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 (마가복음 2장 18~28절)
- 설교/하용조 목사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옷에 새 천 조각을 대듯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유를 누리십시오,
진짜 신앙은 서로 만나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진짜 신앙과 비슷해 보이지만 진짜가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기만 내용이 없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이유로 많은 문제들이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규모가 커지고 성도들도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짜 신앙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진짜 신앙이 능력을 발휘합니다.
크리스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신약시대에 교회는 어떤 곳이었는지, 크리스천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표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고, 신약성경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신앙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은 배지를 달고 있듯이 눈에 보이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표시가 사랑과 용서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등 성경에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사랑의 향기가 맡을 수 없다면 그 교회는 비석이거나 박물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천의 주요한 표시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얼굴과 말에서 사랑이 느껴지고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합니다.
두 번째 표시는 성령을 체험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신 이후 성령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해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는 많은 메시지가 있지만 그 메시지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전도하라는 말씀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 공동체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만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고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곳도 아닙니다. 본질은 사랑입니다. 약자들이 살 수 있고, 병든 자들이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신앙의 기준 ‘금식과 안식일’
구약시대에는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했을까요. 유대인의 관점으로 금식하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시대와 이 계명은 다르지만 구약시대에서 금식과 주일성수를 잘 지키는 것이 바른 신앙의 기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시대에서 신앙의 기준이 되는 금식과 안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구약시대의 유대주의자들은 금식을 지키기는 지켰는데 형식적으로 지켰고, 율법적으로 지켰습니다.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정신이 없고 내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모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안식일과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식일이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만약 잘못된 안식일에 잘못된 금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종교생활은 자기만족이지만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족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영국에서 돌아와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을 때 몹시 흥분이 됐습니다. 잡지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었던지 첫 표지를 무엇으로 할까를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결론은 백지로 내기로 했습니다. 빛과 소금 첫 호의 표지는 백지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는 의미를 담은 표지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누리교회 초창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사명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그래서 직함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 등 직분 없이 예수님을 믿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이 내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본질과 내용에 충실한 크리스천이 되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예수님 만나 ‘새 사람’으로 거듭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금식과 바리새파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생각하는 금식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똑같은 금식인데 정신과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와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한 금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낡은 옷에 새 천조 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천조 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더 찢어지게 된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 모두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18~22절)
당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는 방법이나 원리를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혁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이 당황했습니다. 이 문제는 금식에 대한 율법적 해석과 은혜의 해석의 차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금식의 목적은 생각하지 않고 방법만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찬송도 부르면서 금식을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이 오랫동안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고집과 생각대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성격과 생각이 변화되면 인생이 바뀝니다. 교회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인 교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변해야합니다. 계속해서 전통만을 지켜간다면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교회는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참 신앙생활 … ‘감격, 기쁨, 감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제자들의 금식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금식이 다른 이유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에 대한 율법적 해석과 은혜의 해석을 넘어 성경전체를 율법으로 해석하는가와 은혜로 해석하는가의 문제로 도달합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였습니다. 문자대로 해석해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형식만 지키면 됐습니다. 내 속에 음란한 생각이 들어도 겉으로 간음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또한 내속에 분노와 미움이 가득하지만 그 감정을 잘 감추면 됐습니다. 이렇듯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신약시대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율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내가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감사하고, 기뻐하면 사람이 변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평할만하고 원망할만해도 하지 마십시오. 불평과 원망이 쌓이면 병이 들고 신앙생활이 망가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원망과 불평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과 찬양을 배우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 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한 금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날에는 너희가 금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금식은 날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할 때가 있고 해서는 안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은 축제입니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데 마치 장례식을 치르듯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여하는데 상복을 입고 참석하면 되겠습니까. 기뻐하고 박수치고 축하할 자리에서 함께 웃어주고 좋아해주는 것이 결혼잔치에 참석한 사람이 할 일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옷에는 새 천 조각을
율법이 참 신앙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금식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형식대로 하지 않으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의 방법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잘못된 사람이라고 비판하면 어느새 내가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여러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비판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비판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를 비판하려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완전한 사람일 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낡은 옷과 새 천 조각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황금 같은 비유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깁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새 천 조각이 낡은 조각을 잡아당겨서 다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또 한 가지 비유를 더 들어주셨는데 그것은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이야기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면 포도주가 발효돼서 가죽부대가 찢어질 수밖에 없고 찢어지면 가죽도 버리고 포도주도 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헌옷에 새 천 조각을 붙이면 안 됩니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율법적 사고를 의미합니다. 율법적 사고는 낡은 사고 즉, 과거의 사고입니다. 이 사고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늘 해오던 방식입니다. 예전에 사업하던 사람 중에는 죄의식 없이 분식회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만약 분식회계를 하는 회사가 빈털터리리가 되도 수치상으로는 흑자입니다. 그런데 숫자를 바꾼다고 해서 흑자가 됩니까.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이기적인 생각, 자기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 가장 변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남을 괴롭히고 호령하는 사람은 섬기는 방법을 모를뿐더러 섬김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합니다. 야단치고 호령하고 무섭게 행동해야 권위가 있는지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고 분노만 있습니다. ‘왜 내 말 듣지 않는가.’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것이 진리인가’ ‘왜 내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등의 생각을 계속해서 하기 때문에 화를 내고 싸웁니다. 여러분, 이러한 생각은 낡았습니다. 또한 기준을 나로 정하면 자신의 마음에 맞으면 옳고 그르면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새롭게 표현하고 싶고 현재의 모습을 바꾸고 싶지만 낡은 생각에 붙잡히면 더 낡아집니다. 예전의 사고방식과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뿐더러 자신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화만 더 나고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합니다. 기존의 나를 깨고 벗어나야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과거에 해왔던 일들에서 빨리 벗어나야합니다. 새집은 헌집을 부수고 새로 지어야합니다. 예전에 내가 살던 집에 미련이 남으면 새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러 문제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지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이나 창의적인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율법이 아니라 영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금식의 문제와 안식일의 문제는 구약사람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함께 가던 제자들이 길을 내며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어째서 저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23~24절)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형식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법을 만들어 놓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법대로 순종해야한다는 안식일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새롭게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고파 먹을 것이 필요했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읽어 보지 못했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장만 먹게 돼 있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나눠 주지 않았느냐?’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25~28절)
예수님께서 아주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이며, 신앙의 본질이고,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쁨 충만한 자유함 누려야
그렇다면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종교적인 속박, 전통으로부터 풀어주기 위한 메시지입니다. 전 세계 어디나 무당과 귀신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귀신에 얽매여 절하고 물건과 돈을 갖다 바칩니다.
여러분, 진짜 신앙이라면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레닌이라는 사람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속박하고 제도화 시켜 인간성을 말살시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종교의 이름으로 무시돼 버렸습니다. 우리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종교가 그런 종류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유 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리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금식이요 안식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자유로워야합니다. 기쁨이 충만해야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이나 금식은 율법에서 말하는 문자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소외 받은 자 친구 되신 예수님
“내가 받고 싶은 금식은 이런 것들이 아니냐? 부당하게 묶인 사슬을 끌러 주고 멍에의 줄을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모든 멍에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가난한 노숙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 주고 네 혈육을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사 58: 6~7)
금식의 참 뜻은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입혀주고 네 혈육을 못 본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굶기만 하는 것이 금식일까요. 여러분, 우리의 삶이 변해야합니다. 전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 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여러분의 모습을 주변사람들이 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 그리고 태도가 변하면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못 보는 사람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눅 4:18~19절)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주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닙니다. 약한 자, 가난한자, 병든 자, 소외 받은 자, 사람 취급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등 교단이나 교파를 따지지 마십시오. 장로교가 여러분을 구원합니까. 감리교가 여러분을 구원합니까. 아니면 그 외의 교단이 여러분을 구원합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변화시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잘 믿는 척 하지 마십시오. 믿음도 없으면서 열심을 냄으로 가짜 신앙을 감추려고 할수록 위선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참된 신앙을 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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