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조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 변화산에서 생긴 일
본문 : 막 9:2~13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하지 못합니다.
미성숙을 인정해야 신앙은 성숙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성령님을 경험하면 성숙해집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발견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날마다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교회의 기초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변화산에서 생긴 일’입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 6일이 지나고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가셨습니다. 변화산은 경사가 심해 오르기 쉽지 않은 산입니다. 숨이 차고 땀을 뻘뻘 흘려야 오를 수 있는 산에 예수님은 왜 제자들과 함께 가셨을까요.
기도하기 위해 오른 변화산
“6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습니다”(2절).
열두 명의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가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이 세 사람과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힘들게 변화산에 제자들과 함께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변화산 정상에 올라 말씀을 전하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기 위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까지 특별한 핍박 없이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화산에 오른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변화산에 오른 이후부터 기도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고난과 역경에 직면했습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았을 때에는 관대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면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연인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은 모든 것에 관대하지만 사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작은 것까지 간섭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동안 얼굴 모습이 변하셨고 옷이 하얗게 빛났습니다”(눅 9:29).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산에 가셔서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지상에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천국에서 입는 하얀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옷뿐만이 아닙니다.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처럼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땅에 계실 때와 하늘에 계실 때가 다릅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충격과 혼돈에 빠진 베드로
“예수의 옷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희고 광채가 났습니다”(3절).
마태복음 17장에도 변모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모돼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새하얗게 됐습니다”(마 17:2).
우리는 변모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람은 천국의 의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그분의 오른손에 일곱 별을 들고 계셨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왔고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요한 1:16).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 있게 비추고 있는 것 같아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혼자 계시지 않고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4절).
예수님이 변모하신 내용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있는데, 서로 보완하며 말씀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0~31절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분의 떠나가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눅 9: 30~31).
누가복음에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십자가에서 죽게 될 일을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광경을 본 베드로는 충격을 받고 혼돈에 뼈졌습니다. 이성과 상식으로 살고 있는 베드로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는 광경을 보고 굉장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는 너무 놀라 횡설수설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세 개를 만들어 하나에는 주를,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몹시 두려웠기 때문에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5절).
당시 베드로의 신앙은 미성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미성숙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숙하면 미숙한 대로 사십시오. 자신의 미성숙을 인정해야 신앙은 성숙합니다.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하지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또 성실하게 일하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삶이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봤고, 닭이 울 때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시자 자신의 생업이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드로의 믿음은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서야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직은 성숙하지 못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한참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믿음이 성숙해지면서 제자로 돌아가는 길에서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열심히 가십시오.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금 여러분이 서있는 자리가 최선의 자리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있는 그곳은 최선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때 구름이 나타나 그들 위를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7절).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도 구름을 타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왔다는 것은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는 장면도 이와 비슷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짓습니다. 성막을 짓고 기름을 붓고 난 후 성막 안에 구름이 가득 찹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차서 성막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 찬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올 때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교회를 가볍게 들락거리는 곳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속에는 언제나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려주신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아니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원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요청을 듣고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째서 예수님이 제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하며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거절하지 마라.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와 “그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향해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긴다”는 음성을 들려주시면 다른 어떤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고 하시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두 가지 음성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만약 사역자들이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고난과 억울함을 경험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면 지쳐서 결국 실족하고 맙니다.
십자가와 부활, 구원의 완성
“그 순간 그들은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산을 내려오시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단단히 일러 두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사람 가운데에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8~9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사람 가운데에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이 합해져야 완성됩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대해 소문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고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하셨지만 비밀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마음에 새겨 두면서도 ‘죽은 사람 가운데에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 물어보았습니다”(10절).
제자들은 부활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말씀하셨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진리는 누군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자기들끼리 많은 토론을 했지만 결국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토론을 자주 하지 마십시오. 토론을 많이 한다고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다
영적으로 무지한 제자들과 사역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끝까지 믿으시고 지상명령을 수행하도록 하신 예수님은 믿음이 참 좋으신 분이였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영적으로 무지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승천하실 수 있었을까요.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불안하거나 걱정하시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때까지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왜 엘리야가 나타났을까?, 왜 모세가 나타났을까?’라는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왜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까?’”(11절).
제자들의 질문은 율법학자들이 주장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킨다. 그런데 왜 성경에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기록된 것이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 대해 성경에 기록돼 있는 대로 그를 자기들 마음대로 대했다.’”(12~13절).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이미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는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오, 메시아입니다.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시에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창녀처럼 살던 수가성 여인은 메시아를 알아봤습니다. 이 여인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5~29절입니다.
“여인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저도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요 4:25~26).
“여인은 물 항아리를 내버려 둔 채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와서 내 과거를 모두 말해 준 사람을 보십시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요 4:28~29).
이어서 요한일서 5장 1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에게서 나신 분도 사랑합니다”(요일 5:1).
여러분들은 최소한 수가성 여인보다 높은 학력과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마음이 가난해져서 수가성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메시아임을 발견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영상설교=하용조 목사님의 마지막 예배와 설교 2011.7.31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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