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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사에 대하여

구원의 계획 2010. 5. 5. 20:13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사에 대하여

 

                                                      이천우 목사(부천개혁교회)

 

 

1. 성경의 중심 사상인 하나님의 구속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 성경을 고대 근동의 문학 작품, 신화, 혹은 이스라엘의 종교 역사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특히 성서 비평학으로 성경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법과 이해를 이끌어내고자 한 결과 자료 비평(Source Criticism),1) 양식 비평(Form Criticism),2) 전승사 비평(The Traditio-Historical Criticism),3) 수사학적인 비평(The Rhetorical Criticism)4)들이 있어 왔다.

 

이러한 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로 적지 않게 바른 신학을 추구하는 보수주의 신학(개혁주의 신학)에 위협이 되어 왔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들이 갖는 것대로의 학문적인 영향의 공헌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로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정경(正經)인 것에 대한, 곧 성경이 정경의 권위를 갖는 것을 신학적으로 규정하는 것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게, 단지 외부적인 해석의 관점에만 머물러 왔다. 그렇다 보니 프란츠 델리취(Franz Delitzsh)는 구약을 “비기독교적인 책”이라고 말하기도 하는가 하면,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구약을 폐기하여야 한다” 라고 망령되이 말하기도 하였으며, 맥켄지(J. L. Mckenzie)는 “나는 마치 신약성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구약신학)을 썼다”고 말하였다. 이와같이 구약을 아주 낮게 평가하는 마르시온적(Marcionism) 발상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갖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을 해 오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의 내용을 연구하는 것이 이루어지 않아 성경에서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분야로 학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든지 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여 전해주시는 뜻이 드러나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에 이르든지 아니면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불순종에 이르든지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연구에서 신학이 끼치는 학문적인 공헌은 성경 본문의 내용에 집중되어져야 하고, 그 중심 사상을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복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계시하시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하나님의 영원 전 뜻과 계획5)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택하셔서 예정하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서 그의 안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데 있음을 말하였다(엡 1:3-6). 또한 그에 따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신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엡 1:7)과 하나님의 그 뜻의 비밀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자들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갖게 하여 알려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곧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는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엡 1:8-9).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요 6:40)인 구원의 성업(聖業)을 이루어 놓으신 ‘진리의 말씀’을 ‘구원의 복음’6)이라고 하면서(엡 1:13),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약속의 성령7)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8) 라고 하였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용한 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구원의)복음’이라고 한 것과 ‘구속’(죄 사함)이란 단어이다. 왜냐하면 복음과 구속은 사실은 서로가 상대 단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하자면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의어인 셈인데 그것이 에베소서의 주제인 ‘교회(론)’을 이루고 있는 핵심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 생명이요 진리의 집, 그 터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은 전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갖는 의미, 곧 그의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고 있는 것으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케리그마가 발생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곧, 구속을 구원의 복음으로 계시하셨으며 교회가 증거 해 나가야 할 것으로 주어졌다. 이 성경은 그 일이 하나님이 택하셔서 예정하신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미쳐 성취되고 완성되어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이 다 이루게 될 때까지 예언의 말씀9)으로서 계시가 되었고, 그리고 예언의 말씀이 되어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이 구속의 원리를 드러내어 나타내는 것에서 복음이 되며, 복음의 본질인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원리10)를 알게 하여서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믿음이요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게 한다. 설교가 구속의 원리에 의해 성경 해석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그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성경은 계시의 책으로서 구원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비밀인 계시를 나타내셨으며, 구원 언약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구원의 원리(창3:15)에 의해 시작되어 그에게 속한 모든 후손에게 영원히 적용 되는, 중단되거나 변개치 못하는 견고한 구원으로 삼게 하셨기에 성경의 중심 사상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 사상을 우리는 ‘구속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과 인간이 타락하였다는 것, 그리고 타락한 인간과 피조 세계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실행 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구원과 그것에 나란히 등장하는 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속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창조에 이르게 함으로, 이것이 목적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의 복을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구속사 계시 방식인 언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구약은 옛 언약, 신약은 새 언약을 의미하므로 성경은 언약의 책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렇게 언약의 책인 까닭에 성경을 읽는 독자는 언약11)의 개념에 의해서 이해하고자 하여야 한다.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자주 반복하여 확언하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연합하시며 교제하시길 원하신다. 그분은 백성들이 자신을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언약의 본질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구속사이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사의 관계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서 이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작정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룰 구속을 언약이란 방식에 의해서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중심은 그 나라의 주이신 그리스도이시다.12)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의 방편(또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그리스도와 그 그리스도께서 이룰 구속이다. 언약은 구속의 방편으로 등장하며 그리스도께서 이룰 구속에 대한 약속과 성취를 말해 준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서 라고 말하는 것은 이 하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 알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고 알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가지신 뜻에 따라서 택한 백성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여 죄에서 구속의 은혜를 입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는 한편 죄 아래 가둔 자들을 지옥에 두시는 일을 하신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요 6:38-39)13)고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을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인식과 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가지신 영원한 작정에 따른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오셔서 또한 작정하신 일을 이루신 구속사역의 완성이었다. 그러므로 디도는 “영생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 곧 창세전에 약속하셨다”(딛 1:2)고 말하였다. 디도의 말에 의하면, 영생은 창세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이미 약속되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생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작정하신 데 따른 것으로 창세전의 언약으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영생의 약속인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오는 필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경을 해석하고 전하는 크리스챤들이 가진 사상의 중심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알아가고 또한 이를 증거 하는 것이 되는 성경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성경을 그 중에 하나인 비평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비평학은 성경을 알아가기 위하여 연구하는 분야의 하나이지만, 그 목적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본의인 언약의 방식에 의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서 구약 성경에서의 언약 연구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정한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해 주시고 있으면서 이 언약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상을 알려나가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폰 라드(von Rad)14)는 구약 신학의 핵심을 ‘구속사’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아이히로트(W. Eichrodt)15)는 구약 성경의 핵심을 ‘언약’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을 통해 흐르고 있는 중요한 중심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밀턴(John P. Milton)은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 또는 계약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사랑의 은혜를 뒷받침해주는 말씀의 역사 곧 성경의 역사가 바로 구약이다. 그리고 연구의 주제 구절이 되는 창세기 3:15에서의 ‘여자의 후손’ 약속은 장차 드러나게 될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전해주는 원복음이 되고 있다.

 

 

3. 성경 해석 방법인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언약 관점 

 

1) 성경 해석의 필요성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은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의(또는 원의, original meaning)를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으로 신적 기원을 갖고 있으나, 인간의 언어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메시지는 분명하나, 많은 구절들이 모호해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문자적이며 역사적인 강독을 전제하고 있는 듯 하고, 비유적이며 비역사적인 것들과 직면하는 관계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는 데는 잘 숙고되고 정리된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이 부분이 바로 성경에서 해석학이 관여되는 부분이다. 

 

해석학이란 단어는 ‘허메뉴틱스‘(hermeneutics)이다. 이 단어는 성경학자들이 성경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기술적 용어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 ’허메뉴인(hermenueein)이란 동사가 사용되고 있으며, “설명하다, 해석하다, 혹은 번역하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에 명사로 쓰여지고 있는 ‘허메네니아’(hermeneia)는 ‘해석’, 혹은 ‘번역’이란 의미를 갖는다. 누가는 이 동사를 사용해서 예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성경이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 바를 ‘설명했다’고 말하고 있다(눅 24:27).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명사를 사용해서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해석학은 본질상 성경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일을 포함한다. 해석학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기록된 형태이든, 구전의 형태이든, 아니면 가시적 형태이든, 어떤 메시지가 전달하려는 바를 이해하고자 사람들이 사용하는 원리들을 기술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해석학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해석하여서 설명하지 않고 단지 읽기만 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 스스로가 해석하는 일을 하고서 그 해석된 것을 설명하는 일을 한다. 가령 우리는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거나 TV를 시청하거나 자신이 읽고 보고 듣고서 이해된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생각 없이 되어진 것이지만 자기에게서 해석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에서 말한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말한다. 이 경향은 오늘날의 인터넷 매개체를 통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터넷 기사에 올라오는 수많은 댓글들은 인터넷 기사를 통해서 그냥 그 기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글을 읽고 자기 속에서 해석되어져 자기 이해에 의한 자기 생각을 피력한다. 그와 같이 성경을 우리가 읽거나 또한 들을 때 그 성경의 이해 속에 우리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해석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성경 해석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성경은 성경을 읽는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의 이해 속에 우리들이 있지 못하고 우리들의 생각에서 되어지는 해석에 의해서 성경을 이해하여 가기 때문에 성경 해석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게 그 의미가 감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16) 인간의 생각에서 되어지는 해석이란 무지에 의해서 성경을 억지로 풀어 해석하므로 말미암아 단어가 지닌 원래의 의미를 곡해하기 마련이다.17) 베드로는 이러한 성경 해석의 시도를 사사로이 푸는 것이라고 하였다(벧후 1:20). 이것은 성경을 뒤틀어 자신의 이론에 교묘하게 맞추는 것으로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위험성은 믿는 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즉 성경 읽는 자의 자의적인 성경 해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 해석은 항상 오석의 가능성을 지닌다. 이런 이유로 성경 해석은 해석 대상이 성경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을 읽는 해석자가 성경에 의해 해석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성경의 바른 해석과 이것을 위한 학문적 노력이 중요하다.  

 

 

2) 성경적 해석에 의한 성경해석 방법으로 시도된 구속사적인 언약 관점에 의한 성경해석

 

시대마다 성경 해석 방법이 다양하게 등장하였지만, 그럼에도 성경적 해석에 의한 성경 해석 방법에 대한 갈망이 있어 왔다. 이것은 “참된 설교는 무엇이며, 참된 성경적인 설교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퍼(R. B. Kuiper)는 올바른 성경적 설교원리를 ① 오직 성경만 설교해야 한다(Scriptura Sola) ② 성경 전부를 설교해야 한다(Scriptura Tota) ③ 오직 말씀과 함께(Sola Cum Verbo) 라고 한 바, 이것에 대한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강해설교이다. 강해설교가 성경적인 설교라는 데는 대체적으로 인식을 같이 한다. 그것은 강해설교가 루터나 칼빈이 누누이 강조한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적 원리를 강조한다고 볼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7:1-4의 말씀 가운데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가 봉독한 성경을 강론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바울이 구체적으로 본문을 선택해서 해석했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경해석사에서 일관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강해설교가 성경 해석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헤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은 강해설교를 “성경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청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적 개념’을 찾아내18) 그 본래의 의도인 중심 사상을 찾아내도록 하는데 기여한 것이 강해설교이다. 그는 강해설교의 특징으로 여러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는데, 주된 점은 성경 본문은 성경 기록자의 사상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본문에 있는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각 단어들의 의미 하나하나에 주된 관심을 갖기 보다는 성경 기록자가 이 단어들을 사용하여 문장 전체에서 의미한 바가 무엇이지를 찾아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 개념은 본문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라이펠트(W. L. Liefeld)도 강해설교의 특징으로 “강해설교는 하나의 기본적인 본문을 취급한다”면서 “강해설교는 성경해석학적 성실성을 갖는다. 시 말하면 본문에 충실하다는 뜻이다”라고 말하였다. 

 

강해설교를 통해서 본문을 떠나지 않고 본문을 중심하여서 올바른 해석을 하려는 시도의 성경 해석 방법은 본문의 뜻을 정확히 찾아내려는 노력에 의해서 성경이 말하게 함을 따라서 성경을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구속사적 설교’19)에 대한 인식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본래 구속사적 성경 해석 방법은 그 역사적 고찰이 화란이라는 특정한 영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세계 제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화란이라는 개혁파 교회 안에는 ‘새로운 운동’ 혹은 ‘새로운 동향’이라는 두드러진 모습이 나타났다. 당시 이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많은 철학연구, 신학연구, 성경연구가 있어왔고 주석, 해석학 내지 설교학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교자는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특히 역사적 본문에 있어서 그러했다.20) “…지금 여기 교회를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적 내용 및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철학과 신학에 대하여 왕성해진 이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해석 및 설교방법 즉 구속사적 방법으로 해답을 얻고자 하였다.

 

당시 구속사적 방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새로운 운동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속사적 방법은 설교학상 새로운 방법으로 보편적으로 인식되어졌다. 그래서 Vandijk은 말하기를, “행복하게도 수많은 설교자들은 성경의 역사적 본문이 지금까지 설교되어온 방법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성경해석의 구속사적 방법에 의한 구속사적 설교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설교가 구속사적 성경 해석 방법에 의한 구속사적 설교여야 한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의문을 품거나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성경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하나님의 구속’을 증거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 본문과의 관련성에서 나오는 때문이다. 더욱이 구속사적 성경 해석을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보아오는 일을 한 것이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서 왔던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언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할 것을 시도한 성경해석학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자연스러우며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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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성서비평학은 1753년 발행된 프랑스 의사 Jean Astruc의 소책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창세기에 하나님의 두 이름인 엘로힘(?????)과 아도나이(????, ????)가 혼용된 점과 곳곳에 반복된 비슷한 내용을 근거로 창세기가 소위 J와 E라는 두 자료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을 Eichhorn(1780)은 오경 전체에 확대 적용하면서 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했다. De Wette(1805)는 신명기가 요시야 시대의 것으로 주장하면서 이를 D라고 명명했고, Hupfeld(1853)는 E자료를 E1과 E2로 나누었는데 E1이 후에 제사장 법전으로 알려진 P자료이다. 

 

2) 양식비평은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학계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양식비평은 당시 구약학계에서 안고 있던 문제점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의 시도로서 등장하여 고대의 종교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들을 사용하면서 히브리인들이 만들어낸 문학작품을 함께 연결하여 연구하는 작업을 함으로써 주목을 받으면서 상당히 신중하면서도 공감을 받을 만한 비평학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 양식비평은 전통의 본 모습을 재구성하고 성경의 본문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제도와 부합하는지를 알기 위해 성경 본문의 일정한 부분에 대한 장르, 구조, 삶의 자리, 저자의 의도 등을 찾는 것이다. 양식비평은 시편의 배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설득력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기도 하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양립될 수 있는 방법론일 수 있다. 성경의 통일성과 특정 작자의 저작성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성경의 부분을 가려내어 장르를 알아내고 본래적 삶의 상황을 규명하여 구전으로 내려 온 이야기를 거기에 써 넣은 편집자의 의도를 찾아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의 영감(靈感)이나 통일성, 작자의 저작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비평 방법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증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3) 전승사 비평은 본문에 있어서 각 연구의 출발점은 전승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어떤 본문이 전승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함을 우선적으로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본문 증거들을 검토하는 작업을 한다. 전승사 비평은 자료 비평과 양식 비평에 비판으로 등장했다. 이 비평 방법은 성경이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이스라엘 전통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후세에 전해졌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성경 본문의 구성요소인 역사적, 사상적, 심리학적 요소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또한 전승사 비평학자들은 전승이란 원래 구전되어온 것이지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전통은 그 계승과 수집 과정 가운데 많이 변질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고대 세계의 신화들을 근거로 고대 세계에는 유사한 제사 양식이나 종교 활동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이에 비추어 이스라엘 종교를 재구성하려는데 역점을 둔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성경의 영감설이나 사실성을 믿는 우리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거부감을 준다. 성경이 구전으로 시작했다든지 고대의 유사한 제사나 종교 양식을 통해서 성경의 사건이 재구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사건의 기록과정이나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비평 방법 역시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상상적이다. 

 

4) 문학의 영역에서 수사학 비평은 한 작품이 그 독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문학적인 기법에 초점을 맞추는 실용적인 문학 연구 방법으로 간주된다. 수사학적인 비평(The Rhetorical Criticism)이라는 말은 James Muilenberg가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성경 연구에 있어서 본문의 구조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함으로 히브리 문헌 구성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천명했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와 구성의 분석은 필수적으로 철저해야 하고 문체의 의도적 변화나 기교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반복되는 사상이나 어휘, 언어유희, 병행구, 유음(assonance)이나 두운(alliteration) 같은 반복되는 음, 삽입 등에 관심을 갖고 이를 통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면 본문 이해를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자칫하면 성경을 하나의 문학작품을 분석하고이해하려는 시도로 전락할 수 있다. 이 경우 전통적인 해석과는 판이한 해석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수사학적 비평이 성경의 해석 도구로서 인정받으려면 본문에 대한 구속사적인 면에서의 성경신학적 고려가 있어야 한다.

 

5)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가지신 영원한 뜻과 계획은 ‘신적작정’(decree or divine decrees)이란 용어로 사용된다. 신적작정이란 하나님의 외적활동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말한다. 이 영원한 신적작정의 계획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기초를 두고 있다.

 

6) 여기서 말하는 ‘구원의 복음’은 구원을 얻는 복음, 또는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을 의미한다. 

 

7)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말하는 '약속의 성령'은 약속하신 성령이라는 것으로, 구약에서 예언으로 약속한 대로 오신 성령이란 의미이다. 이렇게 신실한 예언 성취로 오신 성령이니 장래의 영광스러운 구원 성취도 약속하시는(보증하시는) 성령이다. 

 

8)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의 '인치심을 받았으니'는 성령으로 중생된 자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양자(養子) 의식(意識)으로, 하나님의 자녀격(子女格)과 및 장차 받을 기업에 대한 확인표(確認)標)이다. 그러므로 현대어성경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표로'라고 번역하였다.

 

9) 여기서의 예언은 한문이 ‘豫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預言’의 의미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한 사람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 18:18) 라고 하신 말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언하는 일을 한 선지자에게서도 알 수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을 받아 그 예언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자였다. 이 선지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기본적인 단어는 ‘나비’(????)였다. 그것의 정확한 어원을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의 용례는 그 단어의 주요한 의미가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선포하는 자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에서 구약의 선지자가 하는 예언하는 일에 있었던 자는 사도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일을 선지자(예언자)에게 맡겨 전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며, 그 맡은 장차 되어질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려주는 일을 한 자이다.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 1:3)고 하였다. 

 

10) 구원하시는 원리, 곧 구원 원리는 하나님의 의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또한 믿음으로 각각 그 의미가 쓰인다. 이는 죄인들은 전가된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고, 이 의는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11) Covenant를 ‘계약’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약’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언약’으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왜냐하면 계약은 인간관계에서 쌍무적인 조건과 의무가 뒤따르는 것으로서의 약속을 맺는 것인 한편 비록 편무적인 것일지라도 반면에,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 계약적 조건과 의무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을 선언하시고 그 선언의 온전한 성취를 하나님의 구속사를 통해서 해나가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언약을 하나님이 명하신 것(수 7:11), 세우신 것(레 26:9), 만드신 것(신 5:2), 주신 것(행 7:8)이라 하고 그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으며 우리 인간은 수혜자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언약이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세우신 약속을 지칭한다. 무엇보다도 언약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말 개역성경인 한글성경이 Covenant를 '언약'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용어로 인한 이해의 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12)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을 ‘언약적인 하나님’으로 표현하면서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그가 이렇게 언약적인 하나님을 그리스도인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해를 갖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의 비밀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접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 주제가 된다. 바울은 하나님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영원한 작정을 가지셨는데, 곧 자신의 나라에 대한 계획을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일을 정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시는 것에서 가지셨다는 것과 또한 우리를 친히 보시기에 한 점 흠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 것을 작정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 구체적 실행으로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 대신 죽게 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을 말한다(엡 1:4-5).  

 

13)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은 자신에게 보내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멸망의 자식은 사단에게 내어주어 그와 함께 멸망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요 17:12). 

 

14) 폰 라드(Gerhard von Rad)는 구약신학의 유명한 신학자로서 그로 인하여 구약신학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는 시작이 되고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구약신학’(Old Testament Theology)은 역사적인 전통과 예언적인 전통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들을 통시적 방법(The Diachronic Method)으로 분석하여 구약신학을 쓴 최초의 학자이며 유일한 학자이다. 폰 라드는 케리그마 신학으로 구약연구에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결점이 되는 문제점이 있음은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전승사관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볼 때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항에 도달하기 위하여” 통시적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통시적인 전승사적 방법으로 구약의 케리그마(선포) 혹은 고백을 “다시 말하고자”(retelling) 하였다. 통시적인 연구는 이미 고착된 구약본문 아래에 깔려 있는 단계적인 층(Successive layers)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작업이다. 그의 신학 작업에 있어서 그의 마음에 그리고 있는 역사는 전통의 역사(history of tradition)요, 혹은 전통에 미치는 역사적인 경험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나 자주 구약의 증언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점이 전승사(Traditionsgeschichte)와 역사(history)와 구원사(Heilsgeschichte)의 관계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

 

15) 아이히롯트(W. Eichrodt)는 1930년대에 구약신학에서 교차방법론(The Cross-Section Method)을 주창한 사람이다. 그는 구약의 언약을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써 구약사상의 세계를 관통할 수 있었다. 아이히롯트의 신학은 아주 견고하게 역사적이고 서술적인 작업으로 남아 있다. 그는 구약신학자가 선택의 원리(principle of selection)와 동질의 원리(principle of congeniality)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시도하는 거대한 구조적 작업은 역사적 과정을 관통하여 종교의 내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만들어진다. 그의 목표는 “구약신학의 영역을 그 구조적인 통일성 속에서 이해하며” 그 심오한 뜻을 찾아내는데 있다. 그는 구약 사상의 영역을 다룰 때 “역사적 원리(historical principle)가 체계적인 원리(systematic principle)와 함께 상호 보충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그에 따르면 체계적인 원리는 언약 개념 속에 있다. 그는 자신의 구약신학을 총체적으로 통일시키는 범주를 바로 여기에서 찾고 있다. 역사적 원리와 언약 원리를 합성하여 만든 세 가지 범주 즉, (1) 하나님과 백성 (2) 하나님과 세상 (3) 하나님과 사람을 따라 그의 대작의 구조적 틀을 짜고 있다. 그의 체계적인 교차방법론은 그의 체계 안에서 사상과 제도가 발전하고 있음을 드러내도록 짜여 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중대한 결점이 되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그가 언약 개념을 사용해서 통일성을 만든 교차방법론은 상당히 인위적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체계적인 원리인 언약 개념은 구약에 나타난 다양한 사상을 포함하는 것인데,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히롯트의 구약신학을 다룰 때는 이점에 유의해야 한다.

 

16) 킹스베리(J. D. Kingsbury)는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에서 “어느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시를 파지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면서 “마가에 따르면, 설명되지 않은 비유는 모든 것이 유대군중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 제자들에 대해서도 수수께끼다. 이 까닭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비유를 해석해 주시고,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분여해 주신다. 마태에 따르면, 비유는 단지 그 군중들에게만 수수께끼이고 그 제자들에게는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이 제자로 삼아졌다는 바로 그 사실 덕분으로 신적 통찰의 수혜자로 삼아졌고,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의 비유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과는 대조되게 군중들은 장님이요 귀머거리요 이해도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천국 복음의 비유에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서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게 그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시고 있다. 그런 이유로 천국 복음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마 13:10-15).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지닌 참된 의미를 전혀 올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한 성경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이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 의미적 해석을 갖는 자의적 해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인 선지자의 예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에 의한 가르침이 신적 통찰로 깨달아 알게 하심으로써 이다. 그에 따라서 사도들의 성경 해석과 그 설교는 자신의 해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적 통찰의 깨달음에 의해 알게 된 예수님의 해석에 의한 가르침에 의해서 구원의 원리적인 의미를 이해한데 따라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었다.  

 

17) 로이드 존스는 베드로가 쓴 서신 베드로후서 3장 15-17절의 강해에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느니라”(15-16절)이 말하고 있는 주께로부터 받아 전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 곧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자들과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풀다가’(엉뚱하게 해석하여서) 말하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하여서 바울이 주께로부터 받아 전한 복음을 왜곡함으로 주님께서 주신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조롱하여 비웃으며 부인하여(벧후 3:3-4) 그들 자신 스스로를 멸망케 할 수 있을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18) 헤돈 로빈슨은 이 ‘성경적 개념’의 중심 사상을 ‘big idea'(or ’main idea') 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성경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인 중심 사상은 하나이며, 그 성경의 중심 사상을 찾아내어서 올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하여 전달하는 것에 설교가 있다고 보았다. 

 

19) 구속사적 방법의 설교 창시자는 스킬더(Schilder)이다. 

 

20) 당시 화란교회는 불건전한 신학인 바르트(Barth)의 변증법적 신학을 비롯한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던 화란의 경건주의(Huyser의 표현으로는 신비주의이다. 이 경건주의의 특징은 주관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신령주의 였다), 재침례파의 이원론, 합리주의 사고방식인 객관주의,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인 시피노자주의(Spinozacism)에 의한 주관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스킬더(Schilder)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내적인 위협으로 보면서 저술을 통하여 반박을 제기함으로써 바르트에 대하여 최초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결코 건전한 해석에 이르지 못할 것인데, 계시사에 대한 적절한 고려를 하지 않는 한, 결코 건전한 해석학의 ABC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