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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개를 해야만 천국 가는가

구원의 계획 2011. 6. 13. 20:42

 

어떤 회개를 해야만 천국 가는가?

글/扈一麥 

 

부흥회를 열기만 하면 강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회개하라고 외친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꼭 회개해야만 천국에 들어가는가? 회개를 한다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회개를 해야 하는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회개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오래, 또는 얼마나 많이 회개해야 하는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해야 하는가? 아니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회개만 하면 되는가?


만약 눈물을 흘린다면 얼마나 많이 흘려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으나 아무도 그 확실한 해답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간에 천국에 들어 갈수 있는 회개는 어떤 것인지 그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확실한 해답을 정의 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 적으로 회개라 하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통회하며 자백하는 것이 회개인 줄 안다. 그러나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백하는 회개요, 다른 하나는 생명 얻는 회개다.

1. 자백하는 회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9)

2. 생명 얻는 회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위와 같이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죄를 낱낱이 자백 하는데도 생명을 얻을 수 없고 하나는 그렇지 않아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회개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회개를 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죽을 때 까지 회개를 하여도 지옥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 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이 속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생명을 얻는 회개인가?
이제 그 문제를 자세하게 검토해 보기로 하자.

 

예수님과 요한이 외친 회개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쳤다.

1. 요한이 외친 회개/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1)

2. 예수님이 외친 회개/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회개하라고 했으며 요한은 무엇을 회개하라고 했는가?


요한의 증거
눅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자기에게 나오는 자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러자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3:10) 회개 하리이까 하였더니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3:11-)하였다.

 

1. 옷이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고,
2.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 외에 더 받지 말고,  
3. 군인들은 사람들에게 강포 하지 말라고 했다.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요한은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율법 적인 문제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했다. 그런데 우리가 꼭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회개들이 구원과 상관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옷 없는 자에게 옷을 나누어 주었다고 해서 천국 갈 수 있는가?  세리가 세금을 정당하게 받는다고 천국갈 수 있는가?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강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천국갈 수 있는가? 아니다 이런 회개들은 백번 천 번 한다 할지라도 천국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회개는 요한이 자기에게 오는 자들을 향하여 한 것이며 모두가 다 율법에 관한 것들이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
그러면 예수님과 요한이 외친 회개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에 대하여 요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6,17)


요한은 자기와 예수님을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고 있으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것이라고 했다. 알곡과 쭉정이에 대한 말씀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문제로서 구원과 멸망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요한이 외친 회개는 율법에 대한 것이요, 예수님이 외친 회개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요한의 회개는 자백에 대한 것이요, 예수님의 회개는 알곡 즉 생명에 대한 것이다. 생명 얻는 회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고넬료의 생애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 베드로를 만나기전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

1. 그는 경건한 사람이요.
2.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요.
3.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요.
4.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요.
5. 천사를 만난 사람이요.
6.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 사람이요.
7.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의인이라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기전에 구원을 받은 자였을까?
고넬료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요 경건한 사람이다. 일반 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인정 했으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하여 베드로를 불러 복음을 듣도록 한 것이다.


아마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하니까? 혹 반문할 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 구원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행11:13)


고넬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에게 베드로를 불러 복음을 듣도록 한 것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그는 경건하고 의롭게 산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다. 그러면 고넬료는 경건하게 살기 위하여 날마다 회개의 기도를 했을 것이 아닌가.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은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 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


 왜 구원을 받지 못했을까? 구원은 회개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넬료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미리 알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복음을 듣도록 한 것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베드로를 청하여왔다.그러면 베드로가 그 가정에 전한 구원의 말씀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교인들이 그 내용에 대하여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아는 자가 희박하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 가정에 구원을 준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말씀을 들어보자

 

행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전한 구원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린 피로 인하여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는 자 마다 속죄함을 받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받으시는 분이며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자기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도록 하셨다고 하였다.

 

그렇다 십자가의 사건은 구원의 필수적인 사건이다.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어서 증거하기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10:42)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우리의 재판장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재판장이다.
2.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이 두 가지 예수님의 사역을 듣고 고넬료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면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해 주는가?


첫째 예수님은 죄를 범한 우리의 재판장이다. 그럼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재판장인가?

< 하루는 한 재판장이 어릴 때 자기와 같이 자란 친구를 직접 재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 졌는데 이때 판사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친구를 정죄해야 하기 때문이다. 판사가 볼 때 법대로 하면 친구를 감옥에 넣어야 하고 만약 그를 감옥에 넣지 않으면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법이 있는 한 판사도 죄인을 무죄로 판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 판사도 법대로 판결하지 않으면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판사라고 자기의 마음대로 판 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판사도 자기위에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사는 고민을 하다가 법에 의하여 자기의 친구에게 벌금형을 선고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벌금 낼 힘이 조금도 없으므로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벌금을 다시 판사가 갚아 주었다. 그래서 죄인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판사의 은혜로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판사는 자기가 법대로 판결하고 그 정죄의 값을 자기가 또 갚아 주었다. 그러므로 죄수는 판사가 베푼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조건도 없이 감옥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

 

예수님은 우리의 재판장이다. 그분은 죄로 인해 사형에 처해진 우리를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지옥에서 우리를 건지신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도 없이 그 재판장 되신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죄 사함을 받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백하는 것이요, 하나는 타인의 이름을 힘입어 받는 것이다. 많은 교인 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철저하게 자백함으로 사함을 받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또 다른 죄 사함 받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것은 타인의 이름을 힘입어 받는 것이다. 자백함으로 받는 것은 자기의 노력이 있어야만 받고 타인의 이름을 힘입어 용서 받는 것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저 공짜로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은행에 1000만원 빚이 있다면 그 빚을 갚는 방법이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 자신이 갚는 방법이고 하나는 타인이 그 빚을 갚아 주는 방법이다. 그런데 타인이 빚을 갚아 줄때는 본인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저 그 갚아준 사실을 인정만 하면 된다. 바로 그렇게 타인이 갚아 주는 것을 가리켜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이 빚을 갚아 주었을 때에는 그 갚아준 사실을 인정만 하면 된다. 이미 빚이 없어 졌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 외에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죄의 빚을 예수님이 갚아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사실을 가지고 증언하기를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다고 한 것이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도 지속적으로 그 사실을 증거 한다.

율법적으로 용서 받는 방법과 그 이름을 힘입어 용서받는 방법...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6)


위의 성경 말씀을 표준역 성경에는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행13:39표준)

 

그렇다. 자기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나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죄의 빚을 청산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대신으로 나의 빚을 갚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죄가 없어 졌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된 것이다. 우리가 회개해서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죄를 사해서 죄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10:43)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살리셨고 부활 후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재판장으로 삼으셨으며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셨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서 이 말씀을 증거 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말씀 듣는 자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고넬료의 가정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다.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속죄를 증거 할 때 말씀 듣는 고넬료의 가정에는 성령이 내려지고 모든 자들이 성령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음으로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주었다. 베드로는 이때의 사실을 11장에서 설명하면서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생명을 얻었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우리가 고넬료의 집에 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11:13)

 

그리고 베드로는 이어서 고넬료의 가정은 오순절에 자기들이 받았던 것과 같이 저들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어서 증거 하기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였다.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를 만나 생명 얻는 회개를 하였다. 생명 얻는 회개라고 하는 말씀은 평범한 말씀이 아니다. 생명 얻는 회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고넬료가 울면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저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속죄의 말씀을 듣고 그저 “아멘” 한 것뿐이다.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가 전하는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었으므로 회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속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고넬료에게는 회개하고 기도할 시간적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이 생명 있는 회개는 사람마다 단회적이다. 한번만 있다.


고넬로는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가 부활 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재판장으로 세우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말씀을 듣는 그들에게 성령이 내여 졌으며 그것이 생명 얻는 회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생명 얻는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하는 예수님의 피를 100% 믿는 것이다.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날마다 자기의 죄를 회개(참회)했다고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고넬료는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넬료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베드로를 부르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구원함을 받았다. 고넬료는 복음을 듣기 전에 아무리 회개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 구원은 회개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속죄하는 피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를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가?
일반 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자백하는 회개를 꼭 해야만 구원받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를 믿는 자체가 회개인 것이다. 회개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백하는 것이요 하나는 방향을 전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은 어떤 회개로 이루어지는가? 구원은 자백하는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전환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곧 믿지 않던 사람이 믿는 것은 그 자체가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인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얻는 회개의 교훈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가 무엇임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탕자는 아버지가 있는 곳을 떠나 반대방향으로 갔다. 그는 재산을 탕진한 후에 돼지를 치며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자기의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탕자는 내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였다. 정말로 탕자는 죽을 정도로 굶주림에 지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탕자가 돼지와 함께 있으면서 배가 고파서 울 때 회개를 하지 안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그런 처지가 되면 울면서 회개하지 않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탕자도 날마다 눈물로 아버지를 부르면서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과거를 뉘우치고 자백한다 하여도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혹 그가 죽을 때까지 금식하며 회개한다 하여도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자백하는 회개가 아니라 방향을 전환 하는 것이다. 전에는 아버지를 떠나 다른 방향으로 갔으나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탕자는 지금까지 하던 방식을 벗어나 방향을 바꾸기로 작정하고 지금까지 울며 회개하던 모든 행동을 버리고 방향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돼지 있는 곳에서 돼지와 같이 살며 배가고파서 울며 있었던 것은 잘못 되었음을 알았다. 탕자는 자기가 돼지와 같이 있으면서 울며 회개하는 것은 아버지를 만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발견 했다.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집에 돌아간 탕자가 아버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아버지가 탕자의 죄를 용서 했으나 그 사실을 탕자가 모르고 있었던 것같이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에,  우리의 죄가 이미 다 사해 졌으나 우리가 회개해야 죄가 없어지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다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통회자복 하여야 용서를 받고 천국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 하고 있으나 눈물을 흘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별개의 것이다. 우리 한국기독교가 찬송은 잘 부르면서 찬송가에 있는 가사는 무시해 버리고 있다. 당신은 찬송가의 가사를 믿는가? 믿는 다면 울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 하네 > (찬송343장) 
옛날부터 지금까지 부르는 찬송가에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 하네"하고 적혀 있다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는 죄를 씻을 수가 없다. 아니 죄가 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통회 자백해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죄를 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을 때 눈물을 많이 흘리며 회개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착각 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한 죄를 용서 받을 때 눈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윗은 간음한 죄로 인해서 침상이 떠나가도록 눈물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용서받은 사람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다윗은 죄를 용서받을 때 눈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다윗이 용서받은 사건을 자세히 보라.

 

삼상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나단 선지자는 다윗을 혹독하게 책망 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였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선언 했다.  

 

위의 성경에 명시된 대로 다윗은 눈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했다. 죄란 진정으로 잘못을 느끼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 받는 것이지 눈물을 흘려야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짤 필요가 없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며 우리의 회개가 먼저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탕자가 언제 용서해 달라고 회개를 했는가? 탕자의 죄를 아버지가 용서해 줄때 회개한 역사가 하나도 없다.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용서한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 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리고 다윗의 죄에 대하여 성경은 침상이 떠나도록 우니까 용서했다고 하지 않고 그의 죄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 받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을 보면 다윗도 죄를 범하고 사울도 죄를 범했는데 다윗은 용서를 받고 사울은 용서를 받지 못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누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더 강하게 호소했는가? 사울이 다윗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매달렸다. 그러나 사울은 용서받지 못하고 도리어 버림을 받았으나 다윗은 용서 받았다.

 

그러면 다윗은 전혀 울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아니다 울었다. 그런데 간음한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운 것이 아니라 죄는 이미 용서 받았으나 간음한 아내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이 죽게 생겼으니 아이를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울었던 것이다.  

 

삼하12:15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 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다윗은 금식하며 1주일 동안 울었으나 아이가 죽자 금식과 우는 일을 중단 하였다.
 
 삼하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이렇게 다윗이 아이가 주은 후에 금식과 우는 것을 그치자 신하들은 의아하였다.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 밥도 먹지 않고 울고만 있었으니 아이가 죽었으므로 더 울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죽자 다윗은 목욕을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이해가 안 되므로 다윗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아이가 죽기 전에는 울더니 지금은 울지 않습니까? 했더니 이미 아이가 죽었는데 울 필요가 무엇이냐고 하였다.   

 

삼하12:21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그렇다 다윗은 1주일동안 금식하며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침상이 떠나가도록 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때는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저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침상이 떠나가도록 울며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 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회개와 구원은 전혀 관계가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 얻을 만큼 죄가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는 한 사람도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끗해서 구원 얻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무런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지만 예수님의 흘리신 피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문제에 대하여 로마서 4:6을 현대어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롬4:6 “다윗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 하나님께 '죄없는자'라고 선언받는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복되랴. 허물을 용서받은 이들은. 죄지었으나 다시 가리움을 받은 이들은. 얼마나 복되랴.

 

그렇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죄없는자라 선언” 하시고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않는 것” 이다. 당신은 죄를 회개하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당신의 죄를 사하였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다. 만약에 회개하므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는 회개하는 공로가 포함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공로도 없이 구원한 것이다.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어느 누구도 선물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는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위의 말씀을 현대어 성경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 까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 했다.  그렇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의 노력은 1%도 들어가지 않았다.  고넬료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며 회개한 것도 아니다. 다만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그 사실을 믿고 그것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회개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아멘” 한 것이다. 그런데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했으며 그때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구원은 회개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면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다 회개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회개는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아니라 돌아서는 회개이다. 믿지 않던 사람이 믿으면 그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 탕자가 돼지와 같이 있으면서 얼마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회개를 했겠는가? 그러나 탕지의 구원은 눈물을 흘리며 자백하는 회개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회개인 것이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산 위인이다. 그는 하나님께 상달할 만큼 자기를 다스리며 회개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고넬료는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청해서 복음을 듣도록 한 것이며 그 시간에 고넬료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는 복음을 듣고 죄 사함 받은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받은 것을 가지고 성경은 고넬료가 생명 얻는 회개를 했다고 기록하였다.(행11:18)    


그러므로 회개란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자백하는 회개요 하나는 생명 얻는 회개이다.  혹 어떤 자들은 이와 같은 생명의 복음을 들어도 이해를 잘못하여 그러면 죄를 자백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반문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우리는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를 반듯이 해야 한다. 왜 회개를 해야 하느냐? 성경은 자백하는 회개를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내가 말 하고자 하는 것은 회개를 하지 말라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는 해야 하지만 그 회개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원과 상관이 없을 지라도 회개를 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회개에는 각각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백하는 회개는 율법에 관한 것이며 생명 얻는 회개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자백하는 회개는 육적인 것이요 생명 얻는 회개는 영적인 것이다. 생명 얻는 회개가 되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고, 죄를 진자가 자백하지 않으면 징계를 더 크게 받는다. 그러나 그 징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懲責)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시89:30)
위의 성경은 두 가지의 문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하나는 율법이요 하나는 언약이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율법을 어기면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懲責)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언약만은 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율법을 범하면 그 죄악을 징계 할 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은 취소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율법을 범한 사람에 대하여 구체적인 징계의 단계를 설명해주고 있다.


1. 첫째로 우리가 죄를 범하면 약하게 하시고,
 2. 둘째로 죄를 범하면 병들게 하시고,
 3. 셋째로 죄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1:30)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 죄를 범하면 약하고, 병들고, 잠들게 한다고 했는데 잠든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모두 잔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죄를 범했으니 지옥 가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죄로 인해 육신은 징계를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정죄함을 당하여 지옥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히12:8) 아멘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죄인들을 지옥 보낼 수가 없다. 홍해를 건넌자가 돌아갈 수 없는 것 같이 요단을 건넌 자가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이는 주님의 바라심이고 주의 확고한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범한 자들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자들을 처음에는 약하게 하시고 다음에는 병들게 하시고 그래도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될 정도로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자들은 잠들게 하시므로 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시고 복음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신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죄 정함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이 말씀은 엄마가 애기의 체질을 안다는 의미이다. 애기의 체질을 아는 엄마는 애기를 함부로 때리지 않는다. 애기가 이불에 오줌을 싼다 하여도 함부로 때리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왜냐 엄마는 애기의 체질을 알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진 것에 따라 처치하지는 않는다. 한 부모의 자녀들이 똑 같은 죄를 범해도 나이나 성숙한 척도에 따라 때린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를 묵인 하는 것은 아니다. 반듯이 징계 하신다. 성경은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하셨다.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아들 이므로 우리가 범죄 하면 징계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범하면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부모에게도 징개를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징계란 좋은 것이 못 되고 도리어 괴로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부모에게 징계를 받아도 고통이 따르는데 하물며 고의 적으로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무섭지 않겠는가?!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8)


우리는 사생자가 아니므로 죄를 범하면 반듯이 징계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며 죄를 범했으면 반듯이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천국 갈 죄는 이미 예수그리스도가 해결해 주셨다. 그러나 목욕한 자는 손발을 씻어야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미움을 사게 되면 최종적으로는 육체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육체가 죄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지옥 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 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 얻는 회개가 되어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결론 http://cafe.daum.net/ilmak

 1. 율법을 범하면 육체로 징계를 받고  2.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
 1. 생(生)과 사(死)는 믿음에 달려 있고  2. 상(賞)과 벌(罰)은 행위에 달려있다.
 1. 자백은 육적 문제를 해결하고  2. 믿음은 영적 문제를 해결한다.
 1. 행위는 육적 변화와 관계가 있고  2. 믿음은 영적 탄생과 관계가 있다.
 1. 육신의 변화로는 구원이 없고  2. 영적 탄생으로만 구원이 있다.


 바리세인의 의(義)를 능가하는 율법의 어떤 행위도 침상을 적시는 통회의 눈물도 믿음이 없이는 탄생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며 오직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어떠한 회개도 생명을 탄생하게는 할 수 없다. 새로운 새 생명의 탄생은 회개가 아니라 오직 믿음 뿐이다. 죄를 자백해야 구원받는다는 사상은 이방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 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다.

 

기독교가 이방 종과와 다른 점은 이방 종교는 자의적 구원 종교요 기독교는 타의적 구원 신앙이다. 내가 노력해서 천국가려는 종교는 세상 종교이고, 하나님이 내가 한 것이 없는데 은혜로 미리 다 아시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그리스도교(敎)이다. 이방 종교는 죄를 없애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 노력을 해도 지옥가고 예수그리스도 믿는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내 대신 속죄양이 된 것을 믿기만 하면 용서를 받는다.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났던 생명 얻는 회개가 당신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오직 예수 오직 믿음뿐이다.“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 예수님 내주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사랑의 원천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한분 만으로 만족하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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