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15:21-28 )
어느 교회에서 설교 시간마다 조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다. 목사님이 속이 상했다. 그날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여러분 천국 가고 싶으세요. 아니면 지옥에는 가고 싶으세요. 천국 가고 싶은 사람은 아멘 하시고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 일어나세요.” 목사님이 일어나라는 말을 크게 하니 집사님이 졸다가 잠결에 일어나라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목사님이 “집사님 지옥에 가고 싶어서 일어나셨나요?” 집사님 대답이 “글쎄요 목사님,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지금 일어난 사람은 목사님과 저하고 두 사람 뿐이군요.”
이제 날씨가 더워지는데 설교시간에 졸음이 많이 올 때이다. 졸아도 교회 와서 조는 것이 좋다. 그래도 주님 품안에 왔으니까. 이왕이면 맑은 정신으로 설교에 은혜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란다. 30대 새파란 예수라는 젊은 청년이 혜성처럼 나타나 문둥병자도 고치고 중풍병자도 고치고 흉악한 귀신도 쫓아내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게 되니까 자연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자 그 당시 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기 질투하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공모까지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잠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때 그 지방에 여자 한사람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고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무당을 찾아서 굿도 해보고 유명한 병원에도 찾아 가보고 좋다는 약도 다 써보고 우상 앞에 기도도 해 보는 등 별짓을 다 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데 그 지방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예수님에게만 나가면 어떤 문제라도 해결되고 아무리 흉악한 귀신이라도 쫓아낸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여인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열일을 다 제쳐놓고 당장 예수님을 찾아갔다. 이미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 속에 둘려 쌓여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그렇게 고함을 질렀는데도 예수님은 뒤도 돌아보시지 않으신다. 그래도 계속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 제발 좀 고쳐 주십시오”라고 고함을 지른다. 여자가 너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야단을 치니까 같이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 저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자꾸 지르니 한 말씀하셔서 저 여자를 보내십시오”라고 한다. 성가시다는 것이다. 귀찮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뒤따라오는 그 여자가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은 ‘나는 이방 여인인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어머니로서 너무 안타까워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너하고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으니 얼마나 냉정하고 야속한 말씀인가?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런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 발아래 넙죽 엎드려 절하면서 더 간절히 애원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아주 무시하고 모욕적이 말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이 여인은 이방 가나안 여인이었다. 유대인은 이방나라 사람들을 개같이 취급하던 때이고 더욱이 여자는 당시 사람 축에 끼지도 않았을 때였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 온 이 여자는 이방사람에다 여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개”라는 말까지 사용하셨다.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매달렸다. “옳습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개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개들도 자기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부디 부스러기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는 간청이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부스러기 은혜만 주셔도 내 딸이 병이 낫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믿음인가? 얼마나 확신있는 믿음인가?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리는 믿음인가? 그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정작하시고 싶었던 말씀을 드디어 하신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절). 할렐루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말씀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모두 ‘아멘’하는가? 우리들 속에 있는 모든 소원도 다 이루어지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원이 무엇인가? 건강인가? 사업의 번창인가? 자식들의 진로인가? 식구들 구원인가? 결혼문제인가? 취직문제인가? 물질문제인가? 복잡한 인간관계의 매듭이 풀어지는 것인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처럼 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란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이 가나안 여인이 어떻게 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이 여인은 자기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소원성취의 첫걸음이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바알 신을 숭배하고 다른 잡신들을 섬겼던 사람이었다. 만약 이 여인이 계속 지금까지 자기가 섬겼던 미신과 우상숭배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자기의 소원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나?
내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실패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예수님께로 가지고 나올 때 그것이 소원 성취의 첫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옛날 아람 나라에 나아만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문둥병에 걸렸다. 손이 오그라들고 눈썹이 빠지고 피부에 점이 생기면서 썩어 들어가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때 그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붙잡아 온 어린 여종 하나가 있었는데 그 여종이 이렇게 일러 주었다. “이스라엘에 가면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에게 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은 체면과 지위, 위신도 다 접고 그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래서 그 불치의 문둥병을 고쳤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로 가지고 나오시기 바란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아무리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이라도 예수님께 가지고 나오면 예수님이 그 짐을 대신 져주실 것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실 것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주실 것이다. 어떤 문제든지 예수님께 가지고 나오는 것이 소원을 이루는 첫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두 번째로 22절이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이르되”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 문제를 가지고 멀리서 예수님을 쳐다보고만 있지 않았다.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간절한 표현이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소원을 간절하게 예수님께 부르짖어 알렸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애끓는 심정으로 우리의 소원을 주님 앞에 아뢸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못 본 채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어느 날 어떤 젊은이가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많은 지식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 같은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가 그 젊은이를 물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청년의 머리를 물속으로 쳐 박아서 누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놓아 주었다. 물속에서 머리를 든 청년이 숨이 막혀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젊은이, 자네가 물속에 있을 때에 제일 간절하게 소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숨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자네가 지식을 구한다면 물속에 얼굴을 쳐 박고 있을 때 숨쉬기를 간절히 소원했단 것처럼 그런 심정으로 공부를 하고 지식을 구해라 그러면 자네는 틀림없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안고 있는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가장 적당한 때 가장 좋게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뭐라고 소리 질렀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은 ‘나는 예수님 앞에 내 놓을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공로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만 바랄 뿐입니다.’ 이런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이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 이 여인은 먼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다. 무슨 뜻인가?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다는 말이다. 내 딸이 저렇게 흉악한 귀신이 들린 것은 그 책임이 엄마인 나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했다.
어떤 회사에서 직원을 뽑는 시험을 쳤다. 70여명이나 시험이 응시했다. 시험은 간단했다. 지원자들을 차례대로 줄을 세워서 한사람씩 시험장에 들어가게 했다. 시험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양 사방 벽에 큰 거울이 하나씩 걸려있을 뿐이었다. 사방 벽에 걸린 거울에 자기 얼굴이 비치고 있다. 지원자들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쓰여 있는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라고 답안지에 적도록 되어 있었다.
첫째 질문이다. “당신은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두 번째 질문, “당신은 지금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이 여하의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세 번째 질문,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마지막 네 번째 질문, “만일 당신이라면 지금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을 채용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시험 문제 전부였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놀랍게도 70여명 가운데 단 한 사람만 합격을 했다. 합격한 사람은 네 가지 질문에 모두 “아니오”라고 대답한 사람이었다. 그 회사는 자기의 실력을 뽐내면서 큰소리치고 교만한 사람보다는 정직한 사람 겸손한 사람 자기 부족을 알고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을 원했다.
여러분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문제가 있을 때마다 ‘너 때문이다’ ‘그 사람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 들으시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잘못입니다. 내 책임입니다. 내 탓입니다. 내가 못났습니다. 모두 나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와 같이 겸손히 참회하는 심정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 기뻐 들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부끄러운 점과 약점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본능이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숨기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예수님께 고백했다. 여러분, 기도에는 비밀이 있을 수가 없다. 부끄러움도 있을 수가 없다. 체면도 있을 수가 없다. 만약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그대로 털어놓지 아니한다면 예수님께서도 계속 침묵하실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리 수치스러운 것이라도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었더라도 남김없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주님께 고백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가?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이 간절하게 솔직하게 부르짖으시기 바란다.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애통하는 심정으로 기도할 때 응답의 역사가 분명히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여인은 자기 딸을 고칠 때까지 인내하며 예수님께 매달렸다. 이 여인의 큰 믿음이 바로 여기 있다.
예수님에게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뒤따라가면서 그렇게 소리 질러도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제자들도 시끄럽다고 야단치며 무시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겨우 하신 말씀이 개같이 취급하는 말을 했다. 그래도 이 여인은 낙심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주여, 옳소이다.” 개같이 취급해도 좋다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간에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면서 예수님께 매달렸다. 여러분, 이 여인이 그렇게 애타게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 지르고 따라오는데 처음에는 왜 예수님이 침묵하셨을까? 왜 야속한 말씀까지 하셨을까?
그 여인을 무시해서 그랬나? 아니다. 그 여인에게 더욱더 성숙한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여인의 믿음이 활짝 아름답게 꽃피도록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도 인내하시면서 기다리신 것이다. 그 여인의 믿음이 아름답게 꽃피게 되었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격찬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결국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 소원을 이루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 여인과 같이 끈질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한다. 하나님의 축복받기를 원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소원들이다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인내심이 강한 이 여인의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다. 우리도 한두 번 기도해 보고 응답되지 않는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말 한 마디 들었다고 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시험을 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하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신앙 생활을 포기하거나 교회를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다. 오늘 우리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떠한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 주님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주여, 옳소이다”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반드시 내 기도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인내하는 믿음, 모든 시험을 참고 끝까지 견디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저 하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과연 네 믿음이 크구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주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게 되는 그날이 속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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