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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받기를 원하는가

구원의 계획 2011. 6. 16. 19:09

 

은사 받기를 원하는가?(고전 12:4-11)

                                                           - 김원춘 목사  


은사 받기를 원한다면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은사라는 말의 어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카"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1)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선물. (2)왕이 내려주는 물건. (3)은혜. (4)은혜의 선물.(fifts of grace, 고전 12:4)을 말합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신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을 말합니다. 은사는 선물이지 성령이 아닙니다. 은사와 성령의 본체와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인 섬김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모인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도는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된다는 말씀은 성도 각자에게 이미 은사를 주셨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1,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은사는 모든 성도를 유익케 하는 것입니다.

 

은사 중에는 드러나는 은사가 있고 드러나지 않는 은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은사를 혼동하기도 하고, 비교하면서 이상한 우월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모두의 은사는 각각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 교회에 똑같은 사람을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교회에 그 일을 맡은 사람이 꼭 하나씩만 있게 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와서 교회에 어떤 약점이 보이면 지적해서 광고하지 말고 자신이 하라."

 

네덜란드의 소년처럼 새벽길을 가다가 뚝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어나올 때 자신이 그것을 막은 것같이, 우리 교회도 무엇이 새어 나오거든 본 사람이 막으십시오. 한 교회에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 눈에 띄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한다. 여기를 봐라." 하면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십니다. "너희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같이 기도할 때에 길거리에 서서 하지 마라.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지 마라." 우리에게 제일 큰 싸움은 하나님께 보이느냐, 사람에게 보이느냐의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면 그 상을 여기서 받습니다. 사람한테 잘났다고 칭찬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은 도무지 모른다고 하신 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명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은사는 모두를 유익하게 하려고 있는 것입니다. 각각 다르지만 주신 분은 한 분이며 주신 목적도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서로 싸우면 그것을 주신 분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은사들이 서로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보충적이기 때문입니다. 팔과 다리가 싸울 수 없듯이, 눈과 귀가 우열을 가릴 수 없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합니다. 보충적입니다. 만일 그것을 모르고 서로 경쟁하기 시작한다면 그처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5은 은사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모두 교회의 덕을 세우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심으로써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하게 되며 그것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은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중간에 사랑장이라는 13장에서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8-11). 은사란 이런 것입니다.

 

은사는 어린 아이같은 신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지금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은사란 다른 표현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시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인데, 어떤 유익함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시지 않고 지금도 간섭하고 있다는 큰 위로가 그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밤길을 걷는데 플래시를 하나 준 것 같은 유익도 있습니다. 깜깜한 밤에 등불이 켜지는 것과 같은 유익이 은사입니다. 그 은사는 그 등(燈)을 들고 있는 사람이 그들 중에 가장 잘난 사람이라는 표로 준 것이 아니라, 밤길을 밝히라고 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이럽니다. "나 아니면 너희들 모두 못 보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큰일입니다. 플래시는 혼자 쓰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비추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준 이유는 밤에는 우리가 시력이 있어도 못 보는 소경이기 때문에, 즉 영적으로 우리가 지금 새 생명을 얻고는 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리까지 가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그런 간섭하심이 필요한 자리에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 은사장인 고린도전서 12-14장 사이에 사랑 장이 끼어 있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간섭하셔야 하는 부분이 있고, 은사로써 우리에게 주셔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라, 기다려라, 용서하라, 우리는 지금 부분적인 것만 이해한다, 누가 실수하고 누가 모자라는 것도 용납하고 있어라, 좀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린애 낳아 놓고 금방 서지 않는다고 때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말 못한다고 때리거나, 오줌 싼다고 뭐라 나무라지 않습니다. 물론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러면 안 됩니다만, 아무튼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각 개인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신랑보다 신랑이 보내준 선물만 좋아하고 신랑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선물을 잘못받은 것입니다. 

 

우리 각 개인들에게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할 때, 개인에게는 신앙의 성취감 및 삶의 의미가 생겨나며, 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각기 자신의 영적은사를 사용함으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바로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봉사의 은사를 가진 신자가 그 분야에 충성함으로써 말씀의 은사를 가진 다른 신자가 자기 분야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른이가 받은 은사가 좋아보여서 그것을 달라고 떠를 쓰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분명히 다른 은사를 주십니다.

 

2,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교회의 은사운동은 종종 은사의 목록들 속에 나타나 있는 몇 9가지만을 은사로 취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이 다양하고 풍성한 은혜를 제한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은혜로 대하시며, 은혜로 대하시는 중에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어떤 수단으로 하나님이 각 개인을 확인시키고, 또 그 각자를 통해 어떤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필요한 어떤 수단을, 어떤 일들을 은사로써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사를 다를 때 은사의 목록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은사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따지며 목록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목록을 보고 그 은사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 자리에 있는가를 보아야 됩니다. 그것이 목록이 아니라 '의미'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려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과 그 은혜를 어떤 방향으로 베풀고 계시는가를 성경이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앞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1-3에 이미 그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맨 처음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은사의 방향과 목표가 구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넓은 의미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는 것을 포함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우상에게로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은사의 목표요, 모든 은사를 한 줄로 꿰는 고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목표로 하는 것과 우리를 인도하는 그 의미의 어떤 원칙들을 따져보지 않고 무작정 목록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오해가 있습니다. 방언, 예언, 신유, 환상 등으로 조목조목 따져 계급을 만들려고만 합니다. 이는 초월주의 성향 때문입니다. 신자들 간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그르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제나 모든 종교를 초월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이 본능 때문입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이 세계에 있는 어떤 종교단체도, 어떤 종교나 어떤 미신이라 할지라도 초월의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들이라도 종교가 있으며, 그 종교가 종교로서 힘을 갖는 이유는 언제나 이 초월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독교 된 정당성은 초월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정당성을, 진리 됨을 계시로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주술적입니다. 주술적이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할 때 어떤 주문을 외우면 된다는 방법은 알지만 그 주문의 뜻도 모르고 그 주문을 누가 듣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는 이런 하나님이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너희 열조의 하나님이며, 아브라함을 부른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이며, 너희 선조를 믿게 한 하나님이며.." 이렇게 자신을 설명하십니다. 이 계시가 기독교의 기준이고 근거이고 토대입니다.


 바로 이것.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우리를 몰아가기 위하여 은사가 허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은혜와 목적은 결국 하나님을 알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를 조금 더 세분화해서 말하면, 계시를 분명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이 모든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3, 교회에 주신 은사는 권투의 타이틀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를 초월성을 띤 것으로 사모하고 있습니다. 초월적일수록 자기 지위가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은사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은사를 사모하면 그 은사는 그에게 올무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은사를 체험하고 나서 오히려 그것으로 신앙을 방해받고 있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랑으로 삼는 거기에서 더 발전하지 않습니다.

 

또는 받은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높히고 전도하라고 한 것을 자기를 높히고 돈받고 병고쳐 주는 주술사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된 사람들이 은사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잘못 사용하여서 그런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성령님이 아니고 도구입니다. 도구를 주셨는데 그것이 자기가 잘나서 받은 것처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은사가 목표하는 대로 그 신앙이 발전되지 않고 늘 그 은사를 훈장처럼 달고만 다니는 것입니다. 은사가 계시를 분명케 하리라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14장으로 가면 더 확실해집니다.

 

고전 14:1-6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신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왜 방언보다 예언이 낫다는 것입니까? 예언은 계시가 밝혀져 대화가 되지만 방언은 대화가 없습니다. 방언은 혼자서는 얼마나 신령한 기쁨 속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몰라도 옆에서 보면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옆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기보다는 예언하기를 원하고, 만일 방언을 하려면 통역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통역할 자가 없으면 집에 가서 혼자 하라는 것입니다.

 

은사란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유익케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당사자나 그에게 허락된 은사를 보는 교우들을 유익케 하려고 주신 것이 은사입니다. 목회자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다 다른 은사를 허락하셨는데 누가 목회에 성공하였다 하면 그것을 흉내내려고 하든지 복사를 하려고 한느 것은 성령님의 사역에 반기를 들며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왜 내게는 이 작은 것만 주십니까? 저사람처럼 큰 것을 주셔야 하지않습니까? 그래서 성령이 주신 것을 무시하고 그사람이 받은 것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어느 것을 주시든지 그것을 가지고 창조해 나갈때 주님을 기쁘게하는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이 은사를 우리에게 허락한 이유는 교회의 모든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 분명히 알고, 그래서 신앙이 더 좋아지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되므로 내 신앙생활에 구체적인 도움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은사가 교회에 허락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사를 사모할 때 만약 그 은사를 통해 주를 닮기 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런 은사는 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으로 이미 족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 은사가 성경에 있는 계시보다 더 나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만 특정 은사를 주셨다고 해서 오만 방자하게 행동하고, 그것으로 남과 나를 분리시켜 계급화 한다면 그것은 은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려는 이런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경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모두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을 조심하며, 그 조심 속에서 열심을 내는 신앙으로 성숙해가기를 권합니다.

 

이제부터 성령께서 하늘나라가 넓게 퍼지기를 원하여서 주신 도구를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그 은사를 바로 사용하고 주님을 높히고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며 서로 도와서 하늘나라를 이루어 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 교회에 덕을 세우고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더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