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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구원의 계획 2010. 5. 5. 20:36

신구약 중간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들어가면서


예수님의 성육신 직전의 역사에 대한 성경의 침묵은 주목할 만하다. 이 400년의 공백기를 ‘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 혹은 ‘초기 유대주의’(early Judaism)라 부른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의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기간에 일어난 세상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의 배경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시기는 크게 페르시아제국 시대와 그 후 헬라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별히 유대교가 이 두 시대에 어떻게 반응하면서 생존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유대교의 헬레니즘화의 수용과 거부가 흥미로운 주제이다.


1. 페르시아 시대


1-1. 고레스


캄비세스 (Cambyses)의 아들 고레스가 페르시아제국을 일구어 냈다. 주전 559년 나이 40세의 고레스는 안샨(Anshan)이라는 작은 왕국을 상속받았다. 이 왕국은 바벨론제국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메데제국(Median Empire)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무렵 바벨론의 왕은 나보니두스(Nabonidus 혹은 Nabu-naid)였다.


철학자요 신비가였던 나보니두스왕은 바벨론의 神 마르둑(Marduk)으로부터 고레스가 정복자로 등장할 것을 들었다. 마르둑 신의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가 바벨론 이외의(수메르와 아카드의) 이방신들을 의존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나중에 고레스가 바벨론에 진격해 왔을 때 환영했다.


BC 550-549년에 고레스는 자신의 군주였던 메대왕 아스티아게스(Astiages)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바벨론제국은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샤르우술(Bel-shar-usur)이 통치했다. 안샨(Anshan)의 수도인 파르사(Parsa)에 메데왕 아스티아게스가 고레스를 정복하려고 왔을 때, 그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고레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고레스는 관대한 정복자였기에 메대의 관료들을 그대로 살려두어 그 직을 유지하도록 했다. 고레스는 메데제국의 영토를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그 당시 세계의 열강들이었던 리디아(Lydia)와 바벨론도 고레스에 의해 정복당했다. 그리고 이집트는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II)에 의해 정복당했다.


고레스는 그리스, 파르티아(Parthia) 그리고 히르카니아 (Hyrcania)도 정복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귀환조치 시켰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이방인인 고레스가 도구로 사용된 경우이다. 이 귀환을 그 당시의 국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팔레스타인에 친 페르시아 정책과 기운을 심어둠으로써 애굽을 정복하는데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고레스의 관대한 성격은 그의 현명한 국제 정세를 읽는 눈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고레스와 유대인의 관계를 살펴보자.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 BC 537년 경, 고레스는 포로 귀환하던 약 5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 편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빼앗아 왔던 성전 기구들을 돌려보냈다(에스라 6:3-5). 고레스의 칙령대로 팔레스틴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재건하고 제사를 회복했다.


이때 팔레스틴의 북쪽 지역인 사마리아에는 앗시리아의 정복자들에 의해 추방된 포로들인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재건을 방해했다(스 4:5). 페르시아인들은 고레스를 ‘아버지’라 불렀고, 그리스인들은 ‘스승이며 입법자’로 여겼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레스는 바벨론 포로를 종식시켜 새 시대를 연 하나님의 종이었다. 고레스는 신민들에게 페르시아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그리고 인도의 고대문명들을 종합하는 일을 했다.



1-2. 다리오


고레스 사후 다리오가 페르시아를 통치했을 때 이스라엘에서 학개와 스가랴가 선지자로 있었다. 다리오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도로와 우편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상비군은 기병 2,000명, 귀족 출신 보병 2,000명 그리고 불사신들(immortals) 10,000명 정도의 소규모였다. 주전 512년 경 다리오는 7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스키토족(Scythians)을 공략했는데 이것이 아시아와 유럽의 첫 번째 군사 접촉이었다.


다리오는 BC 518년경에는 나일강과 수에즈만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기도 했다. 다리오는 계속하여 그리스를 점령하려고 원정했다. 한 예로 마라톤에(Marathon)서의 전투에서는 패배를 맛보았고 그 결과 이집트도 다리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집트의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다리오는 죽었다.



1-3. 아하수에로(BC 486-465)


다리오가 고레스의 딸 아톳사에게서 나은 아들인(히브리어로) 아하수에로(에 4:6; 에스더서의 부림절을 참고하라; 페르시아말로는 크사야르사(Khshayarsha; 영어로는 크세르크세스, Xerxes)가 35세에 다리오 후임자로 발탁되었다. 아하수에로는 이집트의 반란을 잠재우고 바벨론의 반란도 잠재웠는데, 스스로 ‘페르시아와 메데의 왕’이라고 부름으로써 바벨론은 영원히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임을 나타냈다.


BC 480년 경 아하수에로는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46개국으로 구성된 군대의 병력을 보충했고, 엄청난 함대도 동원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군대가 페르시아를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하수에로가 아테네를 정복했지만,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도였고 자기 과시를 좋아했다. 그 후 즉위 20년 만에 그의 친위대장인 아르타바누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1-4. 아닥사스다 1세(BC 465-425)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Longimanus: ‘손이 긴 사람’이란 뜻. 그의 오른 손이 왼손보다 길었다고 함)가 왕이 되었을 때, 애굽 그리고 그리스 등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할 책임을 떠맡았다. 다리오가 시행했던 효율적인 행정제도가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아닥사스다에게 포로귀환을 요청했다.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 바벨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물질에 눈이 밝았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닥사스다 제 7년에 유대인들이 아하와(Ahava)에 집결하여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약 7개월이나 소요되는 귀환 길에 오른다. 귀환 후 에스라는 재건 사업을 추진했는데 특별히 잡혼(mixed marriage) 문제를 처리했다.


이때 느헤미야의 활약도 컸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전재건에 힘쓴 후 12년 만에 다시 페르시아의 수사(Susa)로 돌아왔다. 그는 귀환한 백성들 가운데 잡혼과 율법의 준수의 해이가 다시 문제로 대두되자(느 13:23-24) 2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이런 배경이 구약 성경의 마지막 내용이다. 아닥사스다 때로부터 사실상 페르시아는 기울기 시작했다.


그 후 다리우스 2세와 아닥사스다 2세(BC 404-358)의 통치 때는 애굽, 구브로, 페니키아, 시리아에서 반란이 더욱 만연했다. 과도한 세금과 총독직의 세습화도 큰 문제였다. 그 후 아닥사스다 3세는 애굽을 다시 정복했는데 조상 다리오 시대의 영화를 회복하려고 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체결했다. 하지만 아테네 근처의 마케돈(마케도니아, Macedon)은 이것을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주전 338년에 필립과 알렉산더의 통솔아래 아테네와 싸워 승리했다.


아닥사스다 3세는 환관 바고아스(Bagoas)에 의해 독살 당했다. 다리오 3세(느 12:22)가 주전 336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같은 해에, 알렉산더는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333년 다리오 3세는 잇수스(Issus)에서 참패당했다. 다리오 3세의 죽음은 곧 페르시아제국의 몰락이었다. BC 550-330년 동안 융성했던 제국이었다.



1-5. 이 당시의 유대인의 상황


BC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이방 나라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사람과 잡혼이 많아졌다(왕하 17:24-29). 그 결과는 일부는 여호와 신앙을 견지했으나 다수는 이방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가 만연해 졌다(왕하 17:33). 그 후 즉 약 150년 후, BC 586년에 남 유다도 망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정착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위협을 느껴서 그들을 반대했다. 귀환했던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강해진다면 그들의 소유지를 빼앗길 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재건에 동참하려고 했으나 귀환자들은 이방인과 같은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수용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의 통치자였던 산발랏은 성벽과 성전 재건 사업을 무력으로 반대했다. 그 후 사마리아와 유대인은 원수로 지냈다.



1-6. 이집트의 엘레판틴의 유대인들


1907-8년에 이집트의 아수안(Assuan) 근처의 엘레판틴 (Elephantine: 코끼리 마을)에서 BC 500-400년 사이로 추정되는 아람어 파피루스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은 유대인이 작성한 사업문서였다. 성경인물과 같은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BC 407년 유대 총독인 Vigvai에게 보낸 편지에, 이집트의 제사장들이 지방 행정장관들의 도움을 얻어 엘레판틴에(예루살렘의 성전을 본 따) 세운 유대인의 성전을 파괴한 기록이 있다. 반 유대인 감정이 컸음을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이 유대인들은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부했으며 유월절을 지켰다. 하지만 이들 유대인들은 종교 혼합주의적 생활을 했다. 이들의 기원은 여전히 신비이다. 엘레판틴의 파피루스는 유대인의 정착이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의 애굽 침입 이전이라고 밝힌다. 캄비세스가 애굽 신전은 파괴했으나 유대인의 신전은 훼파하지 않았다.



1-7. 디아스포라의 회당


아마 바벨론 포로기에 최초의 회당이 건립된 것 같다. 회당(synagogue; 히브리어로는 ‘케네세트’- 이 단어는 지금도 이스라엘의 의회를 지칭함)은 신구약 중간기 디아스포라의 삶의 중심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귀환을 원치 않아서 디아스포라로 남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제사제도는 중단되었으나 기도, 율법의 연구와 가르침은 계속되었다(겔 8:1; 20:1-3). 호주 10명만 모이면 회당이 하나 세워질 정도였다. 참고로 디아스포라에게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의 결정은 여전히 유효했다.


회당예배는 아주 자유로운 형식을 취했다. (남자 혹은 여자) 회당장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회당의 사환(눅 4:20)은 ‘하잔’(hazzan)이라 불렸는데 성경을 낭독자에게 건네주고 다 읽은 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하잔은 (지방)산헤드린의 대리로서 범법자를 매질 할 수 있었다.



1-8. AD 2-3세기의 회당 예배의 요소


기도

쉐마를 읽음(Shema: 신 6:4-9, 11:13-21 그리고 민 15:37-41로 구성됨),

기도

율법 낭독(안식일에는 7명이 낭독함. 낭독 후 통역자[methurgeman]가 아람어로 번역[targum]해 주었다)

선지서 낭독(아마 율법을 설명하기 위해)

감사기도

성경 교훈의 설명(눅 4:20)

(설교자 혹은 회당장이 행한) 제사장적 복의 선포와 회중의 아멘으로 구성되었다.



2. 헬레니즘 시대


2-1. 헬레니즘의 전파자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동맹으로 묶은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이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게는 치명타였다. BC 336년에 필립이 모살당한 후 아들 알렉산더가 즉위했다. 그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리스 문화를 수용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 때 알렉산더는 원정 중이었는데 Granicu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렀다. 그 후 별다른 저항 없이 소아시아와 페니키아를 점령했고, 다리오 3세의 협상을 거절했다.


애굽인들은 페르시아를 침입자로 여겼기에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마케도니아인들의 애굽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새운 도시다. 이 무렵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많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군사 정책이외의 모든 부분은 애굽인의 자치를 허용했다.


BC 331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본토에서 대 접전을 준비했다. 바벨론과 수사 등 페르시아의 대부분의 도시를 점령했다. BC 330년에 다리오 3세는 죽고 알렉산더는 대왕(Basileus)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후 동진 정책을 통해 러시아와 인도의 푼잡 지역까지 경계선을 확장했다.


323년에 알렉산더는 33세의 일기로 열병으로 사망했다. 사망 전에 여러 가지 문제로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헬레니즘이 전파되었는데, 이것은 헬레니즘을 다른 모든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여긴 알렉산더의 영향 때문이었다.


2-2. 알렉산더 사후의 분열 및 톨레미 왕조 치하의 유대인


알렉사더가 죽은 후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알렉산더의 형 필립 아르히다이오스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페르딕카스가 제국을 대표하게 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제국을 분할-점령해 갔다. BC 315년에 이르러서야 알렉산더의 후계자로 4명의 걸출한 장군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안티고누스(Antigonus)는 지중해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카산더(Cassander)는 마케도니아를, 톨레미 라기(Ptolemy Lagi)는 이집트와 남부 시리아를, 마지막으로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트라키아를 지배했다. 이 중에서 안티고누스가 가장 강력했기에 나머지 3장군들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 후 톨레미는 팔레스틴을 통치했는데 이 때 의인 시몬(Simon the Just)은 톨레미 1세가 파괴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했다. 시몬은 유대인의 지도자요 대제사장이요 교사들의 수장이었으며 예루살렘에 저수지도 만들었다.


그 후 안티고누스는 톨레미를 시리아에서 쫓아내고 시리아를 장악했다. BC 311년에 셀류커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셀류커스 왕조를 세웠다(나중에 안디옥이 수도가 됨). BC 301년 리시마쿠스, 셀류커스, 그리고 카산더는 연합하여 안티고누스를 대항한 결과 그를 프리기아의 입수스(Ipsus)에서 죽였다.


이 전쟁에 톨레미가 가담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해버렸다. 셀류커스는 BC 281년에 살해되고 안티오커스 1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 후 3왕이 알렉산더 대제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

시리아의 셀류키드 왕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가문.


BC 252년 안티오커스 2세는 톨레미의 딸 베레니케(Berenice)와 혼인하여 이 두 왕조간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안티오커스 2세의 다른 아내였던 라오디케(Laodice)는 베레니케와 그녀의 자녀들을 죽여 버렸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셀류키드와 톨레미 3세 사이에 라오디게아 전쟁(Laodicean War)이 발발하여 톨레미 가문의 승리로 끝났다.



2-3. 셀류키드 왕조 치하의 유대인


BC 223년에 18세로 등극한 안티오커스 3세의 팔레스틴 정복 역사 중에서 BC 198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입성은 주목할 만하다. 셀류키드 왕조의 팔레스틴 통치 시기는 이집트인의 팔레스틴 통치 보다 더 헬레니즘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시기였다. 이 무렵 로마의 힘은 강성해 갔다.


아테네 출신인 안티오커스 4세는 에피파네스 (신현)으로 불렸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에피마네스’(Epimanes, 미친 놈)로 불렀다. 이 때 예루살렘에는 의인 시몬의 자손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친 헬라화 정책을 추진한 유대인에 의해 그리고 에피파네스의 재가에 의해 야손(Jason)이 대제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야손은 짐나지움을 세웠고, 유대 이름대신 헬라이름을 선호했다. 하지만 정통 유대인들인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은 反헬라화 투쟁을 전개했다. 메네라우스(Menelaus)는 베냐민지파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뇌물을 바쳐 대제사장이 되었다.


에피파네스는 쥬피터 신상을 성전에 세웠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멸망의 가증한 물건(the abomination of desolation)으로 여겼다. 돼지가 성전 제단에 드려졌고, 바카스(Bacchus)를 위해 酒神祭가 드려졌다.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면 사형에 처하라는 법령이 선포되었다. 히브리 성경 사본을 파기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이것에 대해 저항했던 자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참고로 BC 168년에 피드나(Pydna)전투에서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군을 무찔렀다.



2-4. 유대인에게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


알렉산더 대제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헬라의 사상과 문화를 전수 받았고 정복지 마다 헬라도시를 세웠다. 연극장, 짐나지움, 도서관, 헬라교육-철학, 헬라화된 축제 등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포로 이전에는 가나안의 종교가 위협이었다면, 포로 후기에는 헬레니즘이 유대인들의 최대의 적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에 미친 헬레니즘- 바벨론, 안디옥, 다마스커스, 에베소, 버가모, 사데, 티그리스-유프라데스 강 계곡 등에는 큰 디아스포라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들 중 20세 이상 남자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성전세를 보내었고 절기에는 순례길을 떠났다. 하지만 헬라문화와 유대문화의 종합은 여러 지역에서 불가피해 보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LXX이 번역되었는데, 아마 톨레미왕조의 첫 번째 왕인 ‘필라델푸스’ (BC 285-246)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번역의 동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 헬라어 성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주후 3세기 오리겐 때에 ‘Septuagint’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발된 72명의 장로들이 별실에서 72일 동안 번역하여 제출한 것으로 거의 일치한 번역본이라고 한다. 이런 전설은 LXX에 영감성을 부여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이다.


성경해석과 관련해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BC 160년경의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BC 20에서 AD 50년경에 살았던 필로(Philo)는 헬라의 풍유적 해석을 도입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영향에서 제외된 안디옥에서는 문자적 해석이 유행했다. 디아스포라처럼 팔레스틴에서도 헬레니즘이 유행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2-5. 마카비 왕조와 反헬레니즘


모딘 (Modin)이라는 마을 출신의 늙은 제사장인 마타디아스의 출현은 중요하다. 그는 이방신 숭배를 거절했으며 배교한 유대인과 에피파네스의 사절을 죽여버렸다. 그는 5명의 아들과 함께 도망갔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이 가담하여 게릴라전 형식으로 헬레니즘에 대항했다. 그의 사후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성전을 정결케 하고 하누카(Hanukkah, 빛의 절기)를 12월 25일부터 8일간 지켰다. 그 후 시리아 군대와의 전투에서 유다 마카비는 전사했다. 이제 유다의 형제들인 시몬, 요나단, 요하난이 지도자로 역할을 했다. 시몬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회의에서 지도자 및 대제사장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하스몬 왕조가 합법적으로 출법했다. 하스몬(혹은 아스모니우스)은 마카비 가문의 조상의 이름이다. 그러나 BC 134년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은 야심 많은 사위에게 살해당하고 셋째 아들 요한 하르카누스가 왕이 되었다. BC 142-BC 63년까지 하스모니안 왕가는 시리아로부터 독립했다.



2-6. 하스몬 왕조의 성장과 쇠망


히르카누스가 시리아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정치적인 협상에 기인한다. 시리아는 히르카누스가 시리아의 군사 행동에 지원할 것을 약속받고 왕위를 보장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헬라주의자들과 하시딤 사이의 분쟁은 종식되었다. 헬라주의자들의 이상은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발전되었고 하시딤의 정신은 바리새인들에게 전승되었다.


히르카누스는 정복 정책을 펼쳤는데 부자와 귀족의 지원을 받았다. 이유는 새로운 상업의 기회를 정복정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실한 하시딤의 일원이었지만 헬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BC 104년에 사망했다.


히르카누스의 장자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폭군이었던 그는 음주, 질병, 반란에 대한 공포로 통치 1년 만에 사망했다. 따라서 그의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계승했다. 영토확장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이때 하스몬 왕가와 바리새파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외국 보병을 동원해서 바리새파를 복종시키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시리아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나중에 얀네우스에 의해 많은 바리새파들이 살해당했다. 이런 대립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대립을 자연스럽게 초래했다. 학자들은 얀네우스를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를 핍박한 사악한 제사장(the Wicked Priest)으로 여겼다.


아리스토불루스와 얀네우스와 번갈아 가며 결혼했던(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권을 잡았다. 그녀의 사후 히르카누스 2세가 통치했다. 그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그 후 이두메 출신의 안티파터가 정권을 잡았다. 이런 형제간의 혼란을 중재하기 위해 로마의 폼페이가 개입하게 되었다.




3. 신구약 중간기의 신학적 사상


3-1. 신론


신구약 중간기에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초월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성호를 직접 사용하기를 주저하여 대신에 완곡어를 사용했다. 마카비 1서에서 저자는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하늘’로 말한다. 혹은 유대 랍비들은 ‘세키나’, ‘그 이름’이라는 대체 용어를 사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의 초월하심에 대한 강조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경건생활에 있어서 경건과 종교적 열성이 증가해 간다는 점이다. 유딧과 토빗 등에는 개인적인 경건과 기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3-2. 천사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천사를 이해한 것은 신구약 중간기의 특징이다. 마카비 2서에서 천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싸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직접적인 접촉을 가지신다는 묘사 대신에, 외경들은 번개와 눈, 비, 구름, 흑암, 추위, 더위, 안개 등에 대한 책임을 천사들에게 지우고 있다. 즉 눈을 주관하는 천사, 비를 주관하는 천사, 바람을 주관하는 천사와 같은 개념이 발생했다.


에녹 1서 20:1절 이하에서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미카엘, 사라카엘, 레미엘과 같은 천사들의 이름이 BC 2-3세기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언급된다. 그리고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 혹은 ‘파수군’으로 나타난다. 천사들의 계급 구분도 나타나는데, 에녹 1서 61:10절에는 케루빔, 스라빔, 오파님, 권세의 천사, 주권의 천사 등이 나타난다. 천사의 기능 중 최고의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외경들은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자로서 천사를 언급한다. 마카비 2서 5:1-3절에서 말을 탄 천사가, 토비트에서는 라파엘이 이 기능을 수행한다(행 7:38절 참조). 그리고 천사들이 수호천사로 등장한다. 모든 나라는 수호 천사를 자기고 있다(창 11:7절의 아람어 번역). 희년서 35:7절에서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수호천사로 언급된다.



3-3. 마귀론


악한 영의 기원에 대해서 에녹 1서 15:8절은 “영들과 육체의 결합으로 낳아진 거인 (창 6:4의 네피림)들은 땅에서 악한 영들이라 불리우며 땅 위에서 거할 것이다. 악한 영들은 그들의 몸에서 발생했으니…” 중간기 문헌들은 악한 영들이 땅에 가지고 온 악에 대한 언급을 상당히 내포한다. 마귀들이 타락한 천사의 후예라는 것이 이 기간의 문헌에 담겨있다.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이름은 벨리알(Belial) 혹은 마스테바(Masteba)라고 부른다. 몇 가지 방도가 마귀의 악한 궤계를 대응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믿어졌는데, 주문(magic formula)을 외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리고 토비트 8:2-4절에 의하면 물고기의 심장과 간을 향의 재 위에 놓아두면 마귀가 그 냄새를 맡고 도망간다는 미신적인 언급이 등장한다.



3-4. 율법관


이 시기에 율법은 영구적이며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율법적인 종교가 발전되었다. 집회서와 바룩의 묵시론에는 율법이 인간들에게 가능한 모든 지혜의 총화로 묘사된다. 이 당시의 율법은 구전도 포함한다. 랍비들은 율법의 준수를 충실히 하는 것이 이 후의 세상에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에스드라 2서에서 율법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극히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의 소유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이 제 2 에스드라 8:35절에 등장한다.



3-5. 지혜


지혜는 하나님의 능력의 입김이며 전능하신 이의 분명한 영향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영원한 빛에서 발해진 광채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흠없는 거울이고, 그의 선하심의 형상이다(솔로몬의 지혜서 7:25-26). 집회서와 피르케 아봇(선조들의 어록)에서 율법(말씀)과 지혜는 동일시되고 있다.



3-6. 죄


죄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외경 문헌들이 각각 다른 답을 제시한다. 솔로몬의 지혜서 2:24절은 죄의 기원을 마귀에게 돌리며, 집회서 25:24절은 하와를 집중적으로 비난하며, 에녹 1서 10:7-8절은 악한 천사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에스드라 2서 7:48절은 아담을 비난하며, 같은 책 3:21-22절과 7:48절은 원죄를 암시하면서 세상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무거운 죄책을 짊어지고 가는 악한 곳으로 묘사한다. 당시에 제사는 속죄를 위한 주된 수단이었다. 선행과 구제, 순교, 조상을 기쁘게 하는 것도 역시 동일한 목적을 성취하는 대 고려해 볼 만한 도움을 준다.



3-7. 윤리관


피르케 아봇 2:9절에서 에서 한 랍비는 삶의 주목적은 율법이 가르치는 바를 이해하고 그 교훈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의 총화로 인식된다. 토비트 4:14-15절에는 황금률이 등장하는데, 스스로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등장한다.



3-8. 종말론


이 당시 유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내세에 대한 신앙을 종교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메시아의 도래의 산물이 될 것이다. 에녹서는 죽은 자들의 집결지로서 스올을 말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그곳에서 작용하여 선인에게는 보상이, 악인에게는 징벌이 시행된다고 말한다.


희년서의 종말론적인 교훈은 모든 죽은 자들은 스올로 내려가며, 메시아가 임하면 정직한 자의 영혼들이 큰 기쁨을 맛보리라고 언급한다. 피르케 아봇 6:10절은 “임종 시 사람은 금이나 은, 보석이나 진주, 그 어느 것도 가져가지 않으며, 오직 토라와 그의 모든 선행만을 가져간다”라고 말함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에서 받을 보상을 언급한다.



3-9. 하나님 나라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주제는 등장한다. 예를 들어, BC 2세기 중엽의 이집트의 디아스포라에 의해 기록된 ‘신탁의 책들’(The Sibylline Oracles)의 경우 3권 499, 560, 617 등에서 발견할 수 있고 특히 3권 46-50에서 메시야왕국의 도래를 예언하는 것 같다. BC 2세기 말엽에서 1세기 말엽에 기록된 제 1에녹서에도 하나님의 영원한 왕, 우주의 왕 등으로 묘사한다(9:4; 25:7 등).


BC 2세기경의 ‘희년의 책’(The Book of Jubilees)에서도 동일한 사상을 본다(1:27-28). 그리고 BC 2세기의 마카비 시대에 기록된 모세의 유언(The Testament of Moses 특히 9:7-10:13), 솔로몬의 시편(The Psalms of Solomon, 2:29-30; 17:1-32), BC 2세기부터 AD 68년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 사해 부근의 쿰란 공동체(에센파의 핵심적인 무리들)에 의해 기록된 사해 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s, 특히 11QMelch, 1QH, 4Q511 등), 카디쉬 제 18 축복 기도문(The Eighteen Benediction), 그리고 랍비문헌 중 탈굼에서도 볼 수 있다.



3-10. 메시아 신앙


이 시대에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신앙이 나타나며, 그는 왕국을 세우도록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받은 자이다(참고. 에스드라 2서 11-13장). ‘12족장의 유언서’ 중 일부인 ‘르우벤의 유언’ 6:7-12절에서 메시아는 레위에게서만 나온다고 말하는 반면, ‘유다의 유언’ 22장과 24장에서 메시아는 레위에게서만 나온다고 말한다.


‘에녹의 유사서’(The Similitudes of Enoch)과 에녹 1서 37-71장에서 메시아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요한의 로고스처럼 모든 인간보다 먼저 계시고 보다 뛰어나셨던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이 메시아는 종말에 나타나실 것이며, 하나님을 위하며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왕국을 세우기도 하실 것이다. 이 당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인자’라는 칭호가 메시아에게 적용된다(에녹 1서 45:1-6; 52:4).




4. 신구약 중간기의 연대표


페르시아 시대


BC

612 바벨론에게 앗시리아의 니느웨가 함락됨.

586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이 예루살렘을 함락함.

559 고레스가 메데의 안샨을 상속함.

539 고레스가 바벨론을 함락시킴.

530-522 캄비세스가 고레스를 계승함. 애굽 정복.

522-486 다리오 1세가 페르시아를 통치.

515 포로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착수.

486-465 아하수에로 1세가 그리스 정복을 시도. 에스더 시대.

480 그리스의 살라미스 해전. 아하수에로 1세가 도주함.

464-424 아닥사스다 1세의 페르시아 통치. 느헤미야 시대.



헬레니즘 시대


BC

334-323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

330 마케도니아의 팔레스틴 정복

311 셀류커스 왕조의 바벨론 정복. 셀류커스 왕조의 시작.

223-187 안티오커스 3세가 시리아를 통치.

202 로마가 카르타고를 격퇴함.

198 안티오커스 3세의 애굽 격퇴 및 팔레스틴 통치권 획득.

175-163 안티오커스 4세인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

168 Pydna 전투,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격파함.

167 맛다디아스의 반란 시작.

166-160 유다 마카비가 통속함.

160-142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 봉직.

146 로마의 西지중해 지배.

142-135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봉직 (하스모니안의 독립 기간).

134-104 요한 히르카누스가 대제사장 겸 왕으로 통치.

103 아리스토불루스

102-76 알렉산더 얀네우스

75-67 살로메 알렉산드리아의 통치. 히르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

66-63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통치. 히르카누스 2세와 분쟁.

63 폼페이의 팔레스틴 침입. 로마의 통치 시작.

63-40 히르카누스 2세가 통치. 로마의 속국이 됨. 안티파터가 힘을 얻음.

40-37 파르티아인들의 예루살렘 정복.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다시 왕으로 인정받음.

37-4 안티파터의 아들인 헤롯대왕의 통치. 로마의 속국.

31 악티움 전쟁.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