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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득도(得道)의 개념이 아니다

구원의 계획 2011. 7. 22. 21:25

 

구원은 득도(得道)의 개념이 아니(요8:1-11)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성격을 띠고 나타납니다. 바로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신학적 명제 때문에 흔히 세인(世人)들로부터 '복음의 독선' 내지는 '기독교의 독선' 문제가 심심치않게 제기되곤 합니다. 이 때에 기독교를 독선(獨善)적인 종교로 혹평하거나 펌하(貶下)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구원론과 관련해 지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타종교와 비교해 유독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타종교에는 상대적으로 참된 구원이 없다는 논리가 성립돼 심한 빈축과 반발을 사기가 일쑤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갖는 보편적인 특징은 구원론입니다. 종말론적 구원을 보증할 수 없는 종교는 더 이상 종교일 수 없습니다. 이때 구원은 다름 아닌 죄로부터의 구원을 우선적으로 가리킵니다. 따라서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은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 사상입니다. 성경은 에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창세기 3장 15절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바꿔 말하면 '어떻게'와 관련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론 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여타의 제반 종교는 선행을 유일한 조건과 수단으로 강조합니다. 지속적인 선행을 통해 마침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 말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종교가 비록 수행(修行)의 방식에 있어서 상호간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결국 도달하게 되는 궁극적인 구원의 정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일지라도 동일한 정상에서 모두가 만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자력(自力)구원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수행의 연마를 통해 마침내 선의 경지 곧 저들이 말하는 구원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점에서 본질적으로 견해를 달리 합니다. 결코 선행과 노력 등 제반 인간적 행위를 구원의 필수 조건이나 방편으로 전제하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설령 그렇게 노력하고 수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罪性)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구원의 본질은 일체의 죄로부터 용서를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는 일이지(사59:2, 롬5:10) 결코 자력(自力)수행을 통해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득도(得道)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그리스도를 믿는자에게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죄 용서함을 받는 기독교적 구원의 도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선행(善行)으로 말미암는 자력(自力)구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행의 대가로 지불되는 보상의 개념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 사실을 전제하는 데서 오는 타력(他力)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해 주는 대속(代贖)의 방식 말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여기 한 사람의 노예가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는 노예의 신분상 결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선한 주인이 이 노예를 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 노예는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그 노예에게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노예와 관련된 일체의 모든 노예 문서를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순간 이 노예는 더 이상 노예의 신분이 아닙니다. 자유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노예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상태에서 그 주인의 은혜로운 대속적인 구속(救贖, atonement)의 방식에 힘입어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어느 누구도 이 노예를 더 이상 노예로 대우할 수 없습니다. 그는 법적으로 명실상부한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력(他力)구원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독선적인 종교로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의 당위성이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타종교의 창시자가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함이 없이는 결코 남의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속물의 자격은 죄와는 무관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 죄와 무관한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 가운데 오신(요3:16) 유일한 대속물(막10:45)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대속주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고 자증(自證)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행4:12). 이상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기독교의 복음만이 유일하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명제 하에서 그 독선적 종교로서의 당위성이 정당화된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위해 요구되어지는 대전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심정으로서 우리 각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입니다(롬3:23, 5:12). 이는 마치 시장기를 느끼지 못할 때 음식을 요구할 수 없으며, 자신이 사경(死境)에 처해있지 않으면 결코 절박한 심정으로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이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될 때, 본능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의 공의적인 심판을 의식해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어떻게 해야 죄 문제를 해결 받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지를 심각하게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데 회개를 해야 구원받는다고 매일 울고 불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도행전 16:30-31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지적하는 대로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인 심판으로서 형벌에 해당합니다(롬6:23). 예비적 형벌 말입니다. 죽음을 예비적인 형벌로 설명함은 죽음 후에 종말론적 심판으로서 최후의 선고인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마25:46). 모든 불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인생의 종말이란 사실보다 그 후에 심판이 있으며 영벌(永罰)로서의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본능과 본성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불신자들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데서 나와진 법정적인 효력이 성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일체의 정죄로부터 이미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롬8:1-2),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롬3:22-24, 요1:12).

이상의 사실과 관련해 오늘 본문은 구원의 절대 필요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죄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 인류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실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한결 같이 종말론적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정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신분으로서 우리의 영적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구원에로 인도하는 첩경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지옥 갈 죄를 해결해 주시고 죄가 있지만 죄값을 치뤄주시고 죄인이 아니다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죄를 닦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일러 준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 졌습니다.(요15:3) 믿으면 깨끗해지는 것이지 행하여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 갈 죄는 그리스도가 다 해준 것을 믿으면 해결됩니다. 세상 살면서 짓는 죄는 믿음으로 주님께 고백하면 손발 씻는 것같이 해결해 주십니다. 혹시 참회를 못한 죄도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서 용서받습니다. 믿는 자는 주님께서 일러 준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 졌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가 신부 단장을 한다고 집안에 앉아서 깨끗해지려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며 자기 혼자 깨끗하여 들림받는다는 신종 이단 사상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진짜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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