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속의 하나님은 우상이다(막2:1~12)
부제/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원형수 목사
본문은 가버나움이란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가버나움은 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마을로서 우리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곳입니다.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셨던 주님이 애굽에서 돌아온 후 처음 머문 곳은 나사렛이지만(마 2:23)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는 대부분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마 4:13).
그러므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막 1:21~28)를 고치셨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막 1:29~31)를 고치셨고, 각색 병든 자(막 1:33~34)를 고치셨으며,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를(막 2:1~12) 고치신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이와 같은 기사와 이적을 어느 마을보다도 많이 경험하고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 냉담했습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주님은 강렬한 어조로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남들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도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남달리 체험하고서도 냉담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우리에게 책임과 의무를 동반합니다.
1.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논쟁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주님께 고침받은 문둥병자의 증언으로 소문이 퍼져 드러내놓고 다닐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얼마간 은신해 계시던 주님은 며칠 후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오셨는데,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네 친구에 의해 들것에 실려온 중풍병자도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로 인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우기(雨期) 때만 막아놓도 평상시에는 통풍구로 사용하는 지붕 통풍구를 뜯고, 그곳으로 병든 친구를 달아 내렸습니다. 이때 하늘나라의 복음를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기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데 사람이 되어 죄를 사하겠다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다’고 분개했습니다. 갑자기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듯 냉기가 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분노하고 분개하는 뜻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어째서 당신들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말이 더 쉽겠는가.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 사람이 곧장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를 떠메고 왔던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갔습니다.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깜짝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하나님을 극구 찬양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중풍병도 고쳤다는 말씀일까요? 병 고치는 이야기는 예수님만의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부처님도 하셨고, 마호메트도 하셨고, 공자님도 하셨습니다. 오늘날 모모 목사님, 기도원 원장들, 이단의 어느 교주 옛날에 박태선, 현신애 권사등도 병 고쳤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와 같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일까요?
여러분은 성경이 다른 종교의 경전들과 같다고 보십니까? 불교의 경전에 실린 기사와 이적의 이야기가 부처님의 신성을 드러내듯이, 성경의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은 예수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라고 불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경전들과 달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성경이 하나님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신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관심 밖의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느냐, 하나님과 나와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려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기껏해야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쳤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다’는 증언은 기껏해야 예수님이 석가나 공자나 마호메트와 다를 바 없는 인물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경전들과 다릅니다. 똑같은 기사와 이적을 기록했어도 드러내는 목표가 다릅니다. ‘예수께서 무엇을 행하셨다’가 아니라, ‘무엇 무엇을 행하시는 그 예수는 누구시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2.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이시다’는 증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보십시오. 지붕을 뚫고 내려오는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서기관들이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고 분개했을 때 주님은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알았다”(막 2:8)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겠다”(2:10)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병 고치는 권세’가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서기관들에게 알게 해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왜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느냐?”고 비방했습니다. 죄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가지고 계시는데, 사람으로서 어찌 하나님처럼 ‘죄를 사했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정말 죄 사하는 권세를 가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서기관이나 예수님 모두 죄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예수께서 만일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가 없이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사건은 예수께서 과연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말이 쉽겠느냐?” 여러분은 어느 말이 더 쉽다고 보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입니까? 예수님께는 실제적으로는 죄를 사하는 것보다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이 더 쉽습니다. 죄를 사하시려면 죽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들고 가라는 말씀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확인될 수 없지만,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그 자리에서 확인될 수 있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함으로써 “예수가 분명히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들고 가라”고 하셔서 중풍병자가 제 상을 들고 걸어갈 수 있다면 예수님은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심이 입증됩니다.
그러나 그 중풍병자가 상을 들고 걸어갈 수 없다면 예수님께서 “죄 사함 받았다”고 선언하신 말씀은 여지없이 거짓말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사람에게 떠메여 들어왔던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즉시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네 사람에 의해 떠메여 들어왔던 그 사람이 제발로 걸어 나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걸어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죄는 누가 사합니까?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오직 한 분 되시는 그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한 분 되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예수께서 ‘이런 병도 고치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능력 많으신 분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오직 한 분 되시는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즘 성도들이 죄 사함 받은 기쁨을 잊어 버리고 능력만 좆아다닙니다.
3.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은 우상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그 사실을 목전에서 목격하고도 한 사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12절에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라고 한 것은 한 사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앞에 하나님이라면 예수그리스도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영광을 돌린 그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한 분뿐이신 그 하나님은 지금 그들 앞에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 자신들의 관념적이고, 교리적이고,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자기들의 우상 앞에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마땅히 영광을 돌려야 할 하나님은 예수리스도이신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돌린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관념 속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고도 하나님이라고 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만일 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예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여, 중풍병자의 죄뿐만이 아니라 나의 죄도 사해 주옵소서”라고 예수 앞에 죄 사함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입니다.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이란 우상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바로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진정 여러분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가버나움 회당의 목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을 교훈 삼아 너희는 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먼저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본문이 증언하는 내용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듣고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앞에 ‘주여, 중풍병자의 죄뿐만 아니라 내 죄도 사해 주십시오’라고 죄 사함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없이 인생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죄의 문제에 둔감할까요?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을 뵈올 때 한결같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죄 사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구하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5절-11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죄 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부활하심을 믿어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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