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자료/설교모음

다 이루었다 하시고

구원의 계획 2011. 8. 12. 21:33

다 이루었다 하시고(요19:16-30)

 

                                                                          - 옥한흠 목사
                
  제가 LA에 있을 때 성경을 많이 연구해서 신학 박사가 된 목사님 한 분이 꼭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하면서 저를 어떤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중세기 스페인에서 카톨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어보겠다고 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끌어다가 고문을 할 때 사용했던 고문도구들을 진열해 놓은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중세기라면 지금부터 수백 년 전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 당시에 쓰던 고문도구들을 모방해서 만든  대체품을 전시해 놓았겠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시된 고문도구들을 보니  대체품이 아니고 진품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문을 하는데  사용되었던 도구들을 열 몇  가지 전시해 두고 각각에 설명문까지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침침한 불빛이 비치는  전시실 안에 들어가서  고문도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또 그 옆에 기록된 설명문을 읽으면서 저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인간이 잔인하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들은 교회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이건 사람도 아니다. 악마다. 악마!'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사타구니 사이로 넣어 켜서 죽이게끔 만든 톱이 두세 개 걸려 있었고, 사람을 끌어다가 기계 속에 넣으면 국수 가락처럼 되어서 나오도록 만든 소름 끼치는 기계도 있었고, 사람을 집어넣고 자물통을 채우면 꼼짝달싹도 못한 채 고스란히 말라죽어 뼈다귀만 남게 만드는 그런 기계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도들을 고문을 하는데 사용되었던 도구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그 도구들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성도들이 죽어가면서 비명을 지르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이런 고문도구들이 잔인하고 흉측하다한들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 틀에다가 눕혀 놓고 손발에 철 못을 박는 그것만큼 잔인할 수 있을까요? 톱으로 켜임을 당해 죽는 것은 5분이나 10분 정도 고통을 당하다 보면 까무러쳐서 그대로 죽을 수라도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 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운명입니다. 세상에 이  십자가 형틀만큼 무서운 고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만큼 잔혹한 죽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로마의 시세로(Cicero)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어떤  신체적인 증세가 나타나며, 또 그 고통이 어떻게 서서히 발전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지를  의학적으로 분석해 놓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이  자리에서 굳이 자세하게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를?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그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새."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결한  표현 속에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잔혹함과 고통 처참함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습니다.

 

  왜 주님은 하필이면 그렇게 저주스럽고  잔혹한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아무리 우리의 죄 값이 크다 해도 어떻게 이런 끔찍한  죽음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을까요?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들려줍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저주를 받았다' 하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범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 예수님으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저주받은 자의 죽음에 대한  한 가지 원칙이 나옵니다. 그것은 나무에 다는 것입니다(신21:23).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을 어김으로  인해 받게 된 율법의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다 짊어지시고 저주받은  자가 되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로서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읽을  때면 늘 대제사장들과 빌라도를 특별히 주목해 봅니다. 그 당시에 대제사장들이나  빌라도가 약간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더라면, 최소한의 공정함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그와 같이 혹독하고 소름 끼치는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생명은 공정성과 합법성에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한사람의 생명을 끊어 놓는 사형을 선도하는 재판이라고 한다면 다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하고 합법적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일 만한 분명한 죄목이 있어야 하고 그 죄가  확실하게 입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았던 재판에는 이와 같은 상식적인 요건들이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대제사장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분명한 죄목이 있고 분명한 증거가 있어 예수님을 재판 대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일단 잡아 놓고는 그를 죽일 구실을 찾느라고 밤새도록 법석을 떨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재판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죽을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잡아와서 재판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생사람을 끌어다 놓고 그에게 무슨 죄목을 씌워 죽일 것이냐를 궁리하느라 밤새도록 법석을 떠는 그런 재판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또 그들이 들고 나온 죄목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예수님의  죄목은 '행악자'라는 것이었습니다(요18:30). '행악자'(行惡者)란 말 그대로  '악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것도 어쩌다가 한두 번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고질적으로 악을 행하는 흉악범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말만큼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어디 있습니까? 대제사장들이 한 푼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한치의 상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었다면 예수님에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걸어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또 어떻습니까?  그가 법정을 네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여러 번 반복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그는 아무리 심문을 해봐도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노라고 자기 입으로 분명히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즉시로 석방했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떠들면서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 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고 말하던 바로  그 입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을 선고했습니다. 법을 집행한다고 하는 인간 중에  이보다 더 비열하고, 비양심적인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빌라도가 조금이라도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선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선한 구석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양심도 없습니다. 상식도 안 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몰랐던 당시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교양이 있는 것처럼 꾸미고 사람들에게 양심적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역시 악의 화신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 뿌리 깊게  감추어져 있는 이와 같은 본질적인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면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저주스러운 무관심
  십자가형이 확정되자 네 명이 한 조를 이룬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인계 받았습니다. 이 네 명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골고다까지 호송하고  거기서 십자가 형틀에 예수를 못 박아 사형을 집행하는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팁이 있다면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처형되는 사람의 옷을 벗겨 가지고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 정말 웃음거리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서 전적으로  수공업에 의존해서 옷을 만들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옷은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한 벌을 가지면 평생을 살아야 할만큼 귀한 것이었기에 그 만큼 더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고대사의 전쟁 기록을 보십시오. 양편이 서로 붙어 가지고  싸우면 어느 한쪽이 이기고 어느 한쪽이 지지 않습니까? 그럴 때 이긴 쪽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사한 사람의 옷을 전부 벗기는 것입니다.  피가 묻었든지 창으로 구멍이 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옷이란  옷은 모조리 벗겨 가지고  전리품으로 들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남성들의 정장은 보통  다섯 가지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쓰는 터번과 신발, 속옷 한 벌, 외투  한 벌, 허리띠가 그것입니다. 네 사람의 군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외투 같이 좀 더  중요한 옷은 계급이 제일 높은  사람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 같은 것은  아마 계급이 제일 낮은  사람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한 가지씩 나누고 보니 하나가  남았습니다.

 

속옷입니다.

물론 속옷이라고 해서 요즈음의 속내의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당시의 속옷은 무릎까지 혹은 발꿈치까지 오는 통으로 짠 옷입니다. 통으로 짠  옷이기 때문에 네 조각으로 나누게 되면 걸레로도 쓸 수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이것은 나누지 말고 제비를 뽑아  누군가 한 사람이 가지기로 하자." 그들은 그 제의를 좋게 여기고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누가 그 옷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동전 던지기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아직 10 여분도 채 안된 때입니다. 그러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찢어진 손발에서 핏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십자가의 기둥에는 핏물이  흘러내리는 바로 그 발치에서 로마 군인 넷이 예수님의  옷을 놓고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 하면서 옷을 나누고, 심지어 마지막으로 남은 속옷까지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동전을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시편  22편 18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될 때 십자가 아래서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한 바 있긴 하지만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마치 쌍둥이를 힘들게 낳다가 병을 얻은 어머니가 한2,3년 동안을  죽을힘을 다해서 이 아이들을 키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앞에서 과자 하나를 놓고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것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옷가지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네 명의 로마 군인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렇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마음은 칠흑 같은 무지의  어두움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이 누구인지, 또 그분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주스러운 무관심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물욕이요, 다른 사람보다도 하나라도 더 얻는 것이요, 다른 사람보다도 한발이라도 더 앞서는  것입니다. 내가 더 잘 사는 것, 이것 말고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로마 군인들에게서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던 때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추호도 긍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그 때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남보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로마 군인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소망이 없을 만큼 악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고결한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  시간을 고통 하시다가 드디어  한마디 자기의 고통을 외쳤습니다. 아니 외쳤다기보다는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신음처럼  한 마디 내뱉으셨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요19:28). 시편 69편 2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 한 마디로 요약하여  예언했습니다. "저희가 쓸개로 나의 식물을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우리 예수님은 손바닥이 아프다거나, 쥐가 난다거나, 숨이 가쁘다거나, 열이 난다는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고통을 "내가 목마르다"라는 한 마디에 집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흔히들 목이 탈  때의 고통을 일컬어 죽음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한번도 그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아서 목이 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22:15). 물이 귀한 광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 갈증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자주 체험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한번씩 당하는 이 갈증의 고통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위기 사태가 그들에게 엄습했는가를 성경을 통해 자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불기둥이 밤낮없이 그들의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그들 중에 있습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어떤 이적 기사라도 행할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들의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 가지고 목이 타 들어가고 혀가 입천장에 들어 붙을 때가 되자 하나님의  기적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불기둥도 소용이 없고, 과거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적 기사를 행했다는 모든 이야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진정시킬 만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나라의 기초를 뒤흔들고 모세의 리더십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만큼 그들은 엉뚱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이 마르는 고통은  그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바로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이  일평생 당하신 고통과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한꺼번에 당하신 그 모든 고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을 친히 체험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통을 당하는 우리들과  같이 되시려고 친히 그 고통을 맛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토록  당해야 될 고통을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가 이 땅 위에 살며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압니다. 마음의 고통이 끼어 들어 우리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면 마치 날카로운 칼끝으로 생살을 건드리는 것 같은 무서운 진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의 육체에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이 온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찾아가 어린애처럼 "주여, 나의 고통 아시지요? 나의 고통 아시지요? 주님이 맛보셨으니까 내 고통 아시지요?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몸소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고통을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자기 고향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그가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인은  밭을 지나서 모퉁이에 있는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깊지 아니한 우물에다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면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참 신기하다 싶어 그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왜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물통 속에 나무  조각을 집어넣어 끌어올리느냐?" 그랬더니 그 하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 조각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지요.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보면 반 통 밖에 안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지.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 보게." 마음이  공포로 짓눌리고 요동할 때는 십자가를 붙들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대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주님은 목마름의 고통을 맛보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지 약  6시간이 지나갈 무렵 예수님은 또  한번 짧은 한 마디를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30절). 그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태나 마가는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소리 지른 내용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크게 소리  지른 내용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요한이 그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겁이 나서 멀찍하니 군중 속에 숨어 가지고 아마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대담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함께 핏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신음하시는 주님의 그  음성이 귀에 들어오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6-7시간을 진액이 빠지도록 고통과 싸우고 이제 초죽음이 되어 마지막 호흡을 몰아 쉬기  직전에 처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크게 질렀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놀랠  만큼 소리를 크게 질렀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요한은 그 소리를 분명히 알아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힘을 다하여 말씀하신 한 마디 말씀에는 굉장한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도 보면 한  마디의 말이 모든 진리를 대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간결한 문장 하나가 어떤 사상을 전부 함축할 때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사람을 움직이고, 역사를 흔들어 놓을 정도로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 한 마디를 가지고 기치를 높이 들자 중세기의 그 어두운 암흑이 물러가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링컨이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한 마디 속에 담아 외쳤을 때 북 아메리카의 여러 가지  혼란 상황이 하나하나 수습되었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한 마디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의  박정희 대통령도 유명한 한  마디를 내세웠습니다. '잘살아보세'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린애 노래 가사 같은 짧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 한 마디는 정말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잘살아보세' 라는 이 말 속에는 그 분의 통치 이념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난에 찌들은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잘 살게 만들어 열강 앞에 내노라하고 얼굴을 쳐들고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까  하는 집념과 한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일을 했지 않습니까?

 

  사랑의 교회에 들어와도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참 굉장한 말입니다. 사랑의 교회에 몸담고 오래 지내다 보면 '평신도를 깨운다'는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한 마디 안에는 옥한흠 목사라는 사람의 목회 철학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의교회가 어디로  가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교회인가 하는 것이 그 한 마디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교회의 성격과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 말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한 마디 말이 가진 위력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다/ 이루었다'로   번역되어  있어  두  마디이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한 마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짧은  한 마디지만 그안에 엄청난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그 높이나 깊이를 우리는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내용이 그속에 다 들어있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 한 마디는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지르는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을지 모릅니다. 한 맺힌  절규처럼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나는  이겼노라. 나를 해냈노라. 드디어 나는 완주했노라."하는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알고는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조차도 피땀을 쏟으며 고민하셨을 정도로 발을 들여놓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향해서 묵묵히 발을 옮겨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여러 시간을 고생하시다가 이제 하나님 앞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셨습니다. 그 때 주님의 마음에는 놀라운 기쁨이 솟구쳐 올랐을 것입니다. "다  해냈구나. 드디어 해냈구나!"  '테텔레스타이'라는 외침 속에는 이런 기쁨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는 분명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요4:24,6:40). 할렐루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몇 시간 전에도  자기 마음에 기쁨이 있다고 제자들에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아는 기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마음속에 이 기쁨이 있었지만 이제 십자가의 고통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순간에도 자기가 그렇게 피 흘려 죽음으로써 전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드디어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았던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는, 구약에 예언한 모든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눅24:25이하). 둘째로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장대한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막아 두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져 내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된 것입니다.

 

셋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데  성공하셨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 이루었다'는 말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게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6-7시간 동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비명 한마디 안 지르셨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꽉 붙들고 있었을까? 어떻게 6-7시간 동안 그처럼 죽음에  죽음을 거듭하는 고통을 당하면서 돌아버리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장시간 동안 몸이 부스러져  내리는 고뇌를 당하면서도  까무러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닙니까? 

 

필리핀에 있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자기 손에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발에는 박지 않고 양손에만 박았는데 그는 못을 다 박기도 전에 그만 까무러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정신을 흐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안으로 흡수하면서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견디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그렇게 감내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 할 때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철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데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마당에도 '아, 이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구나. 이 죄인들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구나. 이 사랑 때문에 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서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이 승리의 외침 때문에 엄청난 은혜를 입게 된 자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서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그 영광을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찬송을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이루었다"고 하는 이 외침 속에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과 특권이 우리에게 다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우리가 십자가에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이 더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릴 것입니다. 주님의 그 힘찬 외침 속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우리의 환상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넘어지는 자 같으나 일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긍지와 만족이 있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쳐 봅시다. 그 음성에 우리의 능력과 소망과 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