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장1절~13절)
부제/불같이 임하는 성령님
예수님은 많은 사역을 하시고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동행했습니다”(1절).
고향을 찾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집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제자들도 동행했습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고향과 어머니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명절 때마다 극심한 교통대란을 겪으면서도 우리가 고향을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고향은 뿌리와 같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선조들의 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타향살이가 고달플 때 우리 마음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생깁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고향에 가셨는데, 그 행보가 조금 특이합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가셔서 집이 아닌 회당을 먼저 찾아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고향을 찾은 예수님
“안식일이 되자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이런 것들을 어디서 배웠는가? 저런 지혜를 도대체 어디서 받았는가? 기적까지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닌가?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했습니다”(2~3절).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을 본 고향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떻게 저렇게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을까’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거나 말씀을 가르칠 때 보통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영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죄를 지은 모습이지만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놀란 사람들
둘째, ‘예수님이 어떻게 가르치는 지혜를 가졌는가’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셋째,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고,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고, 누이는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장 가까운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속이 상하고 답답해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선입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변해도 얼마나 변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저 사람 잘 알아. 학교 다닐 때 저 사람의 모습은 이랬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불같이 임하는 성령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배척당하는 법이다’”(4절).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본인이 예상하고 있으면 상처를 덜 받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체험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성령님을 만났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분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니 나의 사고방식과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성령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이게 무슨 일인가?’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기가 설명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어느 날 갑자기 불같이 임합니다. 불같은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사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반항하고,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던 사람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뀌고, 날마다 찬양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모든 결정이 달라집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저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성령님을 만나고 변화하십시오.
성령님을 만나면 변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영국에서 13년 동안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분은 설교와 목회에 탁월할 뿐 아니라 지성까지 겸비한 분입니다. 어느 날 그 분이 서재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상한 전율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쏟아지면서 가슴속에서 감동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성령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설교를 하면 불이 쏟아지고 귀신이 떠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목사가 성령님을 만나면 교회가 변하고, 성도가 성령님을 만나면 가정이 바뀝니다. 싸늘하고 평화가 없던 집에 사랑이 찾아옵니다. 아내를 폭행하던 남편이 변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성령님을 만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혜도 받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만나십시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인데 왜 저러지?’, ‘어떻게 기적을 행하지?’, ‘어떻게 지혜로운 말을 하지?’ 등의 선입견을 가지고서 그 사람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예수님을 몰라본 사람은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내 아내와 남편이 변할지 모릅니다. 성령님을 만나 변화되는 일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 자신도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기를 원하면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게 오는 시간은 아침일지 새벽일지 밤중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 잠을 자다가 왜 깨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서 깨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늘 기억하고 계십니다.
믿고 의지하십시오
믿지 않으면 기적과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에서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악한 도시에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고향에서는 기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저 아픈 사람들 몇 명만 안수해 고쳐 주셨을 뿐 거기서 다른 기적은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5~6절).
여러분, 믿음이 있어야 기적을 베풀고 축복을 줄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기적과 축복을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은 최소한의 기적을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에서 최소한의 사람에게만 안수하고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도 자신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 민족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받지 않는데 어떻게 줍니까. 사랑도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절하고 배척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 가까이 오시면 환영하십시오. 성령님이 오시면 받아들이십시오.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또한 누구에게 올 지도 모르지만, 성령님은 어느 날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눈빛이 달리지고 표현하는 언어도 바뀔 것입니다.
전도의 원동력, 말씀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계속해서 전도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열정은 열심히 전도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여행길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먹을 것이나 자루도 챙기지 말고 전대에 돈도 넣어 가지 말라. 신발만 신고 옷도 두 벌씩 가져가지 말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 집에 머물라. 어느 집이든지 너희를 반기지 않거나 너희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에 붙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 제자들은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7~12절).
이 말씀에서 일곱 가지 전도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거지 전도’라는 것을 했습니다. 거지 전도는 돈을 모두 수거하고 기차표만 주고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를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처음 거지 전도할 때는 황당했습니다. ‘어디 가서 어떻게 전도를 하나?’라고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기차표 하나 들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먹을 것을 주고 돈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전도했습니다. 전도하기 위해 다니는 곳마다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성령님이 이끄셔서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나니 힘이 샘솟았습니다.
전도의 일곱 가지 원리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실 때 전도의 일곱 가지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전도할 때에는 둘씩 짝을 지어서 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전도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혼자서 하면 공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전도하면 한 사람은 뒤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뒤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소리를 내서 기도하면 안 됩니다. 몰래 숨어서 해야 합니다. 때로는 눈을 뜨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응원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이 기도 덕분에 힘을 얻습니다. 사실 전도를 시작하면 두렵습니다. 전도하려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 사람은 안 믿을 거야’, ‘이 사람은 내 말을 거부할 거야’, ‘저 사람은 아는 것이 너무 많아’ 등의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전도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능력이 있으면 두려움은 없어집니다. 무당을 만나도 두렵지 않고 귀신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그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전도는 성령님이 하십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귀신을 제어할 능력이 있습니다. 쓰지 않아서 모르는 것뿐입니다. 지금 당장 쓰십시오. ‘악한 귀신이 떠날지어다’라고 명령하십시오.
셋째, 돈에 의지해서 전도하면 안 됩니다. 전도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 하나면 됩니다.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도하십시오. 전도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지위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넷째, 신발만 신고 옷도 한 벌이면 됩니다. 실력 없는 사람이 자꾸 사람들을 끌고 다니려고 하고 돈과 명함을 두툼하게 들고 다닙니다. 여러분의 얼굴과 인격이 명함이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어느 곳에 가든지 한 곳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환영하지 않으면 그냥 떠나십시오.
일곱째, 전도의 핵심 메시지는 회개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하십시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제어하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수많은 환자들에게 기름 부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13절).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는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점차 차가워지고 회의하고 연설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능력이 있었지만 현대 교회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능력이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 예수님 전하는 것
현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나치게 귀신을 쫓고 병만 고치려고 합니다. 이러한 교회는 위험합니다. 어떤 교회는 귀신을 잘 쫓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귀신도 떠나고 병도 고치는 것이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회가 병듭니다. 결국 교회가 극단으로 갑니다. 성경은 예언을 무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만 하면 큰 사고가 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귀신만 쫓고 예언만 하는 곳에 가지 마십시오. 귀신만 쫓고 병만 고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둘째, 지나치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것을 무시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것은 없다. 귀신 쫓고 병을 고치는 것이 무슨 교회냐? 교회는 구제하고 봉사하고 사회 참여하고 착한 일을 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교회지 그런 일을 왜 하느냐?’ 이러한 생각만 하는 교회는 더 위험합니다.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교회가 학교나 병원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결론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귀신을 쫓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을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극단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 이단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이단은 한자로 다를 이(異)와 끝 단(端)을 씁니다. 즉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99%가 같은데 끝에 가서 마지막 하나가 다릅니다. 그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기독교와 같다’, ‘우리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결국 끝에 가보면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일을 지나치게 주목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신앙의 인격과 사랑을 강조하십시오. 여러분, 인격을 잊지 마십시오. 더불어 균형과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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