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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구원의 계획 2011. 6. 13. 20:43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마태복음 11:16-24 )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복되신 말씀과 많은 이적을 보면서도 회개 할 줄 모르는 믿음 없는 고을들을 책망 하신 주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제목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믿음 없는 세대는 분별력 없는 세대입니다(16-19).

 본문 16절에 주님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그 시대를 책망 하시고자 적절한 비유를 찾으시다가 곧 한 비유를 말씀 했습니다.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 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곧 그 시대의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불신자들을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진리에 대해 무분별한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의 사람들이 마치 장터에 앉아있는 아이들 같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동무들을 불러다가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피리를 불어도 친구는 춤추는 응답이 없고,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슬피 울어도 친구는 가슴 치는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의 놀이가 생각납니다. 또 아이들을 키워보면, 도저히 그에게 옳은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의견이나 기분이 만족 할 때에만 옳다고 합니다.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항상 불평불만을 합니다.

 

믿음 없는 세대도 이 같은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세례 요한과 자신에게 적용 시키셨습니다. 본문 18-19절에 그 시대 사람들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한다.”고 하십니다.

 

 그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마치 장터에서 결혼식 놀이에 피리 부는 아이들처럼 요한을 자기들 뜻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의 뜻대로 춤추는 사람이 되지 않고, 오히려 금욕적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는 하나님의 사자의 사명을 충실히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마치 장례식 놀이에 슬피 우는 아이들처럼 예수님도 요한처럼 금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시면서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며 회개와 위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요한과 예수님에게 불평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고 분별없는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요한이 와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회개 하라!” 고 설교 하자 “귀신 들렸다 ”고 비난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오셔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 하면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고 비난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과 행위가 아무리 착하고 옳아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난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 없는 세대는 영적 분별력이 없어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 하며 참된 신앙인들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야합니다.

 

로마서 8장 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모르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본문 19절 하 반절에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행한 일이나 주님이 행한 일은 모두 옳았습니다.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이나 예수님의 부드러운 교제가 모두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주님은 교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이렇게도 쓰시고, 저렇게도 쓰십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성숙치 못한 아이들, 곧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처럼 분별력도 없고, 경솔하며, 까다롭게 이것도 저것도 트집을 잡고 비난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행한 일이나, 주님이 행한 일이나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2, 복된 기회를 상실한 고을들을 생각해봅니다(20-24).

 본문 20절로 24절은 예수님에게 복음을 듣고, 또 크신 권능들을 많이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음으로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도시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20절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그 때에 책망하셨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도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권능을 많이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을 심각하게 들어야합니다. 복음을 많이 듣고, 또 주님의 권능을 많이 보고 많은 체험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보고 듣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고 들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많이 듣고, 보고, 체험을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으면 주 예수님께 버림을 당하고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복음을 듣고, 큰 권능을 많이 보았던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도 회개하지 않을 때에 마지막 심판 날에는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먼 옛날의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거나 복음을 많이 들으면서도 자기의 죄에서 떠나지 않거나 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 날에 복음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 보다 더 큰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이 복음을 사랑하며, 단지 읽거나, 듣는데 그치지 말고 이 말씀을 지키며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고 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예수님께서 잘 다니던 곳이요 사랑하셨던 고을들입니다. 특별히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공생애를 시작 하셨고 그곳에 가장 많이 머무셨던 곳입니다(마4:12-17).  그곳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로운 말씀들을 많이 듣고, 크신 권능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회개 할 줄 몰랐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죄를 버릴 줄 모르던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4장 17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는 말씀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말씀부터 전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고 책망 했습니다. “회개 ”란 말씀의 의미는 ‘마음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고치라는 말입니다. 그릇된 옛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변 할 때 생각이 변화되고, 다음으로 행동이 변화되고, 마침내 성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원리입니다. 주님이 외친 회개는 마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삶이 잘못된 근본적인 원인은 “경건치 못함 ”때문입니다. “경건치 못함 ”은 그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일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믿음이 적어 그런 경향을 나타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입니다. 소요리 문답 제 일 문답에는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요 우리는 이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여기 세 도시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했습니다. 곧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마음을 돌이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회개치 않고 죄와 사망의 나라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화를 당할 것입니다. 구주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를 쓰시며 복음을 전파하셨고, 많은 권능을 나타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화가 된 것입니다. 여기 “책망 ” 이라는 말과 “화 ”라는 말씀을 통해 주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화있을찐저 고라신아 ”라고 말씀 했을 때 이 말씀은 극도로 화가나 호통 치는 말이 아니라 안타까운 통곡의 부르짖음이셨습니다. ‘고라신아, 벳세다야, 가버나움아 너희가 내 말을 듣고 회개하면 구원을 얻을 터인데 내 사랑을 거절하고 화를 택하는구나, 생명을 거절하고 사망을 택하는구나’ 는 탄식입니다. 주 예수님은 마음 내키는 대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화는 그 도시의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한 결과란 말씀입니다. 그 화는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그 도시의 사람들의 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에게 임하는 모든 화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고 복음의 사자들을 보내시고 그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화입니다.

 

 오늘날 고라신과 벳세다는 그 자취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도시의 사람들이 회개 했더라면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유달리 가버나움에 대하여 강조하여 말씀 하십니다.  본문 23절-24절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 까지 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사는 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했으나 그들이 회개를 거절하매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치 않고도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지옥에 떨어지리라 ”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이 믿음 없는 세대 속에 살고 있으나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분별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에 힘쓰며 전하기에 힘씀으로 믿음의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