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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구원의 계획 2011. 6. 5. 22:25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마태 복음5:13-16 )

                                                                                                - 하원식 목사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 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소금은 맛을 내고 빛은 주위를 밝게 비추는 능력이 있다. 소금이 맛을 낸다고 하는 것, 빛이 어둠을 밝힌다고 하는 것은 그 존재가치가 분명히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은 요즘의 세상을 `썩을 대로 썩어서 더 이상 썩을 데가 없는 세상' 이라느니,` 살맛이 안 나는 세상' 이라는 표현들을 한다.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 수훈 가운데 하나다. 특별히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사명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가장 많이 들어 본 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바로 “성도는 소금과 빛”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도가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죄와 그 결과로 인하여 신음하는 세상이다. 즉 하나님 없는 인간적인 세상이요, 성령 없는 육체적인 세상이요, 인간적인 욕망으로 덧칠된 세상이요, 그 결과 본질적으로 어둡고 부패한 세상을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이 이와 같이 죄악 가운데 썩어가고, 빛 없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것을 그대로 두실 수 없어, 성도로 하여금 ‘소금이 되어 부패를 막으라’하시며, ‘빛이 되어 어두워 가는 것을 막으라’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역할과 기능에 대한 주님의 명령의 말씀이다. 즉 주님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소금답게, 그리고 얼마나 빛답게 사느냐’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묻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할까요? 또한 빛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할까요?

 

1.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천국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였다. 소금인 나를 세상이 요구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여러분! 세상의 소금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고 있지 않다. “신자는 이미 소금이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서 수도 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너희는 세상 속에 들어가서 “소금 역할”을 감당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소금은 원래 바다에서 나는 광물이다. 바닷물 한 컵에 보통 소금이 50그램 정도 들어 있다. 이것이 정제가 되어서 세상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우리 예수님도 하늘 보좌를 비워 두신 채 죄악 세상에 내려오셨다. 물론 세상과 연합을 한다면 그것은 타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건 안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소금의 용도는 매우 다양하다. 아마도 이 세상 광물 중에 소금처럼 다용도로 쓰이는 자원도 없을 것이다. 성경(구약)에도 보면, 소금은 음식 맛을 내는데 뿐만 아니라(욥6:6), 모든 예물 속에(레2:!3), 또 의약품 등으로(출30:35) 쓰였다. 이와 같이 소금은 화학적, 물리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쓰이는 자원이다.

 

소금이 맛을 내는 “식용”으로 쓰이는 경우는 전체 생산량의 1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공업용으로 쓰인다. 그래서 그 용도가 무려 14,000여 가지에 달하고 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공산품이 거의 없을 정도다. 무슨 말씀인가?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의 여러 분야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살라고 하는 말씀이다(고전12:4-11, 10:19-22). 오늘 말씀은 주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사회, 경제, 정치, 문화, 그리고 예술 등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라고 하는 말씀이다.  소금이 하는 대표적인 역할이 몇 가지가 있다.

 

(1) 제일 먼저, 소금은 맛을 내는 일을 한다.

소금은 가장 크고, 분명한 특성은 음식에 맛을 내는 것이다. 아무리 귀한 음식이라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게 되면 그 음식은 제 맛을 낼 수가 없다. 짠맛이 빠지게 되면 음식이 음식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소금이 지니고 있는 짠맛은 모든 맛의 기본이다. 이 짠맛이 들어가야만 음식이 음식 노릇을 할 수 있다. 짠맛이 음식물 속에 들어가서 매운 맛, 고소한 맛, 새콤한 맛 등 여러 맛들과 어울리게 될 때에 비로소 독특한 새 맛을 창조해 낼 수가 있다. 무슨 말씀인가?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게 되면 어떻게 세상이 세상다운 맛을 낼 수 있겠느냐는 말씀 아닌가?

 

(2) 그 다음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생선을 소금에 절여서 보관함으로써 썩는 것을 막았었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김치, 젓갈류 등을 소금에 절여 오래도록 두고 먹음으로써 슬기를 발휘하였다. 오늘날 TV 뉴스와 신문의 사회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건들은 점점 더 썩어가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사회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방부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3) 시퍼렇게 살아 있는 푸성귀를 수그러들게 만드는 일이다.

배추나 무 잎사귀에다 소금을 뿌려서 놔두게 되면 금방 풀이 죽는다. 시들시들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배추나 무 잎사귀를 소금에 절이는 것을 가리켜서, “배추 숨을 죽인다, 무 잎사귀 숨을 죽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쨌든, 숨을 아주 끊어 놓는 것은 아니지만, 맥을 못 추게 만들어 놓고 만다.

 

(4) 짠물은 사람들에게 갈증을 일으킨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사모하게 만들어야 한다. 말씀에 갈증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저들로 복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야 한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저들을 인도해야 한다.

 

(5) 소금은 살균하고 소독하는 일을 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염분이 없이는 잘 장성하지 못한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내륙에 있는 나무나 곡물은 바닷바람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에 충실치를 못하다. 바닷바람이 미치는 곳에 사는 동물이 병이 적고, 바닷바람이 미치는 곳에 사는 곡물이 병충해가 적다. 소금은 쏘는 성질이 있고, 쑤시고 들어가는 성질이 있다. 짠물이 상처 부위에 닿게 되면 쏘고, 쑤시고, 아리고, 쓰리고, 얼얼하다. 그런데, 이것이 동물에게 유익을 주고, 식물에게 유익을 주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썩어 냄새나는 이 세상이 소금인 “나”로 인해 소독되고 살균되어져야 한다.

 

(6) 소금은 정결한 것을 상징한다.

구약 성경 레위기 2장 13절에서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소금을 치라고 했고, "네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소금을 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7) 소금은 온전히 녹아질 때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소금은 조그만 양을 가지고도 큰 것을 변화시킨다. 큰 가마솥에 물은 한 가득 부어야 하지만 소금은 몇 숟가락만 넣어도 맛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다수일 필요는 없다. 다만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소수일지라도 제 역할을 하고 제 맛을 내면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소금이 소금으로서 맛을 내야 할 곳은 교회가 아니다. 세상이다.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녹아져야 한다. 소금은 녹으면서 나 지금부터 녹는다면 소리 지르지 않는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소금을 사용해 왔다. 주로 음식의 간을 맞추는 조미료였지요. 뿐만 아니라 소금은 음식이 상하지 않고 썩지 않도록 하면서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부제로도 사용해 왔다. 또 이 소금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집에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 어귀에 소금을 뿌렸다. 지금도 대문이나 가게 입구에 소금을 뿌리는 분들이 있고, 재수 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그 사람으로 인해 부정탈까봐 소금을 뿌린다. 그리고 이 소금은 물물교환 시대에 화폐의 역할을 했고, 또한 통치자나 사원에 바치는 공물로도 사용되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야 단맛, 신맛, 매운 맛 등을 내기 위해 이러저러한 조미료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맛있는 음식”이란 적절한 소금간이 된 음식이었다. 양념, 즉 조미료가 거의 없던 옛날에는 소금이 맛을 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자 중요한 것이었지요. 사실 지금도 소금간이 안 된 음식은 정말 맛이 없지 않은가? 따라서 성도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이 세상과 사람들의 삶이 싱거운 음식과 같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예수님과 복음이 없는 세상은 소금기 없는 음식처럼 싱겁고 허무하기 짝이 없다.

 

살맛 나지 않는 세상과 인생을 맛있게 만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라는 뜻으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오직 성도 여러분들만이 이 세상과 인생의 참 의미를 줄 수 있다. 인생이 제자리를 찾게 만들고,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만족스럽게 해 줄 수 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 오염되고 점점 더 부패해져 가고 있다. 일반 사람들도 이것을 염려하여 과학과 교육을 통해, 혹 정치의 힘이나 경제력으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고 노력을 해 왔다. 그러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세상의 부패를 방지할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들이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5%의 공산당원만 있으면 한 나라를 공산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감동된 소수의 성도들이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을 신선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부패를 막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한다. 이 땅의 부정, 음란, 그리고 타락의 요소들을 찾아내서 그것을 막는 일에 힘써야 한다.

 

(8) 소금은 굳은 음식을 부드럽게 만든다.

딱딱하거나 질긴 음식에 소금을 치면 그것이 부드러워지고 연해진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묻지마” 살인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이런 세상에서 성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고 했다. 이기적이고 각박하고 거칠어진 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이고, 그들을 서로 화평하게 만드는 역할을 성도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세상을 화평케 하는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하고 회복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도는 살맛을 잃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을 주는 조미료가 되어야 하고, 썩어 가는 세상을 신선하게 만드는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 하며, 이기적이고 거칠어져 가는 이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소금인 성도가 그 맛을 잃을 수 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경고다.

 

2. 세상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

<본문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다. 과학자들은 아직도 빛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나 정의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빛은 파도의 파장처럼 파동 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1)전자파 (2)파장 (3)주파수 (4)가시광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 과학자들은 빛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나 정의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성도는 주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반사체일 뿐이다. 마치 달이 햇빛을 받아야만 빛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서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소유한 빛이 바로 이런 빛이다. 빛이 하는 일이 참 많이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빛은 어두움을 밝혀 준다. 빛은 길을 안내해 준다. 빛은 따뜻하게 해주고 빛은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해준다.

 

(1) 빛의 제일 가는 사명은 어두움을 밝히는 데 있다.

빛과 어두움은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다. 빛이 들어오면, 반드시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다. <엡 6:12>에 마귀 사단을 가리켜서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고 하였다. 성도가 이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상처로 얼룩진 가슴, 정욕으로 어두워진 마음, 미움으로, 싸움으로, 증오로 가득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 생명의 밝은 빛을 비춰줘야 한다.

 

(2) 빛은 사실 그대로를 드러낸다.

빛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감출 수가 없다. 아침에 창살 틈으로 스며드는 빛살 앞에는 방안의 먼지들까지 다 보이게 마련이다. 어두울 때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빛이 비춰지게 되면 모두가 다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어두운 곳에서는 물체의 색깔도 크기도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빛이 밝게 비취는 곳에서는 모든 진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3) 빛은 길을 안내해 준다.

등대는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해변을 항해하는 배들로 하여금 암초에 부딪히지 않게 해준다. 공항 활주로의 조명등은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게 해준다. 가로등은 밤의 혼란을 막아 준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빛으로서의 사명이 있다.

 

(4) 빛은 따뜻하게 해주고, 빛은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해준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그 마음이 온유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빛은 초록을 자라게 하고, 곡식으로 결실을 하게 하고, 과일을 영글게 한다. 농부가 밭을 갈고 아무리 좋은 씨를 뿌리더라도 햇빛이 내려 쬐지 않게 되면 곡식이 성장도 결실도 할 수 없다. 햇볕이 곡식을 결실하게 하고, 과일을 영글게 하고, 밤알을 터지게 만드는 것이다. <엡5:9>에 ?성도가 맺어야 할 빛의 열매가 있는데, 그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말씀했다.

 

(5) 빛은 살균을 하기도 한다.

비온 뒤에 날씨가 다시 개게 되면 그 때는 눅눅해져 있는 이불과 옷들을 햇볕에 내다 말리는 것이 좋다. 그러고 나면 이불과 옷의 촉감이 무척 좋아지게 된다. 그것은 이불과 옷이 일광으로 소독이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6)거기에는 자기 희생이 따른다.

초가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자기 몸이 녹아내려야 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자기 희생이 따른다. 오늘날 병든 배우자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은가? 희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희생 안 해도 되는 곳, 무엇인 가를 얻을 수 있는 곳, 나에게 이익이 되는 곳을 찾아가려 한다. 그러나 등불은 달라야 한다. 등불은 어둡고 그늘진 곳에 있어야 한다.

 

성도가 세상에서 빛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도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세상은 진리의 빛을 잃고 방황하며 고통 하는 흑암의 한 가운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둠에 빠진 세상에 빛을 비추셨다. 성경에 보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 있는데, 그 분이 곧 “예수그리스도”라고 말씀하였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했다. 밤을 낮 되게 하기 위해서 친히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했다(요8:12).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 인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본분을 가르치는 빛, 구원과 영생의 길을 보고 그 길로 가게 하는 빛, 진정한 행복의 길을 보이셨다. 이제 그 아들로 빛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성도들을 향해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빛의 역할은 어두움과 어두움에 속한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캄캄한 방에 불이 켜지면 방안이 환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이 가는 곳, 성도들이 있는 곳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여러분이 가는 곳은 마치 어둡던 방에 불이 켜지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이 빛 된 삶이고 무엇이 어둠의 삶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정욕과 쾌락을 쫓아 사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말해주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왜 옳은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 여러분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어둠과 악과 편법이 그대로 있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빛 된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다.

 

또한 빛은 어두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이 세상이 이렇게 어둡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세상과 사람들의 삶을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요, 이 세상 사람들만 어두운 것이 아니고 로마서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다(8장). 그래서 그 모든 피조물들이 한 가지로 부르짖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죄에서 돌아서서 영광의 주님을 향할 때 그것이 사람들만의 기쁨이 아니라 피조 세계의 기쁨도 된다는 것이다.

 

빛의 또 다른 역할은 어둠에서 벗어나 바른 길, 옳은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성도는 새로운 목표와 비전을 향해 그리로 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된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여러분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을 바로 그 진리의 길로 이끄는 빛으로 살라 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말로 덮어두지 않고, 받침대 위에 놓아 집 안 모든 사람을 비취게 한다"고 말씀하셨다(15). 사람들이 등불을 켜는 것은 집 안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래서 가능하면 등불 받침대, 혹은 등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선반 위에 등불을 두어서 그 위치를 높게 한다.

 

그리고 등불이 필요 없어 그것을 끌 때는 ?말?이라는 것으로 등불을 덮어서 껐다. 오늘 본문이 이 ?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등불은 켜서 밝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꺼져 있는 상태로 무슨 악세사리 마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어둡고, 그 어두운 가운데 사람들이 있는 이상, 이 세상의 등불인 성도 여러분들도 항상 불을 밝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항상 이 세상을 환하게 밝게 비추기를 원하신다. 성도들이 숨겨져 있거나, 가려져 있거나, 막혀 있어, 등불 기능을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항상,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여 등불을 켜서 밝히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옛날 어느 서당의 훈장님이 영리하고 재주 있는 아이 셋을 뽑아서 돈을 두 푼씩 나누어주면서 ?이 서당방 안에 가득히 찰 물건을 사 가지고 오느라?고 했다. 세 아이들은 나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왔다. 첫 번째 아이에게 "너는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니까, 아이는 솜뭉치하고 불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어떻게 이 방 안을 가득 채우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 아이는 솜뭉치에다가 불을 붙였다. 솜뭉치가 타면서 거기서 나온 연기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연기가 방안에 가득 차니까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매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눈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해댔다. 이것을 지켜본 선생님은 "돈 두 푼을 가지고 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을 잘 사왔다. 그런데 너는 자라서 의식(衣食)은 족하게 살겠다마는 사람을 괴롭혀서 원성을 많이 듣게 될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에 두 번째 아이에게 "너는 무엇을 사 가지고 왔느냐?"하고 선생님이 물으니까, 그 아이는 향(香)하고 불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어떻게 방안을 채우겠느냐?"고 하니까, 향에다 불을 붙이니 그 향이 타면서 그 향내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향내를 맡으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님은 이것을 보고 "돈 두 푼을 가지고 방안을 가득 채우는 향을 사왔으니 참 잘했다. 그런데 너는 장차 결백하게 살겠구나. 벼슬 같은 것도 안 할 것이고 ? 그래서 의식(衣食)이 곤란할 것이다. 네 일생은 저 향기처럼 향기롭기만 할 것이다"하고 말했다.

 

다음에 셋째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사왔느냐?” 그 아이는 초와 불을 내놨다. 그리고는 초에 불을 붙였고, 그 불빛은 온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이것을 본 훈장 님은 “돈 두 푼을 가지고 방안에 온통 환하게 하는 초를 사왔으니 잘 했구나! 너는 자라서 온 백성을 구할 사람이 되겠구나?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경기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전설화다. 이 이야기처럼 성도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성도가 세상을 비추는 빛은 다름 아닌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한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행실“이란 어떤 특별한 행동이나, 잘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도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평범하게 드러나는 행동이나 활동을 말한다. 즉 여러분의 일상생활이 사람들의 기분을 환하게 만들고, 세상을 밝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눈빛, 여러분의 말 한 마디, 여러분의 작고 사소한 행동이 곧 빛이 된다는 것이다.

 

3. 맛을 잃은 소금, 빛을 잃은 등불

우리 한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배타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유태인 못지 않게 세계적인 적응력을 가지고 어디를 가든지 뿌리를 내리고 성공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중국 상인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밀려 나간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나라에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외래종교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기독교가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세계 선교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부흥과 성장을 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초대의 교회가 지금의 교회보다 세상과 더 잘 소통했고 세상의 공감과 나아가서 감동을 얻어내는데 유능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우리 한국 교회의 교인 수는 감소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 이유가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세상과의 불통이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세상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다. 세상의 공감을 얻어내고 더 나아가 세상의 감동을 얻어  내겠다는 의식과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 저는 그것이 영적 교만함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면서 영적인 헛배가 불러서 세상을 우습게 여기고 세상에 대하여 무심해졌다. 그것이 세상과의 불통으로 이어졌고 그 세상과의 불통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쇠퇴의 원인이 된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기업이다. 기업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와 원인은 세상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고객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소통에서 머물지 않고 고객의 공감과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객들의 감동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저들의 케치 프레이즈는 고객 감동이다. 저들이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라는 케치 프레이즈를 내 걸고 정말 생명을 건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것이 성공하여 오늘날 기업의 발전을 이루어내게 된 것이다. 기업이 고객의 감동을 얻어내기 위하여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은 서비스다. 서비스 센터의 운영이다.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기업의 에프터 서비스 수준은 세계적이다. 몇 년 전의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우리 한국 초대교회는 세상에 대한 서비스가 탁월했던 교회였다. 그것을 우리 교회는 섬김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초대 우리 한국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것을 교회의 목적으로 삼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우리 초대의 한국교회는 자기 예배당부터 세운 교회가 아니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학교와 병원을 먼저 세운 교회였다, 그리고 그 학교와 병원을 통하여 사람들은 섬긴 교회였다. 나라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서 경제적으로 속국 화 되었을 때 나라의 빚을 갚자고 나선 곳이 교회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국채보상 운동을 일으킨 것이 크리스천들이었다. 남자들은 금연운동을 벌였다. 담배를 끊고 담배 값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 감동을 받으신 고종 황제께서 친히 담배를 끊으시고 금일봉을 우리 한국교회에 보내신 것은 유명한 일이었다.

 

할머니들은 탈환 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탈환이란 가락지를 뽑자는 뜻이었다. “나라가 빚을 졌는데 가락지는 끼고 다녀서 무엇하랴?”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다. IMF 때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났던 금모으기 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운동이었다. 할머니들은 금을 모으면서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 금을 모아 학교를 세워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자. 금을 모아 민족 자본을 형성하여 민족의 기업을 키우자. 교회의 이와 같은 운동은 세상을 감동시켰다. 이와 같은 감동이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가져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를 망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경쟁심에서부터 나온 이기적 욕심이다. 다른 교회와 경쟁하면서부터 우리 한국교회의 목표와 목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가 되고 말았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교회가 그와 같은 욕심에 사로잡히면서 교회는 소중한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상을 섬기는 것을 잊게 되었다.

 

그것을 잊게 되면서부터 세상과의 단절이 일어나게 되었고, 세상을 섬길 줄 모르고 자신의 부흥과 성장에만 집착하는 이기적인 한국 교회를 세상은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멀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멸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안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세상은 지금 교회의 사명을 망각하고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자기 교회만 생각하는 우리 한국교회를 경멸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보면 소금과 빛의 사명을 망각하거나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소금의 사명을 받았지만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말았다. 빛의 사명을 받았지만 ‘빛을 잃은 등불’이 되고 말았다.

 

이번 한기총의 ‘금권타락선거’는 성직자들의 욕심이 어디까지이며, 연합기관이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것인가? 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하겠다. ‘금권타락선거’의 대표로 상징된 한기총의 문제가 한국교회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한심하고 기가 막힌다. 이번 사건은 영혼이 심하게 타락한 자들이 세속과 다름없는 물욕과 명예욕을 위하여 정치권의 못된 관행을 흉내내 돈 선거를 자행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너무 오래 세월 그렇게 습관적으로 해오다 보니 그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하다. 한기총에서 세상정치의 방법을 가지고 들어오는 맘몬(돈)우상의 영향력에 물든 탓이요, 한국교회가 ‘돈 이면 다 된다’는 맘몬을 우상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싶다.

 

이미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금권타락선거에 관련된 모든 인사들은 하루 빨리 모든 직을 버리고 회개하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호소한다. 교계 지도자는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돈주고 산 자리라면 부끄러워야 한다.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하는 교계지도자이나 목회자들이 이러한 추태를 반복하는 것만큼 먼저 부끄러운 모습에 대한 회개가 앞서야 한다. 정치를 하는 당사자보다 주변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정치 꾼들이 더 문제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것을 방지하지 못하고 아무 말하지 못하는 방관적 자리에 있는 것이 더 문제이다.

 

 

① 맛을 잃은 소금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소금이 지금 우리와 다르게 바위로 된 ‘암염’(巖鹽)이다. 염분이 적고 흙이나 불순물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순수한 소금으로 정제한 후에는 흑이나 불순물을 갖다 버리게 된다. 그때 경작지에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독한 성분이 있어 밭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거리에 갖다 버리게 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에 빗대서 사명을 망각한 크리스천을 책망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와 크리스천의 모습이 바로 맛을 잃어 버려짐으로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기는커녕 한데 어울려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요, 행위가 따르지 않는 입술만의 신앙을 의미한다. 맛 잃은 소금은 아무런 쓸데가 없다. 쓸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세상에 꼭 필요한 소금인가? 아니면 맛을 잃어 무시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소금이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소금으로서의 그 맛이다.

 

② 빛을 잃은 등불 14절~15절.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 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크리스천은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불과 같은 존재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동네’는 교회를 가리킨다. 동네가 산 위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등불을 말(그릇, 됫박) 속에다 숨겨두지 않고 등경(램프 스탠드) 위에 둔다는 것도 마찬가지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사람들이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무관심한 것 같아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뒤에서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주시합니다. 좋게 보면 그만큼 기대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죄를 짓고 살지언정 크리스천들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더욱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빛을 잃으면 세상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심각하다. 세상이 변화될 기회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와 크리스천의 모습은 빛을 잃은 등불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되는데, 그럴 능력을 상실한 채 세상의 어둠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수년 전 이름을 대면 알만한 모 대형교회 목사가 건축법을 어긴 것과 재정 비리, 개인 비리 등으로 인해 법정에 섰을 때의 일이다. 그때 판사가 유죄 선고를 하면서 판결문에 쓴 내용은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당신처럼, 그리고 당신의 교회처럼 이렇게 한다면 도대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한 이유가 무엇이요?” 하면서 따끔하게 훈계한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될 사명을 가진 자들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심지어 훈계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희생이다. 소금은 그것이 뿌려진 곳에서 녹아지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다. 그리고 빛을 내기 위해서는 연료가 소모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성도 여러분을 향해 ‘소금과 빛으로 살라’ 하신 것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희생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자신을 죽여야 만 여러분을 통하여 주님과 말씀이 살아나고, 또 여러분이 자신을 죽여야만 주님과 진리의 말씀이 세상과 사람들 속에 깊이 배어들 수 있으며 이 세상의 부패가 방지된다. 세상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여러분을 죽이십시오! 세상의 법칙, 이 세상 사람들의 법칙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반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여러분이 죽어야 이 세상이 살맛 나고, 밝고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섭취하는 소금은 염소와 나트륨의 화합물인데, 분리된 이 두 물질은 모두 극약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따로 떨어져 독약인 것이 하나로 합쳐져 없어서는 안될 물질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생각의 소재를 제공해 준다. 이런 저런 몇 가지 이야기만 보더라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깊은 뜻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음식의 목적이, 사람이 그것을 잘 먹어서 양양 분을 공급받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깨닫고 인생살이에 맛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는데 그 존재의미가 있겠다. 하지만 소금이 그 짠맛을  잃었을 때 존재가치가 없듯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도덕적인 부패를 방지하는 역활을 못하고  인생에 있어서' 삶의 맛' 을 주지 못할 때 그의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금은 또한 방부제의 역활을 하면서 동시에 정화의 의미를 갖는다.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셨다. ‘집안의 소금이다. 부뚜막의 소금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을 염두에 두셨는데 세상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교회 밖의 삶의 현장을 말한다. 세상은 우리가 숨쉬며 일하고 돈벌며 보람 있게 살아가는 곳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세상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이단들이 많이 있다. 직장 떠나고, 가족 떠나고, 집 떠나고 자기들끼리 집단 생활하는데 이것은 정상적이지 못한다.

 

염전에 쌓여 있는 소금, 전구공장에 쌓여 있는 전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주님도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치 못할 때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고 경고하신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욕 거리,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소금이 되기 원하면 이 세상의 부패한 곳에 가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빛이 되기 원한다면 이 세상의 어둡고 후미진 뒷골목,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그 어두운 곳에 가야 한다. 그럴 때만 진정한 소금으로서, 진정한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을 먼저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우리 하나님의 교회는 이 사회에, 이 세상에 이러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때문에 세상이 더욱 살맛 나고, 여러분들 때문에 이 세상이 더 밝아지게 되고, 여러분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살맛을 느끼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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