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 연보에 대한 교훈 (고후 8:1-5)
- 최영백 목사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연보에 대한 교훈을 하는 8장 9장의 일련기사가운데 서론 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연보에 대하 교훈과 아울러 하나님께 약속한 연보를 드릴 것을 요구하면서 마게도냐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했던 사안을 모범적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러한 편지를 쓰는 사건의 배경에는 예루살렘의 극한 기근과 그곳 성도들의 어려움이 있었다.
좀 더 본문과 연관된 역사의 배경을 살펴보면 바울이 3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였다. 그때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 안디옥교회에서는 유대인 성도들과의 심각한 교리적 마찰이 있게 되었다. 당시 있었던 교리적 마찰은 유대인 성도들과 바울이 전한 말씀과의 갈등이었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유대인 성도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할례를 행해야 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를 가르쳤다. 때문에 두 원리는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오직 은혜란 이신득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인하여 안디옥 교회에는 심각한 논쟁이 있게 되었다. 그러자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예루살렘 총회의 사도들에게 판단을 의뢰했고, 그 문제로 당시 바울은 디도를 데리고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었다.
급기야 안디옥 교회의 교리적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고, 거기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과 함께 바울은 사도직임도 승인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때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사도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갈라디아서에서 나온다.
(갈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이 내용에 보면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아울러 그가 전한 복음이 전혀 잘못됨이 없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기근으로 당하는 어려움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바울에게 이러한 부탁을 하게 된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안디옥교회에서 연보한 구제헌금을 가지고 가서 유대인 성도들을 도왔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부탁을 받은 바울은 3번째 전도 여행을 하면서 먼저 교린도 교회에 예루살렘 성도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했고, 그러자 고린도 교회는 그들을 돕기로 약속을 한바 있었다. 이에 감동한 바울은 다시 마게도냐 지경의 교회를 돌며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과 고린도 교회가 돕기로 한 연보 언약을 소개하게 되고, 그러자 마게도냐 지경의 성도들은 극한 가난과 환란가운데 있었으면서도 힘대로 할 뿐만이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넘치는 연보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가 고린도 교인들이 연보약속을 한 때와는 거의 1년이란 시간이 지났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 때까지 고린도의 성도들은 약속한 연보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본장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후 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고후 8: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0절에서 지적하듯이 일 년 전에 하기로 약속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지금까지 행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을 이야기하며 이제는 약속한 것을 성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여러 방면의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오늘은 그 가운데 은혜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은혜란 원어는 헬라어 cavri" (카리스)다. 이는 ‘기쁨'과 ‘행복'을 뜻하는 caivrw (카이로)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약 성경에 모두 152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바울이 3분의 2가 되는 101회를 사용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은혜라는 말을 종합해 보면 은혜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택한 백성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선물로 주시는 기본적인 은혜가 바로 그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들 각자의 믿음에 따라 더해지는 차별적 은혜가 바로 그것이다.
기본적인 은혜란 택함을 받은 문제라든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값없이 받게 된 기본구원에 대한 것 등이다. 그리고 차별적 은혜란 성도들의 행위에 따라 더해지기도 하고 또한 오히려 삭감되기도 하는 차등 차별적 은혜이다. 그중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혜는 바로 후자의 경우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은혜는 은혜의 종별이나 차등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함이 아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그 은혜의 개념적 의미를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란 그 개념적 의미에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1. 하나님의 은혜는 육신적이며 물질적인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육신적으로 극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마게도냐 교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운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다는 데에서 주어지는 진리이다. 마게도냐란 본래 그리스의 북쪽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였다. 그러나 B.C. 148년에 로마제국의 영토로 흡수된 지역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바울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선교의 첫 발을 내디딘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바울은 그동안 2차례 전도여행을 통해서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열매로 갈라디아교회나 빌립보 교회 또는 뵈뢰아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이곳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 것은 불과 몇 년도 채 안 되는 때였다고 볼 수 있고, 이곳의 성도들 역시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 세월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바울이 2절에서 밝혔듯이 그들은 극한 가난 가운데 처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극한이란 말의 원어를 보면 bavqo" (바도스)란 헬라어로서, ‘깊다' ‘높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다. 그런데 그 앞에 가난이란 전치사가 붙여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이 처한 가난이 그만큼 깊고 높다는 것으로서 아주 극한 가난을 의미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 역시도 정복자의 칼 아래 모든 것을 착취당하고 사는 식민지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총독을 통하여 식민지를 통치 관리했으며 그들로부터 막대한 세금과 노역을 착취해갔다. 때문에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식민지 국가와 국민들로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민족이나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어려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는 그 제국의 수도 로마와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웠기에 더 많은 간섭과 통제를 받고 또 착취를 당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바울의 표현대로 극한 가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만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말해야 옳다. 은혜를 받았다기보다는 도리어 심한 불평과 원망 속에 하나님을 탓하며 살아야 할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들이 처한 환경과 현실이 바울의 표현대로 모진 환란과 극한 가난 속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교회로서 고린도와 비교해 볼 때 더욱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고린도는 고대로부터 ‘온 희랍의 빛'(Iumentotius Graeciae)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큼 번영을 자랑하던 도시였다. 얼마나 번성한 도시였는지 B.C. 146년 그들의 번영을 질투한 로마가 그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릴 만큼 고린도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풍요와 풍성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로마에 의해 파괴된 고린도는 그 후 대략 100년의 긴 세월에 걸쳐 폐허가 된 채 버려진 도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BC 46년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황제가 다시 그 유리한 지리적 위치에 착안하여 이곳을 로마의 식민시(植民市)로써 재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로인하여 고린도는 다시 수도 로마에 버금가는 번영을 자랑할 만큼 물질적으로는 어느 도시보다도 풍성과 풍요를 누리는 도시였고, 그러했기에 교회역시 그러한 지리적 혜택과 경제적 부요를 누리고 있는 교회였다.
그러니 같은 이방교회의 상황에서 마게도냐 지경의 교회들과 고린도 지경의 교회를 놓고 비교해 볼 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게도냐는 은혜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은혜가 아니라 왜 우리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며 도리어 내뿜는 한숨과 넋두리가 온 하늘을 덮고도 남을 만큼 크고 컸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어진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은혜란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가시적인 어떤 상황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진리이다. 우리는 대개 은혜를 물질적인 것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큰 이익을 보았다거나 또는 부요를 얻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은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축복이란 말을 쓰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사고와 가치관이 육신적인 것에서 맴돌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은혜의 개념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침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도 고린도 교인들을 상대로 그들의 은혜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은혜란 육신적이며 물질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는 말씀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는 바울이 자기 몸의 가시를 위해 3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며 주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왜 약한 것과 능욕,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며 자랑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말씀을 보면 오히려 몸의 가시가 바울에게 있어서 큰 은혜라는 것이고, 약하고 가난하고,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했던 그것이 진짜 은혜요 자랑거리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했음을 상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은혜의 개념이 육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은혜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이나 재물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서 은혜는 물질로 평가해선 안 되는 성질의 것이며, 오히려 물질의 논리와는 정 반대의 원리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2.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적인 문제와도 전혀 관계없음을 깨닫는다.
이 문제는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적 측면에서 생각해보는 진리이다. 실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으로서 부요를 원하고 물질적 풍요로움을 사모하는 것은 누구나 있는 본능적이며 필연적인 욕구이다. 그러기에 역시 그와 비례하여 느끼는 인간의 감정역시도 육신의 것이 풍요로우면 그로 말미암은 감정은 심히 좋은 감정, 기쁘고 행복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와 반대로 육신의 문제에 어려움이 있게 되면 역시 우리 인간의 감정은 그와 비례하여 불행스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역시도 필연이다. 누가 재물을 많이 얻은 것에 대해서 참담하다 비극이라 통곡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또 누가 사업이 쫄딱 망하고 가산이 절단이 났음에도 성공했다고 축배를 들며 잘 된 일이라고 기뻐 노래하며 박수치고 춤을 추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이상은 결국 육신의 것에 따라 감정하는 것은 가치관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원리에서 볼 때 마게도냐 성도들 역시도 그들이 처한 환경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이 마냥 좋고 기쁨의 것으로 받아드려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진리 안에서 자유한다 하더라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늘 그런 마음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마게도냐 성도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그것도 고린도교회에 이처럼 자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해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정말 자기들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맞는 이야기라고 고개를 끄덕였을까? 꼭 그럴 것이라고 이야기하게엔 그들이 처한 환경이 너무나 어려웠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친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과도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내 마음에 들고 내 마음에 좋게 느껴지는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특히 교회생활을 하면서, 특히 말씀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진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기분에 좋고, 자기 생각과 맞아 떨어지고,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 들어지면 무조건 아멘이고 무조건 은혜라고 말한다.
때문에 말씀도 아니고 되지도 않은 누군가의 간증을 들으면서도 은혜 받았다고 말하고, 요즈음은 마치 목사의 설교가 코미디언처럼 인간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울고 웃기는 설교자들이 유명한 설교자로 추앙을 받고 그런 교회에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 인간의 감성과 감정이 좋게 느껴지면 은혜고, 내 맘에 안 들고, 설교가 딱딱하고 자기감정에 맞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란 말인가? 과연 은혜를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그와는 정 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타락한 인간들의 육신의 감정이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는 거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 정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높아지기를 원하지만 성경은 낮아져야 할 것을 말씀한다. 우리는 섬김을 받기를 원하나 성경은 섬길 것을 말씀하신다. 또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지극히도 사랑하지만 성경은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라고 말씀하고, 우리는 재물을 간절히도 원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며 아울러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에서 보면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의 육신의 감정에 좋게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뜻과 정 반대라는 것이 맞고, 그러므로 실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와는 정반대의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들은 성경 역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왕상 22장에 보면 아합왕은 아버지 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아람과 전쟁을 생각하면서 400명의 선지자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오직 미가야 선지자만은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부르지 않은 이유를 그는 그렇게 말한다.
(왕상 22: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미가야 선지를 부르지 않은 이유는 미가야는 자기에게 길한 예언, 즉 자기가 좋아하는 예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바꾸어 말하면 그가 전하는 말씀은 자기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도 보면 자기 마음에 들면 은혜라고 생각했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역사는 예레미야 시대에는 더욱더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벨론에 항복을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에 대해서는 은혜가 안 된다며 귀를 틀어막고 오히려 핍박을 하였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절대 자기들을 바벨론의 손에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시드기야나 하나냐같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은혜라고 받아드리며 아멘 하였음을 본다. 그것은 초대교회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스데반집사가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을 때 그때 유대인들의 반응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술해주고 있다.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오히려 은혜가 된 것이 아니라 악 감정만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에는 어떠했는가? 어떤 때는 돌을 들어 치려했고, 어떤 때는 심지어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떨어트리려고까지 했었다. 전혀 그들의 심정에 은혜가 안 된 것이다. 은혜는 고사하고 악 감정만 불일 듯 일어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은혜란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감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
고로 우리는 내가 원하고 내 마음에 맞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은혜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은혜가 아니고 사탄의 달콤한 사탕발림일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정말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인가에 관심을 두어야하고, 그렇다면 아무리 내가 원치 않는 것이며 내 감정이 좋지 않게 느껴지고 받아드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은혜로 생각할 수 있는 정확하고도 냉정한 판단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 은혜는 내가 좋아하고 느끼는 감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은혜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의 중심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행한 그 헌신적인 믿음의 행위를 보고 은혜라고 규정하는 바울의 진술을 통해서 밝혀지는 진리이다. 지금 바울이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기록된 말씀에 보면 극한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와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을 위해 행한 헌신적인 연보 행위에 대하여 그것을 은혜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면 은혜란 성도의 중심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고, 역시 그렇다면 그것은 성도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인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거야말로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토록 극한 핍박 속에서도 그렇게 뜨겁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렇게 극한 환란과 극빈의 가난임에도 그것도 힘에 지나도록 넘치는 연보를 할 수 있겠는가?
3절에서 보면 그들은 자원하여 헌금을 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구리고 4절에서는 그들이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의 문맥에서 추론해보면 마게도냐 성도들의 극한 어려움 때문에 바울은 일단 그들이 하겠다는 연보에 대하여 극구 만류한 것으로 사료된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을 향해 당신들이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설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마게도냐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돕는 일에 대하여 자기들도 동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곡하고도 간절히 간청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오히려 헌금을 하겠다고 소원하며 받아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는 턱인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의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은혜란 우리가 느끼는 감성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진짜 은혜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을 통해서 가늠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얻고 또 쌓아 놓는다 하더라도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적인 마음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혜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어렵고 궁핍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그 중심에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있고 또 드려지는 삶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바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성도들보다 중국의 성도들이 훨씬 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중국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들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심히 갈급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를 위한 헌신이 가히 우리로서는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진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심히 열악하기 그지없고 정부의 탄압도 여간 심각하지가 않다.
얼마 전 신강에 갔을 때 그들이 처한 환경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심한 탄압 속에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다 감옥에 갔다 온지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최고 지도자는 마을 밖으로만 나가면 공안국 사람이 따라붙어 누구하고도 믿음의 교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말씀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뜨거웠고 간절했다. 얼마 전 나와 같이 공부를 했던 사천성의 지도자는 지금 공안국에 잡혀 간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어디에 있는지 생사조차 확인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번에 내가 청도에 가면 가정교회 연합회를 이끄는 7인 위원들을 좀 만나보려고 청도로 오라는 전갈을 했더니 모두가 너무나 감사한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오겠다는 대답들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돈을 준 적도 없고 하다못해 그들의 어려움을 위해 기도해준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토록 반갑게도 나를 보기를 원하는 것은 오직 말씀을 사모함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환경적으로 보면 지금 고린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들과의 비교만큼이나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중국 교회들에 비해 심히 풍성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모하는 불타는 중심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국의 성도들이 뜨겁고 진실하다. 고로 역시 듣기 은혜가 안 되고 기분 바쁜 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은혜는 이제 한국의 교회를 떠났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교회엔 말씀은 없고 온통 인간 중심, 육신 중심의 교회로 전락된 그 상태와 상황이 심히 심각한 중증현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와 성도들은 물질의 풍요를 내세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지금에서 은혜라고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정의하는 은혜에 대한 개념에서 조명해 보면 그것은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임이 분명하다. 은혜란 물질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도 필히 기억해야한다. 은혜란 우리의 중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외적 상황이나 현실과 상관없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하며 그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삶의 열매를 통해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막 12장에서 부자의 많은 헌금과 과부가 행한 두렙돈 헌금기사가 나온다.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의 개념에서 보면 분명 은혜는 부자보다 과부가 훨씬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이 맞는 것이다. 삶과 관계하여 주어지는 은혜란 그 과정적 열매로 보면 우리의 육신이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이 그러했듯이 하나님 중심의 헌신적인 열매로만 은혜의 정의를 논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고 또 아무리 자기 마음이 그로인하여 기쁘고 즐겁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과 연관이 없고, 삶의 열매가 하나님께 대한 혼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닌 것이다.
고로 진정한 은혜란 올바른 말씀과의 연관에서 오는 삶의 열매라고 규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거야말로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은혜 중에 살고 있는 것인지?? 다른 것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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