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생을 주노라(요10:22-42)
- 옥한흠 목사
얼마 전에 미국에서 들어 온 어느 목사님 사모 한 분이 저를 찾아 와서는 특별히 저를 생각하고 사온 건강식품이라면서 약병 하나를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저는 약 을 잘 안 먹는 성격이라 손을 대지 않고 식탁에 얹어 놓고 여러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 아이가 와서 약병을 보더니 "와, 이거 대단한 건데. 아빠 왜 안 드세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물었더니 "요즘 미국에서 불로장생한다고 떠드는 약 있잖아요? 잡지들마다 이 약을 소개한다고 얼마나 난리인데요. 이걸 왜 안 잡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병을 자세히 보니까 정말 미국에서 한참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는 DHEA 바로 그 약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로장생한다 하면 깜빡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 은 여행 갔다가 들어오는 사람치고 가방에다가 몇 병씩 집어넣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너무 많이 가지고 들어오는 바람에 공항에서 아예 1인당 다섯 병 이상은 안 된다고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그러나 저는 불로장생하는 약이라니까 더 먹기가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래 살고 싶지 않거든요. 너무 오래 살아 가지고 젊어서 안한 고생을 늙어서 할 필 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식탁 위에 그냥 얹어 두고 있었는데 며칠 지나고 나니까 그 약병이 없어져버렸습니다. 저는 아직도 누가 그것을 가져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하면 좋아하는 것은 남녀노소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ETLF(Eternal Life)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DHEA보다 더 큰 선물을,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우리에 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ETLF. Eternal Life!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불로장생 정도가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저희'를 '우리'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 생을 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만큼 복음 중의 복음이 또 어디에 있겠 습니까? 이렇게 놀라운 복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인데도 그 분위기는 사뭇 충격적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수전절을 맞아 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수전절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는 명절입니다. 우리가 이 명절의 유래를 알려면 예수님 당시로부터 17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 당시 시리아 왕이 었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8만 여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다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제사지내던 그 제단에다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일부러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모욕하려 했던 것입니다. 유대나라에 대한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책을 집에다 숨겨 놓고 있다거나 아들이 태어났을 때 할례를 준 사실이 발각이 되면 그들을 여차 없이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한 5,6년을 이와 같은 학정 밑에서 신음하던 유대나라 사람들은 드디어 분노가 폭발하여 마카비우스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총궐기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전쟁에서 유대나라 사람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1년에 한 번씩 8일 동안 한 절기를 지켰는데 그것이 바로 이 수전절이라는 명절입니다. 이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와 있던 유대인들은 성전 마당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들은 예수님에게 언제까지 우리를 헷갈리 게 만들거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당신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해라. 왜 우리로 하 여금 헷갈리게 하느냐?"하고 대든 것입니다(24절).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내가 그러하다고 이미 분명히 말했노라"(25절). 그렇습니다. 주 님은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부터 10장까지 넘어오면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다 이야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행동을 통해서나 이적기사를 통해서도 자 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심을 증명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헷갈려 하는 것은 그러한 증거들을 보고도 믿지 않은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요? 안 믿는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이 분명함에도 그들은 "왜 말을 애매하게 하느냐? 왜 확실하게 메시야라고 말하지 않느냐?"라며 모든 책임을 예수님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근성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안 믿는 사 람들은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믿을만한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안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안 믿는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에게 있고, 성경에 있고, 교회에 있고 또 기독교에 있다고 그들은 탓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와 같이 완강하게 믿기를 거부할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 는도다." 정말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왜냐하 면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된 것은 상당한 기간 동안 준비된 프로 그램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컴퓨터를 다루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윈도우즈 시스템이 되어서 문서작성을 하고 싶으면 워드 프로그램을 띄우고, 전자 우편을(E-mail) 보내고 싶으면 전자 우편 프로그램을 띄우고, 인터넷을 하고 싶으면 인터넷 프로그램을 띄우고, 노래를 하고 싶으면 노래방 프로그램을 띄우고, 게임을 하고 싶으면 게임을 띄우지 않습니까? 우리가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만능상자처럼 쓸 수 있는 것은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우리가 모르는 엄청난 프로그램들이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밤샘을 해 가며, 코피를 흘려 가며 연구하여 만들어낸 프로그램들이 깔려있기 때문에 마우스만 살짝 누르기만 해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작동이 되는 것입니 다. 오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으셨는지 모릅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을 보면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아시고 자기 것 으로 선택해 주시고, 때가 되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으 셨다가 우리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프로그램이 하나 하나 준비되어서 그 프로그램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으로 선택받았기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죽을 때까지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안 믿는 유대인들을 보고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적인 이야기입니까? 저는 우리 가운데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낙인 찍혀 버리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서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생명'과 '영생', 이 두 단어를 별로 구분 하지 않고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진정한 생명은 영원히 사는 생명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 생명은 곧 영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 절을 보십시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 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렇습니다. 아침에 잠시 생겼다가 햇살과 더불어 소멸도어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이 우리 육신의 생명입니다. 장차 하늘에서 누릴 영생에 비하면 생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이 라는 말을 영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십니다.
성경에는 '영원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있는 말이 세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하 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그의 나라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셋째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 곧 '영원한 생 명'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나지도 않으며, 병들지도 않으며, 늙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영원하고 자존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생을 얻은 자들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그 곁에 있을 우 리도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지도, 죽지도 않는 알파와 오메가의 생 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곁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우리도 알파와 오메가의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것만큼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에게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잠깐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저와 같이 어느 정도 인생을 사신 분들은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습니까? "이리 사나 저리 사나 한 세상이다." 저를 염세주의자라고 보지는 마십시오. 솔직히 껍질을 벗겨놓고 보면 인생은 별 것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성실하게 살다 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기 위해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쓰임 받다가 가면 됩니다. 이 세상 생명에 연연해서 너무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주님이 주시는 영생에 비하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 니다. 그러므로 안 믿는 세상 사람들처럼 너무 오래 살겠다고 그렇게 추하게 놀지 마십시오.
<뉴스위크>지가 반달 전에 미국 성인 남녀 752명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보니까 참 흥미롭습니다. 21세기가 불과 몇 년 후면 성큼 다가오지 않습니까? 21세기에는 우리 인체에 있는 모든 기관을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부품이 잘못되면 교체하듯이 우리 인체에 있는 기관들을 교체하면서 살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 다. 눈 동공에 문제가 생겨서 말썽을 피우면 그것을 뽑아버리고 감쪽같이 다른 것 으로 바꿔 끼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심장을 갈아 끼울 수도 있고, 허파를 떼었다 붙였다 마음대로 할 수도 있고, 다리가 보기 싫으면 각선미가 뛰어난 매력적인 다리로 바꾸어 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노후되어 마음에 안드는 기관 을 새것으로 바꾸어 가면서 장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멋진 일 입니까? 그러나 앞으로 그런 시대가 올 경우 인체 기관을 교체해가면서 오래 살고 싶으냐는 전화설문에 대해 10명중 4명 조금 더 되는 분들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저 우리가 누리는 지금 이 수명대로 살다가 가고 싶어요. 더 살고 싶지 않아요." 뭔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겠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경고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 든 영화를 다 누리고 온 천하를 통일하고 모든 권세를 다 누렸다고 할 지라도 나중 에 목숨이 떠나면 그가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나 누리고 있던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인생이 아무리 호의호식하고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며 모든 욕구를 다 충족하며 오래 산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놓쳐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 그 말입니다.
샤를마뉴라고 하는 황제를 아십니까? 주후 8세기 경 서부 유럽 기독교 국가를 전부 묶어 통일 국가를 이룬, 역사에 굉장한 발자취를 남긴 황제입니다. 이 황제의 묘지는 약 200여 년 전에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발굴에 참여했던 일꾼들은 황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황제는 황제의 의복을 걸치고 손에는 황제의 홀을 쥐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에 성경을 펼쳐 놓은 채 손가락으로 성경 구절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 구절은 다름 아닌 마가복음 8장 36절이 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그는 천하를 통일한 황제요, 모든 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영광을 누리고 수백 년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놓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연세가 50에 가까워지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한 50년 동안 즐기고 만족하고 기뻐하였던 일들을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50년 인생에 여러분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희미한 추억입니까? 아무리 날마다 일기를 조목조목 써 놓았다 해도 지금 들쳐본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나가고 나면 다 끝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지나 간 영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내일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부모님 슬하에서 한 30년을 고생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면서 정말 행복하게 자란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다가 40,50대 들어서 생각지도 않았던 고생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그야말로 한 숨이 떠날 날이 단 하루도 없을 정도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한 번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부모 님 밑에서 한 30년 동안 호강하면서 자라며 행복을 누린 것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때를 돌이켜 본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복했던 과거의 30 년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다 살고 나서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이것만큼 후회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은 그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수 백년을 살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면 지나간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영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영생을 값으로 따질 수 있습니까? 값으로 따지지 못합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 님에게 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보시니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 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나를 좇으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값이 너무 비싸다고 느낀 것입니다. 영생을 자기 재산을 다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슬픔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값으로 매길 수 있습니까? 가격표를 붙일 수 있습니까? 만약 가격표를 붙여서 우리에게 사라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영생은 너무 고귀하고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값으로 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서는 우리가 믿기만 하면 영생을 공짜로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공짜라서 그런지, 아니면 구름 잡는 소리 같이 들려서 그런지, 아니면 세상에 살날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영생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못 미더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 믿어 지지 않아 씩 웃으면서 적당히 받아넘기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서 씩 웃고 적당히 받아넘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조금씩 드러나는 한보 사건의 진상을 접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치를 떨고 있습니까? 배후세력이 누구냐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입니다만 현 정권에 그 책임 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에게 국민들이 세금으로 낸 그 막대한 돈을 맡겨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그 사람은 기업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변화를 외치는 현 정권은 그런 사람에게 돈을 안겨주며 기업을 맡겼습니다. 007 가방에 세탁한 돈을 넣어 다니면서 천만 원을 줘도 말을 안 들으면 1억을 가져다주고, 1억을 주어 도 안되면 2억을 가져다 먹이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이런 비양심적인 인간을 정부가 앞세워서 기업을 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현 정권이 이 일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며칠 전 신문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노동자들의 플래카드에 이런 말이 적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5조원을 만드는 방법. 150만원 월급자가 27만년 을 저축해야만 5조원을 만들 수 있다." 이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정치인들은 하나 같이 "나는 모른다," "그 사람 만난 일도 없다." 하고 시치미를 뚝 뗀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몇 년 전에 수서 사건이 터졌을 때도 "나는 정 아무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발뺌하더니 나중에 몇 억씩 얻어먹었다는 것이 들통나서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들 어갔지 않습니까? 그러니 누가 정치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예수님의 말씀도 정치인들의 말처럼 그렇게 듣고 흘리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분 명히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 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일이 지나 간 과거보다 더 풍성하고 영광스런 내일임을 날마다 확인하며 사십시다.
그래야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도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마저 없다면 정말 이 세상을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안 믿으시는 분이 계시면 꼭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확신을 가지라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영생의 확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분들 가운데 영생을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겉으로 봐서는 분명히 믿는 사람입니다. 믿으니까 영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영생을 받았나 안 받았나? 정말 내가 영생할 수 있을까?' 하고 왔다 갔다 하니까 오늘 주신 이런 영광스런 복음의 말씀을 보고도 마음에 감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확신이 부족하다고 해서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어도 확신이 부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루터나 칼빈 같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 문제 중의 하나를 믿음과 의심의 균형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과 의심이 얼마나 균형을 잘 유지하느냐 가 기독교의 영성의 중요한 과제라고 본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가 의심이 없는 완전한 믿음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1퍼센트라도 의심이 있을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고 확인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약속에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루터의 말처럼 신자가 된 다는 것은 어두움과 의심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는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감각의 세 계로부터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다시 말해 하나님 이 계시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은 우리의 경험을 완전히 떠나서 공중에 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공중 에 매달린 사람이 떨어지지 아니할까 불안해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믿으면서도 의심이 일어납니까?
이것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배를 놓고 비유했습니다. 여기 배가 한 척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필 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배가 정말 있으니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를 탈것이 냐 안탈 것이냐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가 영생을 주신다는 말씀도 믿습니다만 그 영생이 내게 있느냐 없느냐 하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기도 하고 의 심에 밀려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의심을 처리하는 길은 의지를 동원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의 지적인 결단입니다. '자, 저 배가 가다가 폭풍을 만나면 조금 위험할 것 같지만 에 이 모르겠다 타자'하고 올라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하 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쉽게 마음이 가지 않습니까? 이럴 때는 의지를 가지고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했으니 믿자. 믿고 보자.' 하고 그 말씀에 올라타 게 되면 모든 의심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지적인 결단이 부족해서 자꾸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의심은 믿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나 주님의 말씀을 의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만큼 믿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예수님 자신의 인격을 불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 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내가!" 여기서 '내가'란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은 곧 하나 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격을 걸고, 자기 이름을 걸고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절대로 멸망치 아니할 것이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영생 얻는 자를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아무도 내 손에서 영생 얻는 너희를 빼 앗아 갈 자가 없느니라. 내가 너희의 안전을 전적으로 보장한다.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보장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걸고 확실하게 말씀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흔들립니까? 의심이 왔다 갔다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절대로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 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기처럼 맑았다 흐렸다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약속은 하늘 의 태양과 같아서 절대로 일기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주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 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 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슨 일을 만나거나 어떤 형편에 처하든 지 예수님이 주신 영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생명이 떠나는 것을 "잔다"고 말씀하시지 "죽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의 생 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살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11:25). 이것 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면 거지 나사로와 같이 고된 인생을 살다가 가도 그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은 세 상에서 어떤 삶을 살다가 왔든지 그것을 놓고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삶 을 살다 와도 그것은 실패작이요 후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라이언 화이트라고 하는 18세 되는 소년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습니 다. 이 소년이 열 세살 되던 해에 혈루병으로 수술을 받을 때 수혈을 하게 되었는데 수혈했던 피에 에이즈 균이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이 소년은 그 길로 에이즈에 덜컥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5년 동안 병상에서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의 모든 텔레비전 방송과 언론들이 그 소년의 여러 가지 형편을 계속 보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성연애자들만 에이즈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어도 저렇게 에이즈에 걸릴 수 있구나 하는 경각심을 미국인들에게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죄 없이 5년 동안을 투병하며 죽어 가는 모습을 온 국민이 동정하면서 지켜보았습니다. 라이언 화이트가 누워있는 동안 그의 병상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찾아왔습니다. 레이건 대통령도 특사를 보내서 이 소년을 위로했고, 마이클 잭슨도 찾아와서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5년의 투병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동안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서 "라이온아, 나는 무척 가슴이 아프고 슬프단다. 네가 이렇게 빨리 가야 한다니..." 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아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빠. 아빠는 나에게 18년 동안 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주셨어요. 그것만이 아니예요. 아빠는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셨어요. 저는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얻을 수 있게 되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이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가장 값비싼, 가장 놀라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거예요. 아 빠,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 않아요? 저는 조금 일찍 가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슬퍼 하지 마세요. 저는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요. 아빠가 말하는 천국에 틀림없이 들 어갈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생명, 곧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인생의 성패를 좌우 합니다. 이 영생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헤피 엔드로 끝나게 하느냐 아니면 정말 비극적인 종말로 끝나게 하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기만 하면 값없이 영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그 영생이 내 것으로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들려주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나에 게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진 것을 평생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서 든지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나는 영원히 산다.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꼭 명심하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찬송하면서 삽시다. 어떤 때는 인생의 파고가 높아서 그 파도에 휩쓸려 어디로 밀려가는지도 모를 만큼 암담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영생이 있다, 나에게는 하늘 나라가 기다린다, 하나님의 생명이 나에게 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 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에 나와 계신 분이 계시다면 꼭 믿으시 기 바랍니다. 믿으면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습니다. 또 믿으면서 흔들리는 분들이 계시다면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의심을 쫓아버리고 하나 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그 말씀에 생명을 걸고 이 세상을 사는 확신 있는 주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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