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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주일 설교 3편

구원의 계획 2011. 6. 18. 14:23

삼위일체주일 설교 3편

[1]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요 14:8-21)


서 론 :
금주는 교회절기로 삼위일체주일로
삼위일체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 나누겠습니다.
본장의 전개 형식이 대화를 통한 것이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와 빌립과의 대화를 보여준다.
빌립은 브니엘에서 야곱에게(창 32:24, 30),
삼손의 부모에게(삿 13:3-22)
혹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출 34:4-8)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야 말로 전지 전능(마 28:18; 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자,
곧 성자 하나님이시라는(롬 9:14; 빌 2:6)
사실에 대해서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한편 16, 7절에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행 2:1-13)이 약속되어 있다.

1. 빌립의 하나님 증명 요구(8-10절)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가로되 :
본절에서 빌립은 앞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신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신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예수에게 여쭙는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
본절에서 '우리에게'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는 당시 모든 제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의
전제란 예수의 선포된 말씀을 이해고 믿기 앞서
구약의 신적 현현(Theophany)을 기대한 듯 싶다.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의 질문가운데 '족하겠나이다'는 표현은 기대와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빌립이 주께서 앞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 '처소', '예비', '영접' 등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기만 하면 족하다는
어리석음과 빗나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빌립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함으로써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자세로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빌립의 요구는 신성을 지닌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우리에게')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 빌립은 현실주의 신자의 모형이니
육신으로 아버지를 보고 믿겠다는 일반인의 요구이다(영암 김응조).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
주께서는 미련한 질문을 던진 빌립을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다시 자세히 가르쳐 주신다.
본절에서 '너희'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전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나 구체적으로
'빌립'이란 이름과 '네'(헬, 쉬)란
대명사를 특별히 사용하신 것은 특히 빌립에게
주목하시는 끝까지 자상함을 잃지 않으시는 예수의 배려도 볼 수 있다.
한편 주께서는 빌립에게 '알지 못하느냐'고 도리어 물으심으로써
빌립의 영적인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하나님과 예수의 동질적인 존재성에 대해서
지금가지 예수께서는 누차 강조하였다
제자들은 벌써 3년 동안이나 예수와 함께 있으며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 그리스도(빌 2:6)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전히 영적으로
부족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빌립과 제자들에게
7절에서 하신 말씀과 거의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심으로 그들에게 예비된 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신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여기 이른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분의 도덕적 연합의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삼위 일체의 교리로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을 기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목적을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명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며 이루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명과 사역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반영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만 수행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는 아니시며
도리어 자신의 신적 지위을 낮추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스스로 맡으신 분으로서
능동적으로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본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상호 보완적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동질성을 가지고 계심이 설명되어 진다.
즉 성부와 성자는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동질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근거가 된다.

2. 하나님과 예수의 동역하심의 증거(11-15절)

1) 행하시는 사역을 보아서(11-12절) -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10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성부와 성자간의 동질성을 믿으라고 거듭 요구하신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성부와 성자의 일치 동일성을 믿지 못하거든 '그 일'로 인하여 믿으라 하신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일으키신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한편 '나를 믿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테 모이'는 단순히 그 자신이 가치를 충분히 보증하는
'자신의 말씀' 증거에 강조를 두며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다.
12절에서도 예수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도
이미 성부와의 동질성에 근거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

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그들이 이해했다면
성자가 하는 일을 자신들도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자신들의 연합한다는 의미이므로
제자들이 놀랄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에서이다.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
'이보다 큰 것'이란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대로 주의 일보다 크다고 한 것은
복음의 전파가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던
시대보다 양적으로 확대될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의 구원받았으나 오순절 이후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넓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즉 주께서 크다고 표현하신 것은 질적인 면에서
향상된 위대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양적인 팽창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아버지께로 감 즉 예수의 승천이 더 큰 일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있었던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암시한다.
도한 이보다 큰 것은 반드시 질적인 의미에서 더 큰 영적 이적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Robertson). 즉 성령의 강림과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복음전파 사역에 있어서
(행 1:8) 제자들이 예수의 선교보다
더 확대되고 큰 능력으로 이렇게 될 것을 가리킨다.

2) 기도 응답을 보아서(13-14절) -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 기도의 응답에 대한 근거는
주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이다.
또한 구하는 것이 응답 받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하는
기도가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구할 수 있는 근거,
즉 보혈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시행하리니 :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믿고 구하라.
이것이 신자에게 부여된 특권이다(영암 김응조).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인들은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본절은 윗절의 약속을 거듭 고조하는 말씀이다. 13절과 본절의 차이는
'내게'(헬, 메)가 추가된 것뿐이다.
한편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13절과 비교할 때
본절은 예수 자신이 더욱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서 예수께서는 명백히
기도 응답의 시행자이심을 강조적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절과 14절을 종합하면 기도의 대상은 '내게'이며,
기도의 중보자는 '내 이름을',
기도 응답의 시행자는 '내가 시행하리라'이다.

3) 계명 지킴을 보아서(15절) -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본절은 주의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본절에서 주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이 가르치신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
사랑이란 어떤 구체적인 정형이 있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방을 아끼고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 관계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3:16)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당연히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이는 의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2. 성령의 역사의 증거(16-21절)

1) 함께하시는 보혜사의 영(16절) -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 본절의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어 '에로테오'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본절의 '또 다른'(헬, 카이 알론)이란
표현은 보혜사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중보자 되시는 예수 대신에 중보자 되실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서 '곁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와 '부른다'라는 의미의
'클레토스'가 합쳐진 단어인데 '도움을 받기 위해
곁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다. 이 낱말은 영어 성경에서
'상담 자', '위안 자', '돕는 자'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영원토록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항상 믿는 자들의 인격과
삶 속에 거하시면서 각자의 필요와
고충을 이해하시며 적절한 은혜로 채워 주신다.

2)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17절) -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
본절의 '토 프튜마 테스 알레데이아스'의 경우 헬라어에서는
소유격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 해석이 문제가 된다.
즉 이를 주격의 의미로 보면
'진리의 영'이 '진리가 되신 영'으로 해석되어
'성령이 진리'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소유격은 요한에게 있어
거의 그렇듯이 복적격적인 의미를 지님이 거의 확실하다(Brown).
즉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요 혹은 진리를 증거하고 밝히시는 영이다
(Morris, Bernard, Barrett).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
'빛'이란 예수를 깨닫지 못하던 어두움인 세상이 예수가 보내신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영적 통찰력이 없고,
영적 지식도 없으며, 영적 분별력도 없고, 성령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에 무지한 이들이 아닌
예수를 아는 제자들은 그와 동격이신 성령도 당연히 안다.
본절과 16절에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 세 번 사용되었는데
각각의 문장에서 전치사의 위치를 달리하는데
이것은 동일한 단어의 사용은 피한
요한 특유의 강조적 용법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3) 함께하시는 영(18절) -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
'고아와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파투스'는
요 13;33에서 제자들이 '소자들아'(헬, 테크니아)라고 불리운 것을 상기시킨다.
유대에게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여겨졌으므로 제자들은
스승이 죽었을 때 고아라고 불리웠다.
아무튼 유대 사회에서 과부와 함께 더불어
가장 불쌍한 부류의 사람들로 보호자를 상실한 고아가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확실한 보장을 하셨다.

너희에게로 오리라 :
'오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는 역시 3절과 같이
분명한 미래를 의미하는 현재형으로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모두 표현하는 이중 암시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부모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이 큰 힘이 된다.

4) 다가오시는 영(19-20절) -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
'조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키 미크론'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임박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의미하지만 20절의 표현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 그리스도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 이전가지,
즉 종말론적 중간시기로 볼 수도 있다(Brown).
이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안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나 불신자들은
영적 어두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망각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나 성령을 보지 못하는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를 본다. 이 표현 역시 1차적으로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신약시대에 계속될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속사역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주의 재림시 영광가운데서 예수를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에는 : '그날'(헬, 에케이네 테 헤메라)이란 종말론적 완성의 날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야 임재를 나타내는 주의 날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본서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과 거의 의미차이 없이 쓰였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본절에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새로운 교회 시대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될 종말의 날을 가리킨다.
이 날이 이르면 성부와 성자간의 본질적 일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믿음을 통한 영적 인격적
연합에 대한 신비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성부와 성자간의 연합과
성자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는 전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묘사하는 밀접성을 참조하라.

5) 계명을 지킴으로 함께하시는 삼위일체의 영(21절) -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본절에서 주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주를 사랑하는 자이며
주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계명'이란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새계명'을 가리키는데(13:34),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

결 론 :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영원토록 보존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사는 자, 그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사랑할 것을 명하신다. 성령님은 이처럼 내 곁으로 오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작정하시고, 약속하시고, 성취하신다.
다시금 성령님을 바라본다.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모두 생각나게 하실 성령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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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위일체의 하나님 (시 8:1-9, 고후 13:13)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신조에 대해 요약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고백을 차례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고백을 하면 될 것을 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라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만,
우리는 왜 꼭 이런 식으로 축복기도를 하는 걸까요?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주 어려운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교회력으로 삼위일체주일인데,
그 의미를 오늘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고백입니다.
유대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 기독교와 달리합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하나님에 대해
알려준 예언자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호멧교나 힌두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이들과 별 차이없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예수는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일러준 위대한 성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유대교도나 마호멧교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고수하는 ‘그리스도 중심 모델’을 가지고는
대화가 안 되니까, 대화가 되는 방식으로 하자.
즉 차이점 가지고 얘기하지 말고,
공통점을 가지고 하자, 그게 뭐냐?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유대교도들이 믿는 하나님,
그리고 마호멧교도들이 믿는 알라나 결국은 한 분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 중심 모델,
즉 신중심모델로 대화하자,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공통점도 중요하지만 차이도 중요합니다.
대화를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대화의 내용이 풍성해지고
뭔가 기여할 바가 있는 것이지, 나의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대화의 의미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즘,
가장 local한 것이 가장 global한 것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지구화가 좋다고 해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버리는 것이 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문화를 다 내버리고 나면,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서구사람이 되자는 건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 것입니까? 결코 아니지요.
서구적인 것이 다 옳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서구문화는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고,
그런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듯이,
아시아문화는 아시아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으로 그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말했듯이
모든 민족의 경계와 문화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기독교는 기독교의 특별한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로 충분하다면 하나님이 왜 예수를 보내셨겠습니까? 기독교의 독특성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특별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명확하고 완전하게 나타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빠져버리게 되므로 결코 이것을 양보할 수 없다는
고백 위에 기독교는 서있습니다.

흔히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그러면 갖게 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심판자, 전쟁의 신, 질투의 신, 역사의 주관자...
대체로 이러한 하나님이지요. 물론 다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하나님은 대체로 인간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면서 명령하고
주관하고 구원하고 심판하며,
자기 외의 다른 어떤 신도 용납하지 않는 제왕적 이미지의 신,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신 앞에서 인간은 한갓 미천한 존재일 뿐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신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잘못을 책망하고
호령하고 군림하고 지배하고 심판하는 제왕적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고 짐을 나누어지며, 스스로 피흘리며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종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길을 걸어갔다면,
예수님은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대로, 교만으로 인하여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는 섬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삶 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이단 가운데 종속론(subordinationism)이라는 게 있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전체 집합이라면 예수는 부분집합입니다.
성자 예수는 성부 하나님께 종속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입장을 거부합니다. 예수는 부분집합이 아니라,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빠지면 하나님이 다른 신이 되어버리는
생명이요 알짬, 온집합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성경에서 구원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요 5:39)

이것을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중에서
누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시나요? 당연히 예수님이시지요.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우리와 대화하시고,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의 사랑을 구하시고 우리에게 의지하기도 하시며
참여와 협력을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증거하는 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당신을 비우시고 사랑하시고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한 분이 다른 한분을 포섭하고,
어느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종속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본질이 같은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제왕적 신관을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쌍방적인 신관을 견지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전체주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와 일방적 지배,
군림, 전쟁과 폭력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래서, 결국에는 전체주의가 극복되고 민주주의가 싹틀 수밖에 없으며,
일방주의가 사라지고 대화와 협력,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문화가 꽃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은 우리 삶을 은혜롭게 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절대적으로 높고 거룩한 분이 군림하지 않고 나를 존귀하게 여겨주고
조건없이 나를 사랑해줄 때,
그 사랑 앞에서 갖게 되는 변화의 경험을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군림의 신이 아니라 은혜의 신이십니다.
당신의 힘을 동원해 억지로 굴복하게 만드는 신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스스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 앞에 옷깃을 여미고 마음과 뜻을 다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사랑의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철들게 하고,
이 사랑이 우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합니다.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은혜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새로운 감성을 가지고 느끼고 반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은혜를 깨닫고 난 뒤, 세상 만물을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눈에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요 저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따스한 햇살 한 줌,
풀 한 포기, 바람 한 줄기, 그 어디에도, 높은 곳에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낮아져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이 묻어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곧 구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우주만물에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 깃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만물을 은혜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또한 삼위일체론입니다.

여러분, 미켈란젤로(1475-1564)라는 미술가 아시지요?
이분은 자기의 작품에 결코 서명을 남기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스틴 성당의 천정벽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받은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을 벽화그리기에 몰두했던
그는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그때 문득 그에게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어떠한 작품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기에 자연을 보면서도
이와 같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말할 때 또 한 분 빼어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성령이 참여하셨으며,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을 불러 쓰실 때도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돕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생각을
알 수도 없고 관계 맺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인격이시기도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하신 일과 그분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깨닫게 하며 소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을 지으신 뜻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의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깨달아집니다.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성경의 모든 기록도,
역사 속의 모든 사건도, 죽어있는 화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소통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역사를 대할 때 깨닫고 감동하며,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소통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이 성령을 또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본질을 같이하는
하나님의 다른 위격이라고 말합니다.
성자 예수를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듯이,
성령을 또한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은 그만큼 소통을 중시하고,
대화와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참여와 대화 없이는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이요 대화하는 것이요
나누는 것이요 그러한 과정에 마음을 모아서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히 10:25), 마음을 함께 하여 기도하고 떡을 떼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행 2:43-47).

요즘의 추세는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 흐름입니다.
그 동안 성령을 우리가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는 무슨 물질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성령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가령,
성령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찬양이든지,
기도든지, 성도의 교제든지 그 어느 것도
더 가치있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이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고, 깨달음이 사랑의 나눔이나
실천과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골 3:23).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몸이 성령의 전이므로
(고전 3:16, 고후 6:16)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롬 12:1)

요컨대, 삼위일체론은 그것을 사변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자칫 편향적으로 흐르기 쉬운 우리의 삶을 균형있게 바로잡아주는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것을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동하는 역사가 되도록 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오류와 복잡한 시대상황 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지켜내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싸움의 결과물입니다.

모쪼록,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고 서로 통하면서
존재하였듯이, 우리의 삶 역시 이 하나님의 신비하신 교통 가운데서
서로가 연결되고 하나가 되어서 점점 퇴색되어져가는 이 시대의 정의, 평화,
생명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부활시키는
창조적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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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六月 첫 주일ㅡ. 삼위일체

교회의 신비와 전례의 정점이 되는 축일입니다.

주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교회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나누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에 더욱 충실하게 하소서.

우리 모두하느님의 초월성과 그 깊은 신비를 묵상합시다.


삼위일체ㅡ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세분 하나님이 아닌,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버지이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들이신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오늘은 성 삼위이신 성령과 함께 묵상합시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업을 완성하고
승천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이 `빠라끌리또'(협조자)는ㅡ
그리스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로 누구를 보라,
하거나 법률 소송에서 누구를 두둔해 발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10일, 부활하신 날부터 5일이 지난 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날은 오순절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농경 축제로 첫 곡식을 봉헌하는 감사절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선사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던 온 집안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머리 위에 내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2,2-4)


성령은 바람처럼 아무도 모른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령은 불처럼 더러운 것을 태워 사람들을 내 것으로 정화하고
열정을 불어 넣어주고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혀 같은 것들이 불길처럼 이란, 불 혀(火舌)라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온 일을 전하는 선포와 신적 훈계의 선포를 가리킵니다.


성령은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을 새 공동체로 형성시켜주는 일치의 힘이십니다.

불 혀 형상은 물론 성령의 본래 모습이 아니고 다만 상징일 뿐입니다.

불은 물건을 비추고 뜨겁게 하며 혀는 말할 때 씁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열정적으로 전할 사도들의 사명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비롯해 땅 끝까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강림은 바벨탑 사건(창세 11,1-9)을 뒤집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각기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했지만
한데 모인 사람들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성령은 분열돼 있는 사람들을 일치시키는 힘이십니다.
사도들은 본래무식하고 우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같은 그들은 성령과 그 은혜를 받은 다음에야 모든 것을
확연히 깨닫고 자기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들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이 가득 차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첫 설교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 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사도 2,32-33)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감명을 받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

이 말을 듣고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고 입교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교회도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살아 있는 교회로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강림 날은 교회의 생일입니다.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성령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의 역사(役事)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대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는데 민중 앞에서, 법정과 의회에서,
그리고 관헌과 왕 앞에서 성령이 주신 지혜와 언변으로
진리를 강력히 전해 당대의 학자들을 침묵시켰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여러 가지 기적을 성령의 힘으로 행했고 가야 할 곳을 식별했으며
악인들의 생각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사도들은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항상 성령의 인도로 복음을 선포하는데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저희를 보살펴주시는 주님,
삼위일체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