 전혀 닮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긴다. 오늘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를 닮았는가? 생명은 힘이 있다. 봄에 솟아나는 풀을 보세요. 그렇게 단단한 땅을 적은 씨앗의 생명으로 뚫고 나온다. 우리가 듣고 보는 바대로 적은 물고기가 살아있으면 물길을 타고 반대로 올라간다. 그러나 생명을 잃은 물고기는 몸이 크다고 해도 탁류에 밀려 내려간다. 이게 생명의 힘이다. 여러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살아있는 영적인 사람인가?
살아있다는 게 무어냐 “아직 숨쉬고 있는 거다” 그렇다. 숨이 즉, 호흡이 멈추면 죽은 것이고 숨쉬는 순간에는 살아있다는 말이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정의가 숨쉬고 사랑이 숨쉬고 있다. 영적으로 기도가 숨쉬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 숨쉬는 게 어려운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죽어 가는 순간에는 호흡이 힘들다고 한다. 살아있는 그리스도 인들은 기도가 어렵지 않다. 기도하는 게 어렵다는 분은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이 호흡을 되찾으면 다시 살게 된다. 살아있는 밀 알이 되어야 한다. 살았다는 것은 정상적인 움직임이 있다. 죽었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산사람은 움직인다. 행동한다. 살아 있는데 가만히 있지 못한다. 봉사하게 된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생활로 나타난다.
한 알의 밀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한 알의 밀로서의 존재의미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진정 위대한 것은 그 속에 숨겨진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 그 위대함을 한 알의 밀은 품고 있다. 한 알의 밀은 생명을 가졌으나 생명을 개체적으로 가지지 않고 자기 안에 품고 있으므로 품고 있는 생명을 표현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가 희생되어야 그 안에 있는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겉껍질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지 않고 자신이 썩어 생명을 희생시킬 때만이 가능한 역사다. 자신의 완전한 희생, 죽음 없이는 새 생명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므로 죽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것은 죽음으로 새 생명을 잉태하는 한 알의 밀, 그 속에 숨겨진 생명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썩는 한 알의 밀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무한한 생명을 얻으셨다. 한 알의 밀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은 썩어 생명을 내는 한 알의 밀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2. 땅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풍성해집니다. 이 과정을 밟지 않고는 생명의 충실을 기할 수 없다. 씨앗은 자기의 성질과 힘과 생명을 발휘하기 전에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한다. 이것이 식물계의 법칙일 뿐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장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는 지상에서 하나님 앞에 떨어지는 생활, 낮추는 생활, 겸손의 생활, 희생의 생활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생명 있는 씨앗이라도 땅에 떨어져 흙에 묻혀야 싹이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다.
생명은 있는데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후에는 그 생명조차도 죽어간다. 우리 주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한 알의 밀 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다. ‘땅에 떨어져’ 이 말은 겸손을 의미한다.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을 높이고 자기 자신을 낮춘다’ 라고 되어 있다. 안토니 불륨은 겸손은 땅과 같다고 하였다. 땅은 우리와 함께 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땅 위에서 산다. 땅은 모든 사람이 밟고 다닌다. 밟히고 밟혀도 아무 표현이 없다.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쓰레기도 받아들이고 오물도 조용히 받아들인다. 햇빛도 받고 비도 맞는다. 이런 겸손의 땅의 마음에 씨를 뿌리면 100배 60배의 결심을 맺게 한다. 생명 있는 씨앗이 겸손하게 땅에 묻혀야 열매를 맺는다. 낮아짐이나 희생을 기피하고 높아지려고만 하면 그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 씨앗과 같이 한 알 그대로일 뿐 아니라 한 알마저도 잃어지는 비운을 맞게 될 것이다. 주님은 하늘 영광의 보좌에서 만군의 주로서 인간이 거처하는 땅의 말구유에까지 내려오셨고,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에까지 달리셨으며, 죄인과 같이 무덤 속에까지 내려가셨다. 그리하심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는 풍성한 결과를 이루신 것이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낮아져야 한다.
씨앗은 심기울 때 버려지는 듯하나 많은 열매를 얻는 방법이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흙으로 덮일 때에는 버려진 것 같지만 실상은 이것이 많은 열매를 얻는 방법이다. 씨앗을 땅에 심으면 적어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게 된다. 많은 것을 얻게 하는 법칙은 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 심기우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씨앗이다. 씨앗이 땅에 심기울 때 사람들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어도 농부는 열매를 기대하듯 이 하나님은 많은 새 생명이 생겨날 것을 기대하셨다.
예수님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는 심기운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로 무덤에 묻혔습니다. 땅에 완전히 묻힌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다. 예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서기관과 제사장들도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땅에 심기운 것은 다시 싹이 나는 것처럼 예수님은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새 생명으로 다시 사신 것이다. 새 생명으로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새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 나온 싹은 너무나 여리고 연약하다. 그 순은 너무나 부드러워 어린아이의 작은 손에도 상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작고, 연약하고, 부드러운 싹이 두껍고 딱딱한 땅을 뚫고 나오는 신비를 보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기는커녕 약함의 전형이다. 그 분은 십자가위에서 억압을 당했고, 가차없이 비난당했으며, 수치스럽게 옷이 벗겨졌고, 무자비하게 채찍질과 조롱을 당했으며, 완전히 품위를 상실 당했고, 마침내 고통스럽게 못 박히고, 십자가에 높이 들리셨다. 십자가에서 기꺼이 죽으시기로 하신 예수님의 순종은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종은 죽음을 뚫고 살아 나오게 하셨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 알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땅 속에 묻히셨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밀 알이 싹이 돋아나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처럼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셨다.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은 포기를 뜻한다.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은 섬김을 뜻한다.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섬기셨다. 주인을 향해 충성스런 노예처럼 우리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며 섬기신 예수님은 한 알의 밀 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비전을 바라보며 섬기신 것이다.
즉 서로 섬김을 받으려고 힘 겨루기를 하는 세상이 지극히 높으신 예수님의 자원적인 섬김을 통하여 감동을 받고 서로 서로 행복하게 해 주려고 자원하여 노예가 되어 섬겨주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시고자 하신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 속에 들어가면 먼저 자신의 몸을 거름으로 내어 주어야 한다. 생명이 있는 밀의 눈에서 싹이 나오고 흙을 비집고 나오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몸으로 썩게 하여 거름이 되게 하여야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과 섬김이 따를 때 생명이 태어난다. 인생은 섬김을 잘 해야 한다. 잘 섬기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잘 섬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인생의 성패는 얼마나 서브를 잘 했느냐에 달려 있다.
한 알의 씨가 심겨지지 않으면 그것은 번식할 수가 없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를 볼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이기적인 욕망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대로 있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아 생명의 확산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자신을 드려 섬기기 시작한다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흘러 들어갈 것이다. 지금 그대로 혼자만 많은 것을 누리고 편안하게 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자.
밀 알이 땅에 떨어져 묻혀져야 땅의 온기를 받고 발아가 되어 힘있게 지각을 뚫고 돋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 알의 밀 알은 땅에 온전히 묻혀야 한다. 보이지 않아야 한다. 땅속에 묻혀 세상과 온전히 차단시켜야 한다. 바람도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햇볕도 차단시켜야 한다. 세상과 온전히 다른 세상에 있어야 한다. 이처럼 주님도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세상에 뜻을 가진 자들은 은둔 생활을 한다. 자기 뜻을 펴고자하지만 알아주지 않고 보아주지 않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어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주님은 자기 때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힘이 잇고 능력이 있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전연 묻힌 자처럼 살아간 사람이다.
3. 땅에 떨어졌으면 죽어야 한다.
본문 24절에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다. 땅에 떨어진 씨가 흙 속에 묻혔다 할지라도 ‘죽지 않고 그 모양 그대로 있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병 속에 들어 있는 씨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씨앗은 흙 속에서 죽어야 한다. 이 흙 속에서 씨앗의 몸통이 썩어지고 죽어질 때 ‘새로운 피조물’로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이 죽음과 같은 고통, 희생의 과정을 통해 생명과 아름다움의 결실로 자신의 진면목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본문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다. 여기 “미워하는 자”란 자기 생명을 ‘2차 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자’를 의미한다. 자기의 심신을 아끼고, 자기의 물질을 아끼면서 자기를 지키려하는 자는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말게 된다. 하나님을 위하여 또는 남을 위하여 신경 쓰는 것도 싫고,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싫고, 물질로 돕는 것도 싫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다면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겠는가? 그러나 자기를 헌신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은 그 생명이 부유해지고 윤택해지게 된다. 위대한 인물이란 모두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볼 때 죽음 즉 희생은 손실이 아니오. 풍성하게 되는 한 방법인 것을 알 수 있다.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은 포기를 뜻한다.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집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생명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기꺼이 포기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기를 포기하셨다.
자기 뜻을 포기하셨다.
편안함을 포기하셨다. 부유함을 포기하셨다. 명예를 포기하셨다. 심지어 생명까지 포기하셨다. 그랬더니 부활하시어 구주가 되셨다.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높이셨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의 본체로써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까지 포기하셨다. 천국보좌를 포기하고 종의 형상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완벽한 포기를 선택하셨다.
우리가 죽어야 새 생명의 역사는 시작된다. 성경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씨앗은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하는데 죽는 것이 무서워서 땅 위로 올라오면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땅 위에 나와 있는 씨앗은 새가 먹어버리고, 햇볕에 말라버리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죽지 않으려고 자기의 생명을 아끼는 사람들은 마침내 잃어버리게 되지만, 땅에 묻혀서 주와 함께 죽을 때에 오히려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을
롬6:5이하에서는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갈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한 그 리스도인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완전히 닮아서 예수님의 생각과 성품과 행동과 말을 닮아 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진실한 새 생명을 얻으려면 주와 함께 죽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옛 생활과 성품과 욕심을 묻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 새 생명의 역사가 나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겸손은 낮아지고 묻히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은 묻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겸손히 묻혀야 사는 것, 이것이 새 생명의 역사다. 겸손을 모르는 자에게는 절대로 그 속에서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 갈 때에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물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한 알의 밀을 땅에 심겨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심겨져 죽지 아니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난다고 해도 한 알 그대로 이지만, 만일 그 한 알을 땅에 심으면 그 밀 알이 죽어 싹이 나 자라나서 많은 결실을 거두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평범한 진리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평범한 사실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생명의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밀 알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물론 밀 알이 되는 것이 고난임에 틀림이 없지만 어차피 인생의 한 평생이 고난의 연속이라면 밀 알이 되는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는 고난이요 영광스러운 고난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자들이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문제는 오늘의 우리 잘못된 마음의 자세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그로 인해 불편하게 되는 것을 싫어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다가 그로 인해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그 이유가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한 면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주님 앞에 가서 상급을 기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믿음인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도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알고 보면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하는 최선의 길이기도 하다. 만일 오늘의 고난을 기피하고 자신의 몸을 사리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 같으나 알고 보면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 정반대로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요 또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일인 것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님의 모든 삶은 그것이 고난이든지 영광이든지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따라가야만 하는 길이다. 물론 우리가 구원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값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공짜가 아니라 주님은 그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피 값을 지불하신 값비싼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기 때문에 어차피 인생이 죄 값으로 고난을 받으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주님의 우리들이 죄 때문이 아니라 고난 후에 따라 올 영광의 자리에 주님과 더불어 우리도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죽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아를 형성케 하는 요소인 情(정)과 欲(욕)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신앙상태는 바로 여기까지 이르러야 하겠다.
한 회사에서 사원을 뽑으며 입사 시험 문제를 냈다.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밤길에 당신은 차를 운전하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차를 기다리고 있다. 한시 바삐 병원에 가야 살 수 있는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차에는 단 한 명만 태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2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에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전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요."
이처럼 내 것이라는 것에 매여 집착을 포기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정말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 나를 버리고 크게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진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최고의 것을 포기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기꺼이 포기하는 자를 찾으신다. 온갖 하늘의 귀한 선물을 주시고자 포기하고 손을 펴라고 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손에 쥔 것을 빼앗길까봐 더욱 꼭 쥐고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러분,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리고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된다.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집착하면 잃어버리고 사라진다. 그러나 자기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다시 찾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땅에 떨어져 죽으신 한 알의 밀 알이 되자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의 씨앗이 이 땅에 생명 없이 살면서 아무 소망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매로 맺혔다. 유대인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는 자마다 새 생명의 열매가 맺혔다. 새 생명은 사람들 안에 있는 불안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었다.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었다. 마귀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요 사랑 받는 자녀로 바꾸어 주었다. 생명의 열매가 많이 확산되는 비결은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외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방법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생명의 열매가 지구상에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량으로 맺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는 길 외에는 없다. 예수님은 멸망해 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열매가 맺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신 한 알의 밀 알이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한 생명, 한 나라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의 문제를 대신해 죽어주신 죽음이었기에 더더욱 아름다운 죽음인 것. 하나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위해 죽어주신 죽음이기에, 예수님을 죽음을 가장 아름답고 고상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 일뿐만 아니라 심판의 십자가다. (고전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을 때, 사단에게는 결정적인 패배가 찾아오게 된 것. 그리고 사단을 따르는 불신자들에게는, 이미 선고된 영원한 형벌을 받을 발판을 마련하신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죄악의 문제는 해결된 것. 누구든지 예수 안에 거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받게 되는 것.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인류가 구원을 얻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예수님의 죽음 같이, 우리의 삶에 많은 열매를 얻으려면,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희생적인 죽음이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 알이 되기 위해서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 알처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야 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을 싫어한다.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다. 누구나 다 살고 싶어한다. 저마다 살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심하면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누르고 죽이려고까지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이 정말 죽겠다는 고백이 아니라, 살기 위한 고백이다. 이 말씀을 의역하면 "나는 매일 죽으며 삽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비결이다. 우리가 사는 비결은 우리가 죽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죽는 것이 내가 사는 비결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살기 위해서 먼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을 했는데, 그가 그렇게 고백한 것은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믿음 안에서 살려고 날마다 죽은 것이다. 살기를 원하는가? 죽으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이제 한 알의 밀이 얼마나 온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비록 지금 초라한 밀로 서있지만 자신이 뿌려져 12사도의 씨를 거두고 또한 그 씨가 뿌려져 온 세계에 복된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을 확신하셨기에 초라하게 묵묵히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이다.
한 알의 밀 그의 힘은 무엇인가? 밀 알의 고통) 어느 밀이고 자신이 썩어지고 깨어지는 고통 없이 결코 뿌리를 땅 깊게 내밀 수 없다. 많은 제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예수를 따랐지만 예수님의 미래는 밀 알이었다. 밀 알이 땅에 떨어져야 하며, 죽어야 하며, 자신이 깨어져야 하며 땅속에 연약한 뿌리를 깊게 내릴 때 비록 고통의 연속이지만 고통이 많을수록 열매를 거두는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고통은 작은 축복도 더욱 감사케 한다.
자기를 버리는 밀 알 자기를 버리기는 말처럼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인류 구원을 위해 처절하게 쓰러져 가는 중에 많은 무리들의 조소를 받으면서 희생할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며 강력하게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은 하나님의 뜻대로 란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예수께서 마지막 고통을 당하면서 우리에게 기르쳐 준 최고의 복음 인 것이다. 매일 변해가야 한다. 한 알 그대로 땅에 남아있다면 그 밀 알은 밀 알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씨앗의 본성은 따스한 햇살을 향해 싹트고 열매맺어야 하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매일 변해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해.... 한 알의 밀 그의 힘은 무엇인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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