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대와 목회
강의/김의환 총장(총신대)
목회의 위기
1. 위기의 시발점은 항상 목회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목회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목회를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아도 때때로 그 마음 속에는 ‘내가 꼭 이 길을 가야되는가’ 하는 회의를 품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목회적 사명감이 흐려지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확신이 점점 약해질 때 위기가 옵니다.
저는 4년 전에 제 동료 친구로부터 “김 목사님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물어 보니까 자기가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잘 되어 가고 부흥되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은 늘 ‘내가 왜 이 길을 들어서 이 고생인가’ 하는 후회가 생기곤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날 이 때까지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 내가 목사 되기를 원해서 스스로 택한 것이라면 또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확실한 사명을 주셨고 주님이 강권적으로 나를 부르신 줄로 믿었기 때문에 여기까지의 숱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 또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각오하고 시작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심을 확실히 체험했기 때문에 내 자신이 목사 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목사님에게, 주님이 부르신 일에 대해 늦었지만 다시 한번 깊은 자기 반성을 해보라고, 영적 재고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또 주님이 분명히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확신이 새로워질 때 목회도 새로워질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와의 만남 이후 그 동료의 목회가 아주 새롭게 변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2. 목회의 어려움은 목회 과정에서 오는 탈진감 때문입니다.
탈진감은 대체로 40대 목회자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미국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40대에 목회를 도중 하차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에 칼빈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도 40대에 목사직을 그만두고 큰 제재소의 매니저로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그분이 섬기던 교회는 미국에서도 꽤 부흥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그만두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만두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장로님들이 교회 성장에 대해서 음으로 양으로 압력 넣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는 목사 나름대로 교회 성장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도 장로님들은 늘 “목사님, 작년보다 금년에 증가된 교인 수는 얼마입니까? 성장이 부진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원인 분석은 해보셨습니까?” 하며 다그치는 바람에 너무너무 괴로워서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던 사례입니다.
또 큰 교회당을 세워 놓고 그만둔 분도 있습니다. 미국의 풀러 신학교 가까이에 있는 레이크 애브뉴 처치(Lake Avenue Church)는 미국에서도 큰 교회축에 들어가는 교회인데 그 목사님이 교회를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사표를 내고 떠났습니다. 목사님이 떠나고 난 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교인들이 목사님을 볼 때마다 “언제 이 교회당을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고 말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당 새로 지어 놓고 얼마 안 됐는데 장로님들이 기도할 때 “아직도 빈 자리가 많사오니 빨리 채워 주시옵소서” 하면 뒤에 앉아 있는 목사는 가슴이 철렁합니다. 수직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한 설교를 해주길 바라고 기도하면서 “오늘 전무후무한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하면 그 전에는 그럼 전혀 은혜 받지 못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려 깊지 못한 장로들의 기도인데 그런 것들이 목사에게는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부터 풀러 신학교에서 시작한 교회 성장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교회의 수적 성장을 굉장히 강조하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한동안 교회 성장학 세미나가 얼마나 유행했습니까? 교회 성장학 세미나에 갔다와서 배운 대로 자기 교회에 적용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잘 됩니까?
미국의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활용한 ‘전도 폭발’은 미국적 상황입니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주일학교 출신이라 성경을 잘 알고 있고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면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플로리다의 코라리취 프레스 앤 처치가 그런 전도 방법을 통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교회에서 왔다고 하면서 아파트 문 열어 달라고 하면 쉽게 열어 줍니까? 또 성경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 성경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잘 받아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적인 교회 성장학의 방법이 한국적인 상황에서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나름대로 교회를 성장시켜 보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지나친 목회 추진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오게 마련입니다. 그걸 흔히 ‘성공 콤플렉스(Success Complex)’ 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성공만을 추구한 나머지 부교역자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줍니다. 월요일에 쉬지도 못하게 하고 주 7일 근무하게 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집은 잠깐 들르는 정도이고 교회에서 모든 생활을 하게 합니다.
가족들과 깊은 대화를 하지 못하다 보니 점차 가족 관계는 소원해지고,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는 교인들의 아버지이지 우리 아버지는 아니라고 하는 반발심을 갖게 되고, 부인은 부인대로 “우리 목사님은 목회에만 미쳤지 나는 사랑하지 않는가 보다” 하는 이야기를 동창들과 만나 털어놓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파생됩니다.
양떼들을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사모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은 아무리 교회가 크다고 할지라도 목회에 있어서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가정 목회에 실패한 사람은 일반 목회가 아무리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인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두 문화를 비교해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직선적으로 다 털어놓습니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이 쉽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속에 있는 말을 빙빙 돌려서 완곡하게 표현하다 보니 센스 없는 사람들은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또 저같이 성질이 급한 사람은 빨리 말하기를 바라다 보니 요점이 뭐냐, 요점부터 말하라고 윽박지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말하려다가 마음이 상해서 아무 말 안하고 그냥 가버리기가 일쑤입니다.
부산의 선교사 가운데 테드 하드라는 가톨릭계 신부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해서 미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만, 그분이 한번은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러 왔으면 곧장 이야기를 안 꺼내고 왜 빙빙 돌리다가 맨 마지막에 꺼내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집에 시골에서 어떤 목사님이 찾아왔는데 손님이라 커피와 케이크를 대접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는데도 정작 찾아온 목적은 말하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을 때 “서로 문화가 다르니까 그쪽 문화를 존중해 주어라. 행여 미국 문화처럼 빨리 요점만 이야기하라고 재촉하면 선교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니, 상대방이 말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려라”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본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너무너무 괴롭더랍니다. 점심 시간이 되었는데도 안가기에 점심까지 대접했답니다. 점심을 다 먹고 나더니 가겠다고 일어서더랍니다.
선교사님 집은 일본집을 개조해서 살았기 때문에 현관이 높고 신장에 신을 넣고 들어오는 곳인데 신장에서 신을 꺼내 신발 끈을 매면서 하는 말이 “선교사님 오늘 내가 온 목적은 말입니다……” 하면서 슬쩍 이야기를 꺼내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더니 “신발 끈을 매기 시작했으니 그냥 여기서 말하지요” 하면서 요점 몇 가지를 말하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저 양반이 진작 이야기했더라면 좋았을 걸 이제야 이야기하여 남의 속을 이렇게 태우는가’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라도 대화가 통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결국은 충돌 상태에까지 이르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심리학자들은 어려운 인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괴로워하는 현상을 ‘엘리야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 가서 “하나님, 살고 싶지 않으니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에 가서 보니 광야에 있는 로뎀나무는 별로 크지 않은데 음지에 있는 로뎀나무는 꽤 컸습니다. 광야에서 햇볕에 노출된 로뎀나무는 자그마한 관목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복잡한 인간 관계 때문에 쫓겨간 엘리야가, 바로 얼마 전까지도 갈멜 산에서 대승을 거둔 영웅이었던 엘리야가 쫓기는 몸이 되어 방향 감각도 없이 겨우 피한다고 간 곳이 광야였습니다. 광야로 가긴 갔는데 피할 곳이라곤 이 로뎀나무밖에 없으니까 로뎀나무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로뎀나무를 보면서 몸 전체도 못들어가고 겨우 머리만 들이박고는 ‘하나님, 못 살겠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라며 기도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비참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충돌이 생기고 위기가 생깁니까? 몇 가지 저의 목회 경험을 통해 보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목사님들이 어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때,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과 부딪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이전한다든지, 혹은 교육관을 하나 세우고자 할 때 등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항상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인데, 그들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하는 데서 위기가 옵니다. 또는 교회 발전을 위해, 영성 발전을 위해 유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할 때 거기에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트레디아스나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 메소살라지 등의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우리 교회에서도 활용하고 싶은데 반대하는 세력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 데서 위기가 옵니다.
이와 같은 시설 변화나 새로운 프로그램 도입, 또는 영적 성장을 위해 목사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발생하는 이러한 충돌이나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충돌에 대한 구체적인 위기 관리의 방법론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칫 잘못하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쉽고, 권위적인 반응을 보이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교인들 앞에서 “우리 목사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교회 유익만을 위해서 일한다”라는 확고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사님이 하는 일이라면 팥으로 매주를 쑨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검증된 인격, 검증된 리더십, 존경받는 목회자의 위상이 먼저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님 자신의 철저한 자아 검토, 자기 반성, 자기 관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 몸을 쳐서라도 복종시키는 사도 바울의 자기 관리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목사님 자신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소화해 낼 수 있는 마음의 자세, 기쁨과 사명감에 감격하여 어떤 어려움도 수용할 수 있는 기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LA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치노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님이 저의 친구였기 때문에 언젠가 그 교회에서 저를 초청해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장로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목사님이 사택으로 잠깐 자리를 비우자 장로님들이 자기네 목사님 자랑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자랑을 한다면 목회 잘 한다, 설교 잘 한다, 학벌 좋다, 이런 것들을 자랑할 줄 알았는데 한결 같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 목사님은 항상 기뻐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기쁨으로 목회하는 것을 보니 괜히 자그마한 일로 인해 슬퍼할 일이 전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목사님같이 항상 기쁜 마음으로 목회하는 목사님을 만나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고 이 곳 저 곳에서 자랑하는 소리를 들으며 저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나를 평할 때 “우리 목사님은 항상 기쁨과 감격 속에서 목회한다”라는 말을 하겠는가 싶었습니다. 몇 주 전 당회에서 내가 호통친 것이 생각나고 며칠 전 집사 불러다 호통친 게 생각나고, 사모에게 큰소리 친 것이 기억나다 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반성했습니다. ‘아하, 항상 기쁜 마음, 포용하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 감격 속에서 목회하는 자세, 이런 것들이 교인들 앞에 보여질 때 어떤 사소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크게 용해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위기 관리 방법론
1. 목회자는 전문가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목회란 목사가 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교인들에게, 장로나 집사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교인들에게 “목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두 번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택한 본문이 에베소서 4장 11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선물을 주셨는데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 정관사가 하나씩 붙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의 목사와 교사는 호칭은 둘이지만 정관사가 하나뿐입니다. 그 말은 즉 가르치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부르시고 준비시킨 주의 종, 목사를 보내시고,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기 스스로 “나는 이 교회를 위해 주님이 부르셔서 전문인으로 키워 주셨다”라는 파송 의식을 갖고 자신있게 목회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로 세웠고, 하나님이 사도로 세웠고, 하나님이 전도자로 세웠고, 하나님이 목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준비시켜 세웠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파워 베이스’, 원동력이 됩니다. 그 말은 교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어도 전문가 의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전문가라고 하면 적어도 법과 대학과 법과 대학원을 졸업한 변호사, 의과 대학과 의과 대학원을 졸업한 의사, 신학 대학과 신학 대학원을 졸업한 목사 등 이 세 직종에 속한 사람을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적어도 3년 간의 수업을 마친 후 인턴 생활을 거쳐서 목사, 변호사, 의사가 된 사람들이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전문가로 알고 존경합니다.
의사가 의료 행위를 할 때 전문가 의식을 갖고 자신있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환자 수술을 하는데 옆에 있는 간호사한테 혹시 내가 수술할 때 잘못한 것 있으면 충고해 달라고 부탁하는 의사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수술대 위에서 환자를 수술할 때 간호사는 칼, 가위, 붕대 등 의사가 달라는 것만 주어서 수술하는 것을 돕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의사가 어디를 째야 되는지를 다 알고 실시해야 하는데 간호사가 옆에서 “선생님, 그보다 더 째야 됩니다. 더 깊이 찌르세요.” 등등 자꾸 참견하면 환자의 고통만 심해집니다.
전문가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전문가답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의 목회 사역에 적용한다면,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목양 사업을 맡았고 또 그걸 위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전문가 의식을 가지고 양떼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강단에 세울 외래강사는 누가 가장 적절할까, 신학적으로 우리 교회에는 어떤 분이 가장 적절할지는 목사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누구누구 세우세요. 내가 은혜 받았는데 누구 세우세요” 하는 소리에 압력을 받아 그 강단에 세워 놓으면 목사가 그 동안에 가르쳐 놓은 모든 것이 일시에 와해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신앙 생활의 기본은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하는 것이다”라며 청지기 교육을 시켰는데, 어떤 부흥사가 와서 “이런 불황에 십의 일조를 더 보태도 살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십일조를 꼭 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때는 상황에 따라서 백일조로 바꿔야 한다”며 백일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강사가 떠난 다음 그 교회는 백일조다 십일조다 하면서 한동안 시끄러웠고, 십일조로 바꾸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불필요한 중독이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목사가 목회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실수해서 교회에 부덕이 되거나 교리적으로 탈선해서 이단성이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이 파송한 그 목회자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존경하며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가끔씩 부흥사를 통하여 가르치는 것도 있겠지만 가급적이면 목사님 자신이 에베소서 4장 11절 말씀을 근거로 하여 목사가 목회에 있어서 전문가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 혹시 생길 수 있는 충돌도 미연에 면할 수 있습니다.
2. 효과 있는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대화를 할 때는 반드시 내가 할 말을 다해 버리면 안 되고 가능한 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의 한국 대통령 중에 어느 분이 모처럼 교계 원로들을 모셔놓고 말씀을 듣는다고 해놓고는 자기 할 말만 다하고 초청한 사람들에게는 말할 기회도 안 주고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하고 악수하고 말아버린 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리더로서 별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리더는 남의 말을 우선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들도 어떤 위기와 문제에 대한 오해가 생길 경우 본인 쪽에서만 자꾸 이야기하려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하고 나면 상대방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반쯤은 해결이 됩니다. “성질 급한 목사님이 꾹 참고 끝까지 다 들어 주더라.” 그러면 문제는 이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상대방 이야기는 전혀 들을 생각도 없이 불러다가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선은 이렇다 후는 이렇다라고 판단해 버리면 의미가 없습니다.
3. 목적을 확인해야 합니다.
불러서 말을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와 문제의 이슈를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안에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느냐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핵심을 찾아 내어 그것을 같이 의논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대체로 핵심 꺼내기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꺼내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크리스찬 리폼 처치’라는 칼빈신학교를 키우고 있는 교단이 있는데 교회 안에서 목사님과 장로님들 간의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일 년에 한 번씩 ‘충돌 관리’ 당회가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말 당회에서 지난 일 년 동안 서로에게 혹시 쌓인 것이나 맺힌 것이 있으면 다 털어놓고 푸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당회에서도 그렇게 해보자고 했더니 다들 거절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가는 싸움이 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습니다. 싸움이 나도 엄청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미국 문화는 상대방에게 지적을 해 주면 곧바로 수용하지만, 우리는 조그만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도저히 수습을 못하기 때문에 꼭 하고 싶으면 공개적으로 하지 말고 개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적을 하더라도 개인 차원에서 해야지, 공개적으로 하면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인격 모욕으로 여기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가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제가 1968년에 화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그 교회는 강단이 넓으면서도 꽤 높았습니다. 강단 뒤에는 문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설교하러 올라가서는 문을 탁 닫아 버렸습니다. 왜 문을 닫느냐고 나중에 물어 봤더니 강단에 설 수 있는 자는 목사님뿐이고 목사님만이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또 목사님이 문을 닫으면 아무도 열 자가 없다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설교자는 오직 목사님뿐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전문가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강단도 높게 만들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장로들도 할 말이 있다. 우리는 듣기만 하느냐. 혹시 잘못 전하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장로님들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한 다음에는 반드시 장로석에 내려와 장로 대표와 악수하고 강대상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것도 장로님이 먼저 손을 내밀면 목사님이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친 다음 제가 “보통은 예배가 끝난 다음 목사와 장로가 밖에서 악수를 하는데 왜 이 교회는 예배 도중에 전체 교인들 앞에서 장로가 손을 내밀고 나면 목사가 손을 내밀어 악수하느냐”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당연히 설교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대표 장로는 양떼들을 대표해서 그 설교가 정말 우리가 믿는 신앙과 교리에 어긋나지 않고 똑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인정해 주는 의미로 악수를 한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약에 목사님과 장로님 간에 감정이 있어서 장로님이 악수 안 해주면 어떡하느냐고 물었더니 다음 주일부터 그 목사는 설교를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 역사가 얼마나 되었냐고 물었더니 백오십 년 정도 되었답니다. 그러면 그 동안 장로가 목사님 설교가 틀렸다고 손을 안 내민 적이 몇 번 있었느냐고 했더니 꼭 두 번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 한국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 교회에 만약 이런 습관이 있다면 목사님이 매년 쫓겨날 것입니다. 조그마한 개인적 감정이 있다 해서 목사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끝장나는 것 아닙니까? 교인들이 그 이유를 물어 볼 때 마음이 불편해서 안 나왔다고 대답해 버리면 전체 교인 앞에 받아들일 수 없는 목사님으로 완전히 낙인 찍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도 다 우리와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충돌 방법의 관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충돌 관리의 당회가 한국 교회에서도 필요하냐고 물어 보신다면 저는 절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를 조용히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4. 문제 해결을 위해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냥 될 대로 되라지 뭐. 누구는 배짱이 없나?” 이런 식의 태도는 목사가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목사는 어떤 문제가 생길 때 교회 평화를 위해,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한 교회에서 20년 동안 목회하면서 여러 가지 실수를 많이 했지만, 그 중에서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큰 실수는 교만한 마음에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장로나 집사들이 이제는 내 말에 순종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누가 마음의 상처를 받고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어도 찾아가서 위로해 주기보다는 ‘자기가 마음이 상했으면 자기가 풀어야지. 감히 목사가 오길 기다려? 건방지게’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목사에게 순종해야지. 무슨 잔소리야’ 하는 배짱이 생깁니다.
제가 그 동안의 목회를 돌이켜 볼 때 목회 말기에 있어서는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는 자세가 아니라 특별히 권위적이고 교만한 목회, 군림하는 목회를 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됩니다.
제가 뉴욕의 어느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담임 목사가 요청하기를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이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는 자세로 부드럽게 하시면 제가 목회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강성 목회를 해왔으니 목사님도 메시지를 전할 때 강성 메시지를 전해서 교인들을 휘어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님이 부드러운 설교를 하고 가면 목사님만 천사 되고 나는 어려워집니다. 지금 근질근질한 데가 많으니 마구 때려 주세요” 하는데 저한테는 참으로 난감한 숙제였습니다.
결국 저는 그분의 주문을 무시하고 그저 부드럽게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 잘 섬기라고, 어떤 극적인 이벤트가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조용한 메시지만 전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밑에 앉아서 제 설교를 들으니 마땅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확 들었다 놓았다 해야 하는데 살살 긁기만 하니까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나오더니 “여러분, 구호 제창합시다”라고 말하며 몇 가지 구호를 선창했습니다. 그러니까 전 교인이 따라 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잡종이다.” 저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결국 순종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순종이 아니면 잡종이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라는 구호였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전부 손을 들고 따라서 외쳤습니다.
부흥회 강사가 강도 높게 설교하지 않으니까 본 교회 목사가 강도를 높이기 위해 구호 제창을 한다 생각하니, 저분이 나한테 실례를 하는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내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분이 돈을 많이 들여 큰 교회당을 샀습니다. 어리석지만 큰 무리를 했습니다. 미련한 것 같이 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미련한 자가 곰을 잡는다”라고 주장합니다. 목회를 그런 방법으로 해야 되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직까지 이에 설득당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 위기가 올 때 그런 독특한 방법으로 해결을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방법이 가장 모범적이라거나 이상적인 해결 방법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5. 충동 관리를 제도화해야 합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는 장로님들이 서른 세 분 계셨는데 한국의 각각 다른 교파에서 장로가 되어 왔고 또 각양각색의 특색을 가진 분들이라 다루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한국 목회도 어렵겠지만 미국에서의 이민 목회는 한국 목회보다 어쩌면 더 어렵습니다.
장로님들이 다 양같이 보이지만 다 뿔이 달린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서로 말을 많이 하려고 애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회에서는 영어가 달려 별로 말을 못하다가 교회에 오면 우리말로 자유롭게 할 수 있고 특별히 당회에서는 장로님, 장로님 하고 높여 주니까 마음속에 있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 장로가 33명인데 한 사람이 5분만 이야기해도 밤을 새워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부 다 발언권 안 줄 수도 없고 또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줄 수도 없으니 어떤 안건에 대해 한사람만 발언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한 사람이 발언할 때 가급적 5분 이상 하지 맙시다” 이렇게 결의해 놓으니까 누가 어떤 문제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도 “아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하면 “아 그렇지” 하고 더 이상 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의견이 추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혹 교회 안에 두 가지 세력이 있어서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완충 지대를 만들어서 서로 싸우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당회 안에서 싸우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 교회는 장로님들이 지나치게 많이 싸우는 교회로 유명합니다.
그 친구 목사는 지금 하늘나라에 있지만, 그 친구가 그 교회에서 목회할 때 장로님들이 얼마나 싸웠는지, 월요일마다 우리가 모일 때면 그 친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맥이 탁 풀려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들과의 교제도 무의미해지고 괴로워 보이기에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어제도 장로님들이 언쟁을 하다가 나중에는 멱살을 잡고 싸우는 걸 보니 너무너무 괴로웠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한 두 번이 아니고 날마다 반복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것이 그 교회 전통이었습니다.
그 친구 목사는 한창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분 장례식 때 제가 미국에서 일부러 와서 조사를 했습니다. 장례식 마치고 그 교회 장로님들이 제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목사님, 우리가 섬겼던 목사님과 가장 친하셨던 분이 김 목사님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후임자로는 김 목사님이 제일 적절한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니까 “사실 우리가 목사님을 잘 모셔야 하는데 목사님 앞에서 우리가 너무 싸웠고 너무 부덕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괴로워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목사님을 새로 모신다면 심기 일전하여 잘 섬기겠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꼭 오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답답하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저희는 꼭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재촉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을 꼭 하라면 하지요. 내가 이 교회의 청을 거절하는 이유는 죽기 싫어서입니다. 이 다음에는 내가 죽을 차례인데 왜 내가 그 청을 수락합니까?” 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여러분, 되도록 충돌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충돌 관리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걸 적용하기 위해 일부러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에 두 패로 갈라지면 다수결로 해서 억지로 밀어붙이기로 하기보다는 그분들로 하여금 양팀의 대표들, 언제든지 영향력을 가장 많이 행사하는 분들로 하여금 서로 의견을 조절하여 다음 당회에 올 때까지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님이 직접 나서서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알아서 다음 회기까지 보고하시오”라고 하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타협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공개해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량진교회의 림인식 원로 목사님이 일본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가 늘 존경하고 항상 가까이에서 모셨던 한경직 목사님이 한번은 자기를 부르더니 영락교회 당회를 거느리기가 너무 힘들어 최근에는 사표를 써서 때가 되면 내놓으려고 품에 안고 다닌다는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목회의 성자로 알려질 정도로 부드러운 한경직 목사님도 오죽 마음이 상했으면 사표를 써서 품에 안고 다닐 정도였을까 생각하고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니 감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후배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서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교회를 몇 개 개척했습니다. 주일에만 가서 사역을 하고 심방은 부목사님에게 맡겼습니다. 에덴교회, 새한교회 등 여러 교회가 있는데 그 중의 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많이 커져서 교인이 거의 1천 명에 육박해 가는데 이 목사님이 마음이 상해 그만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장로님들은 목사님이 사표를 냈으니 일단 받는다며 쉽게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사표를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결국은 그 교회를 떠났는데 지금까지 목회의 길이 안 열려 그때 사표낸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감정에 이끌려 사표를 내는 식의 행동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주님이 보내 주신 줄 알고 인내를 가지고 한 교회에서 길게 목회를 해야지, 자꾸 옮겨다니면 목회로 대성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한 군데에 오래 있어야 하고 한 우물을 파야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데도 오래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잘 키울 수 있겠다 싶으면 인내하십시오. 목회가 처음에는 어렵고 힘든 것 같아도 나중에는 점점 재미있게 발전할 수도 있고, 내가 이 교회를 안 떠나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겪었던 첫번째 충돌은,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한국의 아세아연합신학대학(ACTS)처럼 미국의 ITS(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워 제3세계 지도자들을 불러다가 전부 장학금으로 공부시키려고 계획하며 부딪친 충돌입니다. 반드시 학교는 세워야 되겠고 장학금 모금도 해야 되겠기에 ‘이 ITS를 위해 TV로 주일마다 설교를 방영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 해야겠으니 장로님들도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 중 일부가 “목사님, 선지학교를 세우는데 그냥 세울 수 있습니까? 돈이 있어야죠. 또 제3세계 지도자들을 불러다 전부 장학금을 주어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 재정으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서 자금을 주로 대고 내가 TV로 호소를 해서 미국의 전체 교인들이 헌금해 주면 그것을 가지고 건립하면 됩니다. 뭐 ACTS가 시작할 때 돈이 있어서 한 줄 아십니까?” 하고 몰아붙였습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을 세울 당시 한철하 박사와 저는 상도동 이웃에 살았기에 자주 만났습니다. 그래서 바둑을 두면서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인데 선교도 전략적으로 하자”라고 말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을 세우자. 그래서 제3세계 지도자들을 불러다 키우자. 우리 특수한 신학교를 만들어 보자”라고 결의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운 게 아세아연합신학대학입니다. 저는 그 일 때문에 교단에서 어려움이 있어 손을 뗐습니다만, 미국에 가서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ACTS와 같은 ITS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방송으로 호소하였더니 헌금이 많이 들어와서 교사도 큰 것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운영이 잘 되고 있습니다만 처음에 그걸 시작하려고 했더니 장로님들이 펄펄 뛰며 말렸습니다. “그건 개교회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단이 달라붙어도 힘든 판인데 목사님의 이상은 훌륭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이야기를 했습니다. “ACTS도 무일푼으로 시작했습니다. 꿈만 있으면, 비전만 있으면 됩니다. 합시다.”그러나 “ACTS야 한국 교회가 배경이 되었지만 이민 교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며 만류했습니다.
이 문제로 몇 달 동안 씨름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투표로 결정을 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부결이 되면 나는 이 교회를 사임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로 내 이상을 따르는 사람, 내 목표를 따르는 사람과 함께 따로 나와서 개척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효과를 봐서 8 : 6으로 ITS를 세우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반대한 분들은 ITS를 하면서까지 교회를 섬길 수는 없다고 하면서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 때 넓은 대지를 얻게 되어 15,000평의 땅을 샀습니다. 미국은 한국처럼 그렇게 땅값이 비싸지 않습니다. 15,000평을 사서 3,500평짜리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님, 우리 집 다 팔아도 안 됩니다. 이거 너무합니다”라고 하기에 “그러면 천천히 지어가면서 합시다. 이것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것으로서, 후세들에게 이민교회도 이렇게 교회를 세우고 후진 양성 교육을 시켰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니 한번 해 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 15,000평의 땅을 사서 교회당을 지었는데, 저의 이상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라 어려움은 많았지만, 소명의식을 갖고 따라 주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잘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인들이 “목사님 둘 중에 하나를 택하세요. 이렇게 옮겨 왔는데도 힘드니 신학교를 포기하든지 교회를 포기하든지 결정하십시오. 둘 다 어떻게 감당합니까? 아니, 물이 고여야 푸지 물이 안 고이는데 자꾸 바가지만 댑니까?” 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맨 먼저 대헌금을 통해 목표액을 달성해야만 문제 해결이 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습니다. 왜냐 하면 장로님들이 대헌금을 하지 말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안 하면 어떻게 이 큰 사역을 감당합니까? 그것이 결국 의견 충돌이 되고 저에게 큰 위기로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동역자들이 김 목사가 교회당 짓다가 포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그 바쁜 틈에도 늘 제자들과 식사를 했고, 죽기 전날 밤에도 식사하셨고, 오순절에도 함께 식사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도 저녁마다 식사를 준비하여 장로님 부부를 청하여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이 너무 놀라워하며 맨 먼저 하는 말이 “어느 장로님이 같이 옵니까?” 하고 묻기에 “아뇨, 장로님 부부만 옵니다”라고 했더니 너무나 좋아하였습니다. “목사님, 왜 저희 부부만 초대하신 겁니까?” “그냥 와 보면 압니다.” 저녁 식사를 정성껏 준비하여 대접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로 불렀을까 궁금해 하다가 저녁을 다 먹고 난 후 커피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목사님, 오늘 대접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당 건축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시죠?”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못 이기는 척하고, “예, 장로님, 사실은 장로님과 그 문제를 상의하고 싶어 이렇게 모셨습니다” 하면 저녁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겠지만 자기 부부를 인격적으로 대접해 주고 정성을 다해 식사까지 대접했다는 점에서 이미 마음이 풀렸으므로 같이 걱정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장로들이 힘을 모아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서는 얼마나 했으면 좋겠습니까?”
“장로님, 우리 교회에서 나보다 장로님 형편을 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장로님과 상의하고자 하니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를 간절히 드린 후 “장로님, 내 생각에 장로님이 최선을 다하면 3만 달러는 낼 수 있겠습니다”고 말해도 장로님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제가 준비 작업을 잘 했기 때문에 거액의 요청이 있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옆에 있는 부인을 쳐다보며 “그렇게 할까?”라고 말합니다. 그 상황에서 안 하겠다는 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 3만 달러 책정받고 자기들이 밥값 다 했다 싶어 가겠다며 일어섭니다. 아마 장로님 부부가 집에 가면서 “여보, 오늘 저녁에 우리 비싼 밥 먹었소” 하며 웃지 않을까 생각하며 저는 “주여, 저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로님과 집사님들을 일 대 일로 만나 어려운 고비를 다 잘 넘긴 후 교회당을 건축하고 나니까 그 동안 원망, 불평하고 짜증내던 사람들이 교회당 지은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 짓는 동안 떠나간 사람들도 교회당을 다 짓고 나니까 서서히 돌아왔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돌아온 사람들은 절대로 문제를 안 일으켰습니다. 왜냐 하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같이 목회 못 하는 사람도 정말로 큰 과실 없이 목회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더 제가 위기를 겪은 것은, 어떤 장로님 한 분이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자꾸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분이 돌아다니면서 제가 독재를 한다고 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을 저대로 놔 두면 안 되겠다 싶고, 선동하는 사람은 본보기로 뿌리째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불렀습니다.
당회를 마치고 난 다음 전체 당회원이 있는 앞에서 “아무개 장로, 이 당회 마친 후 내 방으로 와요”라고 아주 엄한 음성으로 말하니까 다른 장로님들은 목사님이 드디어 결심을 했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제 방으로 들어왔는데 창 밖을 보니 장로님들이 어떻게 결말이 나나 보려고 다 밖에 서 있습니다.
제가 그 장로님에게 “장로님, 내가 왜 장로님을 부른 줄 압니까?” 하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장로님과 나하고는 우리 교회에서 같이 동역할 수 없습니다. 동역할 수 없으니까 다음 주일부터 우리 교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장로님도 먼 데서 오느라 불편하실 것입니다. 장로님 집에서 가까운 교회 목사님한테 이미 전화를 해 놓았어요. 그 목사님은 성격이 아주 부드러워서 장로님을 아주 잘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성격이 강해 매사에 장로님과 부딪히기 일쑤니, 피차 서로를 위해 장로님이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로님이 떠나는 것은 간단하지만 내가 떠나면 교회가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장로님, 다음 주일부터는 나오지 마십시오. 자 이리 와서 손잡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이 장로님하고 나하고는 같이 동역하기가 심히 힘드오니 다음 주부터는 서로 헤어져서 예배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헤어져도 서로 원수가 되지 말고 서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하니 그 사람도 아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을 열어 주니까 그냥 나갔습니다. 밖에 있는 장로님들이 기다리다가 어떻게 되었냐고 하는데 아무 말 안 하고 자기 차 있는 데로 그냥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그 장로님이 왔습니다. 그분이 한국에서는 어떤 큰 교회의 수석 장로로 아주 배짱이 센 분이었습니다. 제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무릎을 꿇고 기어서 제 앞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목사님, 그 동안 큰 죄를 지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많이 힘드실 텐데 보탬이 되지 못하고 거침돌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거침돌이 된 나를 용서해 주세요. 용서만 해 주신다면 이제부터는 디딤돌이 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그 장로님을 껴안고 “주여, 거침돌이 된 이 장로가 이제부터는 디딤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후로 이 장로님이 얼마나 디딤돌 역할을 잘 했는지 모릅니다.
그 장로님이 어떻게 변하게 됐는지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부인 덕분이었습니다. 그분 부인도 권사님이었는데 그 권사님이 “여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찍어서 말할 때 다른 장로님은 다 좋은데 당신은 목사님 목회 철학에 따르지 못하고 항상 불평만 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교회 봉사를 잘 못해 목사님한테 나가라는 말을 듣습니까? 당신 내 남편으로서 부끄럽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 다른 30명의 장로는 다 칭찬해 주는데 나만 이렇게 목사님 책망하고 싫어하는 것을 보니 문제는 아마 나한테 있는가 보다.’ 이렇게 깨닫고, 또 부인의 말에도 크게 감동을 받아 그 다음주부터는 교회 봉사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양떼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모든 양떼를 다 믿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마 겪어 본 사람들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그런 방법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제가 그분을 은혜로 이끌지 못했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했던 것이 제 목회의 큰 오점으로 남으면서 충돌 관리를 그렇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후회가 앞섭니다.
우리 속담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종으로서 “우리 목사님은 너무너무 즐겁게, 아니 감격 속에서 목회를 한다.” “우리 목사님은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위해서 보내 주신 훌륭한 목사님이다”라는 기본적인 존경을 받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기독 자료 > 메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교회 식별법 (0) | 2011.06.28 |
---|---|
성공적인 목회자의 성품 (0) | 2011.06.28 |
칼빈의 제네바 학살? 역사적 무지로 인한 오해 (0) | 2011.06.28 |
교회가 커질까 겁나 ‘쫓아내는 설교’ 한다” (0) | 2011.06.28 |
목사의 약점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 (0) | 2011.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