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항상 있는 것인가(창세기 18;18-19)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8-19)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정성껏 맞이했고, 그 분들 가운데 한 분 ‘여호와’로 등장하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창18:1-2). 예수님에게서 아브라함은 생명의 소식과 죽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후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직접 대면한 일은 없습니다. 이때가 한번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과 한번
이 말씀은 예배에도 적용됩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에 드리는 가장 좋은 암송아지 요리해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대접한 것은 예배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기름지고 가장 좋은 암송아지는 하나님께 예배, 번제를 드릴 때 올려드리는 제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라고 한 것은 예배, 소제를 드릴 때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배, 항상 있는 것인가? 한번 있는 것인가?” 물음을 던집니다. 아브라함은 본문 이후로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한번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있는 기회가 아닌 이 한번의 기회에 예수님을 굳건히 잡았습니다. 그리고 큰 복을 받았습니다. 금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다음 주에 드리면 되는가요? 이것이 예배자인가요? 예배는 ‘여호와의 도와 의와 공도’를 증명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방역지침으로 모든 교회의 현장 예배를 금지했습니다. 모 기독교 단체의 대표는 솔선하듯 한국교회가 영상 예배로 대체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책들이 “예배는 다음 주에 드리면 되지 않는가”라는 인식에 기인한 것이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라면, 엄중한 사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부터 한국교회의 예배가 “금주에 못 드리면 다음 주에 드리면 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개탄스럽습니다(저는 이것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랍니다.). “지금 예배는 내가 마지막 드리는 예배이다.”라는 심정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자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종점까지 역사는 진행됩니다. 그러나 나에게 내일이 있는가요? 하나님이 내일을 살게 해야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나에게 마지막 날인 것입니다. 예배도 지금이 나에게 한번 있는 것이다라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코로나19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사멸시키시기 전에는 명년 길게는 그 후년까지 지속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합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한국교회는 지금 같이 공적 예배를 잠정 중단해야 하나요? 정상화 될 때까지 실시간으로 예배를 송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대비인가요? 그 기간 동안 과연 성도들이 어떤 예배관을 갖게 될까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행4:42-47). 예배하는 자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성도들의 인격적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예배의 본질이 사라져도 되는 것인가요? 서구는 자유주의로 교회가 폐쇄되었고, 한국은 방역지침 행정명령으로 교회가 폐쇄되는 것은 아닌지 무거운 마음입니다. 그 뒤에 누가 있는 것인지 경각하게 됩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한국 초대교회의 거룩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주체인 평양소재의 교회들이 1938년 9월 9일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예의라는 헌의안을 올려 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인 1948년 9월 9월 김일성 정부가 평양에 수립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제강점과 공산주의를 겪으면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의 수많은 교회는 오늘날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일본 제국에 교회를 갖다 바친 결과입니다.
교회도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 정부의 방침에 협력하여야 한다는 명분 아래, 하나님 말씀보다 사람들 말에 치우치게 된다면, 너무나도 큰 일입니다. 예배가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결혼한 부부가 사랑을 하는데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역사 가운데 그런 만행을 한 몰지각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을 가장 존경하고 추앙한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1918-1989입니다. 24년간 통치하는 기간 인구증가 정책을 펼쳤던 그는 가정 주부들의 가임기간을 다 파악했고, 그 기간에 남편들은 외부로 절대 나가지 못하게 비밀경찰들로 감시하게 하셨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럽 여행을 가신 분들은 도둑을 조심하라는 말은 가이드에게 많이 듣습니다. 양국, 프랑스, 이탈리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도둑을 일삼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루마니아인들입니다. 정부가 가정을 간섭한 결과입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는데 정부에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듯이, 예배도 정부와 상의할 이유가 없습니가. 예배를 정부와 논의한다는 자체가 어쩌면 배교에 길에 들어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고 가다가 그 종국은 지난 80년 평양에서 있었던 역사를 반복하게 될지 모릅니다. 역사는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실상 예배를 중단하면서, 우리에게 예배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어두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아비전교회 이재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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