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자료/설교모음

일어나서 함께 갑시다

구원의 계획 2011. 8. 12. 21:49

일어나서 함께 갑시다(마태 복음 26:36-46)

                                                               - 하원식 목사

 

 어느새 2010년도 한 해가 지나고 2011년이 우리에게 왔다. 부푼 기대와 어렴풋한 불안이라는 엇갈리는 전망 속에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다. 가없는 세월의 흐름이 이마에 주름살 한 가닥 또 그어 넣고 지나간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반복하여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아름답게 빛낼 수 있을까 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2011 년을 시작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 보지 않은 선물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이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 보며 인생을 살아간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루하루 그것은 우리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다.

 

우리 벌써 2011년 한 달이 다하여 가는 오늘 우리 참빛 교회가 가고자 하는 목표를 오늘 함께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사람은 곧잘 계획했던 것들이 세월이 조금만 지나도 잃어버린다. 함께 2011 년을 살아가야 할 우리의 목표점을 생각해 보자 “일어나서 함께 가자!”이 말은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는 말씀이다. 오늘은 이 말씀으로 2010년의 잠들어 있었던 저와 여러분들의 영을 깨워 일어나서 함께 전진하자라는 뜻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1).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되기 직전에 천사가 나타나 롯의 식구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외쳤던 음성이다.

(2).죄악 된 세상이 홍수로 멸망되기 직전에 노아가 그의 식구들에게 방주를 향하여 “일어나서 함께 가자!”하고 외쳤던 소리다.

(3).야곱이 그의 식구 70 명에게 7년의 흉년 속에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외치며 아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있는 애굽을 가리켰던 음성이기도 하다.

(4).그 후 모세가 그의 백성 200만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외쳤던 절규이기도 하다.

(5),신약으로 넘어와서는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다가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잡게 만들었다. 놀라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돈을 많이 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부르시던 음성이었다.

(6).계시록 마지막에서 신랑 되신 예수께서 신부된 그의 교회에 재림하셔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사랑의 손길을 펴시며 천국을 향하여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같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 라는 말씀은 성경에 누누이 흐르는 맥이다. 본문에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이끌고 계신다. 이와 같은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것에 대하여는 세 가지의 해석이 있다.

 

첫째, G. Burrow의 영감으로: 그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음성은 재림의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려는 궁극적 음성이라고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둘째, Hudson Taylor의 영감으로: 그는 주님과 교제하던 성도가 주님과 멀어 졌을 때, 그를 다시 찾으시려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라고 말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던 성도가 시험, 환란, 낙심 속에 있을 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시는 권면의 말씀

셋째, Johe Gill: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저주를 감당하셨고 죄를 씻고, 병을 담당하셨다. 이 말은 곧 축복의 동산이 있으니 그곳으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외치는 축복의 음성이다. 이 세 가지는 다 맞다.

 

 

1. 우리 함께 기도하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날 습관을 쫓아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밤을 세워 기도하셨다. 열 한 명의 제자 중에서 제자 세 사람을 대동하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기도하고)있으라"(38절)고 당부하셨다. 예수님을 지금 중대한 시험을 앞에 두고 있다. 십자가 고난의 시험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시험 앞에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고민하시며 슬퍼하고 계셨다.

 

주님은 제자들과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 떨어져서 기도하셨는데 "십자가 고난의 시험을 면케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느냐고 반문하는 기도였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의 결론 부분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기도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어려웠던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모든 그 무거운 죄 짐을 지고 대신 고난을 받으시며 죄 값을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십자가의 죽음보다 천 배, 만 배 더 고통스럽고 힘든 죽음이었다. 이로 인하여 고민하셨고 천사를 통해 힘을 얻으셨을 때는 피가 맺히는 기도를 하셨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하신 것이다. 두 세 사람 이상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고 하셨다. 한 겹줄은 쉽게 끊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겹의 줄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중보 기도가 필요하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비상기도는 하늘나라의 싸이렌을 울리게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를 올리면 하늘나라에 마치 119로 신고하면 싸이렌이 울리게 된다. 소방차가 와서 불을 꺼주듯이 우리가 기도를 올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기도를 당부하셨다. "내가 지금 십자가 시험을 앞에 두고 있으니 나를 위하여 깨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존 낙스(John Knox)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라고 말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부르짖으면 기도하지 않는 한 나라보다도, 한 민족보다도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운명이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숱한 약점과 허물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가슴을 찢으며 기도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하여 기도는 반듯이 필요하고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 때문에 자주 넘어지고 시험에 빠지지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도 깨어 기도해야만 한다.

 

깨어 있으라는 명을 받은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깨어 있으라는 명을 받은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했다. 잠자고 있었다. 한번 와서 깨어 놓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는데, 또 가서 기도하고 와보니 또 자고 있다. 세 번째로 기도하고 와보니 그때도 또 자고 있었다. 마가복음 14장 41절에 보니 제자들이 자다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라고 했다. 우리 성경에는 이렇게 점잖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저 깨어 있기를 원하셨다. 얼마나 오래 있기를 원하셨는가? 단지, "한 시 동안", 잠시동안 깨어 있기를 원하셨다. 피곤하고 약하다는 자기 입장만 생각함으로 영적으로 중요한 일에 소외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잠시동안, 한시동안"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편한 대로 해석하고 우리 편한 대로 판단하고 우리 편한 대로 자고 있다.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를 향해 물으신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가 잠시 동안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나를 고통에서 멀리해 주시옵소서." 평안의 세계와 풍성한 소유적 성취가 우리의 기도 제목이고, 건강케 하시며 성공적 삶을 환영하며 전쟁이 나면 빨리 그치게 해주시고 비가 오지 아니할 때는 넉넉한 비를 내려주시기를 바라며 자녀들의 훌륭한 번영과 목표에의 충분한 도달, 투표에 당선되고 사업의 성취가 있으며 진취적 발전의 약속 …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다. 그런 기도를 우리가 드릴 때는 땀이 피 방울 같이 되어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얼굴을 흙바닥에다 대고 기도 드리지도 않는다. 기도가 무엇인가? 내 뜻을 버려야 되는 기도다. 이 기도가 제일 힘이 든다. 기도는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합심(合心)하자는 것이다. 함께 기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똑같은 요청을 하신다. 어떻게 보면 측은하게 보일 만큼 사정을 하신다. 나와 함께 한시간만이라도 같이 기도하자고 예수님조차도 기도에는 동지가 필요하였음이 나타난다.

 

주님이 가장 신임하고 있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또 그토록 한 시간만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는데도 그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이유가 예수님이 인정하신 합리적 이유로 나타난다. 여기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다. "한계성을 초월할 수 없는 육신의 약함 때문에 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구나! 지탱할 수 없는 육신적 피곤이 안식의 시간인 밤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해하겠다는 말이다.

 

현대 문화의 특징, 만성피로! 그런데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도를 안 하면 시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육신의 약함을 인정하시면서 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것이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와 바램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한다. 연약한 것, 쉽게 지치는 것, 피곤한 것, 아픈 것, 부족한 것…등 그것은 죄가 아니다.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줄 알고, 쉽게 지치는 줄 알고, 피곤하고 병든 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연약한 것, 쉽게 지치는 것, 병든 것 때문에 시험에 들고 그것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 연약한 것, 부족한 것, 그것은 오히려 더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육신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던 세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한 시간 합심 기도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하고 그만 자버렸다. 그런데 그 자고 있는 시간에 무슨 사건이 터졌느냐? 가룟 유다를 앞세운 군병들의 예수님 체포하기 위해서 들이닥쳤다. 그랬더니 그렇게 기도 좀 하자고 해도 못 일어나던 제자들은 급작스럽게 벌떡 일어났다. 군인들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난 것이다. 잠이 무언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자기 방어의 순발력 있는 행동을 하는데 칼을 빼서 다가오는 군인의 귀를 깎아버리는 칼 솜씨를 발휘하게 된다. 그렇게 정신 없이 예수님의 요청도 못 들어드렸던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돌발적으로 일어나서 행동하게 되는가? 마음의 결정이 그렇게 한단 말이다. 죽고 사는 문제조차도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찾고자 할 때는 한 시간의 기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6장에서 베드로가 어떤 시험에 빠지는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비자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 "너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때 베드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맞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다.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해야 한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왜 그렇게 비겁한 대답을 하였는가? 시험에 들었기 때문에 그렇다. 왜 시험에 들었나? 그 날 저녁 예수님과 함께 기도 동참을 못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첫 번째보다 더욱 강력하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건 무언가? 한번 시험에 빠진 사람은 끝없는 비겁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그 당이라. 한패거리지?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너는 북쪽 갈릴리 사투리 액센트를 쓰면서 왜 갈릴리 사람을 부인하느냐?" 마지막에 베드로는 큰 일났어요. 예수를 저주하여 맹세했다고 했다. 큰 시험에 빠진 것이다. 그 날 밤 한 시간만 기도를 드렸다면 그 기도의 영력을 통해 베드로는 그렇게 큰 시험에는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온 가장 괴로운 시간에 그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 구원을 위해 마지막으로 주시는 십자가 사명을 훌륭하게 마감하셨다는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가장 버리기 힘든 이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는 피 방울이 떨어지는 기도의 영력을 우리는 나의 삶 속에 실천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도는 내 뜻을 정착시키려는 이기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고 참된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정면으로 만나 피 방울이 떨어지는 갈등의 순간을 거쳤다. 우리도 거쳐야 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청을 하신다. "네가 나와 함께 한 시간만 기도하자." 계속 반복하여 요청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기도

기도를 많이 했고, 기도의 비밀을 알았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다. 남북전쟁 당시 동족이 죽어 가는 쓰라린 상황 속에서 그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의 병사는 숫자가 많고 조건이 유리한데도 남 군의 용장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항상 패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하루에 두 세시간씩 기도했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위로했다. 그때 북군의 한 교회 대표가 링컨에게 말했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이 되어 주셔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온 교회가 날마다 눈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링컨이 대답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그의 말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때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항상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지혜로운 기도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구하는 기도다. 우리의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내 축복의 창고를 채우고자 하는 이기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다.

 

2. 기도에도 시간과 때가 있다.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 함께 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세상의 잠에 취해 생명의 주님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그들의 굳은 맹세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통곡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입술로 주를 위해 살겠다고 얼마나 많은 맹세를 하였는가? 교회를 섬기며, 충성하겠다고 얼마나 우리가 많은 약속을 했는가? 기도하지 않는 고백, 기도 없는 충성의 맹세, 기도 없는 봉사와 섬김은 얼마나 헛되고 무지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가리켜 바클레이 승부를 겨루는 고투였다고 말하였다. 기도해야 하는 시간에 깊은 잠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신 이 말씀은 나와 함께 기도하자는 말씀이다. 즉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도 기도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축복, 고난이 없는 행복만을 추구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십자가 없는 고난, 영광은 우상이다. 거짓된 종교다.

 

기도의 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원수의 손에 팔릴 때가 되었다고 하셨다. 세상만사에 다 때가 있기 마련이다. 기도하는 삶도 때가 있다. 아무 때나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원수가 오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망한 뒤에 회복해 달라고 망하기 전에 복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닌가? 환난 당한 뒤에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먼저 환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다. 지금은 기도할 때다. 기도를 소홀히 하는 사람, 기도를 다음으로 미루는 사람, 기도를 하는 삶을 맨 마지막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도할 제목이 태산같은데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너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헤셀 포드는 말한다. “마귀는 성도가 무릎을 꿇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오늘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으면 그 영혼을 마비시켜 버린다”고 하였다. 기도할 시간을 빼앗아 가 버린다 라는 말씀이다. 오늘 지금부터 기도하지 않으면 내일 마귀가 기도의 시간을 빼앗아 가 버린다는 말씀이다.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보자. 신앙 생활의 모습을 돌아보자. 안일과 평안, 게으름과 나태함, 불평과 불순종에 떼 묻어서 값없이 던져진 인생, 병든 내 영혼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의 피 뭍은 손이 닫는 순간에 내 죄와 허물은 다 씻겨 나가고 영혼이 치료되어 감사와 찬송과 은혜와 기쁨으로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능력 있는 기도 자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로 믿는다.

 

오늘부터 기도의 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자. 어두운 밤이 오기 전에 정신차려 기도하자. 주님께서 나의 기도의 등불을 끄시기 전에 우리 기도하자. 그리고 모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자. 혹시 우리가 이런 문제 정도는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 문제들, 아주 작은 문제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을 깨달아 아는 자가 무릎을 꿇게 되고 무릎을 꿇었으면 들어야 한다. 기도 중에 들어야 하고 말씀을 통해 들어야 한다.

 

사랑하는 참빛 교우 여러분. 2011 년도는 무릎을 꿇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루터 기도 없이 기독교인이 되려는 것은 호흡 없이 살아가려는 것과 같다. F. 헤벨 기도란 우리가 어둠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기도 때문에 치러야 할 불편을 생각지 마라. 하나님은 당신을 기도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노라. T. 루즈벨트 : 기도하는 어머니들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성 프랜시스 기도는 성도들의 검이다. 알렌 바트레트 1주일 간, 7일 내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약자가 아닐 수가 없다.


구약성경의 민수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가던 길에 일어난 일이다. 광야를 여행하던 중에 한 무리가 불만을 가졌다. 고라 라고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가문인데 그들은 레위 족속이다.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성전에서 제사하는 일을 돕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불만을 가진 이유는 자기들은 심부름만 하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제사장만 하니까 기분이 나빠졌다. 제사장이라고 해 보아야 특별히 그리 잘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자기와 똑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누구는 심부름만 하고, 대접을 받는 것은 제사장들이 다 받고 어려운 일은 자기들이 다 하고, 이거 기분이 나쁜 것이다.

 

힘든 일을 하는 만큼 대접을 받아야 하겠는데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서 불만이 생겼다. 원래 불만이나 불평은 아주 쉽게 전염이 된다. 처음에는 한 두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불어나서 나중에는 전부가 다 그런 생각을 가진 것처럼 된다. 고라의 자손들이 그렇게 감정이 상해가지고 모세에게 나온 것이다. 왜 우리는 심부름만 해야 하고 당신만 제사를 지내는 특별한 대접을 받느냐 것이다. 우리도 당신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이제 그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말로 안 될 것 같으니까 온 회중을 다 모았다.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았다. 이스라엘 중에 유명한 족장 이백 오십 명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였다.

 

그리고는 모세와 대항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도 계시는데 왜 너희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고 하며 이 백성을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고 항의를 한다. 이제 그만 지도자의 자리를 내 놓으라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다. 지금 한 쪽에는 모세와 아론이 서 있고 다른 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면 모세와 아론이 탄핵을 받는 장면이다. 이제 그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때다. 그러나 고라와 그 자손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꾼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보기에 자격이 있다고 해서 다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고라와 그 자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에게 있어서 이 일은 위기였다. 광야 사막에서 그들은 불만이 가득 차 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힘으로 대항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 방법이 없다. 그 위기의 순간에 모세와 아론이 한 일은 무엇인가? 무릎을 끓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고라의 자손들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두려워서 살려 달라고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다. 나를 선택하셔서 이제까지 이끌어 오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았다. 적당히 타협해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치 보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용서하옵소서. 이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손을 보아주신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선택하셔서 일꾼으로 세웠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모세를 거역했던 사람들을 벌하신다. 그 날 땅이 입을 벌려 고라의 자손들이 몰살을 당한다. 그리고 문제가 그 이튼 날 또 벌어진다. 민 16:40 후반부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려 와서 모세와 아론을 친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백성을 다 멸하겠다. 어제 그들이 당한 일을 보고서도 깨닫지 못한다. 왜 그런 재앙을 당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일꾼인 모세를 원망하고 그를 죽이려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하려는 그 순간에 모세는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내 생각이나 내 계획, 내 지식을 앞세우지 않고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는다.

 

3. 일어나 함께 가자

세 자녀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세 자녀 중에 누가 제일 힘들게 자랐겠는가? 다 본인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런데 사회 심리학에서는 둘째가 제일 힘들다고 한다. 위아래에서 눌려서 제일 어렵게 보내게 된다. 실제로 제일 비교 대상이 많이 된다. 형에게는 "야! 형만큼만 해봐라. 어떻게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 그렇게 다르냐?" 동생에게는 "동생 좀 봐 어린 나이에도 청소하고 애를 쓰잖아, 동생만큼만 해봐, 어이구 언제 철이 들겠니!" 그런데 이런 아픈 마음을 가진 둘째가 학교에 가서 처음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토끼와 거북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좋은 교훈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첫째, 뭍에서 뛰어다니는 토끼와 물에서 사는 거북이가 달리기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된다. 둘째, 이 우화는 토끼를 재우는 것이 목적이 된다. 아무리 거북이가 노력해도 토끼가 자지 않으면 졌다. 그러니 재워야 한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몰래 지나가야 한다. 사실 꾸준히 노력하라고 하는 메시지이지만 이 세상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을 재우고 이겨야 한다는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끼와 비교하면 끝까지 싸우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가보니 어떤가? 토끼가 너무 많다. 나는 돈이 하나도 없이 시작했다. 그런데 잔뜩 유산을 갖고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웬 걸 공부도 더 잘한다. 나는 기고 있는데 뛰어 가고 있다. 토끼가 자야 하는데 자는 토끼가 없다. 도리어 누가 자는가? 거북이 인내가 잠을 잔다. 그러니 얼마나 인생이 힘이 드는가? 토끼와 싸워야 하니 말이다. 비교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 이런 구조가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금번 성공회 대주교와 성공회대 총장을 지낸 김성수 목사님께서 신묘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푸르뫼 재단 이사장인신 김목사님은 “토끼는 경주 도중 자만해 잠을 자도 안 되고, 자고 있는 토끼가 있다면 거북이가 깨워서 함께 손잡고 뛰어야 하지 않겠나”라며 “토끼와 거북이 함께 가는 사회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백로가 시냇가에 와 물고기를 잡아갔는데 이튿날 그 백로가 다른 백로를 데리고 와 같이 물고기를 잡아가는 것을 봤다”며 우리의 함께 가야 함을 이야기했다.

 

 V자를 그리며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왜 그런 형태로 날아가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기러기 무리는 혼자서 날아가는 것보다 최소한 71퍼센트는 더 넓은 거리를 날 수가 있다고 한다. 각각의 기러기가 젓는 날개 짓이 바로 뒤에 따라오는 다른 기러기에게 상승기류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죠. 기러기 한 마리가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그 기러기는 대기의 저항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탈했던 기러기는 재빨리 대열에 다시 합류하게 된다. 대열의 선두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는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는 금방 다른 기러기가 대신한다. 뒤따라가는 기러기들은 앞서가는 기러기들이 속도를 유지하는데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은, 한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사냥꾼의 총에 부상을 입어 낙오되면 다른 두 마리의 기러기들이 낙오된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움을 주고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함께 머물다가 다른 기러기들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간다. 

 

 1970, 80년대 청년 노래문화의 한 축이었던 김민기씨가 부른 ‘작은 연못’이란 노래가 있다. 언 뜻 보기엔 평범한 노래 같지만 이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깊은 산 속 작은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정답게 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두 물고기의 마음속엔 나 혼자 이곳을 차지하면 왕이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다툼이 되어 둘 사이의 평화는 깨어지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시비가 생기게 되었다. 다툼이 지속되면서 피차간에 미움이 증폭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생사를 걸고 싸움을 벌였다. 물고 뜯고 치고 박기를 계속하다 결국은 물고기 한 마리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싸움에서 이긴 물고기는 “내가 이겼다. 내가 왕이다”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이긴 물고기도 결코 이긴 것이 아니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싸우는 동안 물리고 찢긴 까닭에 상처가 심각했던 것이다.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게다가 죽은 물고기는 물 위에 둥둥 뜬 채 썩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못의 물도 함께 썩어갔다. 이렇게 되자 살아남은 물고기도 상처에 균이 감염되면서 병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 낙원이던 연못이 저주의 현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너 죽고 나 살겠다’는 생각이 만든 비극적인 이야기다. 요즘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마치 이 ‘작은 연못’과 같은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땅에 살면서 협력하지 못하고 있다.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함께 살려고 하기보다 혼자 살려고 하다가 서로를 죽이고 마는 세상이 아닌지요?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느낌은 왠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기 사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세속적인 유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잘되게 하기 위해 나 자신이 손해보고 희생하고 죽이는 삶’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 필요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道)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작은 연못’의 비극을 교훈 삼아야 하겠다. 이제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나도 사는 상생(相生)의 아름다운 연못, ‘생명의 연못’ 이야기가 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땅에 세워진 주님이 몸 된 교회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 사람을 살리는 아름다운 ‘생명의 연못’이 되기를 소원한다. 주님은 우리의 공수표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 제자들이 세 번씩이나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 함께 동참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포기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의 육신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묵묵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일어나 함께 가자” 비록 너희가 연약하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자들이지만 다시 한번 일어나 힘을 내서 십자가의 자리로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이다. 함께 일어나 다시 한번 연약해진 우리의 무릎을 꿇고 겟세마네의 기도의 동산으로 올라가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고, 세례를 받을 때 반드시 질문하고 확인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삶의 우선권과 결정권이 돈과 관련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와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고백하고 있다면 예배나 교회생활은 기본이고, 이 사회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뿐인 신앙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잠시 잠깐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쾌락을 쫓아 산다. 여러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섰다고 생각하지만 다 허물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영적 관리다. 스티븐 코비는 "나는 성경이 나의 가치체계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재충전되고, 강하게 되고, 중심이 잡히고, 봉사를 서약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적 관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마틴 루터가 한 말 "나는 오늘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만큼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기계적인 의무가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방출하고 증가시켜주는 능력의 원천이었다고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달려야 할 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에 옛날이야기에 심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우리 함께 2011 년이라는 새 길을 떠나 보자. 세상적인 한해인 올해가 토끼해라죠?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통하여 우리가 알다시피 행여나 내 실력만 믿고 자만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나아가자. 기쁨과 행복의 인생으로, 꿈과 희망의 인생으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것이다. 평화로운 인생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인생으로 일어나 함께 가자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인생을 함께 가자는 것이다.