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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구원의 계획 2011. 6. 8. 23:55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29)

                                                         - 옥한흠 목사

 

  우리가 어떤 인물을 두고 말할 때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은 그가 누가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하고 명함을 내 놓습니다. 명함을 보면 그의 이름도 나와 있고 그가 일하고 있는  직장이나 직함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이  질문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의 교양이나 인품,  성격 등과 같은 됨됨이가 어떠하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명함을 넣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명함에 그런 것을 써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하지만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누구인가라는  것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끔 보면 안타깝게도 남에게 사기를 당해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게 된 데에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얻었는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을 소홀히 한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믿어버리고는 돈을 건네주거나 사인을 했다가 덜컥 사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약점이  있습니다.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만 가지고는 어떤 사람을 믿을 수도 없고 마음을 열 수도 없는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약점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자신을 계시하실 때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시냐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가지를  병행해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이 누구시냐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라." 자존자(自存者), 곧 스스로 있는 자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 끝까지 자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대답을  들으면 '참 대단하신 하나님이시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입을  빌려 가지고 자기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대답해 주십니다.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또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야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알 게 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자기가 누구이며  어떤 구원자인가 하는 것을 꼭 병행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펼쳐 보면 예수님은 먼저 말씀이라고 나옵니다(1:1). 그리고 빛이라고 나옵니다.  생명이라고 나옵니다(1:4). 이런 용어들이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답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흡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10장에서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이 어떤 구원자인가에 대해 대답을 해주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구원자이신 지, 또 어떤 하나님이신 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어떤 면에서 매우  목가적이고도 낭만적인 비유를 드셨습니다. 자신을 선한 목자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물론 선한 목자라는  것을 놓고 은유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은유라고 하면 우리에게 얼른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에도 비유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비유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선한 목자'  하면 우리 마음에 그려지는  어떤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그려지는 그런 이미지만으로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차원이 높은 지 우리가 동원하는 그 어떤 은유나 비유나 상징으로도 주님의 선하심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시 목축업을 하면서  살아가던 유대인에게 가장 정감 어린 상징으로 통하던 선한 목자라는 말을  빌려서 자기가 어떤 구원자인가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는  선한 목자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머리로 받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 신가 대한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해 주시는 말씀이라기보다 예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한'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좋은'이라고 번역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볼 때 "좋은 목자"가 더 나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선하다'고 하면 흔히  '악하다'는 말의  반대 의미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하다'는 말에는 도덕적인 의미가 함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삯을 받고 남의 양을 치는 삯군 목자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삯군 목자가 악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삯군 목자는 돈을 보고 일하기 때문에  진정 양떼를 위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양을 심하게 몰수도 있고, 또 이리나 짐승이 덤비면 양보다 자기 생명을 살리느라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삯군 목자는 좋지 못한 목자요, 못된 목자이지, 악한 목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 이유는 양들을 위해서 일하는 진실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을 순서대로 놓고 왜 예수님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하시는가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은혜 받도록 합시다.
 
 
양들을 자기 생명보다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양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너무너무 마음에 와 닿는 말씀 아닙니까? 자기 생명보다 양을 더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얼굴 표정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목자가 양을 사랑해서 정말 목숨까지 바치는 그런 사례가 있는가 하고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례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례를 찾기는 했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라고 하는 10대 소년이 자기 아버지의 양떼를 치면서 겪었던 일을  사울 왕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자기 아버지의 양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목자 생활을 했는 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17:34-35). 자기가 아비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힘없는 새끼를 움켜서 도망가면 목숨을 걸고 좇아가서 사자나 곰을 치고 새끼를 구해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 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곰을 만나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갑자기 곰을 만나면 완전히 간담이 내려앉습니다. 동물원에 있는 곰이야 쇠창살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별로 겁날 것이 없지만 실제로 곰을 만나면  문제가 다릅니다. 저도 캐나다에서 한번 그런 적이 있는데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좁은 길을 산책할 때는 반드시 방울을 짤랑짤랑 흔들며 다닌다든지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습니다. 곰으로 하여금 미리 겁을 집어먹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어미든 새끼든 곰은 그만큼 위험하고도 무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곰이  새끼를 물고 가면 좇아가서 곰과  격투를 해서 새끼를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못하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을 아껴 가지고는 아무도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 생명보다  양을 더 사랑할 때에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말을 액면 그대로 진실한 말로 받아들인다면, 다윗이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의 한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러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양을 위해서 싸우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11절부터 18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계십니다. 마치 자신이 작사 작곡한 어떤 노래를 부르시면서 마지막 후렴으로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하고 네 번 반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난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게 어떤 말씀인데 쉽게 함부로  떠들겠습니까?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는 말속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샘이 솟듯이 넘치기 때문에 주님이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듣고 넘겨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자기 생명보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가?'하고 주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바치지 아니하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그 저주를  대신 받아주지 아니하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안겨  주시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내 놓지 아니하면 안 되는 입장에 서 있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자나 곰하고 싸우다가 잘못해서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도와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마음에도 없는 죽음을 당하는 그런 목자도 아닙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생명을 버릴 권세도 버리지  않을 권세도 있지만 양들을 위해서 스스로 그 목숨을 내 놓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가슴속에 뭔가 뭉클하게 전해지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자의적인 사랑이지 의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Henry Nouwen)이라고 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심리학자요, 신학자입니다. 오랫동안 노틀담 대학과  예일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으며, 매년 무게 있는 책을 한 권씩 써낼 정도로 부지런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까지 말년  10년을 캐나다에 있는  데이 타이머(Day Timer)라고 하는 장애인 수용기관에서 봉사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맡아 돌보던 장애아는 아담이라는 스물 다섯 살  먹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있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합니다. 옷도 혼자 힘으로 못 입습니다. 어쩔 수 없어 숨을 쉬고 있는 하나의 몸둥아리일 뿐입니다.게다가 정신적으로도 심한 장애를 안고 있던 터라 자기를 돌봐주시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실을 전연 알리 없었습니다.  그런 분이 왜 자기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잘해줘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나우엔 박사님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를 세수시켜 주고, 이 닦아주고, 면도 시켜주고, 머리 빗겨 주고, 옷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는 손이 제 맘대로 가니까 그 손을 꼭 붙들어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만도 2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Philip Yancey)라는 유명한 저술가가 나우엔 박사님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박사님, 박사님 처지에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또 아직도 써야 될 책도 많은데 왜 여기 와서 이런 일에 매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해도 이 일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나우엔 박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 이 젊은이를 돕는 것은 젊은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많은 유익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아담이라는 청년을 통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안고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조금이나마 배우려고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어느 잡지에  실린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맞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과 똑같다.' 아담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수고하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걸 그가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그게 고마운 줄 압니까?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나를 사랑해야 되는 지도 잘 모릅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여러분 각 사람에게 쏟아 부어주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자비로운 주님의 음성을 조용히 앉아서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저는 이따금씩 여러분이 참 부럽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면서도 최대한  긴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긴장은 감정을 억제시킵니다. 긴장은 말씀을 마음으로 전하기  보다 머리로 전달하게 하는 독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긴장이 없기에 감격해서 울 수 있어도 저는 울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가 자기 생명보다 나를 사랑하셨다는 말씀 앞에 가슴이 뜨거워지면 눈물을 쏟을 수 있고, 기쁘고 감격스러우면 찬양도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는 청중은 은혜를 받아도 설교자는 은혜를 못 받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스펄전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척 공감했던 적이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한번은 지방을 여행하다가 주일날이 되어 지방에 있는 작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젊은 목사가 패기  있게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그런 내용의 설교였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 설교를 듣는 동안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스펄전 목사님이 젊은 설교자에게 가서 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스펄전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 목사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세계적인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듣고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가 그날 했던 설교는 다름 아닌 그 대설교자의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젊은 목사는 그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오늘 제가  한 설교는 목사님의 설교를 가지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스펄전 목사님은  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저도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 설교를  하면서 오늘 받은 은혜를 받지 못했어요. 오늘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조용히 앉아서 들으니 그 말씀이 얼마나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설교할 때 받지 못한 은혜를 앉아서 들으면서 받았습니다." 저는  스펄전 목사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압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너를 사랑하노라."하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감정을 뒤집어 놓고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전인격의 더러운 생각들을 걸러내어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회복케 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들을 너무 잘 아시기에
  예수님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너무 잘 아시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또 27절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서 '안다'는 말은 양이 몇 마리인가 하는 것을 아는 그런 정도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양이 남의 양이냐 내 양이냐를 안다 거나 나이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 혹은 새끼를 배었는지 안 배었는지를 아는 그런 정도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삯군 목자도 다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안다'고 할 때,  그 말은 양들의 처지에서 양들을 생각해 준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들의 처지에  서서 양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에게 마음이 있다면 양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말입니다.

 

  저는 목자가 양들을 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알고 싶어 구약성경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았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목자들의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야곱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 33장에 보면 야곱이 20년 동안의 처가살이를 끝내고 재산을 모아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형 에서는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의기양양해 가지고 그를 맞으러 왔습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내 부하들이 이렇게 많으니  우리가 네 양떼를 보호하며 인도하마. 그러니까 우리와 같이 가자." 그러나 야곱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형님은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가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선한 목자의 샘플을 봅니다. 그러나 에서는 양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목적이 있다면 빨리 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에게 양들을 맡겼다가는 하루아침에 양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습니다. 과하게 몰면 양들이 피곤해 쓰러질 것이고 병들어  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들의 이러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은 생각부터가 달랐습니다. '급하게 몰면 안돼. 새끼까지 딸렸는데. 어떤 양은  임신을 하고 있는데. 그러니 한 달이 걸리든, 두 달이 걸리든 간에 양들이 가는 대로 천천히 따라 가면서 풀도 먹이고 물도 마시게 하자. 혹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걸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또 어두우면 쉬자.' 양들이 가기에 좋은 속도와 형편을  따라 양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 야곱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양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의 처지를 동경하고 양에게 좋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야곱의 심정이라면 이것이 바로 '양들을 안다'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러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실까요? 14-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매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설명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지나치게 과장하시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는 것에다 비기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과 예수님은 원 스피릿(one spirit)이십니다.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이요 예수님의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 두분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어떤 틈바구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예수님도 다 아시고, 예수님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완벽한 상호 지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적인 논리로는 절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놀라운 상호지식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그 정도로 압니까? 천만 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아는 것처럼 세밀하고 정확하게, 우리의 깊은 데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참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나와 너 사이를 갈라놓고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알아주고 이해해줄 만한 어떤 여지도 남겨 두지 않습니다. 숨쉴 틈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날로 더 삭막해 지고 나는 말 그대로 외톨이가 되어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후배 목사님들 몇 명하고 자리를 같이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화제가 요즈음의 삼사십대 초반의 목회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습니다. 요는 요즈음의 신세대 목사들이 저와 같은 기성 목회자들과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너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인정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며, 너무 계산적이고 인사성도 부족하다고들  집중 포화를 퍼부었습니다.

 

  제 옆에 있던 어떤 지긋하신 목사님은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꺼냈습니다. 얼마 전에 불광동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부 목사로  부임을 해 왔다고 합니다. 부목사 일을 시작한 후 드디어 첫 번째 사례를 받게 되었는데 액수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담임 목사님 사무실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그것을 내 놓고는 "목사님, 이것 가지고 어떻게 일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것 가지고 못삽니다."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이 "교회가 약하니 어떻게 하나? 우리가  헌신하는 자세로 좀 일을  해야지."하고 타일렀나 봅니다.

 

 그러자 그는 그 봉투를 책상에다 탁 내려놓으며 "저는 못합니다."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쌍소리를  섞어 가며 담임 목사 욕을 해댔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계단 밑에 있던 교회 사찰이 그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사찰이 들은 그대로를 전해 들었는데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하고 흥분해 있는데 어떤 젊은 목사님이 대뜸 우리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우리만 나무라지 마세요. 요즘  신학교 자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그렇게 만들게 되어 있잖아요? 생각을 해보세요. 신학교  시설은 열악한데 학생은 그냥  무더기로 받아 가지고 한 클래스에 몇백 명씩 들어가서 강의를 듣도록 만들었으니 언제 남 생각할 틈이 있습니까? 어떤 때는 의자가 모자라 가지고  빼앗아야 되는 판국인데. 식당이 작으니까 점심시간만 되면 배고픈 사람은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차지하려고 달려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 생각할 틈이 어디  있어요? 캠퍼스가 지방에 있으니까 서울에서 다니는 사람들은 통학 버스를 이용해야 됩니다.  통학 버스를 타고 한두 시간 서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니까 앉아서  가려고 수업이 채 마치기도 전에 우르르 일어나 버스를 향해서 마라톤 경주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언제 남 생각할 틈이 있어요? 신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3년을  공부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나빠서 그렇게 됩니까? 학교가 그렇게 만들었지." 그 말을 들으니까 정말 입이 딱  막혀 버리더라고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남 생각하고 알아줄 여유가 있었습니까? 너 안 죽으면 내가 죽는 판인데 말입니다.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야 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내가 남을 알아줄 수도 없고 알아줄 틈도 없고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외로운  감정에 빠져 있습니다. 솔직히 나의 마음을 깊이 알아주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

 

래서 그런지 요즈음에는 친구들 사이에도 대화의  깊이가 점점 얕아지고 있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같이 뛰어야 되고 바쁘고 쫓기다  보니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능적 측면에서만 대화를 나눕니다. 쉽게 말해 "요즘 회사 사정은 어떠냐?" "골프는 한번씩 가니?" "요사이 건강은 괜찮니?"하는 이런 말만  나누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것입니다.


  부인들은 더 심각합니다. 

생활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조금 친한 것 같아도 어쩌다가 남편이 직장에서 물러난다든지 생활이 쫓기게 되어서 생활에 격차가 나면 부인들은 싹 돌아서  버립니다. 자존심 때문에 서로  안 만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자기 혼자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 자체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싶어합니다. 그에게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최근에 <아버지의 전화>라는 상담 전화가  개통이 되었습니다. 명예 퇴직하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전화로 상담을 해 온다고  합니다. 그들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졸지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가정에서도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생활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 전화통이라도 붙들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것입니다. 오죽이 답답하면 그러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뉴욕 타임즈>에 실렸던 유명한 칼럼들  중에 이런 제목의 칼럼이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여자 친구가 필요하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게  무슨 소리냐며 깜짝 놀라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읽어보니 참  재미있는 글입니다. 이 글을 쓴 필자가 이천여 명의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 세명 중 한 명이 여자친구의 필요성에 긍정했으며 또 실제로 여자친구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자친구란 자기  어머니일수도 있고, 여동생일수도 있고, 학교 동창일 수도 있고, 회사의 직원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마음을 툭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여자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그  글을 계속 읽다 보니 그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남자들이 아내와 부부 생활을 하면서도 여자친구가 필요하다고 할까요? 그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하고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야, 이번 여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 좀 내서 한두 주간 동안이라도  홍콩에 가서 쉬다가 와야겠다"라고 말하면 부인은 대뜸 그 말을 이렇게 받습니다. "돈은 어디서 나오나요? 당신 나 모르게 살짝 저금하는 게 있나 본데요." 하고는 돈걱정을 하면서 대듭니다.

 

그러면 그래도 가족들을 생각해서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던  남편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해 버립니다. "왜 당신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돈,돈 해?" "그럼 내가 돈 말 안 하게 생겼어요?" 이러다 보면 두 사람의 감정이  대립하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다 들어가 버립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코너에 몰릴 바에야 무엇 때문에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여자 친구는 다릅니다. "야, 나  이번 여름에 가족들을 데리고 홍콩에 가서 한두 주간 정도 있다고 오고 싶은데."하고 말했다 해도  가도 그만이고 안 가도 그만입니다. 자기 이야기에 전혀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자 친구는 "돈은 어디서 나와요?"하는 소리는 절대 안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구, 그러세요? 참 좋겠네요. 무슨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거기 가서 무엇을 하실 거예요? 제가 홍콩에 관한 정보를 더 모아서 드릴게요." 이러면 이 남자는 더 신이 나서 자기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몽땅 털어놓습니다. '아, 이 여자는 그래도 나를 알아주는구나.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순수하게 반응하는 여자를 앞에 놓고 마음껏 이야기를 하니까 속도 후련해집니다.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조금씩 쌓였던 스트레스도 배출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가 있음에도 여자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오늘 우리는  참으로 우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외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나의 속사정을 너무나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에 약한지, 왜 불안해하는지, 왜  자주 넘어지는지, 왜 울고 있는지, 왜 기가 죽어 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그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를 아십니다. 히2:18 말씀대로 그  자신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나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처지가 어떠하든 간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입니다. 나를 아신다고 합니다. 아신다는 말은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자녀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아빠들은  이런 말을 곧잘 합니다. "알았어." 그래도 무슨 말을 또 하면  "알았다니까."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도와주겠다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아신다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직장을 잃고 불안해하고 계십니까? 도와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혼도 해야 됩니다, 주님." "알았다니까." "앞으로 내 진로는 이렇게 택했으면 좋겠는데 벌써 시험에 다섯 번이나 떨어졌어요."  "글쎄 알았다니까." 우리 주님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절망이 아닙니다. 슬퍼하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은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렇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결론을 맺읍시다. 자기  생명보다도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 나의 깊은  속사정까지 다 알고 동정해  주시는 선한 목자, 그분은 이 세상에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헬라어 원문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할  때 정관사를 붙입니다.  "I am 'the' good shepherd." 나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실 뿐 아니라 진실로 나를 알아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비록 고통이나  슬픔 중에 있다 할지라도  슬픔 중에 있다 할지라도 불안 중에 낙심 중에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