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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신앙이란

구원의 계획 2011. 6. 8. 23:28

종말론적 신앙이란?

                                      - 박 신 목사


"사랑하는 자녀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다섯 달만 연기된 종말

미국 패밀리라디오 운영자 해롤드 캠핑이 지구의 종말이 닥친다고 예언한 5월 21일이 아무 문제없이 자나갔습니다. 그러자 영적인 종말은 그날부터 시작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다 금년 10월 21일이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수정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적했다 고작 꺼내 놓은 변명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이 거짓 예언에 속아 자살한 자가 미국에서 2명이고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입은 자는 부지기수입니다. 패밀리라디오 측에선 경제적 피해는 가능한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현이 의심스러운데다, 그 정신적 영적 피해는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는 경고가 생각날 뿐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냥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미국에선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말리거나 깨우쳐주려 해도 한번 왜곡된 종말관에 빠지면 헤어나기 심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멀쩡한(?)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비성경적 종말관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잠시나마 미혹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한갓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럼에도 종말은 어떤 날이라도 될 수 있기에 혹시 진짜 그날에 종말이 오면 어쩌나싶어 관심을 갖거나, 마음에 각오라도 단단히 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대부분의 신자들은 종말론적 믿음을 그야말로 종말을 미리 대비하며 사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세상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생업에도  열정적으로 종사할 필요 없고, 자연히 재산 관리에는 무관심 내지 문외한이 되고, 매일이다시피 교회에 모여 성경과 기도에 전무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캠핑은 지난 겨우 지난 5/21에서야 영적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훨씬 전부터 그랬기에 정말 이 땅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죄는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인류가 번성함에 따라 그 죄는 확장 발전하여 다양 교묘 음흉 치사해졌지 그 반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도 모든 면에서 더 꼴이 아닙니다. 영적 종말은 실은 창조 당시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담의 배교를 묵과하지 않고 그 즉시 벌을 주되 종말론적 심판을 하셨습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인간들은 평생을 두고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있는 동안, 또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말로 종말까지 그 벌을 감수해야 한다면 최초의 벌이 바로 종말론적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은 죄의 본성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채 낙원에서 쫓겨났기에 그 후손들 사이에는 아무리 세대가 오래 지나도 온갖 죄악이 번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원흉인 사단도 함께 벌을 받았지만 완전한 멸망은 미뤄지고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들을 여전히 농간할 수 있도록 잠간의 유예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인간이 가는 곳, 하는 일마다 죄의 냄새가 무럭무럭 날 것입니다.

 

창조가 바로 종말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류의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또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인데, 그 일은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십자가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행하는 땅 끝까지, 살아가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다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이 다시 오시면 사단과 죄악에 대한 진짜 마지막 심판이 이뤄질 것입니다.

 

요컨대 인류의 역사는 종말을 향해 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원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되었음은 그 종말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에는 삼위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 시작과 끝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지 절대 사단이나 인간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든 심판하든 오직 그분의 영광만 드러날 뿐입니다. 물론 시작과 끝을 잇는 그 중간에도, 당연히 인간의 타락도 포함하여,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역사 연대표는 항상 인간에게만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창조와 종말이, 타락과 구원이 짝을 이루어 같은 항목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의 현장 속에선 단지 그 둘이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뜻은 그 둘의 완성을 사람들로 미리 보고 알게 해주려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둘의 완성이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진리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참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심판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이 동시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인간 역사에는 종말이 될 것이며, 하나님 시간표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의 이 세대에 지옥의 심판은 이미 내려졌고, 동시에 천국의 구원도 벌써 도래했지만 완성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단에 묶여서 심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와 하나님께 속해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 둘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정표 안에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구원과 심판이 이미 완벽하게 다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시공간 안에 제한 받는 인간에게 역사의 한 시점과 한 장소와 한 인물을 통해 그 둘의 완성을 모든 이가 보여 알도록 한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인간을 나누는 유일한 분기점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길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영원한 구원 안에 이미 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그 중에는 언젠가 십자가를 통과할 자도 분명 있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름)는 영원한 심판 안에 벌써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십자가를 통과해 버리면 더 이상 되돌아 갈 길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대속죽음은 영단번의 완전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제사를 지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 예수를 믿은 신자는 어떤 신분과 특권을 가진 것입니까? 한마디로 천국과 구원의 완성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일정표에는 완성되어 있지만 단지 인간이 실제로 체험하는 완성만 인간이 지각하는 시간표상의 미래 일로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인식하든 못하든 이미 종말을 맞았으며, 종말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심판의 완성과 지옥의 비참함을, 신자는 구원의 완성과 천국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주권 받고도 불법체류자 같은 신자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신자의 종말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지금부터 이미 하나님 자녀입니다. 장래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는 단지 인간의 시공간 안에 눈에 보이게는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종말 즉,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은 실현될지 안 될지 의심할 수 있는 성질이 절대 아니며, 아직 잘 모르기에 계속 공부하면서 알아가야 할 진리도 아니며,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불안하기에 단순히 소망하거나 기대하는 상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미국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영주권신청을 했는데 이민국에서 허락이 떨어졌다는 편지는 도착했는데 아직 영주권카드는 받지 못했고 한국여권에 스탬프가 찍혀지지 않은 상태일 뿐입니다. 신자란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의 영주권신청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허락한 편지와 영주권카드(성령님의 내주로)까지 날라 왔지만 그 입성만 잠시 미뤄진 것입니다. 영주권 승인 편지를 받은 후로는 영주권자 자격으로 모든 권리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듯이, 신자도 이 땅에서 천국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이란 단순히 종말을 대비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을 소유한 자로 종말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으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그 종말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또 그러도록 바로 천국으로 입성시키지 않고 이 땅에 아직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만큼 천국에 빨리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이미 천국 안에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말하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란 단지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갈 수 있다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종말에 "주와 같이 될 줄을 아는"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한이 누구입니까? 천국을 확실하게 보고 온 자입니다. 역사상 그만큼 천국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가 본 천국에는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분처럼 되어서 그분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는 자는 아직 그곳에 가지만 않았을 뿐 이미 그와 똑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정말 이 땅에서부터 종말 안에서 천국의 모든 신령한 복락을 미리 누리고 주위에 나눠주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신자의 능력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앎과 열망 속에서, 조금 단계를 낮추어 확신과 소망으로만 살아도 주님이 그런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니까 불신자보도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장래 완성될 구원에서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데" 어찌 지금 그와 같이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천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인데 어찌 깨끗하게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믿은 후의 신자에게 영원토록 내주하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몸이 들어붙은 샴쌍둥이와 같은 형상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는 앞에서 감히 더럽고 추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다시 같은 비유를 들자면 영주권 승인서를 받아놓고도 불법체류자처럼 추방당하면 어쩌나 싶어 경찰차만 보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바보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캠핑의 종말 예언에 간 졸였거나 혹시나 싶었던 것과 이 경우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도 예수님 재림으로 최후 심판이 있지만 그 날짜만은 아무도 모른다고 익히 알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러니 말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신자

물론 신자라고 이번 사태에 망부석처럼 완전 무심하게 지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심 호기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염려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종말이 닥칠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닥치지 않을 텐데 그 이후에 기독교가 또 욕먹을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전문가라도 특정날짜를 지정하면 결코 그 날에 오실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나마 이번에 다행인 것은 신자에게는 날짜 지정한 종말론에 더 이상 속지 말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되었고, 불신자에겐 하도 세상이 흉흉해서 종말에 대해 한번쯤은 상기시키는 반사적 유익은 있었으니 말입니다.  

 

분명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거의 눈앞에 이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1-5)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모든 세대가 다 그러긴 했지만 이 구절에서 열거한 모든 사항이 하나 빠짐없이 철저히 해당되고, 특별히 마지막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는 모습은 바로 오늘 이 세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흉흉할수록 신자가 붙들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고 안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내 혼자만 착하게 지내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아가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을 구하라고 해서 초자연적 은사만 실행하거나 힘든 일에 기적 같은 보상만 소망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요한이 신자가 가져야 할 종말론을 본문에서 언급하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a) 십자가 사랑을 신자에게 주셔서 당신의 자녀라 일컬음을 이미 얻게 하셨다고 합니다. 앞에서 누차 말씀드린 대로 천국 안에 벌써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1절b) ‘세상’은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 그분으로 말미암은 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단에 미혹되어 그 종으로 살고 있기에 타락의 완성으로 자기들 인생이 흘러가고 있는 줄도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 믿은 우리를 처량하게 여깁니다. 오지도 않을 종말을 심심하면 끄집어내어서 세상을 시끄럽게 구니까 아예 상종도 못할 광신자들이라는 비난과 함께 말입니다.

 

요한은 신자더러 종말을 선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잘 모르듯이 예수를 모시고 사는 우리들 또한 그들에겐 잘 모르는 자로 인식 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전혀 다른 소망을 안고 살기에 그들이 확연히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이해하든 말든, 심지어 오해하고 뜯어 말려도 신자는 그 소망대로 살아야만, 아니 자연스레 그렇게 살아져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날씬하고 예뻐져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로잡고야 말겠다는 소망이 있는 여자는 남들이 저러다 병원 신세 지는 것 아닌가 염려해도 다이어트나 운동에 열중합니다. 자기가 번 돈 모두를 예뻐지는데 다 털어 넣지 않습니까? 신자도 이미 종말 안에 사는 모습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어야 합니다.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흉흉하고 고통스런 세상일에 자신이 완전히 지쳐 있어도, 고난은 끝이 없고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기도할 힘조차 없어져도, 심지어 제발 빨리 이 고통만 끝내고 싶은 심정이 생겨도 내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또 더 강하게 믿음을 세워서 염려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르듯이, 한 개인의 종말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신자는 종말이든 죽음이든 그 자체를 대비해서 살아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말 안에서, 죽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론 우리의 영원한 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만 있는 것이지 때가 되면 반드시 너무나 풍성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신자 앞에 활짝 펼쳐질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요체는 이런 확정된 그러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기에" 그곳을 향해 매일 한걸음씩 실제로 걸어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종말의 날자만 적시하지 않았을 뿐 곧 다가올 심판에 대비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캠핑이 벌린 짓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종말의 두려움만 강조했거나 전도의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했으니까 말입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에 종말은 아예 언급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말만 강조하면 자칫 그들로 신자마저 종말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심판의 완성으로 치닫고 있어도 그들이 전혀 믿지도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 재림에 대해 말로 설명해주어야 큰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을 향해 때로는 타락의 완성, 심판의 종말을 경고하면서 전도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 앞에서 신자가 이미 도래된 천국 안에서 구원이 완성되어져 가는, 그래서 자기들과는 다르지만 함께 따르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종말이 다가갈수록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며 더욱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자연히 사람들이 우리가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종말이 앞으로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어떤 큰 재앙과 환난을 동반할지 짐작도 못하기에 믿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가꾸어서 그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이미 도래한 그리스도의 종말 안에서 살고 있기에 주님의 재림이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닥친다 해도 전혀 요동치 않아야 합니다. 아니 나를 영광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그러기에 종말과 전혀 무관하게 이 땅에서 더욱 성실하고 깨끗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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